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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의 기원』- 생각의 탄생과 진화
200여 년 전에 ‘찰스 다윈(1809∼1882)’이 『종의 기원』이라는 책을 펴내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다른 책에서 보았다. 『생각의 기원』이라는 이 책은 다윈의 진화론과는 다른 주제를 다루지만, 일맥상통한다는 점이 없지는 않아 보인다. 책의 부제가 「영장류학자가 밝히는 생각의 탄생과 진화」라고 한데서 그런 감을 느끼게 한다. 다윈은 실험과 관찰, 경험을 중시한 영국의 생물학자지만, 이 책의 저자 ‘마이클 토마셀로’는 독일에서 태어났고 막스 프랑크 〈진화인류학연구소〉공동소장을 맡고 있고, 세계적인 영장류학자이며 심리학을 전공했다는 차이가 있다.
“유인원 중에서 어떻게 사피엔스만이 문명을 이룩할 수 있었을까? 이 위대한 질문에 답할 단 한 명의 과학자라면 그는 단연코 마이클 토마셀로 여야 한다. 마이클 만큼 인간과 다른 유인원 종들 사이의 미묘한 간극을 깊이 들여다본 지구인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이토록 독특한 영장류로 진화했는가에 대한 해설서 정도가 아니다. 노벨상급 연구의 요약본이다.”라고 이 책을 추천한 서울대 장대익(자유전공학부)교수 말에서 “왜 인간(인류)만이 독특한 능력(생각)을 가지고 진화했으며 문명을 이룩했는가?”라는 질문에 진화를 통해 가지로 뻗어 나온 무수히 많은 유인원 중에 유독 사피엔스만이 예외였던 이유를 알고 싶어지는 이유기도 하다.
(1) 지향성 공유
인간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하는 것처럼 사회성에 바탕을 둔 인간의 사고능력은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작동할까? 학자들은 문화의 역할을 강조해 사회문화가 구성원들의 생각을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예컨대 “사회의 관습과 제도, 이데올로기가 구성원의 생각을 주조하는 거푸집과 같다”(헤겔)거나, “인간의 모든 정교한 생각이 아라비아 숫자와 논리, 기호에 의해서 가능해졌다”(찰스 샌더스 퍼스)거나, “언어적 기호의 영향을 받으며 자란 아이들이 기호 사용을 내면화한 것에서 그것이 인간의 원형”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레프 비코츠키)
사회적 조정을 중요시하여 사람들의 상호작용(소통)이 문화 언어를 만들어 냈을 뿐 아니라, 그 덕분에 개인의 관점을 공동체의 규범 아래 놓을 수 있었다.(조지 하버드)고 하기도 하는데, 이것은 이른바 사회성 이론가들의 이론으로 언어와 문화를 케이크 장식 정도로 치부하며 고도의 사회성에 기반한 인지적 상호작용을 더 근본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아닌 다른 영장류도 놀랍도록 정교한 인지능력을 갖고 있다. 최근 20∼30년간 연구는 대형 유인원은 인과와 지향성을 이해하며, 물리적·사회적 측면을 사람과 같은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을 알았고, 인간의 사고는 인간 특유의 사회성, 문화, 언어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유인원의 문제 해결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초기 인류는 공동활동과 ‘관련된’것에 대한 상대방의 관심을 요구하고 상대방이 그것을 상상할 수 있도록 관점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했으며 상대방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협력적인 추론을 했다. 그래서 의사소통을 하려는 사람은 상대방의 추론을 미리 예측해야 했다. 인간은 생각하면서 생각의 진화를 이루었다. 유인원 조상에게서 출발해 특유의 방식으로 협력하고 소통했던 초기 인류를 지나면서 문화와 언어를 구축한 현대인류에 이르게 된 것이다.
(2) 개인 지향성
인지능력과 생각은 예측하기 어려운 세계에 대응하기 위해 등장했다. 자연선택은 새로운 상황을 인지하고 돌발 상황에 유연하게 대처하는 의사 결정 과정으로 진화되었다. 인과지향성(因果指向性)을 파악한 생명체만이 새로운 상황에 적절한 행동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 침팬지도 어떤 상황에서 문제를 만나면 활용 가능한 도구를 인지한다. 인지능력이 뛰어난 도움은 목표를 설정하고 인과의 지향성을 파악하기 위해 ‘관련된’상황에 관심을 가지고 적절한 행동을 선택한다. ‘믿음=욕구’라는 모델과 기본적으로 동일하다.
목표 가치 지향성은 생명체를 행동하게 만든다. 어떤 물건이나 장소를 목표로 설정했을 때, 그 물건을 확보하는 행위와 장소에 도달하는 행위를 목표로 삼는다는 것이다. 먹이를 찾는 침팬지가 과일나무를 바라본다고 상상해 보자. 침팬지와 인간은 동일한 방식으로 장면을 인지한다. 사물을 지각하고 공간적 관계를 파악한다는 점에서 시각적 시스템은 둘이 거의 동일하다. 그런데 침팬지는 이후 발생 가능한 무한대의 상황을 고려할 수 있다 하더라도 먹이와 관련 있는 상황 또는 ‘사실’에만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행동과 그 결과를 시뮬레이션으로 관찰한다. 또한 성공 가능성을 판단하기 위해 정보를 평가하기도 한다. 인간은 심지어 다른 사람이 상상으로 수행한 시뮬레이션 결과를 의사소통을 통해 알아내고 미래의 행동 결과 예측에 활용하기도 한다. 어떤 형태든 내적 자기관찰을 통하여 행위자가 자신의 행동을 알게 한다는 점에서는 생각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인간만이 가지는 특유의 생각은 어떻게 진화했을까? 침팬지 등 대형 영장류와 인간이 분화한 시점을 대략 600만 년 전으로, 이때의 초기 인류를 연구하는데 가장 좋은 모델이 네 종류의 대형 유인원인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우랑우탄이다. 이들 네 종은 인지능력이 서로 비슷하나 인간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에서 인간의 마지막 공통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능력이 뭔가 새로운 형태로 진화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영장류의 인지능력은 주로 먹이와 관련하여 진화했다. 원숭이는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도 안다. 실험에서 침팬지들은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알 뿐 아니라,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는 정보를 더 모으려고 했다. 유인원들이 일종의 자기관찰이나 평가를 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상상의 원인과 결과에 대해서만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지식과 기억에 대해서도 관찰한다. 그러한 지식과 기억은 성공적인 행동 가능성을 추론하기 위해 사용되고, 이것은 인간에게서 보이는 자기성찰은 아닐지라도 대형 유인원은 생각의 3요소, 즉 추상적인 인지 표상(모델), 원형 논리적 추론인 패러다임, 심적 자기관찰과 평가에 모두 능숙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인지적 표상, 추론, 자기관찰로 이루어진 유연하면서도 규제된 의도적 행동은 복잡한 상황에서의 경직된 적응적 전문화가 진화한 것이다. 실험에서 대형 유인원이 유연하고 지능적이고, 자기 규제 방식으로 생각하며 언어와 문화, 인간 수준의 사회성 없이도 그것들을 해낸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준다. 그러나 유인원의 인지적 자기관찰에 회의적인 학자도 많다. 대형 유인원들은 생각의 구성 요소 각각을 활용하여 인지적으로 복잡한 과정을 수행하기도 하는데 반해, 인간의 생각은 이와는 다르게 진화되어 왔다.
유인원들도 하나의 주체가 여러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안다. 또 ‘동일한 행위’라도 주체가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도 안다. 뱀도 나무에 오르고, 표범도 나무에 오르고, 원숭이도 나무에 오를 줄 안다는 것을 알고 이해한다. 이들은 능숙하게 동료들의 행위를 따라 할 수 있고, 자신을 모방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나 그 모방은 단지 자신과 다른 개체의 일로 이해한다. 나무에 오르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동물을 처음 만나도 위급할 때 나무 위로 도망칠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인간이 하늘을 나는 표범을 상상하는 것처럼 인과적 이해관계에 상반되는 것을 상상할 수도 있지만, 이것은 유인원에게는 어려운 것이다. 유인원의 모방이 순차적이라는 점에서 자타 등가성 인식도 한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대형 유인원들의 인지능력은 온전히 경쟁을 위한 것이다. 반면 인간의 인지능력은 온전히(또는 대체로) 협력을 위한 것이다. 인간사회는 다른 영장류보다 훨씬 협력적이다. 생태계가 바뀌면 새로운 유형의 협력이 요구되고, 새로운 의사소통이 진화한다.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다른 사람들과 사회적 상호작용을 경험하기도 하고 새로운 유형의 표상·추론·자기관찰 능력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3) 공동 지향성
인간의 생각이 침팬지와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협력하는 데는 반드시 복잡한 인지 기능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단순한 인지 기능을 가진 곤충들이 협력하는 데, 얼마나 복잡하게 행동하는지 꿀벌과 개미들의 활동을 통해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지능력이 뛰어나다고 보기 어려운 ‘마모셋원숭이’들은 공동 육아를 하고 먹이를 나눠 먹기도 한다. 옛날 인간과 대형 유인원의 공통 조상들은 경쟁을 위해 이미 상당히 복잡한 수준의 사회적 인지능력을 갖추고 타인을 조정(調整)했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조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개인 지향성’에 ‘공동 지향성’이라는 복잡한 프로세스를 추가로 발달시켰다. 또 유래없는 도전을 만들어 냈다.
침팬지 무리가 원숭이를 사냥할 때는 복잡한 인지 과정이 필요할 수도 있고, 의외로 단순할 수도 있다. 침팬지는 원숭이 사냥이라는 공동 목표를 가지고 각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각각의 침팬지는 자신이 원숭이를 잡고 싶어 하며(그래야 많은 고기를 차지하므로), 다른 침팬지에게 빼앗길까 봐 다른 침팬지들의 행동과 의도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침팬지들은 사냥감을 놓치는 것보다 무리 중 누구라도 원숭이를 잡아주기를 바란다. 구걸하거나, 애걸해서라도 조금이나마 얻어먹는 것이 아예 먹지 못하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이것은 각자의 목표를 추구하는 공동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사자와 늑대의 단체 사냥도 인지적인 측면에서 명확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반면에 인간이 먹이를 구하는 방식은 훨씬 근본적인 데서부터 협력적이다. 현대 인류는 날마다 식량의 상당수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생산하거나, 그것을 위해 직접 협력하기도 하고, 중앙저장소에 저장한 식량을 공유하기도 한다. 식량뿐 아니라 다른 활동에서도 침팬지와 다른 방식으로 협력한다. 유인원이 주로 개별적으로 행동하는 반면, 인간은 대체로 협력적이다. 예를 들어 인간은 공동육아를 하기도 하지만 유인원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상대방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려고 하기도 하지만, 유인원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공동 문제를 공동으로 결정하고 해결하지만, 유인원은 그렇지 않다. 인간은 사회적 규범이나, 제도 심지어 관습과 언어 같은 여러 사회구조를 만들고 유지하지만, 유인원은 그렇지 않다.
현대사회는 잔인한 전쟁과 이기심, 경쟁으로 가득 차 있고, 이 중 많은 부분이 다른 집단과의 갈등 때문에 생긴다. 하지만 그것은 불과 1만 년 사이의 일이다. 인류 역사 수백만 년 동안 소규모 협력집단으로 지내다가 농경 생활을 시작하면서 사유재산과 부를 축적하고 경쟁하기 시작했다. 200만 년 전쯤에는 아마도 야생의 과일이나 채소를 따 먹는 일에 ‘개코원숭이’가 인간보다 우위에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틈새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고, 연합하여 사냥감을 잡은 동물을 쫓아내고 그것을 차지했다. 그러다가 어느 시점부터 적극적인 협동 사냥이 시작되어 사냥감을 잡거나 곡물을 채집했다. 모두가 만족하는 윈-윈전략으로 협력하는 동물의 기원이 시작된 것인데, 이것은 약 40만 년 전 호모 하이델베르겐시스 시대로 네안데르탈인이 나타나기 이전에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최근에 아이들과 침팬지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짝과 협력해서 먹이를 끌어오거나 혼자서 동일한 양의 먹이를 끌어오는 선택이 주어졌을 때, 아이들은 협력하기를 훨씬 선호했으나, 침팬지는 협력 여부와는 상관없이 먹이의 양이 많은 쪽을 선택했다. 고대의 대형 유인원이 몸짓과 목소리를 이용해 역할을 분담하고, 공동으로 계획을 수립할 수 없었던 데는 이유가 두 가지 있다. 첫째는 온전히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만 몸짓과 목소리를 사용하여 공동의 목적을 위한 협력에는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고, 둘째, 타인의 행동을 직접적으로 조정할 목적으로 몸짓과 목소리를 사용했으며, 협력을 위한 행동과 관심을 조정하기 위해 활용하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초기 인류의 손가락 지시는 협력 커뮤니케이션의 첫 번째 사례였으며, 손가락 지시가 요청인지, 정보전달인지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은 특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다는 진화적 주장이 가능하다. 어떤 시점이 되자 초기 인류는 타인과의 상호 의존성을 협력 활동을 하고 있을 때뿐만 아니라, 더 넓은 의미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나의 이득을 위해서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상대방을 위해 유익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명확히 구분할 줄 알았다는 것이다. 지시의 표현이거나, 요청하거나 정보를 제공하는 두 가지 다른 동기가 생겨났으며, 모든 사람들이 이것을 이해하고 사용할 수 되었던 것이다.
생각은 상상의 한 형태에서 비롯되었다. 인간 특유의 생각이 진화발달과정에 다른 사람을 위한 상상에서 온 것이라면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인간의 인지를 연구하는 거의 모든 연구자들은 공간적 개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으며, 특히 1차 인지능력과 공간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최근 몇몇 이론가들은 인지와 공간의 관계를 깊이 연구했다. 흔히 사랑에 빠진다거나, 성공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거나, 마음이 떠났다고 하는 이런 표현들은 단지 표면적인 비유가 아니라 복잡하고 추상적인 상황을 개념화하는 기본적인 방법이다. 인간 초기에 관습 언어가 생기면서 가설과 같이 제스처가 나오게 되었다면 이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인류 초기에는 가상공간에서 가상의 인물을 대상으로 가상의 행위를 연기하여 타인에게 무언가를 전달하려고 했던 것을 가장 중요했던 근거로 추정할 수 있으며, 이는 관습화되지 않은 것을 묘사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가상의 공간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인간의 생각이 의사소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면(생각이 타인을 위해 사물을 개념화하는 방법이라면), 역사의 어느 한 시점에 ‘팬터마임’이 공간적인 행위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인간의 인지능력과 공간의 각별한 관계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은 언어와 문자에 전혀 노출되지 않은 아주 어린 시기에도 제스처와 목소리를 조합하여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 낸다.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들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 지시를 조합하기도 하고, 글자를 배우는 아이들은 손가락 상징 기호나 관습 기호를 손가락 지시와 함께 사용한다. 무언가 먹는 모습을 팬터마임으로 연기하며, 손가락으로 과일을 가르키는 행위는 진화적인 맥락에서 쉽게 상상해 볼 수 있다. 초기 인류는 경쟁을 통해서만 식량과 짝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다. 인류는 새롭게 진화한 협력 활동과 협력 커뮤니케이션으로 다른 사람들의 행동과 상태를 조정했다. 그들은 개인의 목적만이 아니라 공동 목적을 위해서도 행동했다.
우리는 상대방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해한다. 반면, 유인원은 물리적 세계와 사회적 세계에서 인과를 추론하고 시뮬레이션하지만 다른 유인원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서는 추론하지 않는다. 이러한 재귀(再歸-再歸本能) 추론은 초기 인류가 공동 목적을 위해 협력하면서 행동과 관심을 조정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협력 커뮤니케이션에서 자신의 지향적 상태와 관점을 타인과 조율하려고 시도하면서 절정에 이르렀다. 영장류의 사회적 인지능력은 주로 먹이와 짝을 두고 벌이는 집단 내부의 경쟁을 위해(마키아벨리즘), 친목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려는 목적으로도 활용되었다.
다른 영장류와 인간의 마지막 공통 조상의 생각은 의심할 여지 없이 개인적이었다. 그들의 생각은 집단 구성원과의 경쟁에서 개인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목적과 관련된 여러 상황에 참여했고 변화된 생태계에서 적응하고자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며 협력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공동 목적과 연관된 상황에 함께 참여했으며, 한편으로 각자의 역할과 관점도 있었다. 중층적 구조(dual lever structure)가 공동 지향성을 지탱하게 되고, 이후에 지향점을 공유하는 기반이 되었다.
(4) 집단 지향성
대형 유인원 중에 침팬지와 우랑우탄은 인간 다음으로 더 문화적이다. 사회적 학습은 이들에게도 관찰된다. 그러나 이들의 문화는 인간의 문화와는 다르다. 이들은 다른 유인원의 행동을 몰래 보고 배운다. 그것은 ‘착취’적이다. 반면에 현대 인간은 ‘협력’적이다. 어른은 아이들을 가르치고 아이들은 순응한다. 교육은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알려주는 협력 커뮤니케이션에서 기본 구조를 차용한 것으로 집단의 규범적 기대에 부응하려는 욕구를 모방한 것이다. 인류사회는 유인원 사회로부터 불쑥 나타난 것이 아니라, 초기 인류의 협력을 바탕으로 진화했다.
인간 개인은 하나의 문화를 공유하는 특정 사회집단의 일원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이해하기 시작하고, 집단 전체를 포괄하는 ‘우리’의 지향성에 기반한 문화적 토대가 마련된 것이다. 즉 같은 방식으로 말하고 요리하고 물고기를 잡는 사람들은 문화적 관행을 공유하는 사람들로 같은 문화집단에 속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교육과 순응은 톱니바퀴처럼 문화의 누적적 진화를 가져왔다. 집단의 정체성은 집단 내부의 사람들과 조상과 자손에 이르기까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서 확장되었으며, 이것이 바로 인류가 문화를 구축한 방식이었다. 어른은 가르치고 아이는 배우면서 문화적 관행이 세대를 넘어 전수되고, 집단은 누적적으로 문화를 만들어 갔다. 하지만 초기 인류는 당대에 소규모 협력에만 전념했다. 정확히 언제 이런 일들이 일어났는지 하는 것은 중요하진 않지만, 인간 특유의 문화를 나타내는 명백한 징후는 약 20만 년 전에 시작된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즉, 현대 인류에게서 나타났을 것이다.
인구가 많아지고 경쟁이 심해지면서 집단 구성원들끼리 상호 의존적인 잠재적 협력자로 여기기 시작했는데, 구성원들은 특정 문화 관행에 따라 손쉽게 식별되었고, 생활방식에 대한 교육과 순응이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새로운 집단적 사고방식에 의해서 문화적 관행, 규범 및 제도와 같은 것이 생겨나고 구체화 된 인간 생활의 집단화가 이루어지면서, 또 한 번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게 했다.
먹이를 구할 때마다 즉석에서 이루어졌던 초기 인류의 소규모 협력은 안정적인 진화 전략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인구학적인 두 가지 문제가 발생해 전략을 수정해야 했다. 첫째 문제는 집단 간 경쟁이었다. 침략자로부터 자신의 삶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느슨한 협력조직보다 제대로 된 집단을 이루어야 했다. 분업체계를 갖춘 협력집단이 필요했다. 이는 서로 도우려는 동기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힘을 모아야만 했다. 이때 집단 전체를 포괄하는 ‘우리’의 지향성에 기반한 문화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했다.
두 번째 문제는 인구 증가였다. 규모가 커지면서 여러 부족이 하나의 상위 집단으로 묶이고, 단일 ‘문화’를 공유하는 부족들이 생겼다. 이는 서로를 식별하는 문제가 중요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도 상대방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지만, 상대도 나를 알아볼 수 있어야 했다.’집단의 구성원이어야만 가치를 공유하고 협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대 인류 사회에서는 집단 정체성이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지만, 초기에는 행동으로 표시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문화관행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같은 문화집단에 속할 가능성은 매우 높았다.
이제 현대 인류는 원숭이처럼 단지 인과적이거나 지향적인 관계를 생각하거나 초기 인류처럼 객관화하고 재귀화하는 것이 아니라, 관습적 언어 덕분에 새롭게 가능해진 추론을 하고, 내적 대화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성찰하는 새로운 방식을 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이 협력적 논쟁이라는 특수한 맥락에서 작동할 때, ‘논증’이라 할 수 있는 결과로 나타난다. 그래서 현대 인류는 문화집단의 규범적 기준의 맥락에서 논증을 제시하고, 성찰적으로 추론할 수 있게 되었다. 초기 인류는 협력적 자기관찰과 의사소통적 자기관찰에 참여했다. 현대 인류는 문화적인 삶의 방식을 통해 집단의 문화적 규범에 따라서 행동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현대 인류는 의사결정 과정에서 양자 간 압력을 느낄 뿐 아니라, 집단의 규범적 압력까지 느낀다. 약속을 지켜야 하는 이유는 상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서 집단의 ‘우리’가 그것을 지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규범이 좀 더 일반화되면 집단 정체성이 된다. 집단의 일원이 되고 싶다면, 그들처럼 행동해야 하고, 나를 포함한 집단 안에서의 모든 사람들이 결정한 규범을 따라야 한다는 말이다.
현대 인류의 생각과 논증은 규범적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구조화되고, 규제된다.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에 참여하려면 관습을 따라야 하고, 집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거나 협력적 논쟁을 할 때는 논증의 규칙에 동의해야 한다. 집단 의사결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내’가 유용한 역할을 해내길 원하기 때문에 추론과 논쟁의 규범을 따르고, 집단적으로 합의된 명제 및 주장과 연결함으로써 정당화된 참된 주장을 하길 원한다. 내면화를 통해 이러한 의사소통 과정은 개인적인 논증으로 발전한다. 실제로 집단의 사회적 규범을 고려하여 행동을 스스로 조절하기도 한다.
다른 유인원들이 적도 부근에 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인류는 지구 곳곳으로 이주해 살고 있다. 개인이 아니라 문화적 집단을 이루면서 이주해 왔다. 인간 개인은 한 서식지에서 혼자 오랫동안 생존할 수 없다. 대신 특정한 환경에서 바다표범을 사냥하고, 이글루를 건설하고, 덩이줄기를 수확하고 활과 화살 같은 전문적이고 복잡한 문화 관행을 개발하고 과학과 수학도 만들었다. 초기 인류는 공동 목적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협력하고 소통하면서 꽤 잘 살았다. 그런데 심각한 인구문제로 집단의식과 순응성의 큰 물결이 인류사회를 뒤덮었다. 그래도 관습적인 문화관행을 개발했고, 복잡한 협력으로 활동을 조정하면서 관습 언어를 개발했다. 또 도덕과 합리성에 관한 사회적 규범을 만들었으며, 초기 인류는 함께 살고 다른 사람들과 공동으로 상호작용했다. 지금도 그렇다.
(5) 협력에 기원을 둔 인간의 생각
인간만이 가지는 전유물이 있다면 그것은 생각이 깃든 사회성이다. “사회적인 기원을 가지고 역사 속에서 발전한 행위들의 내면화는 인간 정신의 고유한 성질이다.”고 철학자 레프 비코츠키가 말했다.
현대 인류의 인지 구조를 살펴보는 방식으로는 진화가 진행됨에 따라 기존의 구조들을 수선하면서 새로운 기능들이 만들어졌던 진화의 과정을 기술하기는 어렵다. 진화의 동적 측면은 ‘공통 조상’을 통해 많은 인지 기능이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동수렵 등 목적을 설정하는 기술은 말할 것도 없고, 빨리 달리기, 정확한 던지기, 숙련된 추적과 같은 개별 능력을 필요로 할 때, 인류 각각은 다른 진화적 기능을 갖는다. 즉각적이고 시급한 문제를 해결한 후에는 인지 기술이 어떻게 연관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계층적 구조를 파악해야 했다.
걷기만 하는 것보다는 걷기도 하고 날기도 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왜 인간은 날지 못할까? 그럴듯한 진화적 설명이라면, 특정한 인지 기술을 보유한 개체가 특정한 이점을 가지는 상황에서의 적응적 시나리오를 제시해야 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 침팬지와 우랑우탄이 인지능력에서 인간과 차이가 난다면 서로 다른 과제에서 일정한 차이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물리적 상황을 다룰 때 인간 유아와 유인원은 매우 유사한 인지능력을 보였다. 언어를 사용하지만, 아직은 책을 읽거나 수를 세지 못하는 아이들은 이미 사회적 세계를 다루는 데 유인원보다 조금의 정교한 인지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 별 차이가 없었다. 인간이 다른 유인원보다 거의 모든 면에서 똑똑한 이유를 일반지능의 차이라기보다 협력하고 소통하고, 문화 속에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새로운 것을 배우기 위해 특별한 기술을 사용하며 자라기 때문이라는 ‘가설’만 남는다.
인간의 사회성을 설명하는 많은 이론이 있지만, 1만 년 전 농업, 도시, 계층화된 사회가 출현하기 전까지 인간과 유인원이 일치했던 점이 한 가지가 있다. 그들 모두 점차 협력하는 방향으로 진화했다는 것이다. 대형 유인원과 달리 인류는 암수 한 쌍의 결합으로 짝짓기를 시작해 핵가족을 이루었고 이는 새로운 사회적 단위가 되었다. 그러면서 엄마 외에 다른 어른들도 돌보는 다양한 형태의 협력적인 보육을 시작했다. 건강한 엄마가 식량을 구하는 동안에 할머니나 다른 어른들이 아이들을 돌보았다는 점에서 협력적인 식량 구하기가 시작되거나 함께 나타났다.
현대 인류가 번성하면서 자원을 얻기 위해 다른 집단과 경쟁해야 하고 서로 알지 못하는 개인들과 문화집단을 이루어 집단 전체가 협력 단위가 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협력하는 경향이 인간의 인지능력과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추측되는 바는 인간의 뇌용량의 규모가 가장 가까운 유인원 친척보다 몇 배나 크다는 것과 정보가 숙련된 어른이 아이들에게 협력적으로 전달되는 것은 개인의 생존에 결정적 요인으로 자손이 커가는 교육환경을 구축하여, 도구 제작과 공동수렵·채집 같은 중요한 생존 활동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제공했다는 것이다.
침팬지들도 집단 사냥을 하고, 사냥하면서 스스로 자기가 대상을 잡으려고 애쓴다. 대형 유인원의 의사소통은 유용한 정보를 알려주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의도와 행동을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유도하려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보이는 공동 목표는 없고, 행동을 조정하기 위한 협력적 의사소통도 없다. 대형 유인원의 사회성은 물리적 조건에 대한 정교한 기술을 보완하기 위해 내가라는 ‘개인 지향성’이란 사회적 인지 기술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사회성은 세계를 개념화하거나 문제를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방식으로 변형되지 못했다. 개인 지향성은 대형 유인원과 어쩌면 다른 영장류들도 인간 고유의 사회성과 의사소통 없이도 실제로 특정 상황의 문제를 생각하도록 한다. 개인 지향성과 도구적 합리성은 적대적인 세계에서의 생각을 위한 보편적인 영장류의 대응이었다.
인간 진화의 여정 600만 년 중에서, 500만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인간의 생각은 대체로 유인원과 같았다. 그러나 초기 인류는 생태 환경의 변화에 따라 식량을 얻기 위해 협력해야 했다. 이는 개인이, 특히 서로 절박하게 의존하게 만들었다. 이와 같은 상호의존 활동에서 충분히 협력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 공동의 목표를 위해 협력하고, 각자의 역할에서 상대방에게 유용한 정보를 알리는 것이 개개인의 관심사였다. 그래서 사회적 파트너와의 협력과 소통에 기대어 생존하고 번창할 수 있는 초기 인류가 탄생했던 것이다.
원숭이가 인간과 같은 사회적 상호작용과 문화적 유산에 둘러싸여 인간 손에서 길러진다고 해도, 원숭이들이 인간과 같은 물리적 인식 능력(공간 대상 연속성, 도구 사용)을 개발한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인간과 같은 모방과 의사소통 기술은 개발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발견들은 인간 개체발생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 인간 특유의 사고 과정에서 어떤 연관이 있을지 궁금해할 테지만, 가까운 미래까지는 여전히 신비로 남아 있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가설은 다른 여러 적응과 마찬가지로 지향점의 공유를 위한 풍부한 사회문화적 환경 속에서만 발달하고 꽃을 피운다는 것은 여전할 것이다.
(6) 화석 없는 세계에서의 생각의 기원
“인간은 다른 동물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고민한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단서가 최근에야 드러났다고 하면 신기해할지 모른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데카르트는 집에서 기르던 동물들과 새, 쥐, 여우, 늑대와 달리 인간만이 이성과 자유의지를 가질 수 있다고 쉽게 단정 지었다. 다윈조차 『종의 기원』을 쓰기 21년 전인 1838년에야 런던 동물원에서 우랑우탄을 처음 보았다. 유럽인들은 유인원을 몰랐다. 당시 빅토리아 여왕은 “기분 나쁘게 사람처럼 생겼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간과 가장 가까운 친척? 등장으로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철학자들은 이 문제를 비껴가기 위해 인간을 새롭게 정의하기에 이르렀는데, 그것은 오직 언어를 매체로 하는 것이었다. 인간 외에 다른 동물은 생각이란 없다고 했지만, 유인원이 어떻게 생각하고 인지하는지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인간과 동물을 완전히 분리하는 관점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유인원이 인간과 완전히 동일한 방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생각의 핵심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현대 인류가 아닌 유인원 종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면 - 다시 말해 외딴 정글에서 호모 하이델베르킨시스나 네안데르탈인이 발견된다면 - 아마 그들은 유인원과 인간의 중간 단계의 모습일 텐데, 그들의 생각이 현대 인류의 생각과 똑같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쩌면 그들은 사회규범에 이르지도 못했을지도 모른다. 또 무언가를 공동으로 결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시도를 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어디를 봐도 현재의 모습과는 아주 다른 형태일 것이다.
서로 경쟁하며 명령하는 유인원들의 의사소통 방식에서 현대 인류의 언어와 문화가 불쑥 생겨났을 리는 없다. 인류의 문화는 그 이전에 형성된 사회적 상호작용의 관습에 불과하다. 협력적 상호작용이 문화와 언어의 재료가 되었을 것이고, 서로 다른 두 관점은 합리적인 사회의 기반이 아니었다면 문화와 언어의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고유한 생각이 행동을 조직하고 조정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진화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은 거의 확실하다.
지금까지 누구의 이론도 완전하지는 않다. 협동, 커뮤니케이션, 생각이 화석으로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의 형태를 만들고 진화를 이끌었던 사건들에 대해서는 추측에 기댈 수밖에 없다. 오늘날 유인원이 인간과의 공통 조상으로부터 얼마나 달라졌는지 모른다는 것이고, 역사적으로도 무엇이 남아 있지 않다. 중요한 문제는 지향점 공유의 모든 형태를 특징짓는 공동성과 집단성 또는 ‘동류의식’의 본질이 무엇인가와 본래부터 사회적으로 생겨난 개념들이 어떻게 구체화 되고 객관성을 확보하게 되었을까 인데, 지폐는 그저 종이 쪼가리가 아니라 화폐로 통용되는 것처럼 인간 생각의 모든 측면이 사회적인 기원을 가진다는 것은 아니다. 인간 종에서만 발견되는 생각의 고유한 특징에만 사회적인 기원을 주장한다. 우리는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인간과 유인원이 사회적 상호작용과 조직 면에서 상당히 다르고, 인간이 모든 면에서 훨씬 더 협력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인간과 유인원의 차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볼수록 생각과 사회적 상호작용 사이에 어떠한 연관성이 있음을 외면하기는 힘들다. 사회성에 기반을 둔 이론이 아니라면 문화제도, 재귀적이고 합리적인 추론, 객관적인 관점, 사회규범, 규범적인 자기 규제 등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모든 것이 사회성과 관련 없이 진화되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것은 생각의 진화에 대한 답이며, 지향점 공유 가설과 같은 이론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우랑우탄이 아니라 오랑우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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