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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스러운 폭력의 역사『신의 전쟁』(Fields of Blood : Religion and the History of Violence)
2001년 9.11 테러가 남긴 커다란 상처로 종교는 전 지구적으로 폭력, 불관용, 분열, 불화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받았다.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충돌은 지금도 진행 중이고, 알카에다에서 갈라져 위협적으로 세를 불린 이슬람국가(IS)는 한시도 그냥 있지를 못한다. 종교는 더 이상 영성을 일깨우는 평화의 수단이 되지 못하며, 공동체의 감각이나 타협에 공감과 연민, 평화적 가치를 전하지도 못한다. 비합리적이고 어리석음의 대명사로 조롱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이런 시점과 관점은 정확할까? 종교가 없어지면 – 아니 없다면 세상은 평화로울까? 종교만이 완전한 광기를 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주장은 타당한가? 종교는 역사적으로 모든 주요 전쟁의 원인이었다는 것은 사실일까? ‘원래 종교는 호전적’이라는 주장은 중세 십자군 원정, 이단으로 몰아 잔인했던 종교재판, 16∼17세기 있은 유럽 종교전쟁, 21세기 들어 과격한 이슬람 무장단체의 테러 등에 기반을 두고 하는 주장이다. 이것은 교회 권력 확장을 위해 십자군 원정을 벌였던 우르바누스 2세와 오스만 제국의 위협 앞에 내부적인 단합을 위해 종교재판을 이용한 페르난도와 이사벨 여왕, 정치적·경제적 이유로 유대인을 박해하고 제국주의 식민 지배와 강압적 근대화가 낳은 폭력조직 ‘지하드’까지 모두 폭력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종교는 원래부터 호전적이라는 주장을 명쾌하게 반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을 읽는, 읽어야 하는 이유가 분명하다. 하지만 주제가 심오한데다 고대 중동, 인도, 중국에서 탄생한 종교의 기원과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이 역사적으로 드러낸 폭력성과 문명이 피로 물든 땅, 폭력이 만연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과 민족국가 문제와 종교의 근본주의문제, 독실한 신앙인들이 세운 미국의 각 종교와 민족주의가 만나 빚어진 폭력적 변화를 낳기까지 살펴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싶다. 750페이지에 이르는 책을 제대로 읽고 소화할 수 있을지도 걱정이다. (231013)
저자 ‘카렌 암스스롱’은 1944년 영국에서 태어나 일곱 살 때 가톨릭 수도원에 들어가 수녀가 되고자 했으나, 7년 뒤 환속해 옥스퍼드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런던대학에서 강의하다가 종교학자로 삶을 바꾼 뒤 《마호메트 평전》, 《붓다》, 《이슬람》같은 논쟁적 저작을 발표하면서 큰 주목을 받았다. 「신의 전쟁」이라 이름 붙힌 이 책은 기원전 3000년 수메르 문명에서부터 21세기 중동과 미국에 이르기까지 신의 이름으로 인간이 저지른 폭력의 역사를 살펴보고 있다. 2019년 전 세계 45개 언어로 번역되었고 2021년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이 책을 이제서야 읽는 데는 이유가 없다.
근대 이전의 세계에서 종교는 삶의 모든 면에 스며들어 있었다. 벌채, 수렵, 농사, 국가건설, 스포츠, 도시계획, 상업, 음주, 특히 전쟁, 지금은 세속적으로 여겨지는 이런 수많은 활동들이 매우 신성하게 종교와 결합 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어디서 ‘종교’가 끝나고 ‘정치’가 시작되는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을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궁극적 가치를 부여하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의미를 추구하는 생물로 다른 동물과는 달리 삶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면 아주 쉽게 절망한다. 우리가 불가피하게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정말 견디기 힘들다. 존재하는 자체가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하면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우리는 또 경이감을 느끼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성에 충실하고 삶을 더 깊은 흐름에 닿은 듯한 느낌을 받고 싶어 하면서 교회나 신전에서 경험을 얻지 못하면 예술 활동이나 섹스, 마약, 심지어 전쟁에서 그것을 구한다. 전쟁이 다른 황홀경에 빠지는 순간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이해되지 않더라도 전쟁은 오래전부터 환희의 경험을 촉발하는 역할을 해 왔다. 그 이유를 이해하려면 인간의 신경구조 발달을 이해해야 하는데, 인간의 뇌는 어떻게 생겨 먹었길래 전쟁을 통해 환희를 느끼는 것일까? 우리 인간은 수렵과 채집을 하던 과거를 절대 완전히 잊을 수 없다. 우리가 가장 인간적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 몸, 뇌, 얼굴, 말, 감정, 생각 – 에는 그 유산이 각인되어 있다. 모든 고대 문화의 중심 의례이던 동물 희생에는 수렵 의식과 더불어 공동체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준 짐승에게 부여한 명예가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 ‘종교’라 부르는 것은 본래 인간의 삶이 다른 생물을 죽이는 일에 의존한다는 비극적 사실을 인증하는 데 기반을 두고 있다. 의식은 인간이 이 불가피한 딜레마와 직면하도록 돕는데 활용되었다. 그러면서 긴밀한 유대로 조직을 만들고 다른 동물과 싸웠다는 것은 곧 군대의 씨앗이 되었고, 아마도 그 과정에 흥분과 강렬한 어떤 느낌을 사랑했던 것이리라.
기원전 9000년경 레반트인들에 의해 식량 재배와 저장법이 알려지면서 인간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다. 숫자가 급격히 늘어났고, 대다수는 농경 생활로 옮겨 갔다. 농업과 더불어 문명이 나타났고 문명과 더불어 전쟁이 생겼다. 인류 역사를 400만 년(유발 하리리는 700만, 제럴드 다이야몬드는 900만 년)으로 보면, 기원전 8500년∼1세기에 농경문명이 정착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농경은 고기를 먹던 수렵인에 비해 키도 작아졌고, 빈혈, 감염증, 충치 등 질병에 쉽게 노출되었다. ‘어머니의 대지’(地母神)은 자주 동료와 적을 파괴했고 폭력적인 신화들은 농경 생활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해 이 무렵 요르단강 유역에 3,000명이 정착했다. 이런 정착 생활은 농업이 등장하기 전에는 불가능했다. 이곳에 남아 있는 육중한 담 유적은 당시의 요새였다.
유목민들을 끌어들이는 자석과 같았던 이 예리코 유적은 그 땅을 피의 벌판으로 바꿀 수 있었고, 그런 점에서 특별했고 미래 전조였다. 전쟁이 풍토병처럼 번진 것은 5천 년 뒤의 일이었지만, 이때 이미 가능성이 등장한 셈이다. 대규모 조직적 전쟁은 종교가 아니라 조직 절도(탈취)와 관련되어 있었다. 또 농업은 자신의 운명을 낫게 바꿀 수 없을 정도로 굴종 속에서 살아가도록 하고 사회적·제도적 구조로 인해 폭력을 낳았다.
“자원과 권력이 불평등하게 분배되어 소수의 손에 집중되었으며, 이들은 이것을 모든 구성원이 가능한 자기실현을 이루도록 하는데 쓴 것이 아니라, 그 일부를 자기만족을 위해 또는 다른 사회나 같은 사회에서 혜택받지 못한 사람들을 지배·억압·통제를 위해 사용했다.”지금도 여전하다며 세계교회협의회가 발표한 내용이다.
【1부】문명의 폭력과 종교의 딜레마
[1] 수메르, 농경의 시작과 전쟁의 탄생
고대 우르크(현 이라크)의 통치자이던 ‘길가메시’는 “인간 가운데 가장 강한 자, 거대하고 잘 생기고 광채가 나고 완벽한 인물”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은 기원전 3000년에 이르면 메소포타미아 평야에는 12개 도시가 있었고, 도시는 주변 농민이 경작한 농작물로 유지되었다는 것이다. 엄격한 위계 속에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상징인 거대한 계단형 신전 탑인 ‘지구라트’가 그것을 말해 준다. 수메르 사회는 첨탑 꼭대기에 권력의 최상층이 존재하는 구조였으며 개인은 모두 자기 자리에 갇혀 옴짝달싹 못 했다. 그러나 이런 잔인한 구조가 없었다면 인간의 진보를 가능하게 해 준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다. 문명 계발을 위해 유한계급이 필요했으며 가장 훌륭한 성취는 수 천 년 동안 착취당한 농민의 등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수메르인들이 문자를 발명한 목적도 사회 통제를 위해서였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수메르인들은 우주를 신들이 관리한다고 믿었다. 신들은 자연의 힘과 분리할 수 없으며 오늘날 유대인과 무슬림이 섬기는 ‘하느님’과는 전혀 달랐다. 이 신들은 사건을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동물, 식물과 똑같이 법칙에 얽매여 있었고 인간과 신 사이에는 거대한 존재론적 간극도 없었다. 길가메시는 1/3은 인간, 2/3는 신이었다. 그들은 불멸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달랐다. 신들도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도시계획, 관개, 통치에 몰두하고 있다고 상상했으며, 모든 국가는 – 세속적인 민족국가도 - 성격과 임무를 규정하는 신화에 의지했다. 가장 높은 귀족에서 가장 낮은 장인에 이르기까지 모두 성스러운 활동을 하는 신정(神政)국가였다.
기원전 6000년경 중동의 목축민들은 분리된 공동체를 따로 이루었고, 기원전 4500년경 러시아 남부 캅카스산맥의 스텝 지대에 정착한 목축민도 공동의 문화를 공유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리아’(고귀하고 명예로운)라고 불렀지만, 우리는 그들을 ‘유럽-인도인’으로 알고 있다. 그들의 언어가 유럽과 아시아의 몇 개 언어의 기초가 되었기 때문인데, 기원전 2500년경 아리아인들이 스텝을 떠나 아시아와 유럽을 정복해 히타이트인, 켈트인, 그리스인, 로마인, 게르만인, 스칸디나비아인, 앵글로-색슨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스텝에 머물며 아베스타어를 쓰던 사람들은 기원전 1500년경 현재의 이란 땅에 정착했고, 산스크리스트어를 쓰던 사람들은 인도 아대륙을 차지했다. 아리아인들은 삶이 권태롭고 늘 부지런해야만 하는 농경 생활보다 전사의 삶이 훨씬 낫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타키투스(55?∼120?)는 “적에게 도전하여 부상의 명예를 얻는 쪽이 훨씬 좋다”고 했다. 그들은 도시 귀족과 마찬가지로 노동을 경멸해 고귀한 삶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농경 제국의 황제는 종종 신격화되었으며 이런 신격화는 그들에게 중요한 행정과 경제적 개혁을 정당화하는 유용한 선전정치를 제공했다. 이전처럼 정치와 종교가 공존했으나 신들은 군주의 분신 역할을 하며 문명의 생존에 필수적인 폭력을 축성했다. 기원전 1225년 만들어진 「함무라비 법전」에는 “정의가 땅을 지배하게 하고 부정하고 악한 자들을 없애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억누르지 못 하게 하기 위해”자신이 신들로부터 임명을 받았다고 선언했지만, 그런 법을 반포하는 것은 왕이 하급 귀족을 건너뛰어 곧바로 억압받는 대중을 위한 최고의 항소법원이 될 만큼 강하다고 주장하는 정치적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함무라비 법전은 “자비로운 법이 의로운 법이며 강한 왕 함무라비가 확정했다.”고 하고는 끝을 맺는다. 함무라비는 전 주민을 성공적으로 억압하고 영토 내의 과세 체계를 확립하여 바빌론으로 부를 끌어들이던 치세 말기에 공포한 법이다.
기원전 1200년경 캅카스산맥 스텝 지대에 살던 사제 한 명이 이른 아침 희생 제의를 드리기 위해 물을 뜨러 강으로 갔다. 거기서 그는 가장 위대한 신으로 꼽히는 ‘지혜의 주’아후라 마즈다의 환상을 보았다. 사제 조르아스터는 그동안 아베스타의 공동체를 파괴하던 산스크르스트어를 쓰는 가축 습격자들의 잔혹성에 경악해 왔는데 이런 지상의 전투에는 하늘에도 짝이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아루라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지닌 ‘바루나, 미트라, 마즈다’가 우주 질서의 수호자로서 진리, 정의, 생명과 재산을 사악한 디바에들에게 공격당해 빼앗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며 그는 공포에 대항하는 거룩한 전쟁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가축을 목초지에서 내모는 잔인한 습격자들과 달리 고운 마음으로 가축을 돌봐야 한다고 하면서 하루에 다섯 번 악의 위협에 관해 명상함으로써 그 힘을 약해지게 해야 한다고도 했다. 사회는 싸움꾼들이 아니라 진리라는 지고의 덕에 헌신한 착한 사람들이 지배해야 한다고 했으며, 조르아스터의 묵시록적 사고는 독특했고 조르아스터교는 귀족의 요구에 적합하게 수정된 뒤에 페르시아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되고 그의 이상은 페르시아 지배를 받아 가며 살아가던 유대인과 기독교인의 종교에도 침투했다. 그러나 이것은 먼 훗날의 일이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을 뿐 조르아스터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는 것 같다.
[2] 인도, 비폭력을 향한 험난한 길
인도 아대륙에 아리아인이 야무나강과 갠지스강 사이 ‘도아브’지역에 들어온 것은 10세기쯤이었다. 이들은 두 왕국을 건설했는데, 침략자이자 유목민이던 이들은 마을로 들어가 물품을 강탈함으로써 꾸준히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면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을 그들은 알았다. 이 시점까지 아리아인 사회는 엄격하게 계층화되지 않았다. 족장을 따라 싸웠고 사제들도 종종 침략에 참여했다. 농업화가 시작되고 번성해지면서 계층화가 찾아왔다. 새로운 부와 여가는 사제에게 명상의 시간을 더 많이 제공했고 사제는 신성의 개념을 다듬기 시작했다. 실재란 ‘존재’였고, 바라흐만(梵)이라고 불렀다. 바라흐만은 우주를 지탱하고 또 우주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해주는 힘이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완전히 초월적이었고, 인드라, 미트라, 바루나, 아그니라고도 불렀다. ‘하나’인 것에다 여러 명칭을 부여한 것인데 그에 따라 신들의 개성은 점차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사제(브라만)는 입이었고, 그의 두 팔은 전사(라자나)를 만들었고, 그의 허벅지는 평민(바이샤)이 되었으며, 그의 발에서 종(수드라)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찬가들을 만들어 새롭게 계층화된 사회가 평등한 과거와의 위험한 결별이 아니라, 우주 자체만큼이나 오래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리아 사회는 이제 4개의 계급사회로 나뉘었고, 이것이 ‘카스트 체제’의 씨앗이 되었다. 계급에는 나름의 신성한 의무가 있었는데, 아무도 다른 계급에 할당된 과제를 수행할 수 없었다. 희생은 여전히 근본적이었다. 이제 전사는 라자나만이 될 수 있었고, 나머지 계급은 싸우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베다법에 따르면 바이샤는 억눌러야 하지만 수드라는 마음대로 제거하거나 죽일 수도 있었다.
기원전 6세기 무렵 인도에서는 ‘자이나교’와 ‘불교’가 태동했다. 이것은 오랫동안 지역에 영향을 끼쳤는데, ‘바르다마나’는 길고 어려운 수련 끝에 깨달음을 얻어 ‘지나’(정복자)가 되어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자이나교도라 불렀다. 바르다마나와 싯다르타는 각각 부족 공화국의 왕자 출신이었는데, 자이나교는 복잡한 신화와 우주론을 발전시키고 비폭력이 유일한 가르침이었다. “숨을 쉬고 존재하고 살아가고 지각이 있는 생물은 죽여도 안 되고, 폭력으로 다루어도 안 되고 학대해도 안 되고 괴롭혀도 안 되고 쫓아내도 안 된다. 이것이 순수하고 변함없는 법이요. 깨달음을 얻어 아는 자들이 선포한 법이다.”는 가르침이었다. 자이나교는 폭력을 완전히 거부했기 때문에 피조물을 죽일 수밖에 없는 농업에 참여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상업으로 방향을 틀었으며 상인 공동체로 인기를 얻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도 마찬가지였다.
싯다르타는 6년간의 고행 끝에 깨달음을 얻고 부처가 되었는데, 그는 친절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세심하게 계발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요가의 한 형태에 의해 깨달음을 얻었다. 같은 시대를 살았던 ‘마하비라’와 마찬가지로 붓다의 가르침도 비폭력에 기초를 두고 모든 피조물이 고통에서 자유로워지고 ‘평온한 마음’(우펙샤)으로 존재를 사랑하여 마침내 개인적 애착과 편견에서 자유를 얻기 바라며 우호와 애정의 감정을 땅끝까지 향하게 하도록 가르치는 명상을 고안했다. 단 하나의 생물도 이러한 관심의 반경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 가르침은 제자들이 매일 암송했다는 초기 기도로 요약되기도 한다.
“모든 존재가 행복하소서! 약하건 강하건, 지위가 높건 중간이건 낮건, 작든 크든,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살아 있든 아직 태어나지 않았든 그들 모두가 완전히 행복하게 하소서! (…)
기원전 268년 두 형제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아소카는 불교도에 호의를 보였다. 그는 알려진 것과 달리 치세가 끝날 때까지 재가 불교도가 되지 않았는데 그럼에도 아소카는 마하바라, 붓다와 더불어 고대 인도 정치와 문화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로 꼽힌다. 제국을 확장해 벵골에서 아프가니스탄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고, 기원전 260년경 칼링카 원정 도중 병사 10만을 잃고, 그 몇 배가 부상과 병으로 죽었는데 이를 목격한 아소카는 큰 충격을 받았다. ‘군사 정복, 승리의 영광, 왕권의 장식이란 것이 덧없는 것’이라고 후대 왕들에게 경고했다. ‘인내와 가벼운 처벌로’를 부르짖었으며 아소카는 군사적 억제와 도덕적 개혁이라는 새로운 정책을 제국 전역의 절벽과 거대한 원통형 기둥에 새겨놓았고 스승 존중, 부모에게 복종, 노예·하인 배려, 모든 종파 – 불교, 자이나교도 등 다른 이단적 종파까지 – 가 서로 존중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 중국, 전쟁의 고통에서 등장한 군자
중국은 전국시대(기원전 485∼221년)까지도 역사시대로 보고 장황하게 역사를 기록하고 있지만 그것은 수렵-채집인 시대의 샤먼신화를 미화한 것에 불과하다. 삼황오제 성군들의 신화는 폭력 없이는 문명이 생존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농사를 시작한 신농(神農)은 마음대로 비를 부르고 하늘에서 낱알을 불러낼 수 있었다. 그는 지배계급을 만드는 대신 모두가 자신이 먹을 것을 기르라고 했다. 자신의 왕국에서 폭력을 금지했지만 어떤 국가도 폭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하늘의 도에 따라 인간사회를 세웠다.’고 한 황제(黃帝)가 재위에 올랐을 때는 서로 싸우고 가뭄과 기근이 이어지고 있었고 외적도 둘이나 있었다. 치우와 염제가 그들인데 동물 군대(이리 곰 호랑이)를 조련하여 염제는 이겼지만, 치우가 이끄는 여든 형제의 야만성은 쉽게 다스릴 수는 없었다. “그들의 몸은 짐승, 말은 사람 머리는 놋쇠, 활은 강철이었다. 모래를 먹고, 활 창 칼 같은 무기를 들고, 그들은 하늘 아래 모든 것을 떨게 했으며 야만적으로 살육했다.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았으며 양육하지도 않았다.”
고조선이 세워지던 기원전 23세기에는 요와 순이 하베이 평야에서 황금시대를 열었다고 한다. 태평성대라고 일컬어지는 시대였다. 순은 큰물을 다스린 우에게 뒤를 잇게 하고 우가 하(夏)왕조를 창건했다. 하는 상나라 주나라로 이어졌고 문헌과 고고학의 증거는 없지만, 기원전 3000년 말경 대평원에 농경 왕국이 존재했을 가능성은 있다. 상나라에 폭력이 난무했다는 것은 은허 유적을 통해서도 밝혀졌지만, 전국시대 묵자는 “죽은 자를 따르기 위해 희생되는 사람들이 왕일 경우에는 수백, 수십 명을 헤아리고 높은 관리나 대부는 수십 명에서 몇 명을 헤아린다.”고 해 순장을 말하고 있다. 상의 제의가 폭력적이었던 것은 국가에 군사적 공격성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이다. 왕들은 전쟁에 나갈 때 천제에게 도와 달라고 빌었지만 실제로 승리를 안겨준 것은 군사기술과 청동 무기였다.
기원전 1045년 상을 패망시킨 주(周)는 천자의 나라를 표방했다. 그러나 천의 영향력은 그 대응물인 인간을 통해서만 땅에서 실현될 수 있었다. 중국인들은 저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거룩함을 찾기보다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을 성스럽게 만드는 데 관심이 컸다. 백 개 이상의 작은 제후국으로 이루어진 주 연방은 기원전 771년 서쪽 수도 견융(犬戎)이 오랑캐에게 짓밟히면서 무너졌다. 동쪽으로 피신했지만 이전의 지위를 회복하지 못했다. 왕조가 쇠퇴했을 뿐 아니라 봉건제도까지 무너졌고, 많은 나라들이 새로 생겨났다. 이때 진(晉), 초는 군역의 댓가로 땅을 주겠다며 오랑캐를 불러들이기도 했는데, 이제 태평한 사치는 불가능해졌다. 이런 불확실한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분명한 지침을 원했다.
의례주의자 유가(儒家)들은 최선을 다해 노력했지만 기원전 7세기 말 무렵 중국 평원에는 폭력이 점점 늘어났다. 주의 제후들이 약해지자 제 환공이 서로 공격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러나 개인적인 위신에 중독된 귀족들은 여전히 독립을 유지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 시도는 실패했다. 기원전 593년 송나라는 장기간 포위 공격을 당하자 아이들을 잡아먹기까지 했다고 하며, 각나라마다 만성적인 내분에 휩싸였고, 저마다 하위 국가를 만들면서 전통 귀족과 제후가 꼭두각시로 전락하는 일까지 생겼다.
노(魯)의 말단 관직에 있던 공구(孔丘, 기원전 551∼479)는 권력을 찬탈하는 가문들의 탐욕과 자만과 허식에 경악했으며 예(禮)만이 이런 파괴적인 폭력을 제어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중국에서는 그를 큰 스승이라고 부르지만 서양에서는 그 이름 발음대로 ‘컨퓨셔스’라고 부른다. 공자는 전사 출신인 소규모 추종자를 이끌고 여러 나라를 돌면서 자신의 이상을 실행에 옮길 통치자를 찾았지만 실현되지는 못했다. 이런 세속적인 것이 중국에서는 신성한 것으로 통한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가 죽고 나서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책으로 정리되었는데, 요순의 미덕을 소생시키는 공자의 이념은 전통적으로 우리가 공유하는 인간성에 대한 세련된 인식에 바탕을 둔 것은 사실이다. “자신이 바라지 않는 것은 남에게 강요하지 말아야 한다.”이것은 공자의 가르침을 관통하는 ‘하나의 원리’다. 평생 실천해야 하는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공자의 가르침은 그가 죽은 뒤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책으로 정리되었으나 후대의 학자들은 서로 관련이 없는 짧은 격언들을 모은 《논어》가 상당히 신뢰할 만한 자료라고 보고 있다. 유학자들은 평등에 관한 확신에도 불구하고 지배계급(귀족)의 전제를 넘어설 수는 없었다. 다만 묵자(墨子, 기원전 480∼390?)에게서는 평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묵자는 180명에 이르는 제자들을 이끌고 돌아다니며 적으로부터 공격받았을 때 방어할 수 있는 새로운 군사기술을 통치자에게 가르치기도 했다. 묵자 또한 인이 유일한 희망이라고 확신해 힘주어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여겨야 한다. 이런 관심(愛)모두를 포괄하고 아무도 배제하지 말아야 한다. 서로 파괴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은 겸애(兼愛, 모두에 대한 관심)를 실천하도록 설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자기 나라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의 나라도 자신의 나라처럼 여기라는 것이다.
당시는 공자보다 묵자를 숭배했는데, 묵자가 폭력적인 시대의 문제를 매우 직접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5세기에 이르면 조그만 제후국들은 전국칠웅에 둘러싸이게 된다. 전통적 제후국들을 소멸시키기 시작했으며 마침내 기원전 221년 오직 하나만 남게 되었다. 이로써 중국에는 첫 황제가 나타났다. ‘성군’은 우주에서 사회를 조직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질서정연한 설계를 발견하고 만들었다. 전장이라는 혼돈 속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찾게 해주는 틀을 분별할 수 있게 되었다.
공자와 같은 시기를 산 손자(孫子)는 그렇게 설명했다. “이런 식으로 문제를 관철하면 누가 이기고 누가 질지 알 수 있다. 훌륭한 지휘관은 아예 싸우지 않고도 적을 물리칠 수 있다. 승산이 적을 경우 상책은 적이 상대가 약하다고 믿고 자만심에 빠져 치명적인 실수를 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지휘관은 정신이 몸을 통제하듯이 통제해야 한다. 유능한 지휘관은 귀족 출신이라 해도 농민 병사들 사이에서 살며 그들과 곤경을 나누어야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된다.”실제로 훌륭한 병법가는 싸워서 빠져나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는 위험에 의도적으로 부대를 집어넣기도 하는데, 병사는 자기 나름의 생각을 할 수 없고 지휘관과의 관계에서 여자처럼 복종하고 수동적이 되어야 한다. 전쟁은 점차 여성화되었다. 사실 여성적인 약함이 남성적인 호전성보다 효과적일 수 있다. 가장 좋은 군대는 물처럼 약해 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군은 기만의 도(道)다.”손자가 말했다. 이 게임은 적을 속이는 것이다. 따라서 유능할 때 무능한 것처럼 보여라. 사용할 때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보여라. 가까이 있을 때 멀리 있는 것처럼 보여라. 멀리 있을 때 가까이 있는 것처럼 보여라. 적이 유리함을 구하면 꾀어라. 적이 혼돈에 빠졌을 때 공격해 빼앗아라. 적이 충실할 때 지켜라. 적이 강할 때 피하라. 적이 준비되지 않았을 때 공격하라.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타나라. 이 방식은 국가의 다른 모든 일에서는 참담한 결과를 낳겠지만 지휘관이 그것을 이용하는 방법을 알면 성인처럼 천도(天道)와 일치하는 상태를 이룰 수 있었다.
[3] 히브리인의 딜레마
처음 읽은 《구약성서》에서 살펴보았으나 히브리 민족의 역사를 요약하는 것도 쉽지가 않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을 때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믿었던 것과는 달리 원죄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 것이 아니라, 농업 경제로 들어가게 되었을 것이다. 인간(adam)은 땅(adamah)에 창조되었으며 에덴동산의 이 땅에는 소박한 샘이 물을 대주었다. 아담과 하와는 자유로운 행동 주체로서 목가적인 자유의 삶을 살고 있었으며, 느긋하게 동산을 가꾸면서 그들의 신 야훼와 벗 삼아 지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불복종 행위 때문에 야훼는 두 사람에게 힘겨운 농업 노동이라는 무기형을 선고했다….”
땅 또한 너 때문에 저주를 받으리라. 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살리라. 들에서 나는 곡식을 먹어야 할 터인데, 땅은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너는 흙에서 난 몸이니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이마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얻어먹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세기 3:17∼19)
아담은 땅의 주인으로 평화롭게 땅을 보살피는 것이 아니라 땅의 노예가 되었다. 히브리 성경은 처음부터 대부분 이런 어조다. 주인공은 귀족이나 엘리트가 아니고, 아담과 하와같이 한낱 들의 노동자로 전락해 황폐한 땅에서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아담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다. 카인은 농부이고 아벨은 목자 - 농경과는 적 – 였다. 둘 다 충실하게 야훼께 재물을 바치지만 심술궂은 야훼는 카인의 제물을 거부하고 아벨의 제물만 받아들였다. 카인은 당황해하다가 격분해 동생을 꾀어내 죽였다. 카인이 경작하던 땅은 야훼에게 복수를 요청하는 피의 벌판이 되었다. “땅이 입을 벌려 네 아우의 피를 네 손에서 받았다. 너는 저주를 받은 몸이니 이 땅에서 물러나야 한다.”야훼가 소리쳤다.
희망 가득한 왕국에서 어린 다윗과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결투라는 유명한 이야기는 전사에게 자신의 무술을 과시할 기회를 주었고 양쪽은 충돌을 구경하는 것을 즐겼다. 골리앗은 매일 아침 이스라엘 진영에 와서 싸움을 걸었고, 목동 다윗은 돌팔매로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목을 잘랐다. 그러나 다윗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자 여부스인들은 그를 거부했다. 다윗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솔로몬은 어머니가 여부스인이었고 그의 이름 또한 예루살렘의 고대 신 샬렘에서 따온 것이었다. 솔로몬 성전은 야훼 숭배가 얼마나 철저하고 이교 풍경에 동화되었는지 보여준다. 성전 앞에 바다 괴물 ‘얌’을 상징하는 육중한 청동수조(獸鳥)가 있는데 이 수조는 신성과 다산의 상징인 놋쇠로 된 황소 열두 마리가 받치고 있었다. 성전은 솔로몬 통치에 대한 야훼의 승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다. 솔로몬이 죽은 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아들 르호보암에게 아버지의 ‘가혹한 압제’를 되풀이하지 말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르호보암이 거부하며 그들을 멸시하자 그들이 폭도로 변해 공격해 열두 지파 가운에 열 지파가 제국에서 떨어져 나가 이스라엘 왕국을 세웠다. 기원전 722년 호세아 왕이 공물 바치는 것을 거부하자, 살마네세르 3세는 이스라엘 왕국을 지도에서 지워버리고 귀족들을 추방했다. 그러나 유다가 살아남아 오랜 치세 동안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기원전 7세기 이스라엘은 독립을 꿈꾸었지만, 거대 열강들의 공격성에 겁을 먹은 유다의 개혁가들은 야훼 숭배에 전에 없던 비타협적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이 무렵 모세가 나타나자 개혁가들은 위중한 시기에 자신들이 모세를 대신하여 말하고 있다고 믿으며 자신들의 가르침을 〈신명기〉에 집어넣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야훼는 이스라엘인이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을 강하게 금지했을 뿐 아니라 약속된 땅의 토착 민족들을 쓸어내라고 명령했다.”고 말했다.
그때 너희는 그들을 전멸시켜야 한다. 그들과 계약을 맺지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마라. 그들과 혼인을 맺으면 안 된다. 그런 짓을 하면 너희 아들이 나를 떠나 다른 신들을 섬기게 될 것이고 그리되면 야훼께서 진노를 발하여 순식간에 너희를 쓸어버리실 것이다. 그 대신 너희는 그들에게 이렇게 해야 한다. 그들의 제단을 허물고 석상들을 부수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버리고 우상들을 불살라라.(신명기 7:2∼5)
정말로 섬뜩하다. 단군의 홍익인간, 공자의 인, 심지어 한비의 법가에도 이런 내용은 없다. 어느 경전에도, 불전에도 이런 내용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신앙의 배타성에 대한 이런 고집이 얼마나 이상하게 보였을지 깨닫기 힘들다. 히브리 성경은 2천 5백 년에 걸쳐서 일신교적 가르침을 받아 왔다. 기원전 597년 유다는 강대국을 요리조리 피했으나 바빌론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유다의 귀족, 군인, 장인 8천 명을 살던 땅에서 추방했다. 10년 뒤에는 예루살렘을 완전히 파괴했으며 유다인 5천 명을 더 추방하여 폐허가 된 땅에는 하층 계급만 남게 되었다. 추방은 물리적일 뿐 아니라 영적인 충격이었다.
기원전 522년 ‘다리우스’가 페르시아 왕위에 오르면서 수백 년 동안 전쟁, 유혈, 무질서를 잠재우자 스스로(작은 나라의) 왕이라고 일컫던 사람들이 사라졌다. 다리우스는 창조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단계를 개시했다. 다리우스가 세상을 통일하고 세계적인 제국을 창조해 인류의 행복을 복원하는 단계였다. 하지만 다리우스는 조르아스터와 마찬가지로 무법적 폭력의 공포를 느꼈다. 그는 제국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진압했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야심 있는 귀족을 눌러야 했다. 조르아스터가 시간의 종말에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했던 묵시록적 복원은 현재로 옮겨지고 조르아스터의 이원론은 서로 싸우는 진영들로 나누는 데 이용되었다. 일단 모든 땅을 복속시키고 나면 전체에 평화가 오고 프리샤, 즉 ‘경이’의 시대가 도래할 터였다.
기원전 539년 바빌론에서 돌아온 유대인들은 황량한 땅이 되어버린 고국에서 성전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들은 바빌론 사람들에 의해 이곳에 끌려온 외국인들의 적대감과 싸워야 했고, 추방되지 않은 유대인들의 원한과도 마주해야 했다. 그들이 마침내 성전을 재건하자 유대인 사제 귀족이 페르시아의 이름으로 통치하는 성전 국가가 되었다. 〈신명기〉저자들은 공격적인 역사를 다시 쓰고 고대 이스라엘 전통을 새로운 환경에 맞추려고 시도했다. 유대인들은 바빌론에서 현지인과 떨어져 살면서 민족 정체성을 보존했으며, 사제들은 ‘거룩한 것은 분리되는 다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진정한 이스라엘인은 〈신명기〉저자들이 주장했던 것과는 달리 ‘체류 외국인을 박멸하지 말고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며, “너에게 몸 붙여 사는 외국인을 네 나라 사람처럼 대접하고 네 몸처럼 사랑하라. 너희도 이집트 나라에 몸 붙여 살지 않았느냐?”(출애굽기 19:34) 이는 유토피아적인 이상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실행할 수 있는 윤리였다. 이런 원칙적인 자비는 공동체가 거의 언제나 공격을 당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더욱 눈에 띈다. 유대인들은 다윗의 기사도적인 전쟁 이야기는 하지만 예루살렘에서 눈먼 자와 다리 저는 자를 죽이라는 잔혹한 명령은 저술에서 생략했다. 모세는 돌아오는 전사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칠일간 진지 밖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너희 자신, 너희와 포로를 정화해야 한다.”고. 야훼 자신이 승인한 전쟁임에도 이스라엘 왕국이 우상을 숭배하는 유대 왕과 싸우면서 보여준 야만성을 비난했다. 이스라엘 군대는 유대 병사 12만 명을 죽이고 포로 20만 명을 끌고 사마리아로 개선했다. 그러나 예언자 ‘오뎃’은 이 정복자 영웅들을 비난했다. “이제 너희는 유대인과 예루살렘 시민들을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종으로 부려 먹을 생각을 하는구나.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 범죄하지 않은 줄 아느냐? 이제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사로잡아 온 너희 동족을 돌려보내라. 야훼께서 너희가 한 일을 크게 노여워 하시니라.”(역대하 28:10∼11)
이런 예언자들은 새로운 ‘일신교’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강력한 군주제는 종종 지고의 신, 정치적이고 자연적인 질서 창조자라는 숭배를 낳기도 한다. 네부카드네자르와 다리우스 같은 군주들에 의한 강력한 통치를 백 년 이상 경험하면서 그들만큼 강력한 야훼를 만들고 싶은 욕망이 생겼는지도 모른다. 원래 조국의 폭력과 잔혹성에 격렬하게 맞서던 야훼마져 첫째가는 제국주의자로 바뀌고 말았다. 지금 이스라엘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2부】제국의 폭력과 종교의 응전(붙임)
【3부】세속주의 시대의 종교 근본주의(붙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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