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廣州李氏 始祖 諱 自成 景慕碑銘
天地 삼라만상(森羅萬象)에 그 연원(淵源)이 없는 바가 있으랴.
대저 모든 뫼와 물에는 그 본연의 根源이 있는바, 뫼를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조종(祖宗)을 말하고
물을 말할 때는 반드시 그 원천(源泉)을 말한다.
뫼와 물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사람으로서 世代가 있는 자에게 가히 근본(根本)이 되는 조상이 어찌 없으랴!
公은 廣州李氏 찬란한 역사의 시원(始原)이며, 門中一族의 根本이니 곧 시조(始祖)이시다.
휘(諱)는 자성(自成)으로 신라 내물왕 조(奈勿王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내사령(內史令)에 이르셨다.
{일부 학자의 기록에 의하면, 초기 신라의 외방 수장인 니사금(尼師今)을 후대에 새롭게 음차(音借)하여 표기하면서
내사령(內史令)이라 변천되어 수록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公은 타고난 성품이 光明正大하였고 포부 또한 담대하였으니,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걸(人傑)이시었다.
인애(仁愛)로서 古國을 다스렸고, 신라 조정에 들어와서는 어진 벼슬아치로서 政事를 보필하였다.
전쟁터에서는 백성들을 자기 몸처럼 아끼어 위태로움에도 불구하고 앞장서 나가니,
당시 사람들이 흠복(欽服)하여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렇듯 명실공히 公은 우리 廣州李氏의 연원(淵源)으로서 근원(根源)이며 根本이시니,
우리 모두는 그 실존 一元의 뿌리로부터 뻗어 나온 자랑스러운 후손인 것이다.
내물마립간의 아들인 신라 제十九代王 눌지마립간(訥祇麻立干)이 고구려의 비호(庇護)를 받아 신라 제十八代王이 된
실성마립간(實聖麻立干)과 왕위의 정통성을 다툴 때, 公께서는 눌지마립간을 도와 실성의 군대를 공격하여 대파하는
큰 功을 세우셨다.
그러나 公께서도 변란 중 전몰(戰歿)하시니, 눌지마립간이 몹시 애통해하며 公의 충절을 높이 포상하였다.
이때에 公의 아드님 군린(君隣)에게 칠원성백(漆原城伯)을 제수하고 칠원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하여
그 충절의 功을 포상하니, 자손들이 세거하면서 칠원(漆原)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公의 孫은 용수(龍壽)이니 또한 漆原伯을 세습(世襲)하였다.
용수(龍壽) 아래로는 기록의 미비로 인해 子孫들의 정확한 世代와 각기(各其) 휘자(諱字)는 알 수 없고,
다만 新羅末에 이르러 孫 한희(漢希)가 있다.
漢希에게도 아들 방린(防隣)이 있으며 방린 아래는 세대 기록이 끊어져서 정확한 代數를 알 수 없으니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천년 왕조 新羅는 九三五年 경순왕(敬順王) 때에 결국 막을 내리고 高麗가 三韓의 주인이 되었다.
후손인 判尹 의만(宜晩)의 보초(譜草) 별보권(別譜卷)에 의하면, 경순왕이 고려 태조에게 투항할 때에 漢希 선조께서 울면서
그 부당함을 극력 진언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에 바쳤으나, 公의 자손들은 옛 나라에 대한 굳센 절개로서 투항을 거부하고 칠원성(漆原城)을
중심으로 끝까지 항쟁하였다.
그러나 王建의 강력한 위무(威武)에 결국 항복하였고, 경기도 회안(淮安)으로 강제 이주되어 아전(衙前)으로 복속(服屬)되었다.
九四0년에 淮安이 廣州로 개칭되었으므로 公의 후손들은 그때부터 廣州를 貫鄕으로 삼아 世系를 이었다.
고려 말에 이르러 公의 음덕(蔭德)이 다하지 아니하여 마침내 문운(門運)이 다시 일어났으니,
高麗 高宗朝에 三益 즉 익비(益庇) 익준(益俊) 익강(益康) 삼 형제분의 현달(顯達)이다.
광릉삼현(廣陵三賢)이라 불리며 그 명망이 자자하였으니, 益庇는 영동정(令同正)이고 益俊은 합문지후(閤門祗侯)이며
益康 또한 令同正이다.
특히 益俊은 高麗朝 중앙관계에 진출하여 中外에 이름을 떨쳤으니, 閤門은 조회(朝會)와 의례(儀禮)를 맡아 보던 관아이며,
祗侯는 高麗朝 참상관(參上官)의 벼슬이다.
이는 우리 廣州李氏에 찬란한 중흥의 시대가 마침내 도래했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니, 麗初 이래 씌워졌던 아전(衙前)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더 높은 세상으로 웅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三益은 휘호(諱號)가 분명하고 공명(功名)과 훈업(勳業)이 당대에 높았으므로 세 문중 후손들이 추존하여 각기 一世로 삼았다.
益庇의 아들은 文인데 명망이 있었고 관직 또한 높았으나 바른 道로써 군왕에게 간언(諫言)한 죄로 한때 벌을 받아 다시
주리(州吏)가 되었다. 그 후 直言의 공명정대함이 밝혀져 이내 복권되었다.
배위(配位)는 염주 서씨(鹽州徐氏) 始祖 자번(自蕃)의 여식(女息)이다.
文은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가 름(菻)으로 令同正인데 여러 代에 이르러 후사(後嗣)가 끊겼다.
둘째는 울(蔚)로 또한 令同正을 거쳐 검교(檢校)를 지냈다.
檢校는 高麗朝 훈직(勳職)으로 從二品에서 正五品 이상의 관리에게 제수되던 관직이다. 朝鮮朝에 이르러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다.
蔚의 관직 관련 기록은 <씨족원류(氏族源流)>를 참조하였다.
配位는 江州 李之孝의 女息이다.
蔚의 맏이는 한(漢)으로 섭사정(攝司正)을 지냈고, 둘째는 당(唐)으로 成均生員이다.
漢이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는 록생(祿生)으로 成均生員이며 둘째는 仁生이니 교도(敎導)다.
祿生이 이조참의 밀(密)을 낳았고, 密이 지(知)를 낳으니 의주판관(義州判官) 재임 시 청백리(淸白吏)로서 中外에 명망(名望)이 높았다. 증 이조참판(贈吏曹參判)이다.
知가 아들 둘을 낳으니, 맏이가 관인(寬仁)이나 무사(無嗣)이고 둘째가 대학자 율정(栗亭) 관의(寬義)로 증 이조판서(贈吏曹判書)이다.
울(蔚)의 차자(次子) 당(唐)은 다섯 아들을 낳으니, 고려 말에 모두 문과 급제하여 오자등과(五子登科)의 신화를 이룩하였다.
맏이는 봉(逢,初名仁齡)이니 경선고사(慶先庫使)요, 둘째는 집(集,初名元齡)이니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이다.
셋째는 열(悅,初名希齡)이니 또한 判典校寺事이며, 넷째는 건(虔,初名自齡)으로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지냈다.
다섯째는 성(省,初名天齡)으로 종부시 부령(宗簿寺副令)이다.
逢의 자손은 여러 세대가 번성하다가 갑자기 기록이 끊기니, 그 후사(後嗣)를 알 수 없다.
集은 아들 셋을 낳으니 첫째는 지직(之直)으로 형조참의(刑曹參議)요, 둘째는 지강(之剛)으로 좌참찬(左參贊)을 지냈다.
셋째는 지유(之柔)로 목사(牧使)이다.
之直의 맏이는 장손(長孫)이니 사인(舍人)이요, 다음이 인손(仁孫)이니 우의정을 지냈고 다음이 예손(禮孫)으로 관찰사이다.
長孫의 아들은 극규(克圭)로 병조참의를 지냈고, 仁孫이 五子를 낳으니 맏이는 극배(克培)로 영의정이며 둘째는 극감(克堪)으로
형조판서다. 셋째는 극증(克增)으로 병조판서이며 넷째는 극돈(克墩)으로 좌찬성을 지냈고 다섯째는 극균(克均)으로 좌의정이다.
禮孫의 맏이는 극기(克基)로 예조참판이며 다음은 극견(克堅)으로 좌통례 (左通禮)를 지냈다.
之剛의 아들은 맹손(孟孫)으로 통사랑(通仕郞)이고, 孟孫이 극령(克齡)을 낳으니 교수(敎授)이다.
之柔는 아들 넷을 낳으니, 첫째는 일원(一元)으로 예빈시 정(禮賓寺正)이며 둘째는 중원(中元)으로 판결사(判決事)를 지냈다.
셋째는 정원(貞元)으로 吏曹正郎이며 넷째는 계원(季元)이다.
唐의 셋째 아들인 열(悅)은 文名이 높아 여러 청요직(淸要職)을 지냈으나 후사가 없이 女息 둘만을 두었다.
첫째는 남양인(南陽人) 예의판서(禮儀判書) 익산군(益山君) 홍순(洪順)이며, 둘째는 함종인(咸從人) 공조전서(工曹典書)
어경(魚敬)이다.
唐의 넷째 아들인 건(虔)은 십운과(十韻科)에 등과하여 예의판서(禮儀判書)에 이르렀다.
虔의 아들 연동(蓮仝)은 판전의시사(判典儀寺事)이다.
蓮仝은 증 영의정(贈領議政) 봉로(蓬老)를 낳았고, 蓬老는 봉익대부(奉翊大夫) 전공판서(典工判書)인 두신(斗信)을 낳았다.
斗信은 계유정난에 순절한 단종 조(端宗朝) 충절신(忠節臣)으로 시 충민(諡忠愍)이다.
唐의 다섯째 아들인 省은 후사(後嗣)가 없다.
高麗朝 광릉삼현(廣陵三賢) 중 둘째인 합문지후(閤門祗候) 익준(益俊)은 무후(无後)다.
高麗朝 廣陵三賢 중 셋째인 영동정(令同正) 익강(益康)의 아들은 성우(誠祐)로 또한 令同正이다.
誠祐가 잠(岑)을 낳으니 교도(敎導)이고, 岑이 전사(全斯)를 낳으니 문과 급제하여 군부좌랑(軍簿佐郞)에 이르렀다.
全斯는 문과급제 가선대부(嘉善大夫) 순천부사(順天府使)인 방귀(方貴)를 낳았고, 方貴가 아들 둘을 낳으니 곧 양중(養中)과
양몽(養蒙)이다.
養中은 고려조에 형조참의(刑曹參議)를 지냈다. 李太祖가 혁명을 일으켜 조선을 세우니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절의로서
벼슬을 버리고 은둔한 두문동(杜門洞) 七十二賢 중 一員이다.
養中이 우생(遇生)을 낳으니 증 좌찬성(贈左贊成)이고, 다음은 수생(遂生)이니 금산군수(錦山郡守)를 지냈다.
遇生이 수철(守哲)을 낳으니 증 좌찬성(贈左贊成)으로 한원군(漢原君)이며, 다음은 석철(錫哲)이니 수원부사(水原府使)이다.
遂生이 경철(景哲)을 낳으니 進士로서 德行이 있었다.
養蒙은 고려 조에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다.
養蒙 역시 李太祖가 혁명을 일으키니 不事二君의 충절로서 廣州 원적산(元積山) 아래 만선동(晩仙洞)에 은거하였다.
자손들에게 朝鮮朝에서 벼슬하지 말 것을 유훈으로 남기니, 자손들이 오랫동안 그 뜻을 따랐다.
어느 날 문중의 병자(秉字) 항렬 大父인 근수(根守) 회장이 서초동 누사(陋舍)로 찾아와서 廣州李氏의 根本이신
始祖 諱 自成에 대한 경모(景慕)의 정성을 다하고 져 한다며 비명(碑銘)을 지어주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諱 自成에 관한 한, 어느 후손인들 그 위대한 一元의 행적을 감히 밝혀 적을 수 있으리오.
이에 문득 놀라 사양의 뜻을 전하니, “우리 廣州李氏 同宗이 실로 영원히 돈목(敦睦)하는 계기로 삼고자 청합니다.”하며,
“어찌 후대를 위해 기록으로 남겨 주시려 하지 않습니까.” 재삼 간청하였다. 문중 大父의 그 말이 매우 곡진(曲盡)하였으니,
결국 손사래 치지 못하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니, 내 비록 큰 족적은 남기지 못했으나 학계와 정계에 나름의 발자취는 남겼다고 자부하고 있었음이라.
그럼에도 문중 관련해서는 크게 기여한 바가 없어 매냥 아쉬워하였는데 이렇듯 一筆揮之하였으니, 이 또한 公의 음덕(蔭德)이
아닐 수 있으랴.
기실 세상 사람들이 옳은 일을 행하고자 한다고 말하면서도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이 옳은지 알지 못해서가
아니다.
저마다의 양심과 신념이 있음에도 굳센 의지로 옳은 길을 확고하게 지켜나가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根本을 수호하고 先祖를 현양하는 바는 萬古에 옳은 일일진대, 어찌 굳센 의지로 확고하게 지켜나가지 않을 수 있으리.
우리 廣州李氏 후손들이 內史令公 諱 自成을 根本으로 삼은 바가 이어지고 또 이어져 가히 햇수로 一六OO年에 이르렀다.
즈음하여 우리 廣州李氏 찬란한 역사의 始原이신 諱 自成을 爲始하여 上代 선조님들의 행적(行蹟)을 적어
감히 돌에 새기고 져 한다.
겸연(慊然)하고 두려운 마음 또한 없지 않으나 한 편으로 이 또한 후손으로서 큰 영광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오호, 이럴진대 어찌 公을 흠모하는 마음을 감출 수 있으랴!
무릇 우리 廣州李氏 후손들이 根本을 景慕하는 이 碑銘을 본다면 실로 根本이 어디서 온 바를 적실(的實)하게 알 것이니,
이에 우리 후손들은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始祖 諱 自成을 우러러 사모할 수밖에 없을 것이리라.
이제 우리 모든 후손들은 계파(系派)를 불문하고 오로지 한마음 한뜻으로 삼한갑족(三韓甲族) 廣州李門의 시원(始原)이신
始祖 諱 自成을 받들어 모심으로써 성손(姓孫)으로서의 도리(道理)을 다하여야 할 것이다.
先祖님들의 음덕(蔭德)에 감읍(感泣)하며, 신축년(辛丑年) 초봄에 서초동 누사(陋舍)에서 삼가 적는다.
檀紀四三五四年(西紀二O二一年) 辛丑年 三月 日
廣州李氏 左通禮公后 前 國務總理 壽成 謹識
廣州李氏 十韻科公后 前 文化有司 柱一 謹書
廣州李氏 始祖 景慕碑 建立 推進委員會 謹竪
景慕碑 建立 推進委員
栗亭公宗會 都有司 根守
十韻科公宗會 都有司 光熙
石灘公宗會 都有司 萬述
巖灘公宗會 都有司 和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