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사(輓詞) [ 계동 전경창 선생을 애도하며 ]
이조정랑(吏曹正郎) 수죽헌(水竹軒) 정창연(鄭昌衍)
昂若超群鶴
仁如瑞世麟
芳薰珥筆日
肝照斷金辰
晚路初騰翮
驚風急捲春
蒼蒼理茫昧
多少泣乾坤
憶昨趨承款
微痾已報平
含盃半日話
脂轄故鄕情
一札森顔面
長呼隔死生
人間無會地
千里殲歌聲
헌앙(軒昂)하기 학의 무리에서 우뚝 솟은 듯
어진 자태는 상서로운 세상의 기린이다.
향기로운 훈기 쐬며 조정에서 붓 머리에 꽂고 대기하던 날
우리는 간담상조(肝膽相照)하고 쇠도 자를 우정이었네
늘그막에 처음으로 날개 쳐 올라갔거늘
놀란 바람이 급급히 봄을 말아 들이고 말았네
창창한 이치는 아득하니
많은 사람 천지를 향해 흐느끼네.
기억나네, 지난번에 찾아갔을 때의 일이
병 기운 있음이랴 이미 알려진 일
술잔을 머금으며 반나절 이야기할 때
고향 갈 준비하고 있다고 했네.
이후 한 편지 받고서 내 얼굴 굳어지며
생사를 격하여 길게 소리치노라.
인간 세상에선 이제 만날 갈 없으니
천리에 영구의 상두꾼 노래가 있을 뿐이네.
[출처] 국역 계동선생문집 [國譯 溪東先生文集]
● 정창연 [ 鄭昌衍 ]
정의
조선시대 동부승지, 우의정,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경진(景眞), 호는 수죽(水竹). 정광필(鄭光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복겸(鄭福謙)이고, 아버지는 좌의정 정유길(鄭惟吉)이며, 어머니는 원계채(元繼蔡)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79년(선조 12)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독서당(讀書堂)에 들어갔고, 이조좌랑을 거쳐 동부승지 등의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14년(광해군 6) 우의정이 되고 이어 좌의정이 되어 기사(耆社)에 들고 궤장(几杖)을 받았다.
이 때 강화부사 정항(鄭沆)이 광해군의 뜻을 받들어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니, 부사직 정온(鄭蘊)이 상소하여 “항을 죽이고 영창을 대군의 예로써 장사지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크게 노하여 정온이 화를 당하자 그는 이원익(李元翼)과 더불어 상소하여 정온을 구하여주었다.
이어 폐모론이 일어나자 벼슬을 사퇴하고 두문불출한 가운데 정방(政房)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다른 대신들이 합계(合啓)하여 말썽을 일으켰으나, 때마침 인조반정이 일어나 무사하였을 뿐 아니라 다시 좌의정이 되었다. 한편, 광해군 비 유씨(柳氏)는 그의 생질녀로, 옥사가 일어날 때에는 혹 광해군이 그에게 묻기도 하여 옥사에 억울하게 걸린 많은 사람들을 구하여주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정창연 [鄭昌衍]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