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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이름은 공구(孔丘-기원전 551년∼기원전 479년), 맹자는 맹가(孟軻-기원전 372년∼기원전 289년)이고, 노자는 이름이 담((聃)이고, 본명은 이이(李耳)지만, 아무도 그들의 이름을 그대로 부르지 않는다. 그저 성에 子를 붙여 부른다. 이를 피휘(避諱)라고 하고, 대신에 號나 字로 부르거나 존칭으로 부른다. 그런데 『회남자』는 생소하다. 사람의 이름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회남자』는 중국 서한 시대 회남왕 유안(劉安)이 불러 모은 빈객들과 같이 편찬한 일종의 〈잡학사전〉이름이다. 원래는 내서·외서·중편 등 세 편으로 나누어져 편찬되었다고 하나, 전해지는 것은 「내서」뿐이다.
『회남자』는 대체로 도가 계열의 사상서로 분류되지만, 실제는 유가, 법가와 명가(名家-명목과 실제가 일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학파), 음양가(陰陽家-천문, 역수, 풍수지리 등을 주장한 학파)등 당대 중국의 다양한 학문 유파의 주장들을 담고 있다. 천문학, 한의학, 과학, 의학에 해당하는 저술도 있어서 일종의 잡학서로 볼 수 있다. 유가에서는 내용을 신뢰할 수 없다며 잡서로 여기지만, 『한서』에는 「여씨춘추」와 함께 잡가로 분류하였다.
우리가 흔히 아는 고사성어들이 여기서 유래했는데, 일상어로도 자주 쓰이는 선견지명(先見之明), 새옹지마(塞翁之馬)…,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등의 출전이 바로 이 『회남자』다. 편찬자인 회남왕 유안은 한무제 때 반역 혐의로 처형되지만, 그가 찬술한 내서가 『회남자』가 되어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기원전 139년 유안은 자신의 조카뻘인 한무제(漢武帝)에게 내서(內書) 21편을 진상했는데, 사마천은 이 사실을 “황제는 이 책을 깊숙한 곳에 잘 간수하였다.”라고 짤막하게 기록했지만, 매우 중하게 여겼다는 의미일 것이다. 유안이 황제에게 바친 그것이 바로 『회남자』고, 『회남자』에는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따라가는 것이 이 책 읽기일 것이다.
『회남자』를 따라가기 위해서는 시대적 배경과 역사, 가족사 등을 많은 것을 살펴보아야 하는데, 매우 복잡하므로 줄여서 들여다본다. 기원전 221년 시황이 진나라를 통일한 후 불과 10년 만에 3세 황제 자영(子嬰)이 항우(項羽)에게 죽임을 당하면서 진나라는 사라졌다. 항우와 대립한 유방(劉邦)이 승리해 한나라가 시작된 것이다. 유방은 진 제국의 실패를 교훈 삼아 군현제를 폐지하고, 주나라 때의 제후국을 부활했다. 제후국 부활은 불가피한 조치로서 집권하는 데 결정적 도움을 준 지방군벌과 공신들을 무시할 수는 없었고 한자리 주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그래서 봉건제와 군현제를 절충한 군국제(郡國制)를 시행하게 되었다.
진나라 때 113개 군현이 난립하던 것에서 초왕 한신, 한왕 신, 회남왕 영포, 양왕 팽월, 장사왕 오예, 연왕 장도, 조왕 장오 등 유방과는 연고가 없는 7개의 이성(異姓)들을 제후국 왕으로 삼았는데, 이들은 항우와 대결한 전쟁 영웅이자 개국 공신들이었다. 그러나 고조 6년부터 12년 사이에 이들 제후들을 모두 제거하고, 그 자리에 왕실과 같은 유씨로 대치했다. 이것은 지방분권적 권력 구조를 버리고 황제 중심의 중앙집권화를 도모한 결과였다. 한나라 건국의 일등 공신 한신(韓信)도 이때 제거되었다.
어느 날 고조가 한신에게 물었다.
“짐은 군사를 얼마나 부릴 수 있는가?”
한신이 답했다.
“폐하는 10만 이상을 부릴 수 없습니다.”
“그대는 어떤가?”
“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고조가 웃으면서 말했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그대가 어찌하여 내게 잡혔는가?”
“폐하는 군대를 잘 부리지는 못하나, 장수들을 잘 부립니다. 이것이 제가 잡힌 이유입니다.”-『사기』「회음후열전」
한나라 건국 8년 뒤 고조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 한신은 황후 여후(呂后)와 재상 소하의 모의로 피살되었다. 반란군을 진압하고 돌아오던 중 한신이 피살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고조는 “한편으로는 기뻐하였고, 한편으로는 슬퍼하였다.”고 한다.(그 마음을 알듯 모를듯)
중앙집권제로 권력을 독점하였지만, 한나라 초기 제국의 영토는 54개 군으로 나뉘어졌고, 그중 39개 군은 지방제후국이 차지하고, 중앙정부는 겨우 15개 군을 관할했다. 이때는 동성 제후들이었지만, 이들도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한나라는 고조에 어어 혜제-문제-경제-무제로 이어지는데, 문제 때 재상 가의(賈誼)가 ‘치안책’을 올려 말했다.
“천하의 형세는 바야흐로 손발의 종기가 크게 부풀어 올라서, 발목이 마치 허리처럼 커지고 손가락이 마치 허벅지처럼 굵어져 있습니다. 그리하여 몸을 제대로 굽히거나 펼 수 없을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시기를 놓치고 치료하지 않으면 반드시 고질병이 되어, 나중에 비록 편작과 같은 명의가 온다할지라도 고칠 수 없을 것입니다.”-『한서』「가의전」
이것은 제후국 세력이 중앙정부를 능가할 지경에 이르렀음을 말해준다. 실제로 고조 말기에 9개였던 동성 제후국이 17개로 늘어나기도 했는데, 그중 유방의 형 유중의 아들인 유비(劉濞)는 고조 11년(기원전 196) 오왕으로 봉해졌으며, 소금과 철 생산을 바탕으로 경제력이 크고 부강해지자 경제로부터 오국의 영지 일부를 삭탈한다는 조서를 받았다. 이에 반란을 일으켰고, 경제 3년에는 오를 중심으로 교서·조·초·제남·치천·교동 등 7개 제후국이 연합하여 이른바 ‘오초칠국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반란 10개월 만에 이들은 모두 제압되었다.
이런 와중에 일부 제후들은 자신들의 권익을 지키고자 몸부림쳤지만, 결국에는 죽임을 당하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을 수밖에 없었다. 『회남자』를 저술한 회남왕 유안의 아버지 유장 역시 이러한 중앙 집권주의와 지방 분권주의 사이에서 모순과 대립의 희생자들이었는데 『회남자』는 제국 초기에 나타난 이런 정치적 갈등을 근본적으로 해소시킬 목적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회남왕 유안은 무에 뛰어난 아버지 유장과 달리 문에 밝았다. 『한서』「회남형산제북왕전」에 이렇게 적혀 있다.
“회남왕 유안은 그 사람됨이 책읽기를 좋아하고 음악을 즐기되, 말타고 사냥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았다. 또한 그는 은밀히 덕을 행하여 백성들의 마음에 합치되고자 하였으니 그의 명성과 칭찬하는 소리가 널리 퍼졌다.”
그러나 반역 음모를 꾀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고, 조정의 압박이 점점 강해지자 내부의 동요가 심해졌다. 유안이 신뢰한 신하 오피가 조정관리에게 모의 사실을 털어놓고, 등을 돌리자 일이 틀어졌음을 깨닫고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황후와 태자도 모두 멸족의 화를 당했다. 회남국은 구강군(九江郡)으로 강등되어 개편되고, 4대에 걸친 회남국 비극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한나라 제2대 혜제는 여후의 소생이기는 하나 고조가 그를 후계감으로 못마땅해했다. 고조가 사랑한 여인은 척부인(戚夫人)으로 그녀는 자신의 아들 여의(如意)를 태자가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 때문에 고조는 한때 태자를 폐하고 여의를 태자로 삼으려고 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여후가 원로대신들을 구워삶아 혜제가 황위를 잇게 했다. 혜제와 여후가 죽자, 변방의 대왕(代王)이던 유항(劉恒)이 문제가 등극했다. 그는 이전부터 지속된 무위정치를 이어받아 국정에는 간섭하지 않고 공신들과 평화롭게 관계를 유지할 뿐이었다.
이 무렵에 우주만물의 생성과 발전, 자연 세계에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들을 기(氣)로 보는 동양의 전통적 사유가 발전하기 시작했는데, 이를 ‘기론적 세계관’이라고 한다. 기라는 말은 애초에는 구름의 기운(雲氣), 혹은 호흡하는 숨기운(息氣) 정도로 이해되었지만, 기의 의미가 확대되고 점차 우주 만물을 구성한 기본요소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전 전국시대 후기에 기가 만물의 본원적 요소로 확고히 자리 잡기는 했지만, 모임과 흩어짐으로 이어지는 기의 운행은 사물의 생멸 현상을 설명하는 사유가 되어 동북아시아의 보편적인 생각이 되기에 이른다. 생사와 생멸 현상의 본원으로 간주된 기라는 개념은 이후 음양 개념과 결합하여 음기, 양기로 분화되고 이것이 자연계의 변화를 설명하게 되었다.
『회남자』를 편찬한 유안이 태어난 배경에는 조금 색다른 사연이 있다. 고조가 한나라를 세운 지 8년(기원전 199) 한신의 반란을 친히 진압하고 조(趙)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조왕 장오(張敖)에게 자신의 딸인 노원(魯元)공주를 왕후로 주었다. 이에 조왕은 장인이자 주군인 고조를 극진히 대접했고 심지어 자신이 아끼던 여인을 고조에게 숙청들게까지 했다. 수청든 여인이 조미인(趙美人)인데, 그녀는 하룻밤 인연으로 임신을 하게 되었다. 그 뒤 조미인은 조왕의 역모사건에 연루되어 옥에 갇히게 되고 옥중에서 출산을 했다. 그녀는 어떻게든 태어난 아이가 유방의 아들임을 알리려고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자 한을 품고 옥중에서 자살하고 말았다.
이때 태어난 아이가 바로 훗날 『회남자』를 탄생시킨 유안의 아버지 유장(劉長)이다. 나중에 사실을 알게 된 유방은 자신의 불찰을 크게 뉘우치고는 불쌍한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했다. 유장은 어려서 생모를 잃었지만, 황태후 여후를 잘 따랐고 여후 역시 그를 아껴주었다. 고조 사망 후 혜제가 어려 여후가 섭정을 하는 동안에도 다른 유씨 자식들을 박해했으나, 유장은 무사했다. 문제가 즉위할 무렵 성인인 된 유장은 어린 시절 고조에 의해 봉해진 회남왕이 되었다. 그는 틈만 나면 장안으로 올라와 황제인 문제를 알현하고 황제를 ‘형님’이라 부르며 방자했으나, 문제는 유일한 형제 유장을 너그럽게 용서하고 감싸주었다.
문제 6년(기원전 174)유장은 조미인이 억울하게 죽을 때 충분히 도와줄 수 있었음에도 방관한 벽양후(辟陽侯)에 대한 원한으로 철퇴로 쳐서 그를 죽였다. 이 사건에 대해 문제는 억울하게 죽은 어미의 복수를 위해 저지른 일로 여겨 유장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그 후로도 안하무인이 된 유장을 황실이나 조정이 두려워하게 되었고, 반란을 일으켰다는 모함이 빗발치자 문제는 유장을 체포해 압송했다. 사형에 처하라는 상소에도 문제는 그를 촉(蜀)땅에 귀양 보내는 것으로 끝내려 했다. 귀양 가던 중에도 뉘우치는 빛 없이 ‘한번 세상에 태어나 어찌 이처럼 답답하게 살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하면서 스스로 굶어 죽었다. 소식을 들은 문제는 통곡하며 슬퍼하고 열후(列侯)의 예로써 장사지내 주도록 했다.
이렇게 죽은 유장에게는 자식이 넷 있었는데 모두 어린 나이였다. 문제 8년 유장의 죽음을 가엾게 여겨 그들은 모두 열후로, 맏아들 유안은 아버지를 이어 회남왕으로 봉해주었다. 유안은 아버지와 달리 학문에 힘쓰고 덕을 쌓아 세상 사람들로부터 온화한 인물이라는 평을 듣고자 했다. 유안의 학문적 소양과 문학적 재능을 『한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당시 무제는 예술과 문학을 좋아하였다. 무제는 유안을 숙부로 대접하였고, 유안이 글을 잘 지으므로 매우 존중하였다. 때문에 유안에게 문서나 글을 내릴 때는 늘 글을 잘하는 사마상여(司馬相如)등을 불러 초고를 살피게 한 뒤 보냈다. 즉위 초 유안이 조정에 입조하였다. … 유안에게 이소전(離騷傳, 초나라 굴원이 지은 賦-서정시)을 짓게 하였는데, 유안은 식전에 명령을 받고 점심 무렵에 완성해 올렸다.”「회남형산왕열전」
이미 아는 이름이지만, 무제는 위만조선을 멸하고 조선 땅에 한사군을 설치했던 인물이다. 우리 한민족에게는 달갑지 않지만, 그를 중국에서는 진시황 못지않게 대단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16세 즉위하여 71세로 죽을 때까지 중앙집권을 강화하고, 끊임없이 변경을 괴롭히던 흉노족을 완전히 정벌하고 장건(張騫)을 서역에 파견하여 비단길을 개척한 업적이 있다고 전한다.
유안은 한무제의 숙부뻘로 당시에는 대부분 동성 제후들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황실 종친으로는 가장 연장자고 원로종친으로 무제의 존경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유안은 아버지에 이어 파멸의 길로 빠져든 것일까? 유안의 신하인 뇌피(雷被)가 태자 천(遷)과 검술 시합을 하다가 실수로 천을 다치게 해 천의 원한을 사게 되었고, 그 일로 불안감을 느낀 뇌피가 장안으로 달아났고 결국 회남국에서 역모가 일어나고 있다고 밀고하기에 이른다. 중앙집권화를 꾀하고 있던 무제는 이로 인해 유안이 강한 지방 세력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이로써 뇌피는 ‘유다’역을 자임한 것이었다.
그러나 유안을 이를 모른 채 기원전 139년 조정에 입조하여 『회남자』아니, 「내편」을 무제에게 바쳤다. 내편이 『회남자』로 바뀌는 데는 여러 과정이 있었다. 최초 이름은 반고(班固)의 『한서』에 내서 혹은 내편이라고 하였는데, 內는 유안이 빈객들과 저술한 外書나 中篇과 구별하기 위해서다. 『회남자』는 유향(劉向)이 황제의 명을 받아 이 책을 정리한 다음 거기에 ‘회남’이라는 이름을 붙였기 때문이고, 지금 같이 『회남자』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것은 남북조 시대 양나라 오균(五均)이 지은 『서경잡기(西京雜記)』에서다. 그러나 이때까지도 ‘회남자’는 유안을 가르키는 말이었고, 책은 유안의 책이라는 의미로 ‘유씨지서(劉氏之書), 또는 ‘크고 밝게 빛난다’는 의미로 ‘홍렬(鴻烈)’이라고 불렸다.
『회남자』의 저술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회남자』「요략(要略)」에서 유안 자신은 이렇게 적고 있다.
“무릇 책을 지어 논하는 것은 도덕을 기틀 짓고 인사(人事)룰 아우르기 위해서이다. 위로는 하늘을 살피고, 아래로는 땅을 헤아리며, 가운데로는 [인간사의] 뭇 이치에 통달하게 되면, 비록 현묘한 도의 내용을 모두 드러내지는 못하더라도 만물이 변화하는 추이를 살피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 그러므로 20편을 지었으니 [여기에는] 천지의 이치가 다 연구되고 인간의 일들이 다 다루어지고 있으니, 제왕의 도가 모두 갖추어졌다.”
여기서 ‘제왕의 도’는 황제가 갖추어야 할 정치적 역량과 통치술을 의미한다. 그만큼 유안은 유씨의 일원으로써 제국이 영원하기를 바랐던 것이다.
『회남자』를 관통하는 논리는 氣論, 혹은 氣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회남자』를 지은 여러 저자들은 춘추시대 말부터 전국시대 말까지 진행된 기에 관한 생각과 논의를 총정리한 데 이어 기사상을 심화‧발전시켰다. 『회남자』에서는 우주 생성론을 비롯하여 자연계의 여러 현상, 인간의 생멸 등을 모두 기로 설명하고 자연과 인간의 관계도 전적으로 기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당시 형성된 기에 관한 관념들이 오늘날까지 거의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인데, 가령 ‘인체는 자연의 축소판’이라는 한의학의 관점, ‘자연의 기운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풍수론의 관점 등이 모두 漢나라 초기에 확립된 것이라는 것이다. 사계절의 변화, 만물의 생사 현상까지도 음양 두 기운의 상호작용으로 설명한다. 즉 죽음이란 음기가 양기를 타는 것이고, 생성이란 양기가 음기를 타는 것이라 한다. 인간 역시 만물 중 하나로 생성과 사멸 또한 이런 기론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았다. 물론 인간에 대해서는 벌레 등과 달리 조금‘특별한’대접을 하기도 했다.
『회남자』에는 다른 고서에는 없는 자연도 감응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회남자』에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다.
“옛날 사광(師曠)이 백설(白雪)이라는 음악을 연주하니, 그로 인해 신물(神物)이 내려오고 폭우가 갑자기 쏟아졌으며 평공(平公)은 중병에 걸리고 진나라가 크게 가물었다. ‘서녀(庶女)’가 하늘을 향해 부르짖으니 번개와 우레가 내려쳐 경공(景公)이 누대에서 떨어져 팔다리가 부러지는 등 몸을 크게 다쳤으며, 바닷물이 크게 넘쳤다. 장님 악사인 사광과 과부인 서녀는 지위가 미천하고 푸성귀나 먹는 사람들로 권세가 새털처럼 가볍다. 그러나 내면의 정기를 오롯하게 하고, 뜻을 가다듬어 일에 힘써 정신을 쌓으면 위로 구천(九天)에 통하고 하늘의 지극한 정기를 격동시킨다.”
이 고사는 ‘옛날 제나라에 한 과부가 있었고, 자녀가 없었음에도 재가하지 않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셨다. 이 시어머니의 재산을 탐하는 딸이 있었는데 그 딸이 어머니를 부추겨 과부를 재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과부는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다. 그러자 딸을 어머니를 죽이고 그 죄를 과부에게 뒤집어씌웠다. 억울한 과부가 한 맺힌 마음을 가누지 못하고 하늘에 대고 울부짖자 하늘에서 우레가 경공의 누대를 내려쳐 경공이 다리가 부러지고 바닷물이 크게 넘쳤다.’는 것인데, 이것은 미천한 사람도 내면의 정기를 오롯이 하고 뜻을 가다듬어 일에 힘써 정신을 쌓으면 자연계의 감응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것으로 전일(全一)한 정신을 발휘하면 그 정신이 자연에도 미친다는 것이다.
저명한 국어학자가 감수했다는 우리나라의『국어대사전』에는 ‘무위(無爲)를 ① 목표한 바를 이루지 못한 상태, ② (기본의미) 아무 일도 하지 않음 등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맞는 말일까? 노·장자 사상을 허무학(虛無學)으로 표현하는 건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노자는 모든 사물의 생성과 존재의 본원이라는 의미로 道라는 개념을 최초로 제시했다. 중국의 상고 시대에는 제(帝) 또는 상제라는 개념으로 천지자연과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을 설명했는데, 이때 상제는 ‘인격신’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군주는 이 상제의 뜻을 잘 파악해 그의 뜻에 따라 개인의 삶과 국가를 경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위해 노자는 ‘道’라는 개념을 제시함으로써 상제로 대표되는 인격신 내지는 의지천(意志天)을 지닌 신권(神權)을 부정하고 도를 천지개념의 상위로 끌어올림으로써 고도의 형이상학 체계를 수립했다. 이것은 서양 철학에서 보는 바와 같은 형이상학 자체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노자의 형이상학은 궁극적으로 인간 세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으로 인간의 삶을 어떻게 영위할 수 있는가 하는 현세 지향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노자 철학의 동기와 목적은 결코 우주론을 정립하는 데 있지 않았다. 인생의 요구로부터 점차 위를 추구해 우주 근원까지 올라가며, 이로써 인생의 평온한 경지를 만드는 것에서 도가의 우주론(형이상학)은 노자 인생 철학의 부산물이라 할 수 있다.”「중국인성론사」에서, 대만의 철학자 서복관(徐復觀)이 노자에 대해 한 평가다.
노자 철학의 궁극적 귀결처는 인간의 현실이며, 그것은 구체적으로 정치의 장이었다. 『노자』라는 책은 노자의 현실관, 정치사상을 표현하기 위해 쓴 것이었다. 노자가 살던 춘추시대 말은 혼란의 극치였다. 신하가 임금을 시해하고 임금이 신하를 주살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고,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 아비가 자식을 해치는 일도 숱하게 발생하는 무도(無道)의 시대였다. 이때 노자·공자·묵자 같은 위대한 현자들은 그 혼란을 해결할 나름의 처방을 내놓았는데, 노자는 해결책으로 ‘무위정치’를 내놨다. 그렇다면 무위정치 요체는 무엇인가?
노자는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마치 작은 생선을 요리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무슨 말일까. 작은 생선은 부서지기 쉽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요리하듯이 가능한 한 백성에 대한 간섭을 줄여야 한다는 말이다. 법령과 금기사항이 많아지면 백성은 더욱 더 가난해지고 …, 억지로 하는 자는 실패하고, 잡고자 하는 자는 놓치게 된다 …, 이처럼 노자는 유의(有爲), 즉 지나친 간섭은 오히려 정치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라고 했다. 천지로 표현되는 자연 질서를 본받는 자연 무위가 현실정치에서는 무위정치라는 것이다.
회남왕 유안은 정치철학서 『회남자(내서)』를 지어 황제에게 바치는 등 충성을 다했음에도 왜 몰락한 것일까? 그 과정을 보면, 황제인 무제가 유안의 신하였던 뇌피의 밀고로 관료를 파견해 조사하게 하였다. 그러나 구체적인 증거를 찾지 못하자 화남국에 딸린 2개 현을 삭탈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영지를 빼앗긴 회남왕 유안은 이를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여기고 반역에 뜻을 굳히게 되었다. 회남왕에게는 천 말고 불해(不害)라는 아들이 또 있었다. 나이는 불해가 장남이었지만, 서자인 그를 회남왕이 사랑하지 않았고 왕후와 태자인 천 또한 그를 가족으로 여기지 않고 업신여겼다. 불해에게는 건(建)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재주가 많고 기개가 높았다. 그는 늘 태자 천이 자기 아버지를 업신여기는 태도에 원한을 품고 태자를 무너뜨리고 자기 아버지를 태자 자리에 오르게 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태자가 이 사실을 눈치채고 건을 잡아 매질까지 했다.
앙심을 품은 건이 원삭 6년(기원전 123) “지금 회남왕의 손자 유건은 재주가 뛰어난데, 왕후 다와 태자 천이 항상 저를 질시하고 해치려 합니다. 또한 저의 아비 불해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이들이 여러 차례 붙잡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제가 조사에 응하여 회남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음모를 낱낱이 밝힐 수 있습니다.”라고 상소를 올렸다. 이에 조정에서 감독관을 파견하여 조사하자 자신의 음모가 누설될 지경에 이른 유안은 참모인 오피(吳被)와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했다. 조정의 압박이 점차 강해지자 내부 동요가 일어나 오피 마저 등을 돌리고 중앙관리에게 나아가 회남왕과 모의한 사실을 털어놓고 말았다. 회남왕은 일이 틀어졌음을 알고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왕후와 태자, 관련자 모두 멸족의 화를 당한 것은 물론이다. 이로써 회남국은 구강군으로 개편되고 말았다.
흔히 ‘자연’이라고 하면 영어 ‘nature’와 같이 산천을 뜻하는 명사를 생각하지만, 고대 중국에서의 ‘자연’은 산천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사물이 저절로 그러한 모습을 표현하는 형용사나 부사로 쓰였다. 가령 봄이 되면 얼어붙었던 대지에서 파릇파릇 새싹이 돋아나는데, 이는 누가 억지로 조정한 것이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이루어지는 자연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연스러운 현상은 주로 하늘과 땅에서 나타나므로, 하늘과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현상, 좁게는 천지 자체, 더 좁게는 산천을 그냥 뭉뚱그려 ‘자연’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노자』사상은 인간은 ‘도를 따라서 살아야 한다’는 것으로, 인간은 천지로 대표되는 자연의 질서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질서의 기준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유가는 인간 상호간의 관심과 배려를 기본 바탕으로 삼는 예(禮)에 기준을 두었고, 법가는 엄격한 형벌에 따라 개인적인 욕구를 철저하게 억압하는 법에 두었다. 그러나 도가는 천문과 지리, 여러 현상들을 잘 살펴 거기에 공통적으로 담긴 이치, 즉 자연 질서에 따를 것을 강조했다. 그것은 『노자』의 다음 말에서 찾을 수 있다.
천지는 장구하다네.
천지가 장구할 수 있는 까닭은
나만 살겠다 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길이 존재할 수 있다네.
강과 바다가 뭇 시냇물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자신을 잘 낮추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뭇 계곡의 우두머리가 될 수 있는 것이네.
따라서 백성 위에 서고자 하면
반드시 언어가 겸손해야 하고
백성들에 앞서고자 하면
반드시 자신을 뒤로 해야 한다네. 『노자』66장
노자의 무위론이 초기 노자로부터 시작해 전국시대를 거치고 한나라 『회남자』에 이르기까지 적잖은 변화가 생겼는데, 선진 도가에서 인위의 대표적인 형태로 간주되던 인의(仁義)와 예악(禮樂)이 황로(黃老)도가에서는 오히려 무위의 범주에 포섭되었다. 이에 『회남자』에서는 ‘무위’의 개념을 재정립했다.
〈정의1〉
무위란 응결되고 정체되어 움직이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어떤 행위도 자기 주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정의2〉
무위는 사사로운 뜻이 공적인 길에 끼어들지 않고, 개인적 욕망으로 인해 올바른 통치술이 왜곡되지 않으며, 이치에 따라 일을 실행하고 객관적 사실에 근거해서[因資] 공(功)을 세우며, 자연의 형세를 밀고 나가 교묘한 기교가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일이 이루어져도 자신이 한 일로 자랑하지 않고 공을 세워도 그 명예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자극을 받아도 반응하지 않고 공격해 와도 움직이지 않는 것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 「수무」
〈정의1〉의 경우 《노자》의 무위관과 별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정의2〉는 『회남자』에서 크게 자연현상을 따르는 것으로 인(因)개념을 도입하여 능동적 행위를 중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의2〉에 근거할 때 『회남자』의 무위는 크게 ‘자연 형세에 따름’,‘인 개념의 활용’그리고 ‘능동적 행위의 중시’로 정리할 수 있다.
인因이란 무엇인가? 도가에서는 정치를 기본적으로 ‘따르다’는 태도를 중시하였는데, 따르다는 말이 한자로는 순(順)말고도 인이라 한다. 즉 순과 인은 모두 따르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비슷한 의미가 있지만, 둘 사이에는 본질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순은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인상을 받는 대신, 인은 취(就)자 의미를 지니면서 ‘□’에 ‘大’가 따르는 글자로 그 구역에 나아가 크게 확충한다는 의미다. □는 구역이라는 의미고, 大는 크게 확충한다는 의미로 이해한 것이다. 『회남자』에서는 因개념이 여러 차례 등장하는데, 그중에 성인의 이상적 행위에 바로 이 因개념을 활용한다.
“성인의 다스림은 백성의 본성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천성으로 지니고 있는 것[본성]에 근거해서 그것을 계발시켜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의 공은)‘근거하면[因]’크게 되고 의도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면 작게 된다.”-『회남자』「태족(泰族)」
『회남자』의 무위 사상은 원칙적으로 노자·장자 등 원시 도가의 자연무위론을 바탕으로 삼았으나 거기에 현실 대처 능력이 뛰어난 유가·법가의 이론을 끌어안게 되었다. 유가나 법가는 현실 지향적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자연히 인간 사회에 대한 소극적 태도보다는 적극적 태도를 강조했다. 『회남자』의 무위 사상은 노·장의 무위 사상에 비해 능동적이고 실천적이며 심지어 노·장에서 배격되었을 법한 행위의 요소까지 지니게 되었다.
‘인사는 만사’라는 말이 있다. 사람 쓰는 일이 모든 일의 근본이라는 뜻이겠다. 통치자 입장에서 인사는 매우 중요하고 민감한 사안일 수밖에 없다. 이 점은 예나 지금이나 차이가 없다. 『회남자』에서는 인사의 우선에 군신이도(君臣異道)에 두고 있는데, 군주의 길과 신하의 길이 서로 다르다는 관점이다. “군주와 신하가 도를 달리하면 다스려지고 같이하면 어지러워진다. 각자 그 마땅함을 얻고, 합당함에 처하면 위와 아래가 서로 부릴 수 있게 된다.”-『회남자』「구술」
군주가 사람 쓰는 것은 목수가 나무를 다루는 것에 비유하기도 했다.
“현명한 군주가 사람을 쓰는 것은 뛰어난 목수가 나무를 다루는 것과 같다. 큰 것은 선박이나 대들보로 쓰고, 작은 것은 노나 문설주로 쓰며, 긴 것은 서까래로 쓰고, 짧은 것은 대들보 위의 짧은 기둥이나 두공(枓拱)으로 쓴다. 이렇게 하면 크고 작음 또는 길고 짧음에 상관없이 각각 그 마땅한 바를 얻게 되며 곡자나 직각자 할 것 없이 모두 그 마땅한 바에 쓰이게 된다.”「주술」
『법가』하면 상앙이나 한비자를 먼저 생각하지만, 법가 중 가장 먼저 세(勢)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주장한 사람은 신도(愼到-기원전 395∼315) 이다. 그는 세의 효율성을 설명하며 필부로서의 요(堯)와 군주로서의 요 사이에 나타나는 차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요가 평범한 사람이었을 때는 이웃들도 부릴 수 없었다. 그러나 천하를 굽어보는 왕이 되자, 명령을 하면 곧 시행되고 금지하면 곧 멈추게 되었다. 이로 볼 때 어진 사람은 막돼먹은 사람을 복종시킬 수 없지만, 권세의 지위를 지닌 사람은 어진 사람도 굴복시킬 수 있다.”-『신자(愼子)』「위덕」
요라는 인물은 같지만, 필부로서의 요와 통치자로서의 요 사이에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회남자』에서는 무위 정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법가의 원리도 수용하고 있다. 술(術), 법(法), 세(勢)가 그것이다. 『회남자』가 꿈꾸는 무위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방법론으로 법가 이론을 실질적 도구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회남자』는 그동안 중국 철학사에서 상대적으로 매우 소홀한 대접을 받아왔는데, 그것은 잡가라는 관점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이지만, 이는『한서』등에서 『회남자』는 제자백가 중 어느 학파에도 속하지 않는 ‘잡가’로 분류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남자』는 한대 최고 저술로 극찬하기도 한다.
“『회남자』는 궁리하여 만든 것이며 극히 조리가 있고 멋대로 고사성어를 나열해 지은 문장이 아니며 또한 방대하고도 조리가 있어 한대인의 저술 가운데 제일에 속한다.
『회남자』는 서한 도가 사상의 그윽이 깊은 창고이며, 책의 체계는 방대하면서도 일관성이 있으니 한대인의 저술 가운데 가장 뛰어나다.”-「중국근삼백년학술사」는 이렇게 주장하고 있어 그 평가가 엇갈린다.
한나라 사람들이 생각했던 도가는 확실히 현재 우리가 생각하는 도가와는 상당히 달랐다. 『사기』에는 당시 도가에 대해,
“도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신을 전일(全一)하게 하여 그 움직임을 무형(無形)에 합쳐지게 하고 만물이 [스스로] 만족하게 한다. 그것의 술(術)은 음양가의 주장을 따르고,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취하며 명가와 법가의 요체를 받아들인다. [그리하여] 때의 변천과 함께 하고 사물에 응하여 변화하니, 풍속을 바로 세우고 일을 시행하는 데 적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가리키는 요점이 간략하고 실천하는 것이 쉬워, 하는 일은 적은데 이루어지는 공은 많다.”-『사기』「논육가요지(論六家要指)」
여기에서는 노장의 도가와 달리 음양가의 주장을 따르고 유가와 묵가의 장점을 취하며 명가와 법가의 요체도 받아들인다고 하였다. 이것은 노장 사상과는 매우 다르고 생소하다. 서한 시대 한대 사람들에게 비친 도가의 모습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이것은 황로학(黃老學) 또는 항로도가를 가리키는 것으로 그것은 노자 사상을 중심으로 도가 사상을 바탕으로 삼아 제가백가의 장점을 종합적으로 수용한다는 특징을 지니는 것이고 『회남자』는 바로 이런 황로학을 배경으로 삼은 것이다.
그렇다면 황로학이란 무엇인가? 이 책이 출간되었을(2004)당시의 연합뉴스가 보도한 내용으로 그 대답을 대신하고자 한다.
(서울=연합뉴스)김태식 기자 =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인 한유(韓愈)는 ‘원도(原道)’라는 글에서 요ㆍ순ㆍ우ㆍ탕ㆍ문왕ㆍ무왕ㆍ주공ㆍ공자ㆍ맹자로 이어지는 유가 계통론을 확립하면서 당시까지 중국 학술사를 다음과 같이 개괄했다.
“주(周)나라 도가 쇠미해지고 공자가 돌아가시자, 진나라 때는 책이 불태워졌으며 한대에는 황로(黃老)가 성행했다.”그렇다면 한대를 지배한 황로학이란 무엇인가? ‘황로’란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앞 글자를 딴 것인데 이미 전한시대 역사인 「사기」에서도 보인다.
황제나 노자의 역사적 실존에 대하여는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없지 않지만, 두 인물은 도가철학에서 조(祖)와 종(宗)을 이루는 양대 산맥이다. 이들을 앞세운 황로학이란? 쉽게 말해 도가철학을 주축으로 하고 상앙과 순자 및 한비자 계열의 법가와 다른 흐름이 혼합된 정치사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황로학의 주축이 도가철학이라는 사실이며 그것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사상사적 흐름이 법가라는 것이다.
노자와 장자가 말하는 도가철학은 핵심이 무위자연(無爲自然)으로 수렴된다. 반면 법가는 철저히 법(法)을 중시하는 소위 유위(有爲)의 대명사격이다. 언뜻 전혀 상반되는 듯한 두 철학이 정치사상으로 접점을 이룰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질까? 실제 이런 시대가 있었다. 한유가 말한 한대(漢代)가 바로 그랬다. 요즘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한 황로학의 골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군주는 말을 최대한 아껴야 한다. 왜냐하면 군주가 말을 많이 할 경우 신하들에게 속내를 간파당하게 되며, 그렇게 되면 신하들이 그것을 이용해 군주를 치받는다.
둘째, 신하들에게는 절대적으로 전권을 위임하라. 그런 다음 신하들의 공적을 가려 상벌을 철저히 하라. 조심할 점이 있다면 너무 잘한 신하도 쳐라. 지나치게 잘 대해 주면 군주에게 ‘기어오르기’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황로학이다. 겉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체 하니, 노자가 말하는 무위자연 혹은 허정(虛淨)함이며,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끊임없이 신하들을 감시하고 상벌을 내리고 있으니 법가가 말하는 법치(法治)인 것이다. 따라서 황로학은 굳이 성격을 규정하자면 "무위(無爲)의 유위(有爲)"인 셈이다.
한대에 크게 유행한 황로학을 집대성한 것이 바로 『회남자(淮南子)』라는 책이다. 한 고조 유방의 손자로 회남 땅의 제후인 회남왕(淮南王)에 봉해진 유안(劉安)이 그의 식객들과 함께 완성한 이 책은 황로학이라는 한대 주류적인 사상을 담고 있는 거대 보고에 비유될 수 있다.
이석명 경희대 교수가 도서출판 사계절이 기획한 ‘오늘의 고전’시리즈 중 하나로 집필한 『회남자』는 문헌이 태동된 시대적 배경과 거기에 나타난 특징을 알기 쉽게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