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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하(부제: 솔로몬의 지혜)
고전 4장 8절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부요하며 우리 없이 왕 노릇 하였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하노라
역사서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살았던 이스라엘뿐 아닌, 나의 신앙적 삶의 기록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엮은 것이다. 역대지략에 그대로 기록된 내 신앙의 그래프요, 결과표이다. 내 신앙의 성장기와 과도기, 그리고 부흥기와 쇠퇴기를 나열한다.
신앙의 그래프를 그려가는 과정 속에 잘하였던 기록만 남기고픈 우리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불의하고 악한 날들의 기록이 더욱 많은 것이 두렵고 마음 아프게 한다.
역사서는 말 그대로 종노릇하였던 내가 왕 노릇하였고, 또한, 그릇된 왕 노릇의 결과로 인해 멸망에 이르는 여정의 모든 것을 낱낱이 기록한다.
단지, 보통의 일반적 역사서가 가진 특징처럼 성경 역시, 그 내용이 너무나 방대하고 또한, 계속해서 반복되는 열왕들의 치세에 관한 부정적 내용들 때문에 사실 역사서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기 어려웠다.
흥미로운 읽을거리가 아니 되었다.
따라서 성경해석이나 설교, 혹은 강해에 있어 우선순위를 확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조금 까다롭게 여겨졌던 역사서를 헤집고 들여다본다는 것은, 내 신앙적 삶의 역사를 정리하고 바로잡으려 함에 있어 좋은 본보기요, 훌륭한 동기부여를 하게 되리라 여겨본다.
계속해서 논의해왔듯,
여호수아에 의한 가나안의 싸움은, 실상 율법으로부터 벗어나 가나안(하나님 나라, 혹은, 그리스도 안)에 정착, 안식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이해하여야 했다.
즉, 가나안에 들어가려는 궁극적 목적은 정착, 그리스도의 안식에 이르려함이었다.
여리고성의 싸움을 필두로 가나안에서의 싸움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히브리서가 정의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4절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
히브리서 4장:8절-9절
만일 여호수아가 저희에게 안식을 주었더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여호수아 6장 3절-4절
너희 모든 군사는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행할 것이요 제 칠 일에는 성을 일곱 번 돌며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여호수아에 의해 행해졌던 가나안 정복의 모든 역사를 히브리서는 명쾌하게 대답한다. 즉, 여섯째 날 동안에 해야 했던 일들은 무엇인가?
싸움의 방식과 방법이 새롭게 제시된다.
여섯 날 째 동안에 힘써 할 일,
그것은 일곱째 날에 주어지게 될, 그 안식의 때를 기다림이었다.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매일 여섯 날 동안에는 한 번씩, 그리고 일곱째 날에는 일곱 번을 돌았다. 일곱째 날, 일곱 번을 돈 후, 그리고 무너진 여리고성(일곱 날x일곱 번=오십일 째 되는 날 : 희년, 오순절), 그 땅을 쉬게 함이다.
여리고성을 무너뜨리지 않고서는 이스라엘은 가나안에서의 쉼, 안식(희년)을 누릴 수 없다. 여리고성의 승리로 가나안에서의 싸움은 파죽지세로 진행된다.
온 지경을 두렵게 하여 평안케 한다.
재차 언급한대로,
여호수아는 율법의 정죄와 심판으로부터의 건져냄이요, 구원함이다. 그로 인해 맛보는 일시적 평안, 그러나 이러한 때의 안식은 영원한 안식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안식, 그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기 위한 첫 번째 예표가 여리고성의 싸움이요, 그 모든 여정을 담은 것이 여호수아서였다.
광야생활은,
이전 율법아래에서의 살았던 때를 말함이다.
몸은 여호와의 법궤를 쫒지만 언제나, 생각과 의식은 애굽(세상)을 향하고 살았던 때를 청산하기 위한 싸움터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자가 살아남는다.
모든 것이 위로부터, 여호와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에 이르는 믿음에 도달하지 못한 자들의 장사지요, 무덤 터였다.
율법으로부터의 요구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해답이었던 여호수아를 따라 가나안에 정착(안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결국,
여호수아(예수)의 삶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안에 정착(안식)하게 하려는 모든 성경의 축소판이다.
그렇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정착(안식)한 자들이 무엇을 하여야 할까?
허랑방탕하여 여호와의 은혜의 영광을 허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를 보여주고자 함이 열왕기상, 하의 기록목적이다.
즉, 왕 노릇하게 함이다.
하지만, 사무엘서를 통해 여호와 외에 왕을 구하거나 왕 노릇하기를 먼저 생각했다면, 그것은 여호와를 버리는 행위로 질책하며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왕 노릇을 바라거나 혹은, 우리 쪽에서 요구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왕 노릇의 위험성은,“저들이 나(여호와)를 버려 왕 되지 못하게” 하였으니 “나도 저들이 왕 노릇하기에 합당치 않으면 버리겠다”는, 쌍방주의가 적용된다는 사실이다. 즉, 왕 노릇의 실패에 우리가 민감해져야 할 이유인 것이다.
어찌 보면,
현재의 내가 단순히 왕 노릇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여호와를 버린 것이 된다는 말과 같다. 왕의 제도 자체가 여호와를 대적하는 것이 되었다.
왕 노릇할 자격과 자질이 없는 자가 왕 노릇하여 이스라엘 온 나라와 백성에게 끼친 해악의 처참한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 또한, 왕 노릇의 가장 큰 위험성은 여호와를 나의 수종자의 위치에 놓이게 하는 맥락에서 이해되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섬기는 자가 아닌 부리는 자로 여겨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게 되고 만다. 이는 왕의 시대가 갖는 이중성이었다.
이스라엘은 왕의 시대를 맞이하며 급격한 변화를 갖는다.
왕 노릇하는 자의 악함을 평가하는 첫 번째 기준은 다름 아닌,
왕 노릇하는 자가 여호와 하나님의 대변자인 선지자의 질책과 경고를 간섭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다.
왜냐하면, 모두가 자기의 가진 지혜(말씀)이 가장 온전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지혜의 말씀만이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착각에 빠져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왕의 시대에는 특이하게도 가장 혹독한 선지자들의 핍박과 환난의 때였다.
자기 방식대로의 치세에 빠져 사는 왕 노릇의 어긋남을 항상 가시 돋힌 질책과 훈계를 내뱉는 선지자를 달가워 할리 없다.
또한, 왕 노릇의 기본적 유지를 백성들에게 둔 나머지 여호와 하나님보다 그들의 모든 요구를 수용하는 입장에 선 왕은 더욱 더 선지자를 핍박하였다.
이러한 왕의 시대는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가장 멀리하게 되는, 또 다른 암흑기를 대변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해지고 만다.
왕 노릇의 실패와 성공은,
가장 근본이 되는, 그가 얼마나 선지자의 훈계를 받아들이느냐에 달렸던 것이다.
또한, 왕의 주변에 맴도는 조력자들,
흔히,
역대하 10장,
솔로몬의 영광 뒤에 감취어진 과중한 세금과 노역에 시달린 백성을 대표한 여로보암의 요구에 유다 왕, 르호보암이 대답하기 위해 조언을 구한 대상과 예는 깊이 새겨보아야 할 장면이다. 이는 아비인 솔로몬의 재판과 그 아들의 재판으로 대비된다.
왕이 선택해야 할 판결, 심판의 기준이 여호와와 그의 선지자의 말씀이 아닌 늙은이의 노련한 경험과 소년들의 섣부른 생각에서 나온 혈기였다.
여호와의 지혜(말씀)가 사라진 자리에 경험과 혈기만 남았다.
왕 노릇은,
그렇게 하나님의 지혜로 시작하였다가 부수적으로 얻게 된 부와 영광으로 사라져버리고 오랜 세월 쌓아온 노련미를 겸비한 자가 혈기 넘치는 자들을 부리는 것으로 전락되었다.
왕 노릇은 판결(심판)의 연속으로 이해된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의 지혜로 했던 첫 판결,
그리고, 지혜를 상실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했던 첫 판결,
전자는 둘로 나누려했던 판결의 결과가 오히려 하나가되었고, 후자는 하나가 되게 하려했던 의도된 판결이 둘로 나누게 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것이 여호와의 지혜와 사람의 경험과 조언의 극명한 차이다.
결국,
왕 노릇의 시작은,
사사기 - 표적과 기사를 구하여 가진 자,
열왕기 - 하나님의 지혜와 사람의 경험을 가진 자,
예언서 -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예언)를 가진 자,
들로 구분 되며 하나님의 역사의 흐름을 탄다.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게 할 만큼의 대단한 표적과 기사를 보이는 자들이 왕 노릇하는 때를 기뻐 즐거워하였던 때를 지나, 하나님의 지혜를 가진 자들을 찾아 온 천지를 헤매어 만나 그를 왕으로 삼아 그에게서 베풀어지는 수많은 잠언과 교훈들에 감탄해한다. 스스로 예물과 조공을 바쳐 종 되기를 자처하였다.
지혜의 말씀이라 하여 쏟아지는 교훈들의 결과는 모든 이방인들을 불러들이며 온갖 예물과 더불어 온 나라를 부와 영광으로 풍족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듯하나, 실상 그 모든 영광은 지혜를 내는 자의 몫으로 남는다.
모두가 그의 지혜 아래에서 또 다른 종노릇을 하였다.
솔로몬의 영광이 들의 백합화보다 못하다하였던가!
왕 노릇은 지혜를 내는 자 한 사람의 몫이었고 모두는 그 지혜를 가진 자에게 종이 되었다. 이 비극적 결과를 경고하신 여호와의 말씀을 무시하였다.
예언의 시대가 오기 전,
그 찬란한 지혜의 영광은 사라진다. 그 세계의 영광이 무너진다. 영원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가 노련한 경험과 결탁하고 혈기를 앞세워 그 세계를 유지하고 버티려한다.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교훈으로 둔갑한다. 교회는 착한 사람들이 가득한 곳이 되고 만다.
이제, 예언을 내는 자가 왕 노릇하는 시대가 열린다.
지혜로는 풀어낼 수 없는, 오랜 세월 축적된 경험과 혈기로는 풀어낼 수 없는, 읽어낼 수 없는 성경해석의 시대가 다가온다.
예언의 시대를 맞이하기 전,
욥기서는 얄팍한 지혜를 가진 자들이 쌓아올린 상아탑을 무너뜨린다.
각종 자기 지혜를 짜내어 자신의 신앙을 변호하며 과시하며 합리화한다.
얄팍한 자기 지혜의 난장판이다. 욥의 고난은 그 빈약한 자기 지혜를 걷어냄이다.
정수리부터 발바닥까지 자기 의를 발가벗긴다.
예언의 때란,
그 아프고 괴로운 시절을 이겨내고 순응하는 자에게 허락된 세계다.
자기 지혜로 보았던 하나님의 세계를 걷어내고 다른 세계를 맞이한다. 그 기쁨에 흥겨워하는 것이 시가서였다.
그리스도의 세계를 보았던 것이다. 이를 두고 복 있는 자라 한다.
자기 지혜의 한계를 넘어 그리스도의 세계에 첫 발을 디딘 복 있는 사람들이다.
왕 노릇의 시작은 누구나 그렇듯,
부와 장수와 그 생명이 안전하게 보존되는 것보다 지혜를 구하여 얻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는 왕 노릇의 시대를 사는 모든 자의 기본적 자세이기 때문이다.
왕의 시대에만 국한된 보편적 특징이다.
모두가 지혜를 구한다. 그 지혜가 가져 다 줄 부와 영광은 덤이었다. 하지만 결국 그 지혜 때문에 자신이 교만하여지고 범죄 하게 될 운명을 알지 못한다.
또한, 그 지혜를 상실한 결과가 곧, 르호보암의 판결로 결말지어진다.
지혜의 폐단, 결국은 분열이다.
한 사람의 왕 노릇을 위해 모두에게 종노릇을 강요한 결과다.
지혜로 인하여 부수적이어야 할 자기 이름의 높아짐과 부와 영광을 추구하는 순간, 자신과 그 화려했던 자기 세계를 무너뜨릴 멀리 있는 자와 아주 가까이 있는 자의 침략과 배반은 싹을 키운다.
멀리 있는 자와 가까이 있는 자의 약탈과 배반의 준비됨,
그들은 솔로몬이 여호와를 버렸고,
여호와가 솔로몬을 버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는, 솔로몬의 영광의 근간이었던 지혜가 더 이상 제대로 된 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지혜가 사라져 버림을 알아차린 것이다.
분열되는 근본적 이유다. 지혜가 사라져버린 왕 노릇은 그 모든 분란의 씨앗이 된다.
본래의 지혜는 둘로 쪼개는 예리함과 날카로움이 그 능력의 원천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사람의 모든 생각과 일들을 쪼개어 폐부를 찌른다.
쪼개어 찌르고 아프게 하여 옳고 그름을 나눈다. 모든 것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그 위치를 되찾아준다.
있어야 할 자리에 머물게 하는 것이 본래의 기능이다. 내가 있어야 할 본래의 자리를 되찾게 한다.
그러나, 그 지혜가 세상으로부터 가져다주는 부와 영광으로 대치되고, 온 교회는 세상과 짝하여 음란하게 되어 병들게 된다.
어렵게 하나 되게 하신 하나님과 온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비극적 결말로 매듭지어진다.
분명한 것은,
솔로몬의 구한 그 지혜는, 이후 기름부음을 받은 어떤 왕도 구하지 않았다는데 있다. 이는 왕의 시대에 계속되어서는 아니 될 지혜였다.
왕의 직분은 유전될지라도 그 지혜는 유전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는 것은 합당한 신앙적 자세가 아니다.
즉, 왕의 시대에서만 한시적으로 작용하는 지혜의 한계 때문이다.
열왕들의 치세에 가장 의로운 왕 노릇의 표본으로 제시되는 다윗은, 이러한 선지자의 간섭을 모두 수용한데 있었다.
왕 노릇의 실패는, 선지자(여호와의 말씀)를 자신의 치세에 있어 지독한 간섭으로 받아들이는데 있다. 자신을 괴롭게 하는 말에는 귀를 닫고, 백성들에게 만족을 주기 위한 일만 계획하려 한다.
계속해서 살펴보았듯,
왕 노릇은 기름부음에서 시작된다. 그 기름부음을 받은 자의 구할 것, 구하는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들어주신다.
왕 노릇의 지속됨은, 단지, 솔로몬이 구한 일시적 지혜가 아닌, 예언(이사야부터 시작되는 예언의 때)의 시대에까지 이어져야 했다.
즉, 예언하는 자가 왕 노릇하는 자의 시대가 된 것이다. 왕 노릇의 계속됨은 예언하는 자가 되어야 했던 것이다.
왕의 시대는 예언의 시대 속에서 완성되고 꽃피운다. 솔로몬의 지혜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지혜의 시대와 예언의 시대가 충돌한다.
기름부음이 지혜를 내는 자와 예언을 내는 자로 구분 짓는다. 심판하기 위한 지혜가 아닌 사랑하기위한 예언의 때로 접어든다.
지혜가 가져다주는 결과와 예언이 가져다주는 결과는 상이하다.
예언의 시대를 사는 자들의 왕 노릇은 결단코 온 세상과 사람들이 칭송하고 부러워 할 부와 영광 따위엔 도통 관심이 없다. 세상에서의 성공을 꿈꾸지 않는다.
예언으로 가기 전,
시가서, 곧, 예언서 이전의 욥기서부터 이어지는 아가서까지의 예언 같지 않은 애매모호한 일반적 말씀은, 기름부음의 상태가 계속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시각에서 다루어져야 할 문제였다.
즉, 지혜의 말씀과 예언의 말씀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왕 노릇,
지혜를 가진 자와 예언을 내는 자 사이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잣대가 된다.
기름부음의 충만한 상태에서의 내뱉는 지혜의 말씀은, 예언의 기능과 역할을 일시적 포함하고 있지만,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내뱉는 말씀은, 자칫 시가서(욥부터 아가서)와 같은 말씀들을 예언이 아닌 사람의 교훈의 경계에 놓이게 하고 만다.
모든 것이 세상살이 필요한 적절한 교훈정도로 읽히고 만다.
그러므로,
왕 노릇 하는 자의 실패를 가늠하는 또 다른 기준은,
그가 지혜가 아닌 예언하는 자인가 하는 것이다.
누군가 시가서(욥부터 아가서)를, 예언(이사야부터의 수준과 차원)이 아닌, 도덕과 윤리의 기준으로 읽히고, 읽으려 한다면, 그의 기름부음은 영원한 왕 노릇으로 연결되지 아니한 자가 되고 만다.
솔로몬이 구한, 주어진 지혜는 다름 아닌,
여호와 하나님의 예언을 내고자 함이요, 읽으려함이었음을 우리는 알지 못하였다. 지혜를 가진 자가 내는 관점이 욥기서와 아가서의 말씀들을 세상살이에 필요한 교훈이나 훈계 같은 저급한 세계로 전락시키지 않고 하나님의 예언으로 끌어올려 보게 함을 목적으로 지혜를 구했어야 옳았던 것이다.
솔로몬의 지혜,
그 지혜란,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내는 모든 말이 세상살이에 필요한 교훈이나 훈계의 차원을 뛰어넘어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말하는 참다운 예언의 위치에 도달하기위해 반드시 필요한 열쇠의 기능을 하여야 했다.
이러한 솔로몬의 지혜, 곧, 예언에 도달하기 위한 열쇠가 된 지혜를 솔로몬은 다른 목적에 사용하고 만다.
결국,
지혜란,
시가서(욥기서부터 아가서)를 통해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 노릇하는 자가 내는 말씀이 예언인지 혹은, 일반적 사람의 훈계를 구분 짓는 중요한 시금석이 된다.
예언적 관점에서 시가서를 보아야한다는 말이다.
이로보건데 왕 노릇하려는 자는 솔로몬의 지혜에서 그치지 않고 반드시 예언(이사야부터)에까지 이르러야만 했다.
다만,
왕 노릇하는 자, 곧 지혜를 가진 자가 선지자의 질책(예언)을 필요 없는 간섭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하는 순간, 그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자신은 하나님의 지혜에서 나온 말씀이라 강변할지라도 일반적 사람의 교훈으로 전락, 퇴색되고 만다.
욥의 철저한 고난과 회개는,
그의 개인적 신앙의 고난이 아닌, 이미 지혜의 극치가 가져다 준 사람의 영광과 자기 의로 가득 찬, 왕 노릇하는 자들을 향한 여호와 하나님의 강력한 돌이킴의 요구였다.
욥의 회개와 돌이킴을 통해 다시금 예언의 시대를 맞이하는 것,
자기의 모든 부와 영광, 의를 깡그리 상실한 벌거벗은 자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영원히 왕 노릇 하려는 자는 솔로몬의 지혜, 솔로몬의 지혜가 가져다주는 영광에 그치지 아니하고 예언의 시대에 참예함이 옳은 일이었다.
작금의 왕 노릇은,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자가 아니다.
바로, 예언하는 자가 왕 노릇하는 시대인 것이다.
그러나, 예언의 성격과 내용, 그 해석은 항상 왜곡되고 잘 못 이해되어진다.
예언의 가장 기본적 원칙인,
예언은, 사람의 일(인생사)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음을 각인해야한다.
예언은, 하나님의 사랑인 그리스도를 비밀로 담고 있다.
요셉은, 예언이 아닌 꿈(환상)의 해석까지도 하나님께 있음을 상기시킨다.
즉, 그리스도의 비밀이 예언의 기본 성격인 것이다.
그 예언을 푸는 열쇠가 지혜였다. 결국, 지혜를 가진 자는 예언을 풀기위해 힘써야했던 것이다.
예언에 관한 기본적 개념은 예언서 읽기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솔로몬이 구한, 가진 지혜가 예언을 풀기위한 열쇠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전제가 원칙이었지만, 대개는 이러한 관점에서 접근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솔로몬의 지혜를 예언과 혼동하거나 동일시한 자들에게서 행해지는 일반적 행태가 열왕기에서 다양하게 나타난다.
가장 크고 두드러진 것이 바로 성전건축이다.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자들이 열을 올리는 성전건축,
안정된 왕 노릇을 바라는 꿈 위에 교묘히 포장되어 진행된다.
그것은 예언의 시대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성전, 곧, 에스겔서의 성전 건축과는 사뭇 상반된 입장을 보인다.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자들이 건축하려는 성전과 예언의 시대 속에서 사는 자들의 성전건축은 판이하게 다르다는 사실이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외형적 성전의 건축과 영의 내면적 성전 건축,
이제, 살펴야 할 열 왕들의 시대는,
솔로몬의 지혜를 가진 자들에 의해 시작되는 왕 노릇과 그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신앙적 행위를 논하게 된다.
애굽과 광야, 혹은, 가나안에서 뿐 아니라 이스라엘은 많은 왕들을 보았고 그들과 싸웠다.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사사기에 들어서야 왕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 이전엔 어느 누구도 왕의 제도를 공론화하거나 입 밖에 꺼낼 수 없는 금기적 단어였다. 이방인의 제도와는 한참이나 뒤떨어진 이스라엘의 체계,
왕 노릇은 그만큼 커다란 부담감과 압박을 느껴야 옳았다. 왕 노릇을 쉽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실상, 사울과 다윗은, 왕 노릇을 위한 기름부음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생애가 그토록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되지 않았을 것이라는데 있다.
결국,
그들이 수락한 왕 노릇은, 거칠게 혹은, 고달프게 통과하여야 할 위험한 다리가 그 앞에 놓아져 있음을 인지했어야 하였다.
단지, 왕 노릇의 달콤한 부와 영광에 눈이 멀게 된 자들의 결말이 역사서의 주된 깨우침이다.
사무엘에게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왕의 제도하에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내해야 할 삶의 병폐를 열거하는 부분은, 애굽에서의 종살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의 고통과 괴로움이 경고되었다.
하지만,
신앙의 여정에 있어 인생들은 필연적인 흐름에 따라 왕의 제도아래 놓이게 되고 만다. 성경역사의 흐름인 것이다.
분명한 것은 자의든 혹은, 타의든 다가오게 되는 왕의 제도 아래에서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하나님 섬김의 방식이 전개된다는데 있다.
생각지 못한 많은 것을 얻고, 누리게 된다.
그러나, 왕 노릇은 열왕기상, 하에서 보여주는 극심한 신앙적 악행과 불의, 타락을 반복해서 불러와 멸망으로 치닫는 종극을 맞이하게 되고 만다.
사실, 왕 노릇하기를 거부하였음이 옳은 일이었으나,
그 시대적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사울, 다윗 그들 모두가 두려워했던 왕 노릇은 표면적으로 많은 일을 이루어낸다.
땅에서의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의 통치의 방법과 기준을 제시한다.
이는 온 이방나라가 따라야 할 분명하고도 명확한 원칙이 된다.
그에 따른 결과로 주어지는 부와 영광은 더욱 왕 노릇을 분발케 하는 동기부여를 제공한다.
왕으로서 해야 할 일은 이전, 모세나 여호수아, 사사들이 하려고 했던 일들을 뛰어넘는다. 신앙의 절정에 다다른 전성기를 이끈다. 우리가 역사서를 제대로 보아야 할 이유인 셈이다.
왕의 제도아래에서 보여주어야만 할 신앙적 진보가 있었던 것이다.
이미,
예언의 시대, 곧, 선지자의 시대가 도래 하기 전,
그들이 열왕들을 향해 줄기차게 경고했던 것은,
지혜를 가진 자의 왕 노릇의 시대가 저물어 하나님의 예언을 가진 왕, 그리스도의 왕 노릇이 시작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왕 노릇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해야만 할, 그 일들 때문에 기름부음을 허락한 것이었다.
왕 노릇의 때,
이는 바로 기름부음의 때와 같다.
기름부음을 받지 못한 자는 왕 노릇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지혜를 구할 수도 여호와를 위한 성전을 건축할 수도 없으며 잠언과 노래, 수금과 악기를 다룰 수 없게 된다.
성령의 기름부음의 시대가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지혜는 예언으로 이어져야했다.
대한민국의 르네상스를 열었던 조선시대, 어느 역사보다 왕권이 확립되던 시기였다. 우리 신앙의 전성기와 부흥기를 이끌었던 그 때, 왕 노릇의 시대였다.
바로 역사서인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왕 노릇한 때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열왕기서는 그 왕 노릇이 호락호락하지 않음을 예고한다. 실패할 확률이 더 많음을 보여준다. 왕 노릇에 도취되어 자기 주제를 넘어선 자의 최후를 교훈한다.
성령의 기름부음을 구하는 자가 계산하지 못한 감당해야 할 의무와 몫이 기다리고 있다. 사울은 그 선을 지키지 못했고, 다윗은 넘었다가 호되게 당한 꼴이다.
왕 노릇의 시대,
새로운 개혁과 변혁의 시대 앞엔 언제나 수태고지가 제시된다.
기름부음에 있어 여호와는 사무엘, 사울, 다윗을 예로 세운다.
낳음을 입기 전과 죽기까지, 자라고, 장성할 때의 표본을 제시한다.
그러나,
흔히들, 사울과 다윗의 비교로 인해 사무엘의 역할과 관계성은 소홀히 여기고 만다.
왕 노릇,
곧, 기름부음은 수태고지를 받은 자에게서만 이루어지는 사실을 간과 한다.
여호와의 뜻대로(성령의 원대로) 낳음을 입은 자가 그 대상이어야 했다.
혈과 육이 아닌 성령으로 잉태됨이다. 요한복음은 이를 두고 거듭남이라 하였다.
낳음의 방식이 여호와의 뜻을 따라 되어 진 자에게 기름부음이 주어져야 했다.
그 원칙이 지켜지지 않은 사울과 다윗의 기름부음은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된다.
그러므로,
왕 노릇, 기름부음은 낳음과 자람 장성, 그리고 죽기까지의 전 생애적 드림과 쓰임의 과정을 담아야했다. 이를 나실 인이라 하였다.
물론, 삼손과 사무엘의 수태고지, 나실 인의 성격은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진다.
다만, 사울과 다윗의 예는,
낳음의 과정을 생략한 자들의 생애 속에서의 거듭나고 새롭게 되어 완성되어가는 우여곡절 끝에 그저 육신에 부합하여 세움을 입은 자의 자기 노력의 한계에 부딪힌 자와 그것을 여호와의 사랑으로 극복한 자로 양분된다.
그러므로,
왕 노릇은, 기름부음 속에 암시되어 있는 낳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죽기까지의 일관된 신앙적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 포함되어져야 했다.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자기의 낳음과 더불어 자라고 장성하여 싸우며 죽기까지의 변함없는 여호와 하나님을 향한 그 마음과 삶의 형태가 줄곧 역사가 되어 유산으로 그 후손들에게까지 물려주어야 할 또 다른 역사가 되어야 했다.
이를 두고,
열왕들의 역사 곧, 왕 노릇이라 하였다.
역사서는, 다름 아닌 내가 여호와를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를 기록한 내용이다.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한 날들, 시간들, 이러한 날과 시간들이 쌓여 역사가 된다.
기름부음은 이러한 역사를 계속하게하기 위한, 수월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은총이다.
왕 노릇의 역사는,
얼마나 땅을 넓히고, 백성의 수효를 늘리며, 아름답고 화려한 성전을 건축함에 있지 않다. 왕에게 보여야 할 유일한 본보기는 낳음에서부터 자라고 장성하여 죽기까지 여호와의 보시기에 예언의 실체인 그리스도를 왕 노릇하는 자로 세우려는 피나는 자기와의 싸움이었다. 이를 두고 여호와의 보시기에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다 하였다.
결단코,
이름의 빛남과 부(재물과 영광)와 長壽,
그리고 목숨의 보존을 구해서는 아니 되었다.
이것은 왕이 되려는 자들에게 왕 노릇을 계속하려는 자들을 향한 여호와의 맹약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여,
그 아버지의 눈으로 열왕기 상,하를 들여다보게 하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