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지금 그와 같은 일은 없는지도 살펴서 지금 이 시대에 무엇이 정말 중요한가를 가려내야 합니다. 이걸 하기 위해 역사 공부를 하는 겁니다.”
설명을 마치고 김유신 장군묘로 함께 걸어갔습니다.
묘 옆으로 청년들이 모두 자리를 잡자 스님이 김유신 장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삼국통일의 영웅, 김유신 장군
“이곳은 김유신 장군묘입니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그의 아들인 문무대왕, 그리고 김유신 장군 이렇게 세 사람을 신라 삼국통일의 영웅이라고 합니다. 통일전에도 이 세 사람을 모시고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왕이 아닌데도 후대에 왕으로 추대했습니다. 김유신 장군의 왕호는 흥무왕입니다. 사실 선덕여왕 때 삼국통일의 기초를 다 다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덕여왕 당시 인재를 양성하고, 외교관계도 다 형성했습니다. 선덕여왕을 보필했던 사람들이 2~30년 활동을 한 다음 나이가 5~60대가 되었을 때 삼국통일이 이뤄졌어요. 그래서 돌이켜보면 삼국통일을 발원한 사람은 선덕여왕이고, 그것을 완성시킨 사람들이 태종 무열왕과 김유신 장군 그리고 문무대왕입니다. 당시 군사적으로는 김유신 장군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고, 외교적으로는 당나라와의 외교가 중요했는데 정치외교 부분은 김춘추가 주도권을 쥐었습니다.
사실 선덕여왕 때 당나라에 가서 당태종을 만났고, 만약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면 대동강 이남은 신라가 갖는 것으로 당태종과 구두 약속을 했지만, 오히려 당나라가 그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8년 동안 나당전쟁이 일어난 계기가 됐다고 볼 수 있습니다.
김유신 장군은 가야 출신이기 때문에 신분적으로 정치적인 힘은 부족했지만 정치적 힘을 가지고 있던 태종 무열왕과 결혼 동맹을 맺고, 정치와 군사가 결합하면서 나라가 안정기에 접어들었습니다. 요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런 정치와 군사의 결합을 부정적으로 평가하겠지만 당시 나라의 안정에는 도움이 됐습니다. 군사력이 부족하면 권력에 대한 도전이 생기는데, 그런 권력의 흔들림을 군사적으로 안정시키고 신라가 통일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런 군사적 배경이 된 사람이 김유신 장군입니다.
이렇게 신라는 내정을 안정시키고 외교에도 눈을 떴습니다. 반면 고구려와 백제는 국력은 신라보다 센 편이었는데 국제 정세에 어두웠어요. 중국이 남북조 시대를 지나 첫 통일을 맞이하면서 어마어마한 제국으로 거듭났는데, 고구려는 중국이 분열됐을 때 동북아의 왕자 역할을 한 기억만 가지고 중국을 깔보고 협력을 안 하는 쪽으로 나아갔습니다. 신라는 반대로 외교 정책을 잘 펼쳤죠. 그리고 그 후로 이어지는 동북아의 패권 경쟁에서 당나라가 패권을 잡자, 당나라와 외교를 다져놓은 신라도 덩달아서 전성기를 맞이하고 통일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물론 중간 과정은 그리 간단하지만은 않은데, 자세한 이야기는 태종 무열왕릉에 가서 또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설명을 듣고 김유신 장군묘를 내려와 계단에 서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넓은 계단이 청년들로 꽉 찼습니다.
다음 장소는 무열왕릉입니다.
커다란 왕릉 앞에 청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자 스님은 무열왕 김춘추와 신라가 삼국통일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변방의 나라, 신라는 어떻게 통일을 할 수 있었을까요?
“선덕여왕 때는 신라의 40여 개 성이 백제한테 점령당할 만큼 신라가 위기에 처했습니다. 신라를 기준으로 보면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고, 서쪽에는 백제가 있고, 남동쪽에는 왜(일본)가 있으니까 신라는 고립된 위치였습니다. 게다가 고구려는 몽골과도 연결이 되어 있었어요.
당시 선덕여왕의 신라가 위기를 헤쳐가는 걸 보면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어요. 당시 김춘추를 당나라에 파견해서 당나라와 외교 관계를 형성하고, 당나라도 당시 고구려 침공에 실패했기 때문에 신라의 도움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 나당 연합이었어요. 백제가 의자왕 때 국력이 기울이지고, 고구려도 연개소문 때 내분이 일어나면서, 어지러운 틈을 타서 나당연합군이 먼저 백제를 침공하고 660년에 백제가 멸망하게 됩니다.
[출처] “사람들이 저를 만만하게 봐서 고민이에요.”|작성자 레이지 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