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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드심의 행복
잠 23장 22~26절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우리는 어버이 주일을 통해서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십계명을 다시 새겨 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길까요?
보이는 부모님을 잘 섬겨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부모님을 섬겨야 하는 것이 우리라는 것입니다.
서울 인왕산 기슭에 지금의 경복궁 옆에 <효자동>이 있습니다.
그 동네가 효자동이 된 아주 유명한 전설이 있습니다.
할아버지의 실수로 인하여 손자가 이불 밑에서 깔려 죽었습니다.
이 사실을 할아버지는 모르시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어머니는 시아버지가 이 사실을 알면 얼마나 마음이 아프실까 해서
죽은 아이를 안고 남편에게 왔습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남편은 죽은 아이를 보고
『이 불효자식아, 할아버지 마음을 그토록 아프게 하다니』 하면서
죽은 아이의 뺨을 불이 나게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죽은 아들이 눈을 번쩍 뜨더랍니다. 살아났다는 것입니다.
이 소문이 퍼져서 임금님의 귀에까지 전해지자
임금님은 그 동네를 효자동이라 부르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대로 된 것입니다.
성경에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20:12)하였는데
부모님을 공경하면 장수할 뿐만 아니라
자손의 대가 끊어지지 않고 자손들이 번성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그 예가 룻이지 아닙니까?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남편도 죽고, 자식도 없고, 혼자 된 몸이지만,
시어머니를 섬기겠다고 모압 땅에서 베들레헴으로 왔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여인에게 복을 주어 보아스와 결혼을 하고,
그의 증손자로 다윗이 태어났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축복하여 그 자손이 영원할 것이라 했습니다.
효도하면 내가 잘 될 뿐만 아니라 그 자손까지도 잘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가문의 가장 중요한 가훈은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시대가 뒤숭숭해서 효도는 고사하고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를 죽이는
너무 무섭고 잔인한 패역한 시대가 된 것을 봅니다.
우리는 왜 이럴까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하고
무엇이 우리 가정에 중요한 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주인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가정에 진짜 주인이 없기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는 것입니다.
그 주인은 누구입니까? 주인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가정은 결코 흔들리지 않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시련이 와도 사랑으로 부등켜 안고 해결합니다.
미움이 있고 원망이 있어도 사랑으로 덮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주인이 되지 않고
내가 주인이 되고, 돈이 주인이 되려고 하면
그 가정은 무너질 수 밖에 없습니다.
견고하게 설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수아처럼 우리 집안은
‘하나님만 섬기는 가정이 되자’고 하면서
하나님만 섬기고 예수님만 주인이 되는 가정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부모님께 효도합니까?
효도하는 방법은 시대마다 다르고 사람마다 다릅니다.
하지만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에게 기쁨이 있게 하면 효도가 됩니다.
잠언 10장 1절에 『지혜로운 아들은 아비로 기쁘게 하거니와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니라』 하였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면 그것이 효도입니다.
제주도 어느 가난한 가정에 모자가 살고 있었는데,
어머니가 그만 중병에 걸렸습니다.
효자 아들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써 보았으나
어머니의 병은 더 중해지기만 하였습니다.
그래도 아들의 정성은 여전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꿈에 하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는,
『네 어머니는 요한복음을 먹으면 나을 것이다』하고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오래 전이라 요한복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아들은 약방을 모조리 다니면서
요한복음이라는 약을 찾았습니다.
그러나 제주도 어느 곳에도 그런 약을 파는 데가 없었고,
부산에 까지 와서 뒤졌지만 그런 약을 파는 데는 없었습니다.
서울까지 와서 뒤져보았으나 헛수고였습니다.
크게 실망한 아들이 집으로 다시 내려가려고 서울역 대합실에 들어갔는데
바로 거기서 어떤 사람이 『예수 믿으세요!』하면서
나눠 주는 책에 『요한복음』이라고 쓴 것이 언뜻 보였습니다.
그 책을 한 권 얻어 가지고 온 아들이 거기에 무슨 약 처방이 있나 하여,
어머니 머리맡에서 날마다 읽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의 병이 스르르 사라졌고,
그 일로 인해 제주도에 처음으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 아들은 요한복음을 읽으면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린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어머니가 일어난 것입니다.
부모님이 나이 드시면 한 말을 또 하고 또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 소리 또 한 다고 싫어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스마트폰을 어떻게 할 줄도 모르고
어플을 어떻게 사용할 줄도 모르는데
그것도 모르냐고 무시당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존심 상해할 때에 속이 많이 상합니다.
그런데 자식들은 그것을 잘 모르고 부모님의 속을 긁어 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님께 효도하는 자식들은
그런 것 까지도 감안하여 부모님의 마음을 불편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한 말을 또 하고 또 한다고 할지라도
처음 듣는 말처럼 할 때에 내가 편하고, 부모님께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농촌에서 농사를 짓는 아주 효성스런 아들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연로하신 어머님께서 『얘, 논에 농약을 쳤느냐?』하고 물으니까
그 아들이 『예, 어머니 고맙습니다. 하마터면 제가 깜박 잊을 뻔했는데요.』
하면서 농약통을 메고 논으로 나갔다고 합니다.
실은 그 아들은 서너 시간 전 오전에 농약을 치고 들어왔습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말씀을 하시니까 어머니께서
흐뭇해 하며 기뻐하시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던 그 아들은
농약통을 메고 다시 논에 나가서 한두 시간 후에 돌아온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말에 공감해 주고, 함께 있어 주는 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것이 효도라 했습니다.
반면에 근심을 주는 것을 하면 안됩니다.
잠언 10장 1절에서 “미련한 아들은 어미의 근심이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께 아픔을 주고 고통을 주고 근심을 주는 것은
자식의 도리가 아니며 부모님께 불효하는 것입니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소년 때에
『장차 크면 배 항해사가 되어야지, 뱃사람이 되어야지.』 하고
꿈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공부도 선원이 되는 공부를 했고, 또 이를 위해서 준비했습니다.
젊은이로 성장했습니다. 모든 짐을 꾸려서 배에 옮기고 집을 떠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의 마음이 얼마나 슬펐겠습니까?
자식이 떠나서 바다에 나가면 언제 돌아올지도 모르고,
또 실제 돌아올지 안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어머니가 워싱턴의 손을 꼭 잡고 기도를 해주면서
눈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셨습니다.
이때 워싱턴은 『내가 어머니에게 이렇게 마음 아프게 하면서까지
뱃사공이 되겠다, 선원이 되어야 되겠다 하는 것은 잘못이지 않겠느냐.』 라고
생각한 나머지 일꾼들에게 배에 싣고 있던 짐을 다 내리게 한 다음
집으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이 된 다음 후대에 젊은이들에게 말하기를
『부모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시지 않도록 하라.
부모에게 눈물을 흘리게 하고
부모의 가슴에 못을 박는 사람치고 잘되는 사람은 없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릴 때 하나님의 축복이 이뤄진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부모님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자식은 잘 될 수 없습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기뻐하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사람입니다.
부모님이 내 곁에 계실 때 정성껏 모시는 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자식의 입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부모의 입장에서 사시는 성도들은,
앞으로 살고 싶다면 몇 살까지 살고 싶습니까?
대부분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제가 경험한 바로는 빨리 죽고 싶은 분은 거의 없습니다.
대부분이 건강하게 오래 살다가 갔으면 합니다.
『백년을 살아보니』라고 하는 책을 쓴 김형석 교수님이 있습니다.
이 분은 거의 백세를 살아보시고 이 책을 쓰신 것입니다.
우리 중에 거의 100세를 사시고 책을 쓰신 분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분에게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듣는 다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그래서 100세를 사신 분이 무슨 말을 했는지 귀담아 듣는다는 것은
매우 귀하고 중요한 일입니다.
이 분이 『백년을 살아보니』라는 책에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바람직스러운가?”
이 분의 이야기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래 사는 것이 바람직한 가 했을 때
“나 자신이 행복하게, 그리고 이웃 사람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줄 수 있을 때까지 살 수 있다면
그것으로 감사해야 할 것 같다.
나도 고통을 겪어야 하고 이웃에까지 부담과 어려움을 끼치면서
오래 산다는 것은 지혜로운 생각이 아니다.” 고 했습니다.
김형석 교수는 오래 살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며
고통을 안겨주면서 산다는 것은 불행스럽고 저주스러운 일이라고 보면서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될 까지 사는 것이
최상의 인생이라고 본 것입니다.
장수보다는 좀 더 오래 많은 일로 봉사할 수 있게 해달라는 소원이
장수의 가치와 의미라는 것입니다.
100세를 사신 분으로서 참으로 귀한 말을 했습니다.
장수의 가치와 의미를 잘 설명해 준 것 같습니다.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고, 좀 더 오래 많은 일로 봉사하는 것이
장수의 가치이고 의미라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성도 여러분들이 “나는 빨리 죽어야지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일을 할 수 있겠는가
어떻게 하면 좀 더 오래 많은 일로 봉사할 것인가를 가지고
김형석 교수님처럼 장수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여러분은 마지막까지 남기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김형석 교수님은 나이 들면서 많은 것을 잃어가고 있다고 했습니다.
90고개를 넘기면서 자신을 위해 남기고 싶은 것은
다 없어진 것 같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오직 남기고 싶은 한 가지가 있다고 하면
그것은 바로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베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랑이 있는 고생, 이것을 죽을 때까지 남기고 싶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다 잃어도 사랑이 있는 고생만은 남기고 싶다고 합니다.
우리는 재산을 남기고 이 세상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느 정도 재산을 가지는 게 좋은가 라고 했을 때에
인격의 수준 만큼 가져야 한다고 합니다.
인격의 수준이 50정도 인데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는 재산이 많아서
90의 재물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불행이 되고 고통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격의 수준만큼 재산을 가져야 행복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을 살 때에 마지막 까지 남길 수 있는 것은
재산이 아니라 “사랑이 있는 고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하여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데살로니가 교회를 기억한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도 믿음의 역사가 있고 사랑의 수고가 있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 성도들로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말씀을 결론 맺겠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그 명령은 인간에 주신 첫 번째 계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외롭지 않고 항상 함께 해 드리는 것입니다.
같이 있어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편하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근심을 주지 않고 불안과 걱정을 드리지 않습니다.
내 입장에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입장에서 부모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한 소리를 또 하고 또 한다 할지라도
처음 듣는 것처럼 공손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모님을 공경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내가 축복을 받으며 자손이 잘되고 가문이 빛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모로서 이 세상을 사실 때에 무작정 오래 사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사랑을 하며 살 것인가, 얼마나 사랑을 위해 수고를 할 것인가
얼마나 행복한 마음을 더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인가
장수의 의미와 가치가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나이가 드셔도 행복하고
그 행복을 마지막까지 나누며 살겠다고 하는
모든 성도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