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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이렇게 기도하라>눅11:1~13, 말씀:하용조 목사님
오늘은 예수님이 가르쳐준 <주기도문>에 대해 공부하겠습니다.
누가복음 11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어느 한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는데, 기도를 마치자 제자중 하나가 말했습니다.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처럼 주께서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눅11:1)
여기에서 먼저 예수님은 <기도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1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기도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발견 하는 것은 예수님은 “아주 평온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무척 바쁘신 분인데, 어디를 보나 "바쁘다"는 인상이 전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일을 너무 많이 하는 것 같이 너무나 바쁘게 보여요? 바로 내가 그 사람이예요.
예수님은 홀로, 새벽 미명에, 아니면 밤이 맞도록 기도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보면서 위로가 되고, 편안해 져요.
예수님은 바뿐가운데 에서도 예수님은 인기를 멀리 하고, 대중을 떠나서, 조용히 기도하러 가셨습니다.
2절을 보세요.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아버지여? 주의 이름을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며, 주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내려주고 (눅11:2~3)
기도는 <배우는 것>입니다.
기도는 알아 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다 보면, 한 소리를 하고, 또 하게 되지요. 이것을 우리는 <중언 부언이라>고 합니다.
또 염불같은 기도를 하기 쉬운데, 기도는 <하나님의 기준>에 맞게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 = 주기도문)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첫째,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먼저 부르세요. <아버지?>라고...
1) 기도는 기도의 대상을 분명히 하고,
2)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여김을 받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즉 <간구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라"는 뜻입니다.
3)“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 진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 지게 하소서..."
죽,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바른 신앙은 바른 기도를 하게 하고, 잘못된 신앙은 잘못된 기도를 하게 합니다.
또 신앙이 없는 사람은 기도를 하지 않지요.
4) 기도의 중간에는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기도하세요.
하나님은 우리의 먹고, 마시고, 입을 것을 항상 잊지 않으십니다.
기도하면서 내 삶의 필요를 구하는 것은 정상입니다.
건강도 구하고, 배고플 때에는 "밥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에게는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어떤 웃기는 사람의 얘기는 맨날 기도하면서 하나님 에게는 “달라”고 만 하니까 식상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기는 “주시옵소서”라는 기도는 안 한데요.
5) 하나님이 나를 용서한 것같이, <나도 남을 용서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우리에게 빚진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 같이 우리죄도 용서하게 해 주소서... 그리고 우리중에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눅11:4)
우리 기도 가운데 <영적인 문제>는 아주 중요해요.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우리에게 덤벼들기 때문에 경계해야 하지요.
이런 것이 <기도의 내용>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기도의 태도>는 어떻해야 하나요?
5절을 보십시오. 너희중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하나 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친구가 한 밤중에 찾아와서 “빵 3개만 꾸어 주게”라고 말하면, 그에게 “나를 괴롭히지 말게, 가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들었으니, 지금 일어나 뭘 줄수 없네“라고 거절 할 수 있겠느냐? 친구라는 이유로 그가 일어나, 빵을 갖다주지 않을지라도 끈질기게 졸라대는 것 때문에 나는 일어나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눅11:5~8)
여리고성의 소경은 예수님에게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를 고쳐 주소서“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이 때에 예수님은 “내가 너에게 무엇을 주기 원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소경이 눈 뜨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네가 원하는 것을 얘기하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게 <비젼>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어린아이 처럼 말하라>는 거예요.
자녀가 아버지에게 말하는 것은 당당한 <권리>이고, 자녀의 <도리>입니다.
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구하라, 그려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 문이 열릴 것이다(눅11:9~10)
이 말은 유명한 예수님의 말씀이지요.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르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 에게는 열릴 것이다.
예수님은 고상한 말만 하지 않고, 이렇게 필요한 얘기를 해 줍니다.
예수님은 긍정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입니다.
예수님은 빙빙돌려서 얘기하지 않고, 단도 직입적으로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11절~13절을 보십시오.
"그러면서 비유로 너희중에 아들이 생선을 달라는데 뱀을 주며, 계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아버지가 있겠는가?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녀에게는 좋은 선물을 줄줄 아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지 않겠느냐?(눅11:11~13)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걸 주십니다.
그 하나님의 선물은 <성령>입니다.
셋째, <기도>는 성령님과의 대화입니다.
예수님은 왜 기도를 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과 대화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독생자 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부여 받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왜 그런 완전하신 분이 기도를 하셔야 했을까요? 그 대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예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하나님과 끊임없이 교통하기 위한 방법>으로 기도를 하셨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것은 <기도>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알려 주는 <기도>는 무엇입니까?
1. <기도>는 하나님과 호흡하는 것이고,
2. <기도>는 하나님을 의식하는 것이며,
3. <기도>는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것을 의미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예수님과 같이 항상 <기도>해야 합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는 <마음의 병>입니다.
이런 마음의 병이 곧 <염려>입니다.
이런 <염려>는 근심과 걱정이고, 이것을 하나님께 기도제목으로 올려서 기도하면, 마음이 평안해 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이렇게 기도를 하면서 나의 어려움이나 나의 연약함을 깨닫게 되고,
결국에는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자신이 기도하면서 스스로 반성을 합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이런 염려가 생겼을 때,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원망합니다.
문제가 나타났을 때, 이것이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 집니다.
그런데 이것이 내 탓이 아니고, <남의 탓>이라고 생각하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예로써 내가 남의 차를 손상 시켰을 때, 내가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내 탓이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안해 집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가 “자기로부터 왔다”고 생각하여 <그 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하니까> 마음의 상처가 생기지 않아요.
그러나 "남으로 부터 왔다"고 생각하면, 그때부터 내 마음에 <화>가 치밀어 오르고, 염려와 걱정이 시작됩니다.
다윗은 광야에서 살았지만, 왕궁에 있는 사람보다 더 마음이 편한 사람이 되었고,
사울은 왕궁에 살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지켜 주느냐?”의 <차이>입니다.
넷째, 하나님께서 누구를 지켜 주십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사람>을 지켜 주십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언제나 늘 지켜 주십니다.
예수님은 사역을 하면서도 매일 아침에 기도로 시작하시고 준비하셨습니다.
기도는 우리를 사역하도록 만들어 주는 동력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에게 그런 능력을 주십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는 어떤 때, 기도를 하지 않습니까?
내가 자신 있을 때, 우리는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내가 교만하면, 기도를 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잘못된 신앙생활입니다.
내가 자신이 있어서 잘 나갈 때에도 기도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내가 교만하다”고 느껴질 때에도 더욱 더 하나님을 찾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응답해 주시고, 우리의 부족한 점을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의 문제는 우리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 않고, <나의 뜻>을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설명하는 기도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잘 안될 때에 막판에 가서야 <주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포기하는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기도는 <나의 뜻>이 아니고, <주님 뜻>에 맞게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다 보면 하나님이 내 삶 가운데 개입하여 우리에게 방향을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님의 뜻>에 따라 인도하십니다.
인생을 오래 살아도 하루 세끼 식사를 해야 하듯이, 예수를 오래 믿었더라도 우리는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공기로 숨을 쉬는 것처럼,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과 호흡하고 교제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기도하고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기도를 하면서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에게 기대어 살아가야 합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집니다.
기도하면, 모든 준비를 모두 다 할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고난에 대비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기도하기를 원하십니다.
특새5/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는 의미/막1:35~45, 말씀:이재훈 목사님
오늘 본문을 보면 2가지 다른 상황속에서 일하는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합니다
첫째, 예수님이 [이른 새벽]에 기도하는 모습이 나오고,
둘째, 나병환자들을 고치는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2가지로 다른 상황이지만, "예수님이 [외딴 곳]에서 기도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35절과 맨끝절인 45절을 보십시오. "매우 이른 새벽 아직 어둑 어둑할 때, 예수께서 일어나 [외딴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습니다"(막1:35)
"그러나 그 사람은 나가서 이 일을 마구 널리 퍼졌습니다. 그 결과 예수께서는 더 이상 드러나게 마을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마을 밖 [외딴 곳]에 머물러 계셨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전히 사방에서 예수께로 모여 들었습니다"(막1:45)
35절에 나오는 <외딴 곳>과 45절에 나오는 <마을밖 외딴 곳>은 [광야]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곳은 예수님이 시험을 받았던 [광야]입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외딴 곳]을 <한적한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원래 [광야]는 사람들이 살기 어려운 <한적한 곳>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외딴 곳]에서 기도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대인 기피증이 있어서 그럴까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하기를 좋아하시는 분인데, 왜 [외딴 곳]에서 기도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이 아닌 것에는 <응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이끌려 다니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균형잡힌 삶을 사신분입니다.
고든 맥도날드 목사님은 사람의 Life style을 두가지로 표현했어요.
첫째, 무엇인가 [쫓기는 삶]과
둘째, [부르심]을 따라 가는 삶으로 구분했어요.
"자기의 [부르심]을 확인하고, 나가는 삶을 살라"고 권하셨어요.
우리는 한해를 돌아보면서 지난 해에 내가 해야 [할일]을 하지 못하고, 지낸 것을 후회합니다.
그것은 무엇인가 <쫓기는 삶>과 <부르심의 삶>이 있었기에 그런 겁니다.
우리는 너무나 바빠서 늘 긴급한 일에만 매달려 살고 있습니다.
정말로 중요한 일은 돌아 보지도 못하고,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에 몰두하고 지내시지는 않으십니까?
그러나 예수님의 삶은 그렇지 않았어요.
요한 복음17장 4~5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맡겨 주신 일을 다 완성해 이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렸습니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요17:4~5)
예수님은 요한복음 17장 4~5절과 같이 놀라운 고백을 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가 하라>는 일을 모든 것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모든 영광을 드렸습니다. 그랬으니 이제는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30세 초반의 나이에 이런 기도를하는 예수님을 상상해 보십시오.
당신은 그 나이에 하나님이 부르신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너무나 아깝지 않으세요.
조금만 더 이 땅에 계시도록 허락했다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을텐데...아! 아깝습니다.
예수님의 나이 33세에 십자가를 향해 나가는데도, "예수님은 여한이 없었다"는 거예요.
왜 그랬을까요?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충실한 삶을 살았기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던 거예요.
제생각으로 마가복음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은 늘 분주하게 지내며 [종]으로써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종의복음]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종]은 쉴틈이 없습니다.
[종]은 종으로써 해야 할 [일]과 종으로써 해야 할 [삶]이 있습니다.
때로는 예수님이 식사할 틈도 없었고, 풍랑이 거세게 일고 있는 바닷가의 한가운데에서 깊이 잠드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모든 일을 "다 이루었다"고 고백할 만큼 그의 삶은 어떤 비결이 있었습니다.
과연 그 비결은 무엇입니까?
그 비결은 <혼자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새벽 미명에 <홀로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삶을 살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기도하는 모습은 어땠습니까?
첫 번째로, 오늘의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이 [외딴 곳]에서 혼자 기도하는 모습을 보이셨고,
두 번째도,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많은 무리들이 예수님을 따라오니까 그 무리들을 피해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 했습니다.
세 번째는, 겟세 마네동산에서 십자가를 지기 전에 혼자 제자들을 피하여 기도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을 [선택]할 때도 기도하셨고, 변화산에서 [변화]될 때에도 기도했어요.
그러나 예수님에게 다가오는 유혹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많은 군중들이 몰려오는 유혹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단이 요구하는 유혹과 같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지않고, <영광을 보는 것>과 같습니다.
즉, 고난을 받지 않고 메시아가 되는 길을 사탄이 제의했지만, 예수님은 그런 제의를 단호히 거절하고 혼자 기도했습니다.
다시말해서 [십자가 없는 영광]는 예수님이 원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35절에 나오는 <매우 이른 새벽>은 아직도 [어두운 새벽]을 말합니다.
이 [새벽]은 안식일 다음 날 [새벽]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제 말씀드린 예수님의 하루종일의 행적은 다음과 같습니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그 주위에 있는 회당을 두루 돌아다니시며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그날 하루의 일정에도 귀신들린 자를 고쳐주고, 베드로의 장모 집을 심방하여 열병을 고쳐주고,
또 식사를 하다보니까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을 만나다 보니까, 병을 고쳐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마도 자정이 넘도록 일하시고, 새벽녁에 잠시 눈을 붙이고, 이른 [새벽]에 예수님은 일찍 일어나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이른 새벽에 잠에서 깼을까요?
예수님은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므로, 아직도 아침에 잠이 많은 청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이 있기 때문에> 새벽에 잠에서 깬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들도 다음 날 중요한 사람과 만날 약속이 있으면, 아침에 일찍 일어 납니다.
우리는 피곤하기 때문에 기도를 못하는 것이 아니라, 기도를 하지 않기 때문에 피곤한 거예요
기도를 잃었기 때문에 피고하게 느끼는 거예요
이런 예수님의 습관에는 제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일찍 일어나 외딴 곳에서 기도하는 습관은 너무도 좋은 습관입니다.
우리들도 자녀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새벽에 일찍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기도를 했읍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하루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에 [큐티]를 해야 합니다.
최근에 많은 사람들은 혼자 있지 못하고, 대중속에 빠져서 같이 지내려고 합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너무 외로우니까, 자신을 잃어 버리고 대중과 같이 휩쓸려 지내려고 합니다
요즘에 제일 많이 팔리는 약이 <우울증 약>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외로워서 우울증에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그럼, 우울증에 왜 걸립니까?
우울증은 혼자 있어서 걸리는 병입니다.
그러나 현대인은 혼자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립니다.
혼자 있는 내면의 고독이 <외로움>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우울증에 걸립니다.
우울증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면의 고독]을 [창조적인 고독]으로 자기 자신이 바꿀 때, 우울증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진정으로 [나홀로] 있는 시간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혼자 있어도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 외롭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혼자 있지만, 시장 한 복판에 있는 것처럼 어수선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세상 속에 있어도 혼자 있는 것과 같이 느끼는 사람도 있어요.
그것은 개인적인 생각에 따라 달라지는 거예요.
두란노의 책 중에서 <영적 발돋음>이란 책에서 [영적 흐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외로움을 창조적인 고독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왜 분주하게 사는가?
그것은 <외로움을 참지 못해서 사람들을 만난다>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무엇인가를 채우려고 합니다.
이 사람을 만나고, 저 사람을 만나는 가운데 외로움을 잊으려고 해요.
그래서 이일을 해 보고, 저 일을 해 보는데 특별히 안정되지 않아요.
어떤 목적 때문에 일하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달래려고 일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것은 방법이 아니예요.
오히려 창조적인 시간으로 바꿀 때 <진정한 영적 생활로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의 삶이 그런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니까 방법은 하나님과 함께하는 창조적인 고독을 즐기세요.
이런 시간을 우리는 Quiet Time [큐티 시간]이라고 해요
그런 [큐티]시간이 있었기에 예수님은 수많은 사역을 감당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주님은 [사람]에 이끌려 다니는 삶이 아니고, <목적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둘째, 예수님의 삶은 [내면의 삶]과 [외면의 삶]이 잘 균형잡힌 삶이란 것을 우리가 발견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쉽게 무너지는데 왜 그럴까요?
그것은 우리들이 환경에 이끌려 가는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환경에 이끌리는 삶>에서 <성령에 이끌리는 삶>으로 방향을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 요17:1-5/ 말씀: 안광복 목사님
그동안 우리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장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에서 제자들을 만났고, 니고데모와 수가성의 여인을 만나고, 5장에서는 38년된 병자를 고치셨고, 8장에서는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만나고, 11장에서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셨고, 향유를 부은 마리아와 의심많은 도마를 만나 믿음의 고백을 받았고, 지난 주에는 베드로와 만나서 사명을 주셨습니다.
오늘부터 4주동안 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대 제사장적 기도>로 알려져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은혜를 나누겠습니다.
오늘 1절의 첫 부분을 보면 “<이 말씀을>을 하시고, 눈을 들어 기도했다” 는 말이 나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그것은 요한복음 13~16장에 있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나온 예수님의 귀한 말씀들을 말합니다.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고, 마음속에 평안을 가지라."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면, 너희는 무엇이든 구하고, 그리하면 이룰 것이다."
"세상에서 너희는 환난을 당할 것이지만,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이 뜻밖에 이런 말씀을 하시니 제자들은 당황하였지만, 예수님은 그들을 위로하시고 격려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보고, 기도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7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때가 됐습니다.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영광스럽게 하소서.“(요 17:1)
여기를 보면 예수님이 기도했는데, 누구에게 향해서 기도했을까요?
여기서는 “<아버지여!>”라고 표현했는데,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했다>는 거지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기도의 영적 교훈>입니다.
기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도는 기도의 방법과 기도의 내용, 기도의 결과와 축복 등 모두 다 중요하지만,
기도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의 대상이 누구인가?>라는 점입니다.
왜 기도의 대상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거꾸로 기도의 대상이 잘못 되었을 때, "어떤 결과가 오는가?" 를 생각하면 다 알게 됩니다.
기도는 기독교 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타 종교에서도 기도를 합니다.
우리의 어머니들이 정한수 떠 놓고 우물가에서 기도하거나, 성황당 앞에서 두손 모아 기도하기도 하고, 탑을 돌면서 기도하거나, 삼천배나 삼보일배를 하거나, 백일동안 날짜를 정해놓고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그 기도의 대상이 잘못 선정되었다면, 그 기도는 가치가 없고, <헛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하나님께 <아버지!>라고 호칭을 부르면서 기도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분]은 누구입니까?
[그분]은 천지만물을 만드신 분이고, 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살아계셔서 세상을 지배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입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54번이나 아버지를 부르면서 <구체적인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바른 호칭이 바른 관계를 만들듯이, 십자가를 지려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또 여기서 “<때>가 되었다.”라고 말씀했어요.
어떤 <때>를 말하는 것인가요?
이제 죽음이 임박하여 십자가를 져야 할 <때>를 말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에 두고, 마지막으로 가장 친밀한 대상을 향하여 고백을 하는 그런 시간입니다.
가장 친밀한 대상에게, 가장 간절하게 절규하는, 그런 순간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아들이 아버지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이 아들은 영광스럽게 하소서"
이 말은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십자가 사건>을 의미하고, "십자가를 잘 질수 있도록 도와 달라“는 말입니다.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아버지께 영광을 드릴 수 있게 해 주세요”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가지 [꿈]을 갖고 계셨어요.
첫 번째 꿈은 <십자가를 지는 일>과, 두 번째 꿈은 <교회를 세우는 일>입니다.
왜 <십자가 지는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일까요?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가장 원하신 일이고,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입니다.
그 <구원사건>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십자가 지시는 일>을 원하셨어요.
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모든 사람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요17:2)
여기를 보면,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영생을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거예요.
하나님이 인간에 꼭 해 주고 싶은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영생을 주고, 영생을 알게 하는 것>입니다.
고대 역사나 전래동화를 보면 [신]을 중시했어요.
그래서 신전을 세우고 선행을 강조하여 <신의 마음을 달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모두 다 구원 받기를 원하셨던 거에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보면 <복음의 핵심>이 나타나 있어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사람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요 3:16)
이렇게 16절을 잘 알고 있지만, 요한복음 3장 17절은 잘 모르고 있어요.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그 아들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것이다.”(요 3:17)
이 말씀에 <하나님의 의도>가 담겨 있어요.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여기에서 <구원 받은 것>이나, <진리를 아는 것>이나, <영생을 얻는 것>은 모두 다 같은 의미입니다.
그럼 <영생>은 무엇입니까?
문자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의미하지만, <영원히 죽지 않고, 끝까지 산다>고 축복일까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하여 <오래도록 산다>고 모두 다 축복은 아닙니다.
<영생>이라고 “그 사람이 어떤 조건이고, 어떤 상태인가?”를 따져 보아야 합니다. 본인은 아파서 죽게 되었는데도 <100살이고, 200살을 산다>고 그 사람에게 축복입니까? 그건 축복이 아닙니다.
여기서 이야기 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 면에서 <안다>는 것이 아니고,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비슷한 표현으로 <믿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알기 때문에 <믿는> 것이고, 알기 때문에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분을 알고, 알다보니까 믿게 되고, 믿다보니까 그 분이 나를 사랑하는 것을 느끼게 되어, 더 <친밀한 관계>를 지속하게 되어, 서로 <신뢰>하는 것이지요.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럼, <신앙의 단계>는 무엇입니까?
신앙은 ① 먼저 주님을 알게 되고, ② 주님을 신뢰하여 더 가까이 나가는 것이고, ③ 그분이 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고 깨닫게 되어 ④ 나도 “그 분을 사랑한다”고 고백하게 되어 관계가 좋아지고, ⑤ 그러니까 그 분의 보호아래 들어가고 싶고, ⑥ 그 분의 베푸심을 우리가 누리면, 되는 것이예요
우리가 전도를 할 때, <예수 믿고, 구원 받으세요!>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이 말을 우리들은 흔히 <예수믿으면 지옥에 가지 않고, 천국에 가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알아야 해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죽음이후를 대비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효력이 발생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구원 받는다>는 뜻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죽고 난 이후에만 혜택이 있을까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 믿게 되는 순간부터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의 축복이 시작되고, 영원한 생명이 이미 시작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과 동행을 하면서 일평생을 <함께 사는 것>을 말해요.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을 알고, 같이 동행하며 즐겁게 살다가, 죽음 이후에도 하나님의 소망에 따라 천국에 가는 것을 말해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으면, 주님을 알게 되고 그 순간부터 구원의 축복으로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영생을 얻는 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 맡겨 주신 일을 다 완성해 이 땅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돌려 드리겠습니다” (요 17:4)
4절의 말씀도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어떻게 살아 왔는가?>를 한마디로 기가 막히게 압축하여 표현한 말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① 첫째, <아버지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완성하고 >
② 둘째,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평생을 살았습니다.
이렇게 인생을 살고 마지막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저와 여러분도 이런 <믿음의 고백>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소명>은 무엇일까요?
<소명>이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삶의 목적을 <소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소명이란 <내가 살아 가야 할 삶의 방향>을 말해요.
하나님은 나를 부르셨어요. 왜 불렀을까요?
그것은 나에게 부르신 목적이 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창세 전에 이미 계획된 <하나님의 의도>에 따라 우리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재능>도 주셨어요.
우리는 우리들에겐 각자에게 주어진 <은혜>가 있어요.
우리들은 각자에게 주어진 <소명>을 알아야 해요.
그리고 우리는 그 소명에 따라 살아가야 <기쁨이 충만한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자기의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렇게 영광 돌리는 삶>을 살기를 바라십니다.
마지막 5절에 예수님이 다시 한번 간구하며 기도합니다.
5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창세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누렸던 그 영광으로 이제 아버지 앞에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소서” (요 17:5)
여기에서 <창세 전에 누렸던 영광>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중요한 단어는 <영광>이란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 돌려 드리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자 >고 기도합니다.
그런 우리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무슨 일을 합니까?
그것은 내 삶 속에 영광을 나타 내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필요 해요.
그러나 우리들은 그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자기 희생>은 하지 않고, 나의 영광과 명예를 나타내기를 바라고 있어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인간을 구원해 준다>는 [사명]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죽음을 받아 드린 거예요. 예수님은 <자기 만족>과 <자기 영광>을 포기하고, 오로지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나를 포기하고 죽기로 작정 하신> 거예요.
우리들은 내 영광도 챙기고 내 명예도 지키려고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수 없어요. 내 자신의 <혈기>와 <자존심>과 <내 의도>를 꺽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릴 수 있는 거예요.
어쩌면 이런 것이 <영광>이라면, 오늘 설교를 안 듣는 편이 오히려 좋았을 것으로 생각하시는 분도 있을 거예요.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 때에 겉으로는 억울하게 손해 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런 삶이 더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예요.
오늘 말씀의 결론은 <내가 열정을 가지고 나를 포기해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이 말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 두가지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하나의 예는, 마치 창공을 나르는 <연>이 창공에서 자유함을 느끼고, 빛을 발하기 위해서는 연을 날리는 소년의 손에 줄로 메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욱 높이 올라가고, 멀리 날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연이 줄에 매여 있지 않고 손에서 떨어져 나갔다면, 그것은 날아 오른 것이 아니라, 그냥 멀리 사라져 없어지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러므로 줄에 매여 있는 것이 속박 당하고 답답한 것 같지만, 그것이 진정 자유함을 느끼며, 연으로써의 역할과 빛을 발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의 예는, 한자루의 무딘 [칼]이 [명검]으로 만들어지려면,
대장장이의 힘찬 망치소리와 뜨거운 쇳 가마 속으로 들락 날락하면서 달궈질 때에, 더 강하고 더 날카로운 <칼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생활을 할때에 속박당하는 것 같지만, 그 분에게 순종하고 그렇게 따를 때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 안에서 생활하며 그 분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겉으로는 속박 당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가장 안전하고 올바른 길이 됩니다.
그렇게 행하므로 결과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사는 우리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요 17:6~11/말씀: 안광복 목사님
지난 주부터 요한복음 17장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 나눈 얘기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한 내용>은 무엇입니까?
1. 첫째,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우리들도 남을 위해 기도하기 전에 <나 자신을 위해> 먼저 기도하기 바랍니다.
내가 은혜를 받지 않고, 어떻게 남을 위해 기도하겠습니까?
이것은 내가 차고 넘쳐야 다른 사람을 도와 줄 수 있는 거예요.
2. 둘째, 그 곳에 함께 있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오늘 설교와 다음 주일 설교)를 드립니다.
3. 셋째. 모든 성도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키워드는 무엇입니까?
1. 처음엔 [영광]에 대한 내용이고,
2. 두 번째는 [지켜주심]***** (보존)
3. 세 번째는 [거룩하심]***** (거룩)
4. 마지막으로는 [하나되게] 하심***** (하나됨)
오늘의 말씀은 <제자들을 위한 기도>입니다.
첫 번째는 6~8절은 예수님이 바라보는 제자들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그런 제자들을 향해서 “어떤 기도를 하시는가?“ 라는 내용입니다.
첫째, 예수님의 제자들을 바라보는 <예수님의 생각>을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잘 모르고, 철들지 않은 미숙한 제자들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특징은 이런 엉성한 제자들도 “사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했기에 포기하지 않고, 제자들이 성숙하여 변화되기를 기다리셨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 내셨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고,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이제 그들은 아버지RP서 내게 주신 모든 것이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요17:6~7)
여기서 제자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이 <택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미리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미 하나님이 미리 정한 사람들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입니다.
여기에서 철이 나지 않은 제자들을 보는 <예수님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 첫 번째는, 제자란 세상에서 부름을 받아 <예수님에 속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맘에 들지는 않지만, 그 사람들이 <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2. 두 번째로, 내게 속하기 전에 하나님에게 속하여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리 하나님이 선택하여 <나에게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결혼도 마찬가지 입니다.
결혼은 그 상대편 배우자를 자기가 선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선택하여 나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준 배우자를 내가 받아 들이고, 잘 관리해야 할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의 자녀는 우리가 낳았다”고 해도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자녀도 하나님이 선택해서 나에게 맡겨 준 것입니다.
이런 정체성을 우리가 확실하게 알아야 시험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보내 주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좀 모자라는 사람들을 모아 끊임없이 가르치는 분이 <예수님>입니다.
이것이 <제자훈련>의 요체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이제 그들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으며 내가 아버지께로 온 것을 진정으로 알았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 (요 17:7~8)
그들이 깨닫은 것은 말씀뿐이 아니고, 모든 것이 [하늘로 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예수님의 능력도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것으로 알고 있어서,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도 알고, 믿고 있어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하나님이 평가하는 기준이 달라요.
하나님은 외면적인 평가를 중요시하지 않았고, 존재가치를 중시하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제자로 삼은 거예요.
예수님은 한번도 자기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나님>에게만 초점을 맞춥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위해 나타내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초점을 모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들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모든 초점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각과 내 의견, 그리고 내 비젼과 같이, 나를 중심에 놓고 생각하니까 <갈등이 생기는 법>입니다.
9~10절을 보십시오.
“이제 내가 그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내가 세상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그들이 모두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내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며, 아버지의 것은 모두 내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그들을 통해 영광 받았습니다.(요17:9~10)
예수님이 기도는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았다“고 했어요.
<그들을 통해서 영광을 받았다>는 말씀은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내가 기도하는 것은 세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서 입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적용할 것이 있습니다.
내 인생은 <나의 것>이 아니고 [아버지의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식도 <나의 소유물>이 아니고, [아버지의 것]입니다.
[헌금]도 마찬가지 입니다.
교회에 드리는 헌금도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나에게 맡기신 것]을 <내가 드리는 것>입니다.
시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갖고 있는 <내 시간>이라고 함부로 사용하면 안 됩니다.
은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내가 받은 은사도 다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은사>이므로, 그것을 <소중하게 관리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용해야 합니다.
11장을 보십시오.
“나는 더 이상 이 세상에 있지 않겠지만, 그들은 아직 세상에 있고,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여, 아버지지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은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소서(요17:11)
여기에서 <지켜 주신다>는 의미는 <보살펴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심 = 보호 하심 = 보존 하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들도 소중한 물건은 그것을 보호하고, 지키려고 노력을 해요.
귀하면 귀할수록 더욱 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해요.
예수님은 우리들을 소중한 사람으로 여겼고, 귀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여기서 <지켜 주신다>는 의미는 “목숨을 잃지 않게 하신다“ 는 의미가 아니고,
죽음은 어떤 형태로 든지 우리들에게 다가 오지만, “그 상황에서 어떤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는가?” 에 따라 지켜 주는 내용이 달라 진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나는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지만 그들(제자들)은 세상에 남아 있습니다.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제자들을 지켜주 시고,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 되게 하소서!
여기에서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면 제자들은 누가 보호합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죽어서 이 세상을 떠나더라도 “철없는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떠나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마음이 <사랑이다>라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중요한 것은 <프로그램>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사랑>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이런 <사랑>이 싹트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서로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도 여러분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의 아내도 당신만의 아내가 아니고, 하나님이 보내주신 아내입니다.
오늘 우리는 오랫동안 <내 것>이라고 생각했던 자식과 아내에 대한 사고방식을 버리고, 다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그럼, 무엇을 지켜야 합니까?
1. 첫째, 건강을 스스로 지켜야 합니다.
2. 둘째, 거룩한 명성을 지켜야 합니다.
3. 셋째, 우리 가정을 건전하게 지켜야 합니다.
4. 넷째. 신뢰와 명성을 지켜야 합니다.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들을 확실하게 지켜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가만히 있어도 지켜 주십니까?
우리는 항상 영적으로 깨어 있어야 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들을 지켜 주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간 광야 생활을 할 때에도 하나님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지켜 주셨고, 엘리아는 까마귀를 통해서 먹여 주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사야 43장 1~2절 말씀을 보면서 말씀을 마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여호와가 말씀하신다.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아! 너를 만드신 분이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건져주었으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네 이름을 불렀으니, 너는 내 것이다. 네가 바다를 건널 때 내가 너와 함께 하겠고, 네가 강을 건널 때 휩쓸려 가지 않을 것이다. 네가 불속을 걸어갈 때 타지 않을 것이고, 불꽃이 네 몸을 태우지 못할 것이다.(사43:1~2)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그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지켜 주실 것 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우리는 늘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지면서 지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을 위한 기도2/요 17:12~19/ 말씀: 하용조 목사님
제가 요즘에 병상에 누워서 투석을 하다보니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중에서 제가 깨달은 것은 <기도>입니다.
신앙생활에는 두 가지 축이 있는데 하나는 <말씀>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도>입니다.
이것은 두 개의 <바퀴>와 같아서 매우 중요합니다.
<말씀>만 강조하다 보면, 율법에 빠지게 되고
또 그렇다고 <기도>만 강조하다 보면, 신비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에는 두 가지를 적절하게 조절하고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내가 영적으로 응답받고 힘을 얻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열심히 내가 기도를 했는데 “왜 응답이 없을까?“라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깨닫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습관적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대부분 내 주변의 이야기를 가지고 습관적으로 기도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기도를 많이 하기는 하는데, 그 알맹이가 별로 없어요.
그러나 “누구든지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 이어야 한다” 고 했어요.
예수님의 제자들도 귀신들린 자를 데려다가 기도를 했으나, 귀신을 쫓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은 어쩔 수 없이 예수님한테 데려 갑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기도하자 금방 해결됐어요.
왜 제자들은 능력이 없었을까요?
그것은 <형식적으로 기도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권세도 있었지만 그것을 믿지 않고,
<영의 기도>를 했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는 거예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일 때에도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감사기도>를 한 후에 기적을 보이셨어요.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들을 향해서 <중보기도>를 하고 계셔요.
나는 볼 수가 없지만, 우리를 향하여 기도하는 예수님을 우리는 느껴야 해요.
예수님은 또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기도했어요.
그것을 보더라도, 예수님은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기도를 했어요.
그러나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기도 없이 사역을 하려고 하니, 신경질이 나는 거예요.
기도 없이 어떤 봉사를 하려고 하니, 어렵고 막히는 거예요.
기도 없이, 어떻게 남에게 봉사를 해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비밀을 하나 발견할 수 있어요.
예수님은 바리세인들과도 이 문제에 관해, 논쟁을 했어요.
그것은 서로 간의 개념과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기도>와 <우리들의 기도>가 다른 차이를 발견해야 해요.
그럼,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입니까?
<예수님의 기도>는 자기 생각과 자기 뜻대로 기도하지 않아요.
<예수님의 기도>는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기도를 했어요.
그것이 <영의 기도>예요.
예수님은 <육의 기도>를 하지 않아요.
그러나 우리들은 <영의 기도>를 하지 않고, <육의 기도>만 해요.
그래서 우리들은 <영의 기도>를 알아 듣지를 못하고, 그렇게 못 해요.
예수님 당시에도 제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이 기도를 이성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어떤 때에는 이해가 되고, 또 어떤 때에는 이해가 되지 않는 거예요.
결론은 분명해요.
<영의기도>를 하면 능력이 나타나고,
인간들이 드리는 <육의 기도>에는 능력이 나타나지 않아요.
그 좋은 예가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었어요.
그러나 그 <주기도문>을 우리들은 주문을 외우듯이 그냥 소리 내어 읽으므로,
능력이 없는 거예요.
그 속에 담겨진 말씀의 깊은 뜻을 생각하지 않고,
그냥 읊조리기 때문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들은 이성으로써 먼저 반응하기 때문에, <영>으로 이해를 못하는 거예요.
<영>이 흐르지 않으면, 주술사가 주술을 외우는 것과 같아서 하나의 종교의식으로 변해요.
<영>적으로 해석하고, <영>의 코드에 맞춰져야 하는데,
그냥 종교행위에 그치게 되므로 변화가 나타나지 않는 거지요.
그래서 그런 기도에는 종교행위는 있어도, 성령의 감동은 오지 않는 거예요.
우리들의 기도는 <육신의 기도>예요.
시골교회의 장로님이 기도하면, 교인들이 그 다음에 할 말을 다 외워요.
오래하다 보니까 습관이 되어 하는 말이니까 그렇지요.
그래서 우리 교회에서는 “대표기도를 직접 글로 써서 기도하라“고 해요.
일주일 내내 생각하고, 고치고 또 고쳐서, 성령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기도해야 해요.
그럼 <영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 생각대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성령에 이끌려 말을 하도록 하는 거예요.
기도하면서 성령 안으로 들어가서, 성령이 이끄는 기도를 해야 해요.
<말씀>을 듣더라도 이성으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의 말씀>으로 해석하여 받아드려야 해요.
예를 들자면, 요한복음 17장 3절의 말씀인 “영생을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요 7:3)
이 말씀은 <이성>으로 읽으면, 도저히 이해가 안 돼요.
그러나 <영>으로 해석하면, 금방 이해할 수 있어요.
<영>의 눈으로 읽으면 “이 말씀이 성경의 핵심이구나!” 라고 금방 이해 해요.
우리 인간은 3가지 형태로 만들어 졌어요.
1. 첫째는, 인간은 육체로 만들어 져서 <육신의 기도>를 해요.
이런 기도는 우리들이 제일 많이 하는 먹고, 마시고, 사는, 모든 것에 관한 기도를 말해요.
2. 둘째는, 인간은 정신이 있기 때문에 <정신의 기도>를 해요.
그래서 정신 차리지 못한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해요.
3. 셋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는 <영의 기도>가 있어요.
영은 하나님과 제가 직접 통할 수 있도록 “코드로 연결하는 안테나”와 같은 거예요.
하나님이 무슨 얘기를 나에게 하려고 하면, <영>으로 얘기하시니까,
먼저 내게 <영>이 열려 있어야 하고, 그것을 연결해 주는 코드 역할을 <영>이 해요.
그러므로 <말씀과 기도>는 [영]으로 읽어야 해석이 돼요.
우리들의 문제는 이것을 이성으로 읽으니까 졸리기만 하고, 기쁨을 맛보기 어려운 거예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서 운동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거예요.
저는 이 시간에 조금 시간을 내서, <영의 기도>를 시도해 보세요. 그것은 간단해요.
“하나님! 저는 지금 <영의 기도>를 하고 싶어요, 나에게 <영의 기도>를 알게 해주세요.
나를 도와 주세요!” 라고 말로 시작하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성령님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인도해 주세요.”
<육신의 기도>는 공부 안하던 사람이 공부를 하려고 하면, 졸리기만 하고 잡 생각만 나는 것과 같아요.
그래서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이 영으로 기도한다>는 것을 알고, 읽어야 해요.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들어와서 나를 이끌고, 나의 사고를 리드하게 돼요!
그러면 성령님이 내 안에 오셔서 나를 인도하게 되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성령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과 채널을 맞추게 되는 거지요.
나도 이렇게 몸이 아픈데도 계속해서 말씀을 전하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니까> 버티는 거예요.
CGN-TV를 시작할 때에도 저는 이렇게 커질 줄을 전혀 몰랐어요.
그러자 하나님이 인도하니까, 사람도 보내주고, 물질적인 후원자도 보내 주어서 이렇게 성공한 거예요.
하나님이 <영>으로 인도하니까 불가능이 가능해지고, 어려움도 쉽게 해결되는 거예요.
요한복음 17장은 예수님의 <영의 기도>입니다.
이때 까지만 해도 성령님이 오시기 전이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기도의 뜻>을 알아듣지 못했어요.
나는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영>이 시키는 일들을 스스로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보낸 시간 중에서 “가치있게 보낸 시간이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거의 대부분의 시간이 의미없이 보냈겠지만, 이제부터라도 의미있는 <영의 기도>를 시작해 보세요.
1. 예수님의 첫 번째 기도는 “제자들을 지켜주고, 보호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내가 그들을 지키고 보호했습니다.“ (요17:12)
내가 그들과 함께 있는 동안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나는 그들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지켰습니다.
그들 가운데 멸망의 자식외에는 하나도 잃어버린 사람이 없으니, 이것은 성경 말씀이 이루어지기 위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의 관심은 “제자들을 지켜 달라”는 부탁의 기도입니다.
2. 예수님의 두 번째 기도는, 나와 아버지가 하나인 것 같이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두사람만 모이면 서로 싸우고, 편을 가르고, 서로를 비판하고, 결국은 서로가 헤어지는게 인간의 본능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서로가 하나가 되지 못하고, 헤어지려고 합니다.
인간의 본능은 사랑이 아니고, 미움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나눔이 아니고, 소유입니다.
인간의 본능은 평화가 아니고, 전쟁입니다.
인간은 처음에는 사랑하는 것 같이 행동을 하여도, 부패한 인간은 시간이 지나면서 결국 미움으로 변합니다.
인간은 <분열의 영>이 있어요.
왜 인간은 분열하려고 할까요?
그것은 인간의 마음 속에 죄악의 뿌리가 있기 때문이지요.
인간은 도덕과 교양과 훈련을 통해서 처음에는 잘 나타나 보이지 않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죄악의 뿌리가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는 것은 <서로 싸우지 않게 해 달라>는 거예요.
아무리 어려워도 <서로 싸우지 않고, 하나 되게 해 달라>는 부탁이예요.
온누리 교회는 <하나되는 영>이 흐르기 바랍니다.
세상이 너무나 혼란스럽고, 싸우니까, 그래서 우리교회 표어가 <화해와 일치>로 정했어요.
3. 예수님의 세 번째 기도는 “기쁨으로 충만케 해 달라”는 기도 입니다.
이제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그러나 내가 세상에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그들이 내 기쁨을 마음껏 누리게 하려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리의 독특한 것은 <기쁨의 종교>라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슬픔의 종교가 아니고,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좌절의 종교가 아니고, <기쁨의 종교>입니다.
4. 예수님의 네 번째 기도는 “악에 빠지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제자들에게 전했는데, 세상은 그들을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않은것처럼,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주기도문 에서도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기도는 “악에서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그들을 세상에 보냅니다>”(요17:18)
<제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내가 키운 사람이 <제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 <제자>예요.
여러분의 제자는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이예요.
예수님은 비록 나는 떠나지만, "남아 있는 제자들을 보호해 달라”고 기도하는 거예요.
5. 예수님의 다섯 번째 기도는 “제자들이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으로 “거룩하게 해 달라”는 기도 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은 <거룩>입니다.
<거룩>안에 사랑이라는 것이 있고, <하나님의 공의>가 그 안에 있습니다.
거룩은 순결을 만듭니다.
거룩의 옷을 입을 때, 인간은 순결할 수 있습니다.
현대인의 특징은 순결을 잃어버린, 양심의 갈등이 문제 입니다.
우리들의 생각이 너무나 더러우니까, <거룩하게 되도록 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거룩>은 순결을 뜻하므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다름 주에는 예수님이 <우리 모두를 위한 기도>를 하십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될 때, 우리의 삶에는 영광스런 축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모든 성도를 위한 기도/ 요17:20~26/ 말씀: 안광복 목사님
오늘은 <예수님의 기도>에 마지막 부분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자기 자신을 위해 기도했고, 두 번째로 제자들을 위해 기도했고,
세 번째로 오늘 말씀드리는 우리 모든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지금까지 4가지 중요한 Key Word는 (1)영광 (2)보존하심 (3)거룩하게 하심
(4)그리고 오늘 나오는 <하나되게 하심>에 대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21~2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모두 하나가 되게 하시고,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소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을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17:21~23)
첫 번째로, <하나 되게 하심>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건강이 나빠서 돌아가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죽기 위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꿈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십자가를 지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둘째는 <교회를 세우는 꿈>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도 <십자가를 지기위해> 오셨고, 이 땅이 <하나 되게> 하시려고 했어요.
그러나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 됨>이 깨졌어요.
처음에 하나님과 인간은 하나가 되었으나, 아담이 죄를 지으면서 인간과 하나님은 사이가 벌어졌고,
<하나가 되지> 못하고, <관계>가 깨졌어요.
결국, 아담은 죄를 짓고 숨었어요.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은 거예요.
그 후에 인간이 겪은 아픔이나 비극이나 갈등은 결국 <하나 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한 거예요.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거예요.
이 모든 문제들을 <하나 되게>하시려는 예수님의 뜻이 거기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에서 <하나 되라>고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 됨>이 중요한 것은 세상 어디를 가나 중요해요.
세상에서 <하나 됨>은 어떤 목적을 이루기 위한 행동이므로 <하나 되기>가 어렵습니다.
초선 국회의원인 홍 정욱 의원은 어떤 인터뷰에서 국회에 들어가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적군과 아군으로 싸우던 동료 의원들이 싸움이 끝나고 사석에서 만나면, 서로 웃고 즐기는 가식적인 모습을 이해할 수 없다”고 토로했어요.
물론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부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서로 싸우던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식으로 딴청을 부리는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했어요.
세상에서 벌어지는 노사 간의 갈등도 마찬가지 이지요.
시간이 지나거나, 상황이 바뀔 경우에 과거의 약속을 쉽게 번복을 하지요.
이런 것들은 세상이 바뀌니까 그런 것이라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들도 역시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나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제자들은 틈만 나면 서로 싸우기 때문에 예수님은 온전히 <하나 되기>를 소망했어요.
2. 두 번째로, 어떻게 해야 <하나>가 됩니까?
그것은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하나가 된다>고 했어요.
오늘의 말씀 中에서 “(누구) (누구) 안에”라는 말이 반복이 됩니다.
우리가 <하나 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주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 거할 때 행복합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 거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어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할 때****(이것이 삼위일체의 개념과 같습니다)
우리 모두가 같이 모여 있으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교회를 흔히 <몸>으로 비유하는데, 머리는 <예수님>이고, 우리는 그 <지체>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여럿이 모이면, <교회가 된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들은 지혜롭게 판단을 해야 해요.
그것은 이단의 세계가 교묘하게 접근해 오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들의 <세계관>이 건전한지? 그들의 <교리>가 분명한지, 먼저 따져 보고 얘기해야 해요.
그들은 상대방의 믿음을 알 수가 없는데도, 바로 “믿음이 어떻다”고 평가를 해요.
그건 크게 잘못된 말이지요.------> 그 분의 믿음은 오로지 하나님만 알고 있어요.
그러니 상대를 함부로 판단하거나, 비판하면 절대로 안됩니다.
3. 세 번째로, <하나>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첫째는, 소통이 중요해요. 소통을 위해서는 막힌 것이 있으면 뚫어야 해요.
막힌 담을 뚫고,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주님과 맞는 <코드>를 접붙여 져야 해요.
주님과 확실한 관계를 설정해야 <주님 안에> 살게 되지요.
구멍이 막히면, 소통이 되지 않습니다.
둘째는, 선이 끊어져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과 연결된 선이 끊어져 있으면, <하나>가 될 수 없어요.
끊어진 줄을 연결해서, 서로 이어 져야 해요.
막혔던 담을 허물수록 소통이 잘 되고, 끊어진 코드를 연결해야 하나가 됩니다.
인간과 담을 헐고 소통을 시키기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신 겁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당신은 주님 안에서 온전히 거하고 계십니까?"
말씀을 통해서, 기도를 통해서, <그 분과 함께 온전히 함께 있어야> 행복합니다.
4. 네 번째로 <하나 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본문을 보니까, 자주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알게 한다>는 말입니다.
무엇을 알게 해 줍니까?-----> <하나 됨>의 목적과 결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줍니다.
예수를 믿고 보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돼요.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그냥 생기지 않아요.
<믿음>은 [알게 된다]는 것과 같이, 반드시 지식을 필요로 해요.
<믿음>은 뭘 알아야 믿게 되듯이, 먼저 <아는 지식>이 있어야 해요.
여러분? <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뭐예요?
“신앙생활이 성숙해 졌다”는 것은 과거에 내가 하지 않던 일을-----> "이제는 순종해서 한다"는 말이예요.
또 과거에 나는 혈기가 왕성하여 참지를 못했는데,------->
이제는 “참을 수 있다.”는 것이 <내 신앙이 성숙해 졌다>는 것을 의미해요.
그러니까 과거에는 <하나가 되는 일>에 관심이 없었는데,
“이제는 <하나가 되는 것>에 관심이 생겼어요”라는 사람은 분명히 <성숙해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단계에 따라, 때로는 용서하고, 화해를 이루는데 앞장서는 사람이 되요.
우리도 그런 믿음의 성숙을 통해, 인간들의 사이에 벌어지는 관계가 해결되기를 바래요.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해서 친히 죽으심으로 막힌 담을 십자가를 통해 허물고, 화목제물이 되셨어요.
그것이 하나님과의 관계이든, 성도간의 문제이든, 모두 다 해결되기 바래요.
그러므로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우리는 <하나>가 되었어요.
막혀있던 장벽을 허물고, 끊어진 것을 연결하여,
하나님과 소통을 이룰 때에 하나님과 <하나 된> 관계가 성립되는 것입니다.
교회생활은 문화생활이 아니예요.
힘들고 구체적으로 서로 사랑하게 되면, <너희는 내 제자가 된다>고 했어요.
누군가 믿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서로를 알아야> 하고,
그리고 나서 그 다음 단계는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봉사일수도 있고, 전도일수도 있어요.
성도여러분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흘려보내고, 내게 막힌 담을 허물어야 <소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담을 쌓고, 담을 지키려고만 해요.
주님 안에서 <하나 된> 관계가 유지될 때에 <주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복음과 진리를 주변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막힌 것을 뚫고, 끊어진 것을 연결하세요.
그렇게 할 때에 건강한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자연스럽게 <하나 된> 그리스도의 몸이 교회를 이루고,
통로가 된 우리를 통해 연결되어 <남에게 흘러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추석 명절을 맞은 여러분에게 임하시기 바랍니다
8.<기도하면 어떤 일이 벌어 지나요?>누가복음 3:15~38, 말씀:하용조 목사님
그 당시의 사람들은 <세례요한>과 <그리스도>를 착각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누가복음 3장 15절부터 시작합니다.
" 백성들은 그리스도가 오시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으므로, 모두 마음 속으로 요한이 혹시 그리스도가 아닐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눅3:15)
사람들이 혼동하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세례요한>과 <그리스도>를 착각했기 때문입니다.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신적인 존재로 나타났거나, 영웅처럼 요란하게 왔다면 백성들이 금방 알아 볼수 있는데,
예수님은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헷갈린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세히 보면, <하나님> 임을 알수 있어요.
그러나 그 당시 사람들은 <세례요한>을 <예수님>이라고 착각을 한 거예요.
저는 얼마 전에 조용기 목사님을 만나서 "목사님이 이단이 되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생각해요"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큰 교회를 운영하면서..... 그렇게 많은 기적들이 있었는데.....
그런 분이 교만하지 않고, 정도를 지켰으니......., 역시 그는 대단한 분입니다.
우리 인간은 조금만 잘되면 교만합니다.
겉으로는 표현하지 않아도 돈이 조금만 있으면, 속으로 그렇게 행동을 해요.
사람들이 그렇게 착각하고 있던 그 때에 <세례요한>은 아주 중요한 얘기를 했어요.
그것은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라는 말을 서슴없이 토로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나보다 더 능력이 많으신 분이 곧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끈을 풀어드릴 자격도 없다. 그 분은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눅3:16)
사람들은 모두 <당신이 그리스도이다>라고 말을 할 때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다" 라고 분명하게 얘기했습니다.
아~ 그렇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그런 말을 들으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그냥 슬며시 웃지요.
(그것은 마치 그런 것처럼 느끼도록 유도하지요)
그러나 그런 애매한 태도를 보이지 말고, 세례요한과 같이 "나는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세요.
그래야 그때부터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주님! 나는 실수할 수 밖에 없는 인간입니다.
나의 실수를 도와 주실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님 만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를 움직이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모든 영광은 그 분의 것입니다." 라는 고백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16절에서 배울게 있어요.
우리들은 <물 세례>를 받았습니다.
"물 세례를 받았다"고 신앙의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 다음 단계인 <불세례>와 <성령세례>를 받아야 합니다.
17절을 보세요
"그분은 손에 키를 들고, 타작마당을 깨끗이 치우시며, 알곡을 창고에 모아 들이고, 쭉정이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실 것입니다." (눅3:17)
이 말은 <심판의 시급성> 때문입니다.
심판의 주인이신 예수그리스도 께서는 타작마당에서 모은 곡식을 키질하며, 알곡은 곡간에 차곡차곡 쌓으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는 것과 같이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18절~20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요한은 또 다른 많은 말씀으로 백성들을 권고하고 좋은 소식를 전파했습니다. 그런데 분봉왕 헤롯이 저지른 악행에 관해 요한이 질책하자, 책망을 받고도 뉘우치기는 커녕 그를 붙잡아 감옥에 가뒀습니다. (눅 3:18~20)
요한은 결국 타협하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갇힙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때로는 이렇게 시련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광스런 일 입니다.
고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상징입니다.
저도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면, 저는 즐거운 마음으로 그 고난을 받아 드리겠습니다.
성도여러분?
직장에서 누가 불의한 일에 정직하게 일을 한다면, 주변의 동료들이 싫어해요.
"정말 잘났어!"라고 비아냥 거립니다.
그들은 같이 행동을 하지 않으니까.... (같이 죄를 짓지 않으니까.....)
시기합니다.
여러분! 이럴 때에도 정직하게 행동하세요.
그래야 당신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거예요.
세상은 <빛>을 싫어 해요.
그러므로 그런 어두움 가운데에서도 <빛>으로 행세하고, 어둠을 뚫고 나가는 용기를 가지세요!
21절을 보세요.
모든 백성이 세례를 받은 때에 예수께서도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기도하니까, 하늘이 열리고 성령께서 비둘기 같은 형상으로 그 분 위에 내려 오셨습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눅3:21~22)
예수님은 <동정녀>에게서 태어 났으므로 죄가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세례를 받았어요.
이것은 무슨 의미 일까요?
그것은 대속의 의미예요.
예수님은 "우리들의 죄를 짊어진다"는 뜻으로 세례를 받은 거예요.
죄없는 인간이 죄인의 죄를 위하여 말없이 다른 인간과 똑같이 행동한 거예요.
예수님이 세례를 받고, 기도를 하니까
첫째, 하늘이 열리고
둘째, 성령님이 오셨고
셋째, 하늘의 음성이 들렸어요.
이 말씀을 좀 더 자세히 말씀드리면,
첫 번째, 하늘이 열린 것은 "하늘과 통했다"는 말로, "하나님과 채널이 맞았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사는 지구 공간에는 수 없이 많은 전파가 지나가고 있지만, 채널이 맞아야 정확한 화면이 나타나는 것과 같은 원리 입니다.
두 번째로, "성령이 오셨다"고 했어요.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 사회에 터치했다"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라는 것은 하늘문이 열리고, 성령의 터치를 느껴야 합니다.
우리들이 기도를 하면, 이와같은 상황을 맞을수 있어요
세 번째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예수님의 나이가 30살 입니다.
예수님은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준비 기간을 거치고, 30살이 되면서 공생애가 시작됩니다.
그 때에 하늘에서 음성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한다"는 음성입니다.
23절에서 부터 38절 까지는 긴 글이 나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족보>입니다.
<겟세마네의 기도>누가복음 22:39~45, 말씀: 신도배 목사님
인생의 가장 귀한 사건이 발생하면, 당신은 어떻게 행동하십니까?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겟세마네동산에 올라가서 기도를 드렸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9절을 먼저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밖으로 나가, 여느 때처럼 감람산으로 가시자 제자들도 따라 갔습니다.(눅 22:39)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평소에도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밖에 있는 감람산으로 자주 찾아갔던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기도하는 습관>을 강조하시고,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서 여느 때처럼 이란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평소와 같이 형식적인 것이 아니고, \\"습관처럼 기도했다\\"는 말입니다.
개역성경에는 <습관을 좇아>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거룩한 습관>은 낮에는 성경을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쉬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새벽기도는 육체의 고통을 이겨야 하고, 아침 일찍 \\"육의 몸을 깨워서 일어난다.\\"는 것은 본인에게는 고통스러
운 일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감당할수 없는 고난이 닥치면 어떻게 하십니까?
첫째, <거룩한 습관>을 가지세요.
절망의 시간이 다가오면 사람은 누구나 가야 할 길을 잃어버립니다.
분별력이 없어지고,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고, 헤메게 됩니다.
그럴 때면 본능적으로 <평소의 습관대로> 움직이게 되어 있어요.
이럴 때에 예수님은 어떤 시스템이 프로그램화 된 것처럼 <습관대로> 움직이신 모습을 우리가 상상할 수 있어요.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당할 때에는 예수님처럼 <거룩한 습관>을 가질수 있도록 [연습]할 필요가 있습니다.
<습관>이란 몸과 마음이 시스템화 되어 그대로 반응하게 해주는 행동을 말합니다.
<습관>은 좋은 습관과 나쁜습관이 있는데, 우리는 [좋은 습관]이 몸에 베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나쁜습관]이 지나치면 중독이 되어 고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좋은 습관]을 우리몸에 길들이기 위해서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처럼 <거룩한 습관>이나 <선한 습관>이 몸에 베도록 연습을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주안에서 만들어진 피조물이므로 모든 죄악에 연결된 사슬을 끊어버리고, 자유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으면 너무나 좋아서 방방 뛰는 것입니다.
둘째, <기도>를 하십시오.
40절을 보세요.
\\"그곳에 도착하자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누가22:40)
감당할수 없는 어려운 일에 부딪치면, <기도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기도>는 주님의 사명을 이루는데 꼭 필요한 것이고, <기도>하면 힘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는 나를 지키는데 더 중요합니다.
<기도>는 유혹과 시험앞에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갑자기 어려움을 당하면, 우리에게 무기가 필요합니다.
그 무기가 바로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인간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나아가고,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그럼,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그때 그때의 나의 형편을 하나님께 알려 드리고, 내자신이 시험에 들지않고 <나를 붙들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고난의 때>와 <영광의 때>를 이어주는 [다리역활]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고난으로부터 영광에 이르게 해주는 [문]이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될수 없습니다.
그러나 기도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 마음에 내 영적인 충전을 해야합니다.
하나님의 원천인 전원에 코드를 꽂아 내가 그 능력을 받아 들여야 합니다.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첫째, 무릅을 꿇고,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 간절히 인내 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셋째, 정직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넷째,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게, 전심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4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부터 떨어져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으로 가서, 무릎을 끊고 기도하셨습니다\\"(눅22:41)
4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께서는 고뇌 속에서 간절하게 기도하셨습니다.
그러자 땀이 핏방울 같이 되어, 땅에 떨어졌습니다.(눅 22:44)
이와같이 예수님의 기도는 간절하게, 땀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은 누구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제는 [적당히 기도하는게] 문제입니다.
우리들의 또 하나의 문제는 [자기자신] 인데, 자기는 빼놓고, 남을 탓합니다.
문제는 자기자신의 <마음 속>에 있습니다.
내부의 적을 자신이 찾지 못하고, 남만 탓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간절히 기도하면서 자신의 문제를 회개하여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처럼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전심을 기울여 기도해야 합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뜻으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되게
하십시오. 그때 천사가 나타나 예수께 힘을 복돋아 드렸습니다.(눅 22:42)
겟세마네 동산에서 드린 예수님의 기도는 두가지 입니다.
첫째, \\"아버지의 뜻이면 내게서 이잔을 거두어 달라\\"는 기도입니다.
언뜻 보기에는 예수님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죽음을 피하게 해달라>는 기도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십자가의 고통>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참된 <기도>는 [내뜻]이 무너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순종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런 [순종의삶]을 바라십니다.
예수님의 두번째 기도는 \\"내 원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 입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뜻 >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겠다\\"는 의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하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왜 인간이 기도를 합니까?
사탄이 틈타는 것을 막기위해 기도합니다.
배고픈 사자는 결코 누워있지 않습니다.
사탄은 상처받은 영혼만 골라서 끝까지 공격합니다.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함께모여 서로 서로를 안아주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부대끼며 상처받은 영혼이 있다면, 그들은 교회에서 안아 주어야 합니다.
셋째,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 이제는 일어나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45~46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왜 자고 있느냐? 일어나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22: 45~46)
예수님은 기도를 마치고 제자들이 있는곳에 가보니, 제자들은 슬픔에 지쳐 잠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깨워 일어나게 하시고, \\"시험에 들지 않도록 일어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자고 있으십니까?
이제는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주님은 그 <기도의 자리>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그자리에 함께 동참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기도하는 여러분에게 언제나 임하시기 바랍니다.
<겸손히 부르는 기도> 누가복음18:9~14, 말씀: 신도배 목사님
누가복음 18장에는 <기도>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먼저 9~12절을 보십시오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은 없신 여기는 몇몇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이런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사람은 바리새파 사람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
바리새파 사람은 서서 자신에 대해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저는 다른 사람 들, 곧, 남의 것을 빼앗는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간음하는 사람과 같지 않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저는 1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얻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냅니다.(눅18:9~12)
여기에 두 종류의 사람이 나옵니다
첫째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둘째는 세리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느끼십니까?
첫 번째로, 바리새파 사람은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입니다.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의롭다”고 느끼는 사람은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입니다.
원래 “바리새파”라는 말은 “구별되었다” 또는 “분리된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유대교에서 발생한 분파이고, 종교적으로 엄격한 규례와 오래동안 내려오는 전통과 관습을 숭상하는 사람들입
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는 <거룩한 사람>으로 지칭되길 바라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사람인 세리는 로마 통치하에서 주민들한테 세금을 거두어 일부는 국가에 바치고, 나머지는 자기가
부를 챙기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불리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파 사람은 \\"자기는 <거룩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남의 것을 빼앗지 않고, 불의한 짓을 하
지 않고, 간음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기도를 가만히 들어보면, 한편으로는 맞는 말 같으나, 좀 이해가 잘 안 갑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이 구별된 생활을 하는 것은 좋지만, 남과 비교하여 감사의 이유를 찾은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도 병원 에 가서 아픈 사람들을 보면서, 나의 건강에 감사를 느끼지요.
그러나 남과 비교하며 감사를 느낀다면, 상대편에 있는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므로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두 번째로, 특정한 사람을 지칭하여 비교하고, 정죄하면 안 됩니다.
\\"자기는 일주일에 두 번 금식하고, 모든 소득을 계산하여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라고 자랑합니다.
금식은 영혼을 성찰하는 방법으로 아주 좋은 행위입니다.
그러나 금식하는 것을 남에게 들어 내놓고, 자랑하는 것은 잘못된 행동입니다.
또 십일조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도, 그것을 드러내 놓고 자랑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십일조는 \\"내가 가진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뜻으로 <잠시 나에게 맡겨진 것을 주님에게 되돌려 드리는 것>으
로 생각하면, 자랑할 일이 아닙니다.
또 바르게 살고, 간음하지 않는 것은 당연히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감사하는 일이 다른 사람을 정죄하면서 까지 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기도하는 것 같지만 그것은 기도가 아니고, 자기 자랑을 하고 있어요.
그는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에게 자랑하고 있으며, 더군다나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있어요.
이것은 <영적인 교만>입니다.
영적인 교만도 <질병>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병이든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특징을 두가지로 표현하면,
첫째 “자기가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둘째 다른 사람을 없신 여기고 있어요.
에베소서 4장 18~19절을 보시면, “그들은 지각이 어두워져 있고, 무지함과 완악함이 그들속에 있어,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습니다. 그들은 감각 없는 사람들이 되어 자신을 방탕하게 만들고, 온갖 정욕을 품게하고, 더러운 일을 행하고 있
습니다 (엡4:18~19)
여기에서 <지각이 어두워지고>라는 말은 분별력이 없어서 깨닫는 마음이 어두워 지고\\"라는 뜻이고,
<무지함과 완악함>이란 것은 \\"무식한 것과 고집스러움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력을 얻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
다.
성도 여러분!
모르면 겸손한 축복이 있으시기 바랍니다.
진리를 모르면서 고집스러움이 있으면 그건 대책이 안섭니다.
빛가운데 성령이 운행하듯이, 영적으로 밝은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영적교만>은 무슨 말입니까?
첫째로, 교만은 교만인데, 겉으로 보기에는 영적으로 충만한 것 같아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교만한 것>입니다.
겉으로는 맞는 얘기인데, 속으로는 틀린 것입니다.
겉으로는 주님의 뜻에 반응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교만한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나오는 바리새인과 같이 감사의 이유가 정죄의 동기가 되면, 안됩니다.
자기가 하는 말이 아무리 옳더라도, 그것이 남을 정죄하는 것이면, 안 됩니다.
주님의 은혜를 받아 예배하는 열정을 가졌지만, 영적 교만이 있는 사람은 안 됩니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합니까?
첫째, 바리새파 사람은 “교만한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즉시 반성해야 합니다.
빌립보서 2장 5~7절을 보십시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세요.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분은 본래 하나님의 본체셨으
나 하나님과 동등됨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의 모양>이 되셨습니다.”(빌
2:5~7)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고 계셨지만, 하나님과 동등하게 되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의 모
든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모습으로 사람들과 같이 되어서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며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
에 매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입니다.
또 마태복음 11장 21절을 보십시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너희는 내 멍에를 메고, 내게서 배우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마11:29)
예수님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고 얘기 했어요.
<온유>와 <겸손>이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닭이 계란을 품어 병아리를 낳듯이, 따듯하게 자기 품으로 품어 주어야 <새 생명>이 탄생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따뜻하게 품어 주고, 기다려야 새 생명이 태어 납니다.
그래서 열매를 얻고, 뿌리가 내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온유>라는 말은 [무례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면의 세계가 [부드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나면 따스해 집니다.
<겸손>은 [다른 사람과 마음을 같이 하는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스스로 지혜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무례히 행동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품을 때에 위험한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둘째, 바리새인은 자기가 누구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체성과 사명이 무엇인지 똑바로 알고, 행동해야 합니다.
로마서 1장 1절을 보면, 사도 바울의 정체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따로 세움을 받았습니다.(롬1:1)
“그리스도 예수님의 종이 된 나, 바울은 하나님의 기쁜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 거룩하게 구별되어 세우심을 받았습니다.”라고 사도바울은 로마서 1장 1절에 자기 자신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영적으로 거룩하게 구별되어 세우심을 입었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뚜렷하게 자기의 정체성을 밝히는 것은 그만큼 자신감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기도하면, 모든 일이 달라지고, 변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이런 사도 바울의 마음을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바리새인은 이것을 모르고, 잊어 버린 거예요.
셋째, 영적인 중간지대, 회색지대를 주의하세요.
<온유>와 <겸손>의 중간지대, 그럴듯하게 위장한 중간지대를 조심하세요!
\\"내 것을 가지고, 내가 이렇게 하면 안 되느냐?\\"
\\"내게 이정도의 권한도 없느냐?\\"라고 소리 지르는 사람의 말도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런 생각 자체가 위함한 거예요.
성도 여러분들은 그런 자리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에 나오는 두 번째 인물인 세리는 어떤 사람입니까?
누가복음 18장 13~14절을 보세요.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쳐다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는 가슴을 치며 말했다. 하나님! 이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
어 주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 사람이 저 바리새인 사람보다 오히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질 것이요,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눅13~14)
세리는 가슴을 치며, \\"하나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 주십시오\\"라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은 \\"세리가 바리새파 사람보다도 의롭다고 인정받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얘기했어요.
그것은 무슨 이유입니까?
예수님은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려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
니다.
여기에서 바리새인과 세리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세리는 자기를 향하여 절망하고,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바리새인은 자기가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를 자랑하고 있어요.
이 두사람 중에서 성경적인 사람은 세리입니다.
우리는 “나는 날마다 부족하다”고 느끼면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세리는 자기를 향해 부족함을 느끼고, 자기 자신을 낮추려고 노력하지만,
바리새인은 자기자신을 높이려는 교만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정리합니다.
첫째, 감사의 제목이 정죄의 내용이 되면 안됩니다.
둘째, 내가 누구인지 나의 정체성 을 확실히 알고 나가야 합니다.
셋째, 중간지대인 애매한 자리에 서지 마십시오.
주님의 한 없는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임하며, 한 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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