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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시편 109편1~15절
제목 : 나는 사랑하나
이 시는 다윗의 시로, 35, 69편과 함께 의인의 고통을 노래한 것입니다.
이 시는 다윗이 지은 시로서 예수님의 고난과 박해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행1:15~20에서 베드로는 이 시에 대해 다음 세 가지를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첫째 이 시의 기자는 다윗이며,
둘째 이 시는 개인적인 고통을 노래한 것이 아니라 성령이 다윗의 입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언한 것이며,
셋째 가룟 유다의 결말을 예언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시는 잔인한 원수의 핍박을 호소하는 시로 사울 또는 도엑(삼상21:7, 22:18)의 핍박 때로 추측됩니다.
내용은 1~5 핍박 중의 호소,
6~15 저주의 기도입니다.
시인은 선재했던 사람들이 자신을 저주하고 음해하며 무고하게 고소하는 것을 보고, 그들의 저주의 말이 다시 그들에게로 돌아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1. 대적의 무고한 비난(1~5절)
“[1]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4]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이 시의 서론이 되는 부분으로서 고통의 근원이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진실과 거짓, 사랑과 미움의 대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악인들은 의인의 진실을 거짓된 비방으로(2,3절),
사랑을 미움으로 갚습니다(4,5절).
여기서 사랑은 신실하고 순결한 우애를 나타냅니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보응이 되지만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극악한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선을 악으로 걒는 경우가 많습니다.
1) 하나님을 부름(1절)
‘[1]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하나님을 부르면서 시작합니다.
탄식시에 전형적으로 등장하는 도입구입니다.
그런에 1절은 특별히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라는 문구를 사용합니다.
즉,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기에 자신이 지금부터 시작하는 간구를 들어주셔야 한다는 간청입니다.
시인은 그가 찬송하는 하나님께서(28:1, 35:22, 39:12),
그가 악인에게 핍박당하고 있는 사실에 대해 무관심하게 방관하시는 듯이 느껴 강하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악행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를 호소하는 것입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본시의 주제가 환난에 대한 탄원이기 때문에, '찬양의 노래'란 말이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이 시 전체에 흐르는 분위기는 다소 우울하고 슬픈 음조를 띠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시인은 자신의 이러한 불평과 탄원이 하나님께 상달될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당히 찬송의 노래를 부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신앙의 지조를 버리지 않는 성도의 바른 자세를 더욱 고무시키며,
성도의 눈물마저도 하나님께 찬양의 노래가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키는
구절이라 하겠습니다.
“잠잠하지 마옵소서” - 자신을 해하려고 덤비는 대적들을 그냥 두고 보시지 말고 막아달라는, 즉 하나님의 적극적인 개입을 호소하는 탄원입니다. 이는 자신이 당하는 환난과 핍박에 대해 하나님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실제로 하나님은 눈을 떼지 않고 계시리라는 믿음을 역설적으로 암시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대적들로부터 이유 없이 비방을 받고 악한 자로 여김을 받는다 하더라도, 하나님만이 자신의 무죄를 아시고 판단해 주신다면,
주를 찬송할 수 있다는 굳건한 신앙의 면모를 엿보게 합니다.
2) 하나님의 법정에서 악인을 고발하기 시작합니다(2절).
“[2]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다윗의 핍박 자는 악한 입과 거짓된 입으로 그를 치고 괴롭힌 것입니다.
과연 다윗은 사울에게(삼상22:17~23), 압살롬에게(삼하15:3~4),
시므온에게(삼하16:8) 비방을 당하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도 지상에 있을 때 유대인들로부터 엄청난 비난과 저주를 받은 바 있으며, 심지어는 귀신의 힘을 빌어 능력을 행한다는 말까지 들은적이 있습니다(마 9:34).
*마9:34 “귀신이 쫓겨나고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거늘 무리가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스라엘 가운데서 이런 일을 본 적이 없다 하되”
입을 열어(파타흐) - 이 말은 야수(野獸)가 먹이를 잡아먹기 위해 입을 벌리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말입니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한탄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향하여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애 3:46).
속이는 혀 - 혀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 성경 구절 중에 야고보의 지적이 아마 가장 잘 알려져 있을 것입니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한편 본절에서 시인은 악인들의 비방과 중상을 세 차례에 걸쳐 각기 다른 표현으로써 강조하고 있는 바, 대적들의 독설(毒舌)이 얼마나 심각한 것이었는지를 드러냅니다(VanGemeren).
3) 악인들이 거짓말로 시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3절)
‘[3]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단순히 비방할뿐더러 그를 미워하고, 이유 없이 그를 핍박했다는 것입니다(35:7, 69:4).
사울의 경우 참으로 무고히 다윗을 미워하고 핍박한 것이었습니다.
미워하는 말로 - 앞 구절의 '속이는 혀로'와 대구를 이룹니다.
한편, '미워하다'는 단순히 감정상의 문제가 아니라 살인을 부를 정도의 심각한 증오심을 가리키며 관념이나 생각으로서의 증오심을 넘어 실체적이고 행동적인 미움을 뜻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불순종하는 모습을 이 단어로 묘사한 바 있습니다(신 1:27).
그리고 민 35:20에서는 살인의 원인을 미움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를 두르고(세바부니) - 22:16에서 이 말은 개들이 먹이를 두고 다투는 상황과 연관되어 사용되고 있습니다.
4) 시인의 사랑을 대적함으로 갚았음을 보여줍니다(4절)
‘[4]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핍박 자는 다윗의 사랑을 악으로 갚은 것입니다.
사울의 경우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었을 때나(삼상24:1~7),
하길라산에 있었을 때(삼상6:1~12) 그랬습니다.
사울은 그를 죽이려 했으나 그는 사울을 죽이지 않고 돌려보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리며 기도할 뿐이었습니다.
나는 사랑하나 - 이는 다윗이 핍박자에게 어떠한 해(害)도 끼치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정당한 이유 없이 다윗의 원수로 자처하며 다윗을 공격하고 미워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의 친구로 지내왔으며 단순히 그들에게 악을 행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자비를 행하였던 것입니다.
나를 대적하니 - 이 말 속에는 '나를, 도리어 나를 비방하니'하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사랑을 베푼 결과, 주어진 것이 너무나도 뜻밖에 적대감이라는 데 대한 당혹감이 곁들여져 있다 하겠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보답하지 않고 도리어 악으로 갚은 것은 분명 사단의 장난입니다.
즉, 사단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면,
사랑하는 사람을 도리어 미워하고 핍박하는 것입니다.
나는 기도할 뿐이라 - '그러나 나로 말하면 기도뿐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온갖 거짓과 교활한 말로 공격당할 때 악을 악으로 갚는 합당치 못한 수단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억울한 사정을 하나님께 호소함으로써 오히려 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때로는 이유 없이 손해를 보고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에 이를 보고하려고 하기 쉬우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심판에 맡기고 선으로써 악을 이기는 것이 성도들의 바른 자세임을 깨닫게 해줍니다(롬 12:21).
5) 악인들이 시인의 선과 사랑을 악함과 미워함으로 갚았다고 표현합니다(5절)
‘[5]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핍박자는 그의 선을 악으로 갚고, 그의 사랑을 미음으로 갚았던 것입니다.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 악인들의 배은 망덕(背恩忘德)하는 속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구절입니다(35:12;38:20;렘18:20; 요10:32;15:25).
본문에 언급되고 있는 시인의 원수들은 마귀의 상용 수단인 선을 악으로 갚는 방법으로 시인을 저주하였습니다.
이런 자들에게는 기도가 오히려 저주로 여겨집니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뒤바뀌어 버려 선이 악이 되고,
악이 선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7절 참조).
2. 저주의 기도(6~15절)
대적을 저주하는 부분입니다.
6절의 대적은 사단을 말하는 것으로,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갈 것을 예언하고 있습니다(요13:27).
뿐만 아니라 모든 악인들의 마음속에는 사단이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을 것은 물론이고 가증스러운 기도는 오히려 죄를 더할 뿐입니다(7절).
그는 여러모로 저주를 받을 것이며, 그수를 다하지 못하고 그 명예에 타격을 입으며(8절), 자녀와 아내에까지도 재앙이 내릴 것입니다(9,10절).
또한 재산은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11절), 친구가 곁을 떠나며, 고아가 된 자식을 돌보아 줄 사람조차 없을 것입니다(12절).
더나아가 조상의 죄까지 합쳐져 후사가 끊길 것입니다(13~15절).
그가 이런 저주를 받는 것은 연약한 자를 도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죽이려 하기 때문입니다(16절).
그러므로 남을 향하던 저주가 그에게 임하되(17절), 삶의 구석 구석에까지 미치며(18절) 끊일 날이 없게 됩니다(19절).
이는 그리스도를 대적한 유다가 받을 보응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무리들이 받아야 할 것이도 합니다(20절)
1)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대적자가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해달라고 합니다(6절)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악인’ 은 하나님이나 그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를 가리킵니다(145:20; 잠 24:20;합1:4).
이사야는 이러한 악인의 특성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지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고 여호와의 위엄을 돌아보지 아니하는도다"(사 26:10).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게데스는'그가 악한 심판으로 고난을 당하게 하시며'로 번역하여, 법정에서 재판받는 광경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은 다윗의 저주를 보고 무작정 이를 모방하며 분별없이 남을 저주하거나 욕해서는 안 된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악인으로부터 받은 고난에 집착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망각하고 보복심에 불타올라 악인과 똑같은 범죄를 저지르기 쉬운 것입니다.
그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 재판정에서 오른편에 선다는 것은 고소자의 입장에 선다는 말과 같습니다(Anderson, Kidner).
한편, 스가랴는 사단이 대제사장 여호수아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슥 3:1).
스가랴서에도 분명히 나타나 있는 바와 같이 대적이 오른편에 서는 것은 고소하고 대적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반면에 시인은 31절에서 대적의 위치인 오른쪽에 대신 여호와께서 서서 심판으로부터 자신의 생명을 구해줄 것을 간구합니다.
2)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여달라고 하십니다(7절)
‘[7]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가 심판을 받을 때는 그 죄가 드러나 정죄를 받게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또 그가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거부하신바 되게하사 그에게 죄를 더하는 것이 되게 하소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장 무서운 저주입니다”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 이것은 어떠한 자비도 없는 가혹한 형벌을 요구하는 기도입니다.
즉, 악인들의 죄는 너무나 분명해서 정의의 집행을 모면할 방도가 없으며, 용서를 구해도 허락하지 말아달라는 무서운 저주의 기도인 것입니다.
악인은 가장 비열한 방법으로 타인들을 괴롭혔으며 무고한 자를 정죄하며 달아나지도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들이 그토록 심한 죄를 범했고 또 유죄로 판정 났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면하게 된다면 이것은 공의의 하나님의 통치 질서에 위배된다고 시인은 판단한 것 같습니다.
네로나 갈리굴라 같은 대박해자들이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고 용서받게 된다는 것은 정말 온당치 못한 처사일 것입니다.
그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 악한 마음을 품고 악행을 저질러온 자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흉내를 내고 있다면 얼마나 가증스럽게 보이겠는가?
따라서 이들의 기도가 상달되지 말고 오히려 그의 호소가 죄를 덧붙이는 결과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당연한 것입니다.
그는 과부의 집을 삼키고도 오히려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악인의 인생이 짧게 해달라고 요청하며 그의 직분을 다른 사람이 취하게 해달라고 말합니다(8절).
‘[8]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 세상을 괴롭히며 혼란스럽게 하는 악인보다는 미친개가 오래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그의 생명이 단축되는 것은 곧 세상의 평화를 앞당기는 지름길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부분을 배반자나 사악한 자들에게 적용시키곤 하였으며,
베드로는 유다의 급속한 죽음을 보고 이 말씀의 성취로 보았습니다.
즉, 갑작스러운 죽음은 구약에서 현저한 죄를 범한 자에게 내려지는 형벌로 여겨졌던 것입니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저희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입니다.'
(55:23; 잠 10:27; 전 7:17).
*시55:23 “하나님이여 주께서 그들로 파멸의 웅덩이에 빠지게 하시리이다 피를 흘리게 하며 속이는 자들은 그들의 날의 반도 살지 못할 것이나 나는 주를 의지하리이다”
*잠10:27 “여호와를 경외하면 장수하느니라 그러나 악인의 수명은 짧아지느니라”
*전7:17 “지나치게 악인이 되지도 말며 지나치게 우매한 자도 되지 말라 어찌하여 기한 전에 죽으려고 하느냐”
반면에 가난하고 궁핍한 자에게는 자비가 주어집니다.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베드로는 유다의 죽음 이후 그의 자리에 맛디아가 임명된 사건을 두고 바로 이 말씀이 성취된 것으로 보고 이를 인용하였습니다(행 1:20, 26).
*행1:20,26 “[20]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의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26]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그가 열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니라”
악한 인간은 좋은 직분조차도 나쁘게 만들기 마련입니다.
4) 악인의 인생이 짧게 끝난다는 의미입니다(9절)
‘[9]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고아가 되고...과부가 되며 - 한 남자가 죽으면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고 그 자녀는 아비 없는 자식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악인의 죄 값은 그 가족에까지 미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강조적인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즉, 사악한 자의 최후는 자신의 죽음만으로 끝나지 않고 그의 보호 아래 호의 호식하던 처자식에게까지 심한 타격을 끼치고 말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과부나 고아는 특별한 보호를 필요로 하는 사회적 약자들로 거론되고 있는데, 이들에게 아무런 관심과 배려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서도 큰 불행이 닥치게 될 것입니다.
모든 고아와 과부에게는 동정과 연민을 베풀어야 마땅하지만 그 아비의 행위가 악독했을 때는 그들에 대한 동정의 근원이 말라버리는 것입니다.
헤롯은 베들레헴의 무죄한 아이들을 무참히 살해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아내가 과부가 되었다한들, 그의 자녀가 고아가 되었다한들 슬퍼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런데 이와 같은 무서운 저주의 말씀은 우리가 임의대로 해석하여 사용할 수는 없다는 점을 생각하여야 합니다.
판사가 어떤 사람에게 사형을 선고할 때 사심(私心)을 두지 않고 정의를 선언해야 하듯이 다윗은 여기서 하나님께 공의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5) 그들의 삶이 안정감 없이 흔들리게 됨을 보여줍니다(10절)
‘[10]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본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도 있다.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빌어먹게 하시고, 그들로 저희가 거하는 그 황폐한 곳에서 쫓겨나게 하소서'(Horsley).
이것은 썩고 무너진 건물의 폐허 가운데서 한 가닥의 피난처를 이리저리 찾아다녔으나 그런 곳에서조차도 거할 곳이 없는 가련한 상황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렘 18:21 참조).
6) 고리대금하는 업자들이 악인의 소유를 빼앗아가게 해달라고 구합니다(11절).
‘[11]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고리대금은 율법에 금지된 바나(출22:25~27),
악인의 경우는 저를 압제하며, 그 빛 값에 그의 소유를 취하게 하고,
또 그의 수고한 결과를 외인이 탈취하게하여 달라는 것입니다.
7) 그에게와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자도 없게 하시며(12절)
“[12]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은혜를 계속할 자 - '은혜'에 해당하는 '헤세드'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인자(仁慈)를 가리키는 말로 자주 쓰입니다(창 19:19; 출 34:6; 대하 7:3; 렘 31:3 등).
그러나 여기서는 문맥상 하나님의 은혜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친족이나 이웃의 친절과 자비를 뜻합니다.
그가 아무리 곤고한 상태에 빠진다해도 아무도 그를 불쌍히 보아 은혜를 베풀자도 없고, 그의 고아들도 누구에게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게 하소서 하는 것입니다.
8)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13절)
결국 그의 고아는 자녀가 없이 죽음으로 그의 후사는 끊어지고,
후대에 가서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자도 없게 하소서 하는 것입니다.
이는 이스라엘인에게는 가장 무서운 저주의 하나로 간주되었던 것입니다.
(37:28, 욥18:18, 잠10:7)
자손이 끊긴다는 것은 엄청난 불행이요 저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 본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후손에 대한 축복(창 12:2;
22:17)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9)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버리지 마시고(14절)
“14]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본 문구에는 죄악을 행한바 언젠가는 그 대가를 치르어야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약에 근거해서 천 대까지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신 반면 악인에게는 삼사대 까지 저주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출 34:7).
따라서 시인의 저주는 가혹한 것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상벌 원리에 일치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의 죄가 그 자손에게 직접적으로 전가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죄악된 길로 행하는 자는
그 후손에게도 심각한 죄의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며,
특히 언약 공동체라 할 수 있는 이스라엘에서 부모의 패역한 행위의 악영향은 그 후손은 물론 공동체 전체에 심각한 환난을 초래케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왕하 24:3; 렘 15:4).
그렇지만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을지라 아들은 아비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할 것이요 아비는 아들의 죄악을 담당치 아니하리니"(겔 18:20)라는 말씀처럼 궁극적으로 죄의 형벌이란 본인에게 달린 것입니다.
10)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15절)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 양피지나 토판(土版) 등에 기록하여 항상 기억되도록 해달라는 뜻입니다.
이와 유사한 구절인 시90:8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죄악이란 하나도 없고 또 지은 죄로 말미암은 심각한 악영향이 후대에까지 미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움을 느끼고 자신을 채찍질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시인은 사랑을 미움으로 돌려 받았습니다.
시인의 선을 악으로 갚았습니다.
자신이 미움 당하는 이유를 몰라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시인이 할 것은 기도뿐이었습니다.
침묵하는 하나님을 깨우는 일뿐이었습니다.
억울할 때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하는 태도가 바람직합니다.
주께서 공의로 갚아 주실 것을 기대하고 맡겨야 합니다.
시인은 악인과 자신의 처지가 바뀌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누리는 부당한 번영과 복지와 행복, 즉 샬롬과 인애를 하나님께서 거둬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정의를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를 묵인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어떤 악인을 심판하기 위하여 다른 악인을 사용하셔서 그를 대적하여 전멸하게 하십니다.
시인은 하나님께서 대적에게 갖가지 저주를 내려 주시도록 구체적으로 간구하고 있습니다.
이 시에 나타나 있는 저주는 그리스도가 아니었다면 세상 모든 사람이 받아야 할 형벌의 내용입니다.
결국 저주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므로 받는 심판이며 따라서 이 시는 구원의 가치를 깨닫게 합니다.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것도 사람이고, 두려움을 주는 것도 사람입니다.
기쁨의 말을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주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시인은 말로 크게 상처를 입습니다(1~3절)
잘못한 것도 없는데, 대적들은 거짓말로 시인을 음해하고 비난합니다.
더 나아가 면전에서 증오의 말을 쏟아내고 저주하며 공격합니다.
주위에 그의 편이 되어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보신하며 침묵합니다.
이제 시인을 편들어주실 분은 하나님밖에 없습니다.
반드시 주님이 나서서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나도 섣부른 비난과 손가락질로 무고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또 무심코 던진 말로 이웃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조심합시다.
2) 대적들은 시인의 선대를 악으로 갚았습니다(4,5절).
사랑을 미움으로 갚았습니다.
그런데 시인은 복수하겠다고 하지 않고 기도할 뿐이라고 합니다.
비록 배신감과 억울함으로 원색적인 저주의 기도를 드렸지만, 원수에 대한 심판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탁한 것입니다.
나는 억울한 일을 당하고, 무고한 비난을 받을 때 같은 방식으로 돌려주려 하지 않습니까?
같은 악을 행하지 말고 주님께서 바로잡아주시도록 기도합시다.
3) 시인은 대적들이 재판정에서 유적 판결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6,7절).
무고한 사람을 정죄하고 죄인을 만들었으니, 이제 그들이 죄인이 될 차례입니다.
시인은 그들이 결백하다고 맹세하는 탄원의 기도도 거짓임이 밝혀져 죄가 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우리 사회도 법치가 정의로운 모습으로 회복되고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같이 흐르도록 기도합시다.
4) 시인은 끔찍한 저주의 기도를 올립니다(8~15절).
차마 입에 답기 힘든 이 저주에 기도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지 망설여집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입니다.
당사자의 면전에 퍼붓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고통을 토로하는 말입니다.
이 기도를 보면 그가 받았을 상처의 크기가 가늠이 됩니다.
그는 사랑이 많은 사람이었고(4,5절), 대적의 공격에도 묵묵히 기도만 했던 온유한 사람이었지만(4절), 하나님 앞에서 꾹꾹 참았던 감정을 터트리며 부르짖습니다.
나도 때때로 솔직한 감정을 토해내며 부르짖는 기도를 드립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