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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의 후반생 – 모리야 히로시
대부분의 남자들은 나이 40이 되면, 인생의 반이 지나는구나, 이제부터 후반생이 시작되는구나 하고 생각하지만, 그 사람이 다시 60이 되면 이제부터 진짜 인생 후반이 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된다고 이 책의 저자인 모리야 히로시는 말한다. ‘인생은 지금부터야!’라고 외치며 정신을 가다듬고 새롭게 시작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어영부영 지내다가 죽음을 맞는 경우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중국 고대의 역사 인물 22명이 어떻게 대기만성(大器晩成)을 이루었는지 살피고 있다. 그들 중에는 모두 잘 아는 공자와 여불위, 범려, 조조, 도연명, 왕휘지 같은 이들도 있으나, 이름이 생소한 중이, 주매신, 여신오 같은 인물도 있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면서 여기에 그들의 삶을 다 적기는 어려울 것이 라는 생각이다. 또 지금은 일본의 딸아이 집에서 이 글을 적고 있는 입장이기에, 새로 만져보는 노트북으로는 더욱 그럴 것 같다는 생각이다. 선각자이며 성인으로까지 추앙받는 이들의 인생을 통해서 배울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될 것을 기대해 본다.
(1) 孔子도 춘추시대를 살았지만, 공자보다 앞서서 중이(重耳)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晋나라 獻公의 아들로 헌공에게는 중이 외에 申生, 夷吾 등 형제들이 많았는데, 순리대로라면 장남인 신생이 왕위를 계승하고 중이는 형을 보좌하는 역할을 하여야 했지만, 헌공이 만년에 측실 麗姬를 총애해 그녀가 낳은 奚齊를 태자로 삼고자 했다. 권력 다툼 과정에 신생은 자결하고 중이는 어머니 나라인 狄나라로 도망가 몸을 의탁했다.
결국 서자인 해제가 왕위를 이었으나 헌공이 죽자 신하들의 반란으로 살해되고 중이의 아우 이오가 왕위에 올랐다. 이오는 형 중이의 존재가 위협된다고 생각해 어머니 나라로 도망간 그를 제거하고자 했다. 낌새를 알아챈 중이는 제나라로 가 5년을 머물렀으나 거기도 결코 안전한 곳은 못 되었다. 이렇게 하여 중이는 무려 19년을 조·송·정나라 등을 떠돌다 마지막에 초나라에 의탁하고 있었다. 이때 혜공(이오)의 아들인 어(圉)도 초나라에 인질로 와 있었는데, 혜공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대로 초나라를 떠나버렸다. 초나라는 이를 괘씸하게 여겨 중이를 지원하기로 하면서 중이는 초나라 군대를 이끌고 진나라로 진격했다. 저항 없이 진을 접수한 중이가 진의 왕이 되었다. 중이 나이 예순둘이었다.
이로써 종주국이던 주나라 양왕(襄王)이 중이를 진나라 후백(侯伯)으로 임명했다. 후백이란 두령 즉, 패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중이는 그야말로 방랑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아 예순이 넘은 나이에 패자가 된 것이다.
(2) 공손홍(公孫弘)은 한무제(漢武帝) 때에 승상을 지낸 이로 그가 조정에 등장한 것은 예순 살 때였다. 그러나 이때는 물러났고 다시 등장한 것은 예순여섯 살 때로 이때 승상이 되었다. 이를 두고 대기만성형이라는 말 외에 다른 말로 표현하기는 어렵다. 그는 젊은 시절 관직에 진출해 지방 옥리를 지냈으나,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자 돼지를 기르며 생계를 유지했다. 마흔이 넘어 학문에 뜻을 두었지만, 과거제가 없던 당시에 기회는 좀체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다 당시 무제로부터 인재를 추천하라는 명을 받은 지방장관이 지방에서 이름이 자자한 그를 추천함으로써 조정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지방관들로부터 100명이 넘는 인재를 추천받은 무제는 맨 끝에 있던 공손홍의 답안을 맨 위에 올려놓고, 그 자리에서 그를 박사로 임명했다. 그만큼 그의 답안에 흡족한 때문이었다. 《사기》등에 공손홍을 평했다.
“공손홍은 그 행함이 올바르긴 했으나, 때를 잘 만났기에 출세할 수 있었다.”-《사기》
“공손홍은 때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 자리에 오를 수 없었다.”- 《한서》
때를 잘 만났다고 하지만, 그것만은 아닌 듯 보이는 것은 《사기》는 다시 “무제는 그의 언동이 무겁고 침착하며 실무에 정통할 뿐 아니라 행정을 처리하는 데에도 유학의 이념을 잘 접목시키고 치장하는 것을 보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라고 적었다.
예순의 나이에 현역에 등장해 여든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으니 참으로 놀라운 노인 파워가 아닐 수 없다. 노년에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실천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닐 수 없다.
(3) 주매신(朱買臣)은 남성우위의 중국 고대에 여자인 아내에게 버림받은 사내다. 기원전 109년에 세상을 떠났다고 《한서》가 기록하고 있으므로 한무제 때 사람이다. 《한서》에 ‘그의 자는 옹자(翁子)이고 吳나라 사람이다’라고 했다. 주매신은 독서하기를 좋아했는데, 그러다 양식이 떨어지면 산에 올라가 나무를 해다팔아서 양식을 구했다. 그러나 그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에 더하여 가난과 자신의 처지를 자랑이라도 하듯 고래고래 노래를 불러댔으니 그것만은 그의 아내도 이해하지 못했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아내로부터 이혼 당한 것은 그의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이혼에 앞서 10년만 기다려주면 호강시켜주겠다고 했지만, 그 말은 오히려 아내의 부아를 끌어올렸다. 독서광 주매신에게도 그 일은 충격이었던 모양으로 그는 먹고살고, 출세의 길을 찾기 위해 집을 나와 도시로 향했다. 당시는 지방관이 추천해 주거나, 황제에게 자신을 직접 추천하는 방식으로 출세의 길을 열 수밖에 없었는데, 주매신은 후자를 택했다. 그 일로 겨우 무제를 알현할 기회를 얻었고, 무제 앞에서 춘추와 초사를 논했는데 무제가 감탄해 그 자리에서 시중 벼슬을 주었다. 황제의 측근이 된 것이었으니 대단한 출세였다.
주매신은 금의환향, 회계태수가 되어 100대의 병거를 거느리고 가다가 길에서 전부인과 그의 남편을 보았다. 그들을 수레에 태우고 관저로 가 별채에서 살게 했다. 옛날 배고픈 시절에 밥을 준 것에 대해 보답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전 아내는 자신의 어리석은 행동을 자책하다가 자살해 버렸고 주매신은 그의 남편에게 금을 주어 성대히 장사지내게 해 주었다. 그는 40이 넘어서 이혼을 당하고 빌어먹기도 했지만, 결코 좌절 하지 않았다.
(4) 공자와 범려, 위징은 생략하고 진평(陳平)에 대해 보기로 한다. 진평은 한나라를 세운 유방을 도왔던 인물이지만, 유방과 같이한 인물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널리 알려진 인물이 많아서인지 덜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처음에는 위왕 구를 모셨지만, 헌책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련 없이 그를 버리고 항우에게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도 의심을 받자, 도망쳐 위무지라는 사람의 도움으로 유방을 만났다. 진평을 만나본 유방은 그를 신뢰해 그 자리에서 도위(都尉)라는 벼슬자리를 주었다. 도위는 군을 감찰하고 인사하는 자리였는데, 이에 유방을 따르던 장수들이 반발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저히 신뢰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젊은 시절 형수와 내통했다는 소문이 있고, 부하들에게 돈을 가져오게 해 액수에 따라 직책을 나누어 주고 있습니다.”라고 헐뜯었다. 이에 유방이 그를 추천한 위무지를 불러 진상을 물었다.
위무지가 대답했다. “소인이 진평을 추천한 것은 그의 지략을 높이 샀기 때문입니다. 그가 형수를 범했건, 뇌물을 받았건 그것과는 상관없는 일입니다.”이에 유방은 진평을 직접 불러서 물었다. “그대는 위왕을 모시기도 하고, 항우를 모시기도 했는데 행동이 너무 가볍지 않은가?”진평이 대답했다. “분명 위왕을 모셨으나 그는 올바른 말을 해도 듣지 않았습니다. 항우 또한 소인을 믿지 않아 좋은 계책을 진언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는 편견 없이 사람을 받아준다고 하여 찾아온 것이고 소인은 무일푼이라 부하들에게 돈을 거두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만일 소인의 지략이 필요하다면 소인을 거두어 주시고, 필요하지 않다면 바로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 유방은 이때 항우의 공격을 받아 공경에 처해 있었으므로 그에게 계책을 물었다. “항우 쪽에도 빈틈은 있습니다. 그를 따르는 인물로는 범증과 종리매 같은 몇 명인데, 수만금을 아끼지 말고 그들에게 뇌물을 주어 군신 관계를 이간질하여 서로 의심하게 만들면 감상적이며 귀가 얇은 항우라면 내분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계책이 100% 들어맞았다는 것은 《초한지》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내용이다.
진평은 젊은 시절부터 황제(黃帝)와 노자 사상을 일컫는 황로학 신봉자였는데, 노자가 말했다는 “대국을 다스릴 때는 작은 생선을 처리하듯 해야 한다. 쓸데없이 젓가락으로 쑤시거나 휘저어도 안 되고, 시간을 들여 양념이 베이도록 기다려야 한다. 한 나라를 다스리는 것도 그와 같다. 위에서 규제하고 쓸데없는 법으로 백성의 발목을 잡으면 백성은 활기를 잃고 말 것이다.”사마천이 《사기》에서 말했다. “진평은 처음도 끝도 좋았다. 뛰어난 지략이 없었다면 어찌 그런 삶이 가능했겠는가?”
(5) 《삼국지》를 읽거나 영화를 보았다면, 우직하면서도 손권에게 충성을 다하는 ‘여몽’이라는 장수를 알 것이다. 제갈량의〈천하삼분지계〉가 들어맞자 이제 유비와 제갈량이 조조를 치려고 한다. 적벽대전으로 접수하고 있던 형주땅은 관우가 지키고 있었는데, 형주땅을 놓친 것에 대해 늘 배가 아픈 손권은 기회 있을 때마다 형주를 돌려받고 싶어 한다. 이에 노숙을 시켜 여러 번 유비에게 외교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으나 제갈량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다. 그리고 관우가 지키고 있는 한 씨알이 먹히지 않았다. 노숙이 죽고 여몽이 오나라를 지키는 책임자가 되었을 때 용맹만 앞세운 여몽이라면 관우와 한판 대결을 붙었을 테지만 여몽은 그러지 않고 지략으로 관우의 부아를 돋워 싸워 결국 관우를 죽게 만들었다. 용맹만을 앞세우지 않았던 여몽도 한 때를 풍미한 장수였다.
(6) 蘇秦과 張儀
기원전 221년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 전 180년간은 ‘전국 7웅’이 난립한 전국시대였다. 그 과정에 생겨난 것이 합종연횡이다. 合從은 秦을 제외한 6국이 연합해 진에 대항하자는 것이고 連橫은 진을 제외한 6국이 제각각 진과 손을 잡고 살아남으려는 전략이었다. 합종으로 성공한 이는 소진, 연횡으로 출세한 이는 장의였다. 이 둘은 젊은 시절 제나라로 가 귀곡자 밑에서 동문수학한 사이로 둘 다 괜찮은 가문 출신이 아니었지만, 세객 또는 유세객으로 불리면서 경쟁상대이기도 했지만, 친구로도 의리를 지킨 것으로 알려진 인물들이다.
(7) 법정(法正)
여불위도, 유방도 인생 후반생에 대해서는 살필 가치가 있다고 보이나 따로 기회가 있을 것으로 여겨 여기서는 법정에 대해 알아본다. 그 전에 여불위는 춘추시대 위나라 신평군, 초나라 춘신군, 조나라 평원군, 제나라 망상군 등이 천하 인재를 모아 식객들을 키우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도 식객들을 모았는데 자그마치 3,000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들이 20만 자에 이르는 책을 편집해 〈여씨 춘추〉라고 했다. 언제 읽어보아야 할 책이다 싶다.
법정은 서기 176년에 태어났으니 제갈공명보다 다섯 살이 위다. 법정은 흉년이 들어 식솔을 데리고 익주로 가 무위도식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별장 장송을 만났다. 둘은 익주를 통치하던 유장이 어리석고 장래가 없다며 그를 헐뜯기도 했는데, 그런 와중에 조조가 형주를 차지해 전승 축하연을 연다고 하여 익주에서 장송을 사절로 파견하게 된다. 그러나 냉대를 받고 돌아온 장송은 “조조와는 손을 끊고 유비와 손을 잡은 게 좋겠습니다.”라고 유장에게 진언했다. 그리고 사자로 법정을 추천했다.
법정은 유비를 만나 익주를 차지할 것을 제안하지만, 유비는 자신을 불러준 일가인 유장을 치는 데는 머뭇거린다. 그래서 법정은 제갈량을 만나 유비를 설득하라고 한다. 유비는 마침내 219년 한중을 손에 넣고 법정을 상서령 호군장군으로 임명한다. 법정이 죽고 1년 후 유비는 군신의 반대에도 관우의 원수를 갚는다며 손권 토벌에 나선다. 이릉 전투에서 크게 패해 목숨만 겨우 건져 백제성으로 도망쳤다. 이에 제갈량은 ‘법정이 살아 있었다면 이런 대패는 없었을 것을’하고 그의 존재를 기억했다.
(8) 사마광(司馬光)은 송대 〈자치통감〉을 저술한 역사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관료로서 역사전문가는 아니다. 그는 송나라 6대 신종 때 한림학사가 되었고 이어서 어사중승 자리에 올랐다. 승승장구했으나 신종은 왕안석을 재상에 임명해 개혁을 단행했다. 왕안석에게 전권을 주면서도 사마광을 추밀원부사라는 중앙요직에 두었는데, 그만큼 둘을 평가했다는 것이다.
이때까지 20여 종이나 되는 방대한 기전체로 된 정사가 전해져 왔으나 규모가 방해해 황제가 모두 읽기는 무리가 따랐다. 사마광은 〈본기〉〈열전〉으로 기록되어 온 기전체 역사서를 편년체로 간결하게 편찬하여 신종에게 바쳤다. 신종이 감동했다는 바로 그 〈자치통감〉이다. 신종이 죽고 어린 철종이 등극했다. 이때는 황제의 어머니가 실권을 잡고 지금까지의 모든 개혁작업은 폐지되고 반대파들이 복권했다. 사마광은 마침내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일곱 달 만에 쓰러져 죽었다. 라이벌 왕안석이 죽은 지 다섯 달 만이었다. 사마광의 나이 68살, 〈자치통감〉은 사마광 혼자 힘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전국시대 이후 5대 10국까지 1300년간의 역사를 294권으로 집필한 실로 방대한 역사책이다.
(9)‘양명학’은 명나라 왕양명(王陽明)에 의해 주창된 학문이다. 주자학에 반발한 학문이지만, 주자학에 묻혀 빛을 발하지는 못하고 있다. 왜 일까? 주자학 못지않은 학문적 기틀을 가졌는데도 그렇다. 주자학은 만물의 근원을 리(理)에 두고 있는데, 즉 格物至治가 그것이다. 여기서 두 학문은 분리되고 있다. 양명학은 이가 외적 사물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이 곧 바로 이이므로 마음을 연소시켜 내적인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이를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의 일치만이 격물지치라고 한다. 한때 중국에서 크게 성행했으나, 현재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고, 흔적만 남아 있는 것이 양명학이다.
양명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양명의 후반생을 주목해야 하는데, 그는 세 번이나 반란군 진압을 명 받고 모두 성공했다. 그래서 그를 사상가로서보다 군사전문가로 보는 역사가들도 있다. “문관으로 군대를 이끌어 승리한 사람은 왕양명뿐”이라는 말까지 전한다. 행동을 중시한 그는 반란 진압을 통하여 자신의 사상을 실증했다. 그는 쉰일곱에 결핵으로 숨을 거두었으며 죽음을 앞둔 그에게 제자가 물었다.
“선생님 남기실 말씀이 있으신가요?”
“이 마음에 밝은 빛이 가득한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느냐”
그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10) 여신오(呂新吾)는 명대에 관료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생각을 정리한 책이 《신음어》인데, 이 한 권의 책이 후대에 전함으로써 그는 이름을 남겼다. 그는 지방관직을 시작으로 관료가 되었으나, 명석함을 인정받아 중앙직에 발탁되었고 다시 10년 후 산동의 참정으로 옮겼다. 이를 두고 그는 스스로 윗사람에게 찍혀 좌천되었다고 했다. 그러나 지방관으로써 청렴결백함이 알려져 다시 중앙에서 불렀다. 나이 쉰일곱이었고 법무차관이었다.
여신오가 세상을 뜬 것은 그의 나이 여든 셋(1618년)으로 은퇴하고도 21년을 더 살았다. 21년 동안 후학 양성에 힘썼으며 천리 먼길에서 찾아온 후학도 있었다고 한다. 《신음어》에 “늙음을 한탄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아무 목적 없이 늙어감을 한탄해야 한다. 죽음이 찾아온다고 슬퍼해서는 안 된다. 죽어서 자신의 이름이 잊혀질 것을 슬퍼할 일이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면 마지막까지 힘껏 뛰어노는 것이 생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무엇이 그것을 막는다면 그것을 깨부수는 일에 남은 힘을 다 바쳐야 하는 것은 아닐까? - 2024.1.22. 오전, 일본 치바 후나바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