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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5월의 이달의 6·25전쟁영웅 <도태철 대한민국 육군 중위>
국가보훈부는 6·25전쟁 당시, 적진에 침투해 성공적으로 정찰 임무를 완수하여 아군의 전략적 핵심 고지 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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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태철 대한민국 육군 중위
(1928.2.17.~1951.11.17.)
국가보훈부는 6·25전쟁 당시, 적진에 침투해 성공적으로 정찰 임무를 완수하여 아군의 전략적 핵심 고지 확보에 크게 기여한 <도태철 대한민국 육군 중위>를 ‘2025년 5월의 이달의 6·25전쟁영웅’으로 선정했습니다.
도태철 중위(전투 당시 계급: 소위)는 6·25전쟁이 발발하자 육군종합학교 제30기(통신간부후보생 제11기)로 입교, 1951년 9월 1일 소위로 임관한 뒤 국군 제6사단 제7연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했습니다.
당시 국군 제6사단은 중부 전선을 담당하던 미 제9군단의 우익 부대(전선 분할 시 오른쪽을 담당하는 부대)로 1951년 10월, 강원도 김화군 일대의 교암산과 금성 지역으로 북상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국군 제6사단의 빠른 진격으로 미 제9군단과 미 제10군단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고 일부 전선이 돌출되면서 적군이 침투할 수 있는 약점이 생겼습니다. 미 제8군 사령부는 전선을 정비하기 위해 ‘개리(Gary)선*’을 새롭게 설정하고 국군 제6사단에 해당 선을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 개리선(Gary Line): 6·25전쟁 당시 중부 전선 일대에 설정된 가상 방어선
하지만, 개리선 확보 작전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해당 지역은 북한강 상류의 물살이 세고 변화가 심해 도하가 어려웠고, 더구나 중공군은 방어에 유리한 주변의 험준한 산악 지형과 고지들을 차지하고 있어 오히려 반격당할 가능성이 컸습니다. 개리선의 핵심 거점인 949고지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신속하고 정확한 정찰과 공격이 필요했습니다.
1951년 11월 17일 새벽, 도태철 중위는 연대의 도하 지점과 적의 상황(위치, 병력, 무기 등)을 파악하라는 명령을 받고 소대원 5명과 함께 적진으로 침투했습니다. 그는 강변에 높이 2m 강둑이 길게 형성되어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소대원 2명을 강변에 잔류시키고, 나머지 대원들과 함께 강둑을 넘어 정찰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이후 강둑에 설치된 중공군의 기관총 진지를 발견한 도 중위는 해당 위치를 지도에 표시하고 소대원들에게 “이 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전달하라”고 지시한 뒤, 더 자세한 정보수집을 위해 홀로 적진 깊숙이 향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습니다.
연대에 복귀한 소대원들은 적의 상황이 기록된 보고서를 연대본부에 전달했고, 이를 바탕으로 국군은 신속하게 도하작전을 전개하여 949고지 확보에 성공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 141명이 전사했고, 포로 13명이 생포되었으며, 박격포와 기관총 등 다수의 장비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52년 5월, 소위에서 중위로의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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