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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정(避靜)은 종교적인 행위를 나타내기 위해 만들어진 합성어로, 한자어 그대로 풀이하면 고요함을 피한다는 뜻이 되니 어불성설이다. 피정에 대해서는 ‘피속추정(避俗追靜)’의 준말이라는 설과 ‘피세정념(避世靜念)’의 준말이라는 설이 공존한다. ‘피속추정’은 ‘세속을 피해서 고요함을 따른다’는 의미이고, ‘피세정념’은 ‘세상을 피해서 고요하게 마음을 지닌다’는 것으로, 사실 두 말의 뜻이 대동소이하다. 두 말 중 어느 것이 맞다고 주장할 수 없지만 ‘피세정념’의 준말이라는 설이 좀 더 지배적이다.
영어로는 피정을 ‘retreat’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후퇴라는 뜻을 지닌 ‘retreat’는 종교적인 언어로는 ‘일상 삶에서 후퇴하여 자신을 돌아보는 기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서 피정의 어원적인 의미는 ‘일정한 기간’을 나타내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예컨대 3일, 8일, 30일, 40일 등의 기간을 정해서 세상에서의 일상생활을 떠나 자기 삶을 돌아보거나, 하느님에 대해 묵상하거나 관상하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에서 피정이라는 말이 파생하였다.
2. 피정의 기원과 역사
피정의 기원은 그리스도교보다도 더 이전으로 보는 주장도 있으나. 일반적으로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의 ‘광야사건’에서 찾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신다(마태 4, 1-11; 마르1, 12-13;루가 4, 1-13).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40일 동안 예수는 세상에서 물러나 오직 하느님하고만 함께 지내시면서, 당신을 위한 하느님의 뜻을 식별하고 다가오는 공생활을 준비하셨다. 광야에 가셔서 일정한 기간 동안 단식하시면서 기도하셨던 예수의 행적은 이후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에 모범이 되었다. 초대 그리스도 공동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모범을 따라 광야에 나가 기도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악마의 유혹을 이기고 오로지 하느님께 투신하는 삶을 선택한다. 이렇게 하느님과 함께 지내면서 그분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선택하는 기간을 갖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전통으로 전해졌으며, 이를 피정이라고 지칭하게 되었다.
박해시대에는 박해를 피해 사막이나 광야에 숨어 지내면서 하느님께 투신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더러 있었다. 이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경우로 이것을 피정의 기간을 갖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초기 은수자들의 삶의 형태에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박해시대가 끝난 이후에 로마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국교가 되고 그리스도인이 특권을 누리는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 중에서도 면면히 이어오던 기도생활의 정신이 해이해지기도 했다. 이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점차 광야에 나가서 홀로 지내게 되었다. 이들이 초기 사막의 은수자들이다. 이들의 삶은 그 자체가 피정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들의 영향으로 피정을 사막의 체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기원 후 5세기 경에는 성 파꼬미니우스(St. Pachomius)나 성 카시안(St. Cassian) 등의 여러 뛰어난 영적인 스승들이 출현한다. 이들의 영향으로 혼자서 기도 생활을 하는 것보다는 영적인 스승이나 인도자의 지도 아래 공동 생활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점차 독거 생활을 하는 은수자들이 자취를 감추고 공동체를 이루어 기도 생활을 함께 하는 수도 생활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수도회를 정립시킨 대표적인 인물인 성 베네딕트(St. Benedict)는 수도 생활이 정착되면서 안락한 집이 아닌 사막에서 독거하면서 기도하는 일정한 기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래서 수도자들이 일년 중에 어느 시기를 사막에서 자신을 단련하고 기도에 정진하는 기간을 갖도록 권고했다. 일반적으로 사순 시기를 많이 이용하였기 때문에 한 때 이런 기간을 ‘사순 피정’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 베네딕트는 그의 유명한 규칙 안에 사순 피정을 준수할 것을 언급했다(성 베네딕트 규칙 제 49장 참조). 이러한 피정이 베네딕트회 뿐 아니라 다른 수도회에서도 지켜지기 시작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이 있는 피정이 생겨난 것은 16세기 성 이냐시오 료욜라(St. Ignatius of Loyola) 이후이다. 성 이냐시오 료욜라는 교회 역사 안에서 새로운 형태의 수도 공동체를 탄생시켰다. 이전의 수도 공동체는 기도 생활에 전념하는 봉쇄 수도원이거나 활동을 하지만 기도 시간이 하루 일과의 중심인 반(半)관상수도회였다. 당시의 수도회는 하루 일과 시간이 기도와 일로 이루어지면서 수도 생활 자체가 피정의 상태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특별히 피정의 기간을 가질 필요성을 별로 느끼지 못했다. 이에 반해, 성 이냐시오와 그의 초기 동료 형제들이 세운 수도회는 사도적 활동을 위해 만들어진 새로운 형태의 전적인 활동 수도회였다. 이들은 사도직 활동을 중심으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필요한 어느 곳으로든지 파견되는 이른바, ‘분산되는 공동체’의 형태였다.
성 이냐시오는 하느님의 자비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신이 세운 활동 수도회의 회원들이 특별히 활동에서 물러나 조용히 주님과만 지내는 기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냐시오는 본인이 저술했던 ‘영신수련(Exercitia spiritualia)’에 따라 회원들에게 피정의 시간을 갖도록 배려했다(예수회 회헌 제 408항 참조). 성 이냐시오가 ‘예수회’를 세운 이후에 나타난 다른 많은 활동 수도회들도 특별한 기간 주님과만 함께 보내는 기도 시간의 필요성에 따라 회원들에게 피정을 정례화했다. 이렇게 해서 예수회가 창립된 16세기 중반 이후 본격적인 피정운동이 생겨났고,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St. Franciscus Salessius)나 성 빈첸시오 드 바오로(St. Vincenetius de Paulus)와 같은 활동 수도회를 창설했던 인물들이 피정의 강력한 옹호자가 되었다.
성 이냐시오는 자기가 계발한 독특한 영적인 수련 방법인 ‘영신 수련’을 성직자나 수도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일반 평신도들에게도 베풀었다. 활동 수도회의 회원들뿐만 아니라 평신도들도 피정에 참여하면서 여러 형태의 피정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성 이냐시오 당시에는 ‘영신수련’을 하기 위해서 따로 조용한 장소를 마련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영신수련’의 성격상 ‘영신수련’을 통한 피정을 보다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일상 삶에서 물러나 조용히 머무는 장소가 필요하게 되면서 소위 ‘피정의 집’들이 생겨났다.
3. 피정의 분류
피정은 기간, 지도 방법, 대상, 내용이나 주제 등에 따라 몇 가지 형태로 분류될 수 있다.
1) 기간
기간은 대개 1일 피정에서 40일 피정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본당의 여러 신심 단체들이 어느 하루를 정해 소그룹으로 피정 집이나 성지에 가서 영성 강의를 듣고 자신을 돌아보거나 기도하는 시간을 갖는 것을 1일 피정이라고 한다. 피정은 단지 특강이나 교육 프로그램 혹은 신심 행위와는 다르다. 예를 들어 본당에서 사순절이나 대림절에 전 신자들을 대상으로 영성적 강의나 신심 강화를 위한 프로그램을 갖는 것을 피정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피정이라고 할 수 없다. 평신도 뿐 아니라 수도자들이 대개 한 달에 한번 하루를 정해 조용히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주님과만 함께 지내는 시간을 갖는 것도 1일 피정이라고 부른다.
일반적으로 피정 집에는 3일, 8일, 30일, 40일 피정 등이 마련되어 있다. 가장 많이 행해지는 피정의 기간은 8일이다. 이것은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축약해서 피정을 주는 기간이 8일이었던 전통에서 기인한다. 또한 많은 수도회가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의한 피정을 연례피정으로 받아들이면서 자연스럽게 보편화된 기간이다. 현재 교회법상 성직자는 적어도 3년에 한차례, 수도자는 1년에 한차례 6일 이상의 기간 동안 피정을 해야 한다.
3일 피정은 주로 평신도들을 위한 피정이다. 평신도들의 경우 8일 간의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피정 집에서는 3일 정도로 축약된 피정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있다. 30일 피정은 주로 30일로 이루어져 있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따른 피정 기간이다. ‘영신수련’의 방법을 따르지 않으면서도 30일 피정을 주는 경우가 있지만 드물다. 40일 피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단식과 기도로 보내셨던 기간인 40일의 모범을 따라 정해진 기간이다. 예를 들면, 예수고난회에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의 방법에다 특별히 수난을 강조하여 짜여진 프로그램으로 40일 피정을 주고 있으며 성심수녀회에서 ‘예수 마음 기도’로 하는 다양한 기간의 프로그램 가운데에 가장 긴 기간으로 40일 피정이 있다.
2) 지도 방법
피정은 피정 방법에 따라, 개인 지도 피정(a directed retreat or on-to-one retreat), 강의 피정(a preached retreat), 반(半)개인 지도 피정(a semi-directed retreat) 등이 있다.
첫째, 개인 지도 피정은 한 명의 지도자가 한 명의 피정자를 이끄는 방법으로 피정이 진행된다. 이때 지도자는 일방적으로 피정을 주고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역할보다는 함께 동반하면서 식별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지도자라는 호칭보다는 영적 동반자(spiritual company) 또는 공동 식별자(co-discerner)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 개인 지도 피정의 가장 큰 장점은 개인의 성향과 현 상황 안에서의 필요에 따라 가장 적절한 지침을 줄 수 있고, 피정자가 구체적인 영적 식별을 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도울 수 있다는 점이다. 개인 지도 피정은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계기로 일어난 피정운동의 초기 형태로 피정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피정 방법이다. 피정운동이 처음으로 보편화되기 시작했던 16세기 중엽에서 17세기 말까지는 대개 개인 지도 피ㅐ?이루어졌다. 그러나 피정운동이 점점 대중화되고 많은 수도회가 연례 피정을 시행하고,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피정이 교회법상 의무로 정착하면서 개인 지도 피정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피정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자연스럽게 현실적으로 가능한 방법으로 바뀌어 간 형태가 강의식 피정 방법이다.
둘째, 강의 피정은 피정 지도자나 동반자가 강의를 통해서 피정자들에게 기도할 내용를 강의하고, 그 내용을 반추하면서 묵상하도록 이끄는 방법이다. 잘 준비된 좋은 내용의 강의나 강론을 통해서 피정이 진행된다는 점이 이 피정 방법의 특성이다. 잘 준비된 지도자의 강의는 피정자들이 새로운 지식과 기도 방법을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된다. 이것이 강의 피정의 장점이기도 하다. 강의 피정은 강의 내용에 따라 피정의 성격에 많은 영향과 변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러나 강의 피정은 각 피정자의 기도 체험 안에서 하느님의 이끄심과 악령의 책동을 분별하는 영적 식별은 거의 피정자 각자에게 맡겨진다. 피정의 결과도 피정 지도자의 강의 내용이 얼마나 효과적이냐에 따라 혹은 강의 내용을 피정자가 얼마나 잘 소화하고 따라가느냐에 따라 좌우되는 면이 많다. 이러한 점은 피정의 본래 성격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모습이기도 하다.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각 수도회가 창립자의 정신과 은사를 되살리고 새롭게 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피정의 방법도 강의식 방법보다는 개인 지도 방법을 복원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일대일의 지도 피정이 불가능한 경우 이에 대한 보안의 방법으로 시작된 피정 형태가 반(半)개인 지도 방법이다. 이것은 개인 지도 피정과 강의 피정의 장점을 살려 강의와 개인 지도를 병행하는 방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반개인 지도 피정에서 지도자는 약 15-25명 가량의 피정자에게 강의나 강론을 통해 기도할 내용을 전달하고 묵상이나 관상의 방법으로 기도하게 한다. 그리고 이틀에 한번 정도 개인 면담을 통해 함께 동반하면서 식별을 도와주거나 기도를 잘 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다. 경우에 따라 피정자들의 면담은 몇 명의 공동 지도자가 분담해서 할 수 있으나, 피정 기간 동안 각 개인 피정자의 면담 지도자가 바뀌지는 않는다. 면담자들은 자신의 피정자들의 영적 여정을 피정 기간 동안 계속해서 함께 동반해야 하기 때문이다.
3). 피정 대상
피정은 피정 대상자에 따라서도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성직자나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과 평신도들을 위한 피정으로 나뉘며, 그 외 청소년을 위한 피정, 학생 피정, 부부 피정, 가족 피정, 각 본당 단체들을 위한 피정, 직장인들을 위한 피정, 교사나 의사, 법조인 등 특정 직업 종사자를 위한 피정 등이 있다. 성직자나 수도자를 희망하는 성소자들을 대상으로 한 성소 피정도 있다. 인원에 따라 개인 피정과 단체 피정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성직자들과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은 대개 연례피정이다. 연례피정이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 교회법으로 의무화되면서, 이들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피정 프로그램이 계발되었다.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위한 피정은 대부분 의무규정인 6일에서 보편적인 8일 피정의 형식이다. 이들은 피정을 통해 사목자나 봉사자로서, 또는 봉헌된 삶을 사는 사람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면서, 주님과 함께 머무는 시간 안에서 새로운 힘을 얻는다.
평신도들은 피정이 의무로 부과되지는 않지만, 교회는 그들에게도 여러 차례의 교서들을 통해 가장 효과적인 영성 생활을 영위하는 방법으로 피정을 권장하고 있다. 피정의 중요성과 필요성이 더욱 더 강조되면서 평신도들을 위해서도 다양한 피정 프로그램들도 계발되고 있다. 현재 각 수도회나 교구가 운영하고 있는 피정의 집이나 피정센터에서는 평신도들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형태의 피정 프로그램들이 진행 중이다.
4). 피정 내용과 주제
피정의 실제적인 내용이나 피정에서 다루는 주제에 따라 피정은 더욱 다양하게 분류될 수 있다. 가장 전통적이고 보편적인 피정은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의한 피정이다. ‘영신수련’에 의한 피정은 성서적인 주제를 그 핵심으로 하는 피정 방법이다. 특히 ‘영신수련’의 중심 내용은 복음서를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관상하는 것이다. ‘영신수련’의 방법을 따르지 않는 다른 피정도 성서를 내용으로 하거나 중심 주제로 다루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이 담겨 있는 복음서가 피정의 내용이나 주제로 가장 많이 다루어진다. 그 외 바오로의 서간이나 사도행전, 또는 구약의 예언서, 욥기 등도 많이 다루어지는 내용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의한 피정도 전체적인 흐름은 ‘영신수련’의 내용에 따르지만 기간, 인원, 대상, 피정자들의 필요와 요구에 따라 피정 프로그램을 다양화할 수 있다. 예컨대, ‘영신수련’에 의한 피정에도 기간에 따라 3일 피정, 8일 피정, 30일 피정 등으로 나뉘고, 인원에 따라 개인 피정, 반개인 피정, 강의 피정이 있으며, 대상에 따라 ‘영신수련’ 전체흐름을 따를 것인지, 첫째주간의 흐름만을 따를 것인지 결정되며, 참회를 위한 피정 혹은 식별을 위한 피정과 같이 특별한 목적에 따라 피정 프로그램을 다양화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영신수련’이 원래의 성 이냐시오의 정신대로 융통성 있게 응용되면서 시편이나, 어느 한 예언서나 한 복음서나 서간 등을 가지고 ‘영신수련’ 피정을 진행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레지오 마리에 피정, 꾸르실료 피정, 성령 세미나 피정 등이 있다. 최근에 한국에서는 ‘예수 마음 기도’와 ‘Lectio Divina’(거룩한 독서)에 따른 피정이 많이 행해지고 있으며, 'MBTI(Myers-Briggs Type Indicator)나 애니어그램(Enneagram) 등의 심리학적 접근 방식이 피정 내용과 주제로 활용되기도 한다.
4. 피정의 목적과 지도자의 역할
각 피정마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행해질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피정의 목적은 자신의 일상 삶에서 벗어나 고요함을 추구하면서 주님과 함께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피정을 정의하는 가장 일반적인 표현의 하나로 최근에는 ‘주님과 함께 하는 휴가’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과거에는 피정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서 성찰과 반성을 통해 양심을 깨끗하게 함으로써 영혼을 정화시키는 기간이라는 이미지가 강조된 반면에 요즘은 주님 안에서 조용히 쉬는 시간으로서의 이미지가 더 크게 부각된 것이다. 이것이 바쁜 삶을 사는 현대의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 요청이기도 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피정을 하는 목적은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머물고 쉬기 위함이다. 이를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자세는 피정 기간 동안 자신을 주님께 맡겨 드리는 것이다. 어느 피정이나 피정을 이끄는 지도자가 있기 마련이지만 실제적인 피정의 지도자는 언제나 주님 자신이며 성령이다. 피정 지도자는 다만 주님께서 피정을 이끌어 가시도록 도와드리는 보조자의 역할만을 해야 한다. 피정의 목적이 주님 안에서 주님과 함께 쉬는 것이라면 온전히 피정자 자신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라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피정 지도자는 피정자들이 긴장을 풀고 주님께 자신을 맡겨드리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피정자들에게 피정 지도자로부터도 어떤 긴장도 받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특별한 목적을 갖고 피정이 행해지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부제품이나 사제품 준비 피정, 종신 서원 준비 피정, 성소 식별 피정 등이다. 이런 경우 피정자들은 더 큰 긴장과 부담을 갖고 피정에 임한다. 따라서 지도자는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서 그들이 긴장을 풀고 주님 안에서 쉬면서 주님과 함께 편안히 머무는 가운데 서품이나 서원의 준비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특별히 성소 식별을 위한 피정이라면 성소는 궁극적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임을 인식하고 평화 안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느낄 수 있도록 더욱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피정을 하면서 체험하게 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과 이끄심이다. 주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질 때 인간은 그분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됨을 체험하며 내면 안에서 깊은 평화와 내적인 자유를 얻게 된다. 피정 지도자가 피정에서 해야 하는 역할은 바로 이 내적인 자유, 영적인 자유를 얻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따라서 피정 지도자는 성령께서 피정을 이끄시고 주관하신다는 신뢰를 지닐 수 있도록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피정자가 마음을 열고 자신을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맡겨드릴 수 있는 영적인 자유를 얻도록 도와주기 위해서 피정 지도자가 지녀야 할 자질이 있다면 본인이 영적으로 자유로워야 한다. 특별히 개인 지도 방식의 피정에서 지도자는 피정자의 영적 동반자로서 함께 식별을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 지도자가 먼저 온전히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피정과 피정자를 맡겨드릴 수 있는 영적 자유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5. 피정의 주보 성인과 영신 수련
교황 비오 11세는 1922년 7월 22일자의 회칙 Summorum Pontificum에서 성 이냐시오를 피정의 주보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또한 교황은 1929년 12월 20일자의 회칙 Mens Nostra를 통해서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을 “구령과 완덕의 길에서 영혼 지도상 가장 현명하고 보편적인 법전인 동시에 가장 깊고도 견고한 경건심의 마르지 않는 원천으로서 생활 개선의 길을 가르쳐주며, 영신생활의 높은 수준에 달하는 지름길을 밝혀주는 엄중한 각성의 소리로서 대단히 정확한 지도서가 되었다”고 천명하였다. 이로써 교회는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탁월한 피정 방법임을 공인하였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은 1548년 교황 바오로 3세에 의해 승인된 이래 오랫동안 거의 유일한 피정의 보고였다. 오늘날 다양한 피정 방법이 생겨났지만 대부분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바탕을 두고 응용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이 지니고 있는 가장 커다란 장점은 철저하게 하느님을 중심으로 이끌어 가는 흐름이다. ‘영신수련’을 통해 성 이냐시오가 얻고자 했던 목적이 있다면,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피정에서 체험한 하느님 사랑을 일상의 삶 안에서도 살아가도록 돕는 것이다.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의 흐름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피정을 시작하면서 근본적으로 인간이 하느님 앞에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서 ‘원리와 기초’라는 묵상을 한다. 이어서 ‘첫째 주간’, ‘둘째 주간’, ‘셋째 주간’, ‘넷째 주간’으로 이어지며 마지막으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으로 끝난다. 각 주간은 7일간의 일정한 시간이 아니라 주제에 따른 구분이다. ‘첫째 주간’에서는 하느님 안에서 자기 자신을 성찰하면서 자기 자신을 만나는 시간이다. ‘둘째 주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전 생애를 관상하면서 그분을 알고 사랑하고 따르는 열망을 청하게 된다. ‘셋째 주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을 묵상하고 ‘넷째 주간’에서 그분의 부활을 관상한다. 마지막으로 ‘사랑을 얻기 위한 관상’은 피정 전체를 마무리하면서 이제 다시 일상 삶 안으로 들어가는 다리 역할을 한다. 피정자는 피정을 통해 일상의 삶 안에서도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삶을 살게 된다.
6. 피정에 필요한 기타 사항들
1) 피정의 집(또는 피정 센터)
피정을 하기 위하여 적절한 장소를 마련하는 것도 상당히 중요하다. 피정이 일상 삶에서 벗어나서 고요 안에서 주님과만 함께 있는 시간을 마련하는 것이라면, 실제적인 피정의 장소가 번잡한 삶의 터에서 떨어져 있는 곳이 좋다. 피정을 하기 위해서는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마르 6, 31)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한적한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 피정 장소의 필요성에 대해 성 이냐시오는 “한적한 곳에 외따로 지냄으로써 정신이 많은 일에 분산하지 않고 모든 관심을 하느님을 섬기고 자기 영혼을 향상시키는 한 가지 일에 집중하여 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능력을 더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언급했다. 우리가 따로 한적한 곳에 떨어져 있을수록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기에 더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성 이냐시오에 따르면, 주님과 가까울수록 주님이 주시는 은총과 선물을 받을 내적인 준비를 더 잘 갖추게 된다. (영신 수련 20 참조)
2) 침묵
피정을 잘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준비들이 필요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의 준비다. 피정은 무엇보다 마음의 고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대부분의 피정에서 침묵이 요구되지만 외적인 침묵뿐만 아니라 마음의 고요가 이루어지는 내적인 침묵도 필요하다. 피정에서 침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번잡한 세상의 일상에서 물러나서 고요 안에서 주님과 만나기 위해서는 침묵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와서 다양한 형태의 피정이 이루어지면서 ‘대화’나 ‘나눔’의 방법이 사용되고 있지만 그런 피정도 ‘대화’나 ‘나눔’의 시간 이외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침묵 안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침묵 안에서만 주님이 중심이 되고 그분이 이끄시는 대로 따르면서 피정을 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침묵 없이 행해지는 피정은 ‘연수회’나 ‘세미나’는 될 수 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는 피정이라고 부르기에는 적절하지 않다.
2) 식사와 수면
재미있는 표현으로 피정의 3대 요소를 영어로 ESP라고 한다. E는 to eat에서 먹는 것을 지칭하고, S는 to sleep에서 자는 것을 가리키며 P는 to pray로 기도하는 것을 나타낸다. 좋은 피정이 되기 위해서는 잘 먹고 잘 자고 나머지 시간에 기도하라는 해학이 생길 정도로 피정에서 식사와 수면은 중요하다. 단식을 하면서 하는 피정도 있지만 예외의 경우이고, 일반적으로는 기도하는데 상당한 에너지가 요구된다는 것을 고려하여 적당한 식사가 필요하다. 과식은 금물이다.
피정의 주제나 내용에 따라서 적절한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성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의한 피정에서 죄를 묵상하는 첫째주간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묵상하는 ‘셋째주간’에서는 필요한 극기를 위한 단식이나 식사량을 조절하는 것이 권고되기도 한다. 그러나 항상 자신의 건강 상태나 나이 등을 고려해서 지도자의 안내에 따라 행해져야 한다.
피정에서 충분한 수면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충분한 수면으로 몸과 마음의 컨디션이 좋아야만 기도 속으로 깊이 침잠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성 이냐시오 당시에는 보속으로 고행을 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기 때문에 그는 '피정을 잘 하기 위한 부칙'에서 잠자리에 대한 고행을 언급한다. 여기에서 이냐시오는 “적당한 잠자리에서 필요한 어떤 것을 줄이면 고행인데 몸도 상하지 않고 병도 나지 않는 범위에서 적절하게 해야한다”고 말함으로써, 지나친 고행을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잠을 너무 많이 자는 나쁜 습관이 있어서 그 악습을 고쳐 중용에 이르고자 하는 지향이 아니라면 필요한 수면 시간을 줄여서도 안 된다. 그러나 오늘날 고행이 더 이상 적절한 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지만 “어떤 문제의 해결을 원할 때 하느님의 도움을 구하기 위해서 고행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성 이냐시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영신 수련 84 참조).
첫댓글 정 신부님은 "여러분의 피정 나눔은 다음 편을 기다리게 하는 연속 드라마 이다"하고 말씀하시면서 그 드라마의 제목을 정해 보라고 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