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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질그릇에 담긴 보배
(고린도후서4:5-7)
바울은 그가 복음을 떳떳하게 전하고 누구의 비판이나 비방까지도 개의치 않고 결코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일에 대하여 5절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전파하는 예수
바울의 복음은 오직 예수였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는 예수 외 다른 불순물은 전혀 개입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이단자들이나 잘못된 거짓 선생들은 바울의 복음을 비난하고 중상했지만 바울은 이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하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의 경우, 잘못된 이단자들이 자기들이 전파하는 다른 복음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자기 자랑을 늘어놓으며 자기를 전파하는 경우가 있지만 바울은 결코 자신을 전파하거나 자기의 학식이나 지식을 자랑하지 아니한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드린 후, 복음에 비하여 자신의 학문이나 지식이 얼마나 천박한지 깊이 깨닫고 빌3:7절 이하에서 이처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어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되신 것’을 증거 했다고 했습니다. ‘주’란 말은 퀴리온(χὐριον)으로 예수가 하나님과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들이 복음을 전파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예수가 하나님이시란 사실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일도 그가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증거로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있어서 너희의 종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말은 복음의 빚진 자의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롬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했습니다. 빚진 자는 언제나 종의 자리에 놓여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 울은 스스로 기쁜 마음으로 이 종의 멍에를 지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이 정죄를 주는 것이 아니라 사죄의 은혜를 주며 사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생 22 \ 4:5-7
명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비록 종의 멍에를 메고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보람이 있는 일이 아닐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잘 감당할 때 그는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을 듣고 상을 받을 수 있다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한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질그릇에 가진 보배
바울은 6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말씀은 빛의 창조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빛을 비취라고 하신 것으로 없는 빛을 창조해서 비취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소유하신 빛을 세상에 비취게 하신 것으로 이것을 창조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빛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신 것으로 예수님은 빛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복음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다’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7절에서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했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복음을 보배라고 말하고 자신의 육신을 질그릇으로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천한 것, 보잘 것 없는 것, 바라볼 것이 없는 존재란 뜻입니다. 원래가 인간은 죄인이며 그 마음이 만물의 찌끼만도 못한 더러운 존재로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인즉 질그릇만도 못한 인간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속에 이처럼 귀한 보배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요 축복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릇이란 그 안에 담겨진 물건에 따라 가치가 좌우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질그릇이라도 그 속에 값진 보배가 담겨져 있다면 그 질그릇은 보배 그릇으로 귀한 가치를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결론 : 이처럼 천하디 천한 인간에게 이 귀중한 복음은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인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안에 이 같은 귀한 보배를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면서 이 귀중한 보배의 영광을 비췰 수 있는 성도가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12)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고린도후서4:8-11)
바울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큰 고난과 핍박을 당한 일에 대하여 말하면서 그런 모든 일이 예수의 생명을 우리 몸에 나타내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겪으면서 살아가지만 그 일로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를 위기에서 혹은 핍박에서 건져 주시고 그 생명의 능력이 우리의 연약함을 통해서 역하시어 많은 사람들을 구원에 이르게 한다는 뜻입니다.
1. 버린바 되지 아니한 바울의 시련
바울은 8절에서 ‘우리가 사망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우겨 쌈을 당한다는 말은 들리보네노이(θλιβὀμενοι)로 ‘즙을 짜기 위해 포도를 짓누른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큰 것인가에 대한 것인데 복음을 핍박했던 그 당시의 경우를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우겨 쌈을 당하는 가운데서도 결코 ‘싸이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짓눌림을 당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그런 일로 말미암아 결코 복음을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으며 그런 일을 두려워하지도 아니한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다음에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여기서 말한 ‘답답한 일’이란 빠져 나올 길이 없는 궁지에 몰려서 어쩔 도리가 없는 막막한 상황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를 만나도 낙심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빠져 나올 길을 열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9절에서 ‘핍박을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있을 당시는 복음을 전하는 일이 곧 핍박을 받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방인들로부터 오는 핍박은 말할 것도 없고 유대인들의 핍박 또한 극심했으며 같은 그리스도인 이면서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거짓 형제들로부터의 핍박 역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가운데서도 버린바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복음을 전하는 그의 사역 자들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사람들로부터는 버림을 당해도 주님으로부터는 버린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이 붙들어 주시고 그 핍박으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이런 말을 한 배경이 있는데 그가 루스드라에 있었을 때,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 돌로 쳤는데 이 때 바울이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쳤지만 하나님께서 바울을 일으켜 다시 복음을 전하게 하셨 24 \ 4:8-11
던 것입니다(행14:19). 원수의 무리로부터 이처럼 죽게 되는 위험에 처해도 하나님께서는 망하게 하지 않으십니다. 망하게 아니하신다는 말은 헛되이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신다는 뜻입니다.
2. 우리 몸에 나타나는 예수의 생명
바울은 10절에서 그리스도인이 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가에 대한 해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죽은 것을 몸에 짊어진다는 말은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체험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주님은 그의 남은 고난을 교회를 위해서 주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교회를 위해 그가 받으실 고난을 남겨 두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 고난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하시려는 배려에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롬8:17절에서 ‘자녀이면 또한 후사요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얻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크면 클수록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십니다. 그 생명이 나를 변화시키시며 나로 주의 복음을 위해 주님의 고난에 동참케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질그릇 같은 나를 통해 영광을 들어 내시고 그뿐만 아니라 나로 그리스도의 영광에까지 동참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그리스도인이 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시련은 패배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의 승리에 동참하는 일이며 그로 인하여 더욱 큰 영광의 상급을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자신의 생애를 마치면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한 것입니다.
결론 : 바울은 11절에서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언제나 주를 위해 죽음의 위험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나타나게 하시려는 것이기 때문에 담대한 믿음으로 복음의 일꾼으로 부끄럽지 아니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자유 민주주의 외침= 간증=한국이 곧 공산국가(주사파) 될 수 있다. 주의 성령께서 문재양이가 정책 실패로 푸른집 2층에서 울고 있는 것을 그림 한장으로 보여주셨다. 푸른집에서 울고 있고 그 앞에 유리 진열장 속에 홧도그(정치와 정책)가 진열되어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사단의 정책인 공산주의 사회주의 주사파로 뼈속까지 잠재 의식화된 사단의 정책(정치와정책)이 실패로 가져온 결과에 대한 후회하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영적으로 사단에 잡혀있어 영혼이 불쌍하다는 것이다. 그도 구원 받어야할 존재임을 가르쳐준다. 좌파 문빠들이 불법으로 공수처와 연동제 비례 선거법을 팩스트랙으로 통과한 것이 증거이다. 좌파 국회의원 200석을 확보 헌법을 고쳐 사회주의 (공산주의 주사파)국가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이다. 앉은뱅이 같은 대형교회여! 급하고 급하다. 빨리 일어나라. 주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즉 진리(말씀)앞에 선자에게 자유 (승리)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와 같이 진리를 위해서 싸워야 한다. 루터는 종교개혁 진리를 위해서 교황청과 싸워 진리(예수)로 승리했다. (찬양을 부르면 싸우자 “내 주는 강한성이요” 찬송384장)(2019년 6월 중순경)
(간증: 주님의 성령께서는 2019.8.15.일 광화문광장에서 대한민국 건국 71기념행사에 대한 주님의 은혜의 표시로 그림(환상)한장을 보여 주셨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주님의 믿음의 용사들의 부르짖는 강력한 기도로 하늘에서 아름다운 집 한체가 내려와 안착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즉 대한민국 제2의 건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셨고, 주님의 강한 능력과 믿음의 용사들의 강한 믿음으로 시온산 정상 개선문에 입성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멀지 않아 푸른집(청화대)을 점령 하고 있는 공산주의자 주사파 사단의 세력을 몰아내고 주님의 은혜와 믿음의 용사들(개혁자) 용기로 개선문으로 입성하여 제2의 복음과진리의 나라(대한민국)를 건국하여 땅 끝까지 복음에 증인이 되어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신다는 것을 성전(성령기도원)에서 꿈에 그림 한장으로 보여주셨다.(2019.8.17.새벽 김에스겔 목사)
(간증:한국의 최대의 세습교회 담임목사에 대한 정체성을 보여주셨다. 김정일같이 흰말을 탄 자 루시엘같이 자기 우상화된자로 교만의 마귀로 보여주셨다, 성령께서 회개하지 아니 하면 사랑의 징계로 그 아들을 친다는 것입니다, 그 아비 때문에 징계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욕심)를 불순종한다는 것입니다. 즉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 것을 가르쳐줍니다.(고전1;18)(2019.8,6)
(간증)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주님의 믿음의 용사들의 부르짖는 강력한 기도로 하늘에서 아름다운 집 한체가 내려와 안착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즉 대한민국 제2의 건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셨고, 주님의 강한 능력과 믿음의 용사들의 강한 믿음으로 시온산 정상 개선문에 입성하는 것을 보여 주셨다
(간증)2019.10.3.일 광화문광장(이승만 광장)에서 애국집회에 충격(빰을 맞음)을 받아 사단 마귀를 뒤발(발 꿈치)을 무는(사단이 겁을 주기위해서 전광훈목사에게 난란 선동죄로..고소) 것을 그림 한장으로 보여주셨다.주께서 한국을 통해서 믿음으로 무장시켜 마지막때 성령의 늦은비 역사의 주인공을 만들기 위해 계시록10장과 11장에 나오는 두 증인 사역를 시작하기 위해 금강석과 정금을 만들기 위해서 주시는 강한 훈련인 것 가르쳐주셨다(2019.10.3.)
(간증) 한기총 대표회장 전광훈 목사의 주체로 청와대옆 광야교회에서 여리고성 함락 집회로 많은 목사님 (여호수아)들과 성도들이 함성과 부르짖는 능력의 기도를 하니까. 여리고 성이 무너진것같이 성안에 들어있는 주사파마귀들이 겁을 먹고 떨고 있는 그림을 주님의 성령께서 그림한장을 보여주셨다.즉 흰옷을 입은 마귀 할멈이 겁을 먹고 서서 오줌을 싸는 것을 보여주셨다.성령의 능력 기름부음(감람유 짜는기도) 많은 능력의 주의 종들의 함성과 기도능력으로 큰 산이 무너지는 그림을 한 장 보여주셨다.(슥 4:6-7.14) 2019.11.17. 성령기도원 김에스겔 목사.
(간증) 2019,12.1자 주일날 사랑제일 교회의 전광훈목사 주체로 광화문(이승만광장)집회에 대하여 주님의 성령께서 마가 다락방 성령강림같이 성령의 복음 핵 미사일로 보여 주셨다. 즉 주님께서 전광훈목사와 광야교회로 통해서 제2의 종교개혁 마지막 늦은비 성령의역사를 시작할것이다는 것을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2019.12.2.대구 성령수도원 김에스겔 목사.)
(간증): 몇년(2006년)전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성전에서 주님께 원망으로 애절하게 기도하였다. 꿈에 주님께서 찾아왔어“고난이 유익이다”(약할 때 강하다)말씀을 들려주시며 복음 성가중“주님 예수 나의동산”복음성가와 찬송가202장을 들려주셨고, 환난으로 통해 주님을 만나게 됨을 감사해라고 하셨다. 주님께서 꿈에 에스겔 책을 보여주셨는데 나의 영이 에스겔서를 알게 하셨고. 에스겔 선지자 사명 파숫군 사명(영의 파숫꾼으로 복음을 지켜라고 말씀 해 주셨다,롬16:17-26.빌3:17-20.계시록3:20.)을 주셨다. 그리고 15년 사역에 대하여 칭찬으로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 즉 11톤 화물차량에 포도송이 열매가 반차가(마지막에 완차) 실어져 쌓혀 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좁은 문 좁은 길로 끝까지 주신 사명 (에스겔 사명. 빚진자의사명)을 잘 감당하라고 힘을 주셨다. (눅22;42-43.고전 9:18-27.요한1서 2:15-17) 성령교회 김 종표 목사.아멘)
(간증:2018.7.중순경 주님께서 세상의 영웅과 호걸들과 바벨탑신앙(대형교회의 인본주의 신앙)의사람들을비유적으로 "흰 쟁반위에 담긴 똥 (배설물)등거리로 보여주셨다'.(요일2:15-17.계3:20-22)즉 천성가는 천로역전의 주인공과같이 좁은문, 좁은길 들어 가는것이 천국 가는 길 임을 가르쳐주셨다. 주께서 고린도후서 4장10-11절 말씀이 진리(교리)라고 문자로 꿈에 보여주셨다. (고후4:1-18)성령교회 김목사.2018.11.8.)
(간증: 20년전 사명을 받을 때 주께서 그림 한장으로 환상을 보여주셨다. 즉 넓은 평야같은 곳에 넓은들에 아침에 햇살에 무력 무력자라 나는 벼들을 보여주시면서 저들에게 열매를 맺게 사역해라는 사명을 주셨다. 그 20년 올해 가을에 그 벼들이 노란색을 황금색으로 물들어있는 것을 보여주셨다. 즉 열매 맺게 하는 것을 주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 장소 그 자리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을 가르쳐주셨다.2018.12.2. 성령교회 기도원 김목사.)
(간증) 25년전에 처음 목사 사명을 받는후에 주님께서 사도 바울과같이 고후12장1절에 나오는 삼층천을 한번보여주셨다. 철야 기도하는데 나의 영이 육에서 빠져 하늘나라 보좌를 잠깐 보여주셨다. 즉 생명수강옆에 열매맺은 과일과 하나님은 보이지않고 하나님의보좌 뒤에 무지개를 보여주셨고 그리고 에스겔서 책을 보여주시면 에스겔 사명을 주셨다.목사인수 받은날 소직이 무릎끊고 있는데 주께서 "약콘같은 고구마"같은것을 주는데 소직이 "이것은여러수십억짜리"라면서받는것을그림한장으로보여주셨다. (계4;2-3.겔1:27-28)김에스겔목사.(2019.11.23.)
(간증) 2019,12.1자 주일날 사랑제일 교회 전광훈목사 주체로 광화문(이승만광장)집회에 대하여 주님의 성령께서 마가 다락방 성령강림같이 복음의 핵 미사일로 보여 주셨다. 즉 주님께서 전광훈목사와 광야교회로 통해서 제2의 종교개혁 마지막 늦은비 성령의역사를 시작할것이다는 것을 그림 한장을 보여주셨다.(2019.12.2.대구 성령수도원 김에스겔 목사.)
(13) 영원한 영광을 이루는 우리의 경한 환난
(고린도후서4:12-18)
바울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 늘 죽음의 위협 속에서 환난을 겪는 것이 결국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바울 안에서 나타남으로 복음 사역에 커다란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이 사망의 골짜기를 지나는 것 같은 환난을 받는 일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이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12에서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1. 믿는 고로 말하노라
바울이 복음을 담대하게 전하게 된 이유는 여러 가지지만 그 가운데서도 부활에 관한 바울의 믿음은 진지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이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는 말의 인용은 시116:10절에 나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려운 역경이나 절망적인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은 견고했습니다. 특히 바울의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의 영광에 동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4절에서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죽음이 두렵지 않은 이유는 죽은 후에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부활인데 이 부활에 대한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믿음이며 부활을 제해 버리면 그런 복음은 죽은 복음으로 죄 값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에게 아무런 유익이 없는 세속적인 종교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예수와 함께 우리도 살리십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은 서로 밀접한 연결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일에 대하여 바울은 고전15장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시지 아니하셨으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목적은 그를 믿는 자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시려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16절에서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사신 것이 없었을 터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 혼자 만의 부활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한 것입니다.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부활의 의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활은 절대적인 요소 26 \ 4:12-18
입니다. 부활이 없는 예수를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부활이 없는 복음을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것들이 오직 고린도 교인들을 위해서 한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바울의 이런 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애써 전하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는데 있다고 했습니다.
2. 낙심하지 아니하는 바울
바울이 어려움 속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낙심하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겉 사람은 후패 하지만 반면에 속 사람은 나로 새로워지기 때문에 우리가 육체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우리의 육체는 쇠퇴하고 늙고 낡아지지만 우리는 그런 육체에 연연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살아 계신 예수의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속이란 속 사람으로 육체의 사람과는 대조적인 존재로 거듭난 새 사람을 의미합니다. 이 사람은 늙는 법도 없고 쇠하는 법도 없으며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오리려 날로 새로워진다고 했습니다. 새로워지는 이유는 육신의 연령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으며 자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점점 그리스도의 분량에 이르는 자리에까지 오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겉 사람으로 인하여 오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속 사람이 성장할수록 소망이 더욱 분명하여 소망의 실현이 더욱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17절에 이어지는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반드시 마음에 깊이 새겨 두어야 할 말씀입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생존시에 받는 환난은 잠시 받는 환난입니다. 그리 오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그 환난은 중한 것이 아니라 경한 것입니다. 왜 경하다고 한 것입니까?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에 그로 인한 보상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결론 :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인데 보이는 이 세상은 잠깐 동안이요 보이지 않는 우리의 소망은 영원한 것입니다. 이 영원을 위해 살아가는 사람이 그리스도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