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無比스님이 읽어주시는 화엄경(2021.5.12.PM2시)
현수품(賢首品)
현수보살이 게송으로 대답하다
오늘도 화엄경 한단락 공부하겠다. 요즘은 기술이 발달해서 소위 유튜브 방송이라고 이렇게 개인이 방송국을 차려서 강의도 하고 책도 읽어주고 노래도 부르는 사람은 노래로 자기 표현을 한다. 어제는 보니까 모피 글씨를 쓰는데 명필이 나와서 모필 글씨를 한 획 한 획 쓰는 것을 유튜브에 올려 놓았다. 붓글씨 쓰는 것도 서예원에 갈 필요 없이 유튜브를 보면서 배울 수 있게 되는 시대까지 이렇게 편리하게 이르렀다.
저희들도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화엄경이라고 하는 훌륭한 경전을 앞에 놓고 공부를 한다.
불교에는 여러 가지 행사가 있다. 초파일 행사를 위시해서 결제행사, 해제행사, 경전을 어느 기간 동안 날짜를 잡아서 공부하는 경전산림행사 그런 것이 있다.
불교의 온갖 행사 중에서 제일 훌륭한 행사, 제일 값진 행사, 제일 유익한 행사가 경전산림행사다.
그래서 화엄산림(華嚴山林) 그런다.
많이 들어보셨을 것이다.
법화경을 가지고 하면 법화산림, 금강경을 가지고 어느 기간 동안 설법을 하면 금강경산림 이렇게 한다.
화엄경을 가지고 하든지, 법화경을 가지고 하든지, 금강경을 가지고 하든지, 능엄경을 가지고 하든지 어느 사찰에서 그러한 기획을 해서 우리나라에서 유수한 스님들을 초청해서 특별히 광고를 하고 준비도 많이 하고 그렇게 해서 하는 행사가 아주 대표적인 것이 통도사 화엄산림이다. 통도사에서는 매년 한달간 화엄산림행사를 여법하게 잘한다.
지금 유튜브 방송이라고 하는 초유의 기술을 이용해서 저희가 화엄경 공부를 이렇게 오랫동안 하고 있는데 이것도 통도사같이 전국의 유수한 스님들을 일일이 초청하고 그렇게는 못하더라도 그래도 역시 산림행사다.
화엄경 산림행사, 명칭을 붙이자면 화엄산림(華嚴山林)행사가 이렇게 장시간 동안 이어지고 있다.
벌써 언제인가? 작년 9월초부터 했으니까 9월 10월 11월 12월 1월 2월 3월 4월 5월 접어들었는데 벌써 9개월째 화엄산림행사를 하고 있다.
그새 유마경도 했고, 임제록도 일부 했다.
평소에 계산을 안하는데 해보니까 대단하다. 거의 9개월동안 이렇게 화엄산림행사를 하고 있다.
그래 왜 산림이라고 하는가?
불교에서 여러 가지 행사가 있는데 그중에서 제일 값진 행사, 서로가 유익한 행사를 경전산림행사 그것을 산림(山林)이라고 했는데, 산(山)자는 최절인아산(摧絶人我山) 그런다. 나다 너다 하는 상이라고 하는 산처럼 높고 높은 아상 인상 나라고 하는 산을 다 꺾어 없애고 장양공덕림(長養功德林)이라, 공덕의 숲을 키운다 하는 뜻이다.
내자신을 비우고 내 부족한 공덕을 자꾸 성장시켜 가는 일이 산림행사다.
특히 경전산림행사 그래서 화엄산림이다. 이런 행사를 중요하게 여긴다.
통도사 같은 경우는 일년 중에 제일 큰 행사다. 기간도 초파일은 하루에 끝나지만 화엄산림은 30일, 한달간이나 행사를 하고 정상적인 경우라면 아주 많은 이들이 동참을 해서 행사를 마친다.
거기에 행사를 준비하는 사찰 측에서나 스님들이나 법사나 동참해서 법문을 듣는 사람이나 모두가 목적이 ‘나’라고 하는 것, 그것을 비우자는 것이다. 아상(我相) 인상(人相) 산처럼 높고 높은 아상 인상을 없애자고 하는 것이고, 한편으로는 공덕(功德) 공덕의 숲을 키우자고 해서 뫼산(山)자 하고 공덕림 할 때의 림(林)자 산림(山林) 그렇게 부른다. 좋은 의미다.
그런 행사를 벌려놓고 보면 대개의 경우 다 취지에 맞게 동참을 한다. 복도 짓고 공부도 하고 자기도 없애고 아상 인상도 좀 없애고 공덕도 많이 닦아간다.
그런데 간혹 보면 복을 엄청 까먹고 죄를 많이 짓고 가는 사람들이 있다. 복 지으러 와서 또 복 지으라고 이렇게 산림을 펼쳐놨는데 거기 와서 자기가 황칠을 하고 온갖 여러사람 눈에 상그럽게 아주 신경쓰이게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죄가 어디로 가겠는가? 결국 자기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복 지으러 와서 복을 다 까먹고,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 쓰이게 하고, 그것을 일일이 내가 어떻게 말할 수도 없는 것이고, 그것은 스스로 다 알아서 해야할 일인데 나는 그것이 안타깝다.
내가 복을 지으라고 판을 벌려놓았는데 복을 까먹고 가고, 죄를 짓고 가다니, 공부가 끝나고 나서 ‘아이고 참 그 사람, 내가 판을 안벌렸으면 그사람 죄도 안지었을텐데, 내가 판을 벌려서 그 사람이 죄를 짓게 되었다’ 하는 생각을 하고 이야기도 한다.
그런 것은 만에 하나 있는 일이고, 대개 상식이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안한다. 워낙 상식이 없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다. 인생을 살면서도 너무 이치를 모르고 상식이 없으니까 어디 가도 가는 데마다 죄짓고, 복감하고, 조그만한 복이 있는 것을 다 까먹고, 그렇게 늘 손해를 보면서 산다.
덕을 보면서 복을 지으면서 공덕을 닦으면서 살 장소를 마련해 놓았는데 거기 와서 또 그런 일이 벌어지다니 잘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 산림이다. 이것이 사실은 보통 산림이 아니다.
화엄경을 가지고 9개월이나 이렇게 하고 앞으로 또 얼마나 계속될지 모르는데, 또 설사 큰 절에서 여법하게 산림행사를 한다고 해도, 이렇게 알뜰하게 공부하는 데가 어디 있는가? 세상에 없다.
그 속에 담겨있는 뜻은 다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래도 제일 알뜰하게 공부하고, 책이 있는 사람들은 책을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겨 가면서, 짚어 가면서, 예습 복습 해가면서 공부하는 장소다.
부디 아상 인상의 높은 산을 무너뜨려 버리고 공덕의 숲을 잘 키워가시기 바란다.
*
오늘은 현수품 2권째 82쪽, ‘일체의 모공도 그와 같다’
ㅌ. 일체의 모공도 그와 같다
여일모공소방광(如一毛孔所放光)이 무량무수여항사(無量無數如恒沙)어든
일체모공실역연(一切毛孔悉亦然)하니 차시대선삼매력(此是大仙三昧力)이니라
한 모공(毛孔)에서 놓은 광명이
한량없고 셀 수 없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거늘
일체 모공도 다 또한 그러하니
이것이 이 큰 선인의 삼매의 힘이니라.
삼매를 통해서 광명을 놓으니까
한 모공(毛孔)에서 놓은 광명이
한량없고 셀 수 없어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거늘
항하강의 모래수와 같거늘, 그 광명이 그렇다.
일체 모공도 다 또한 그러하니
이것이 이 큰 선인의 삼매의 힘이니라
어느 것이든 눈을 뜨고 보면 광명 아닌 것이 없다.
두두물물 저 산천초목 삼라만상 어느 것도 광명 아닌 것이 없다.
이미 광명으로 존재하는데, 또 내 자신의 광명을 통해서 이미 광명을 놓고 있는 일체 삼라만상 두두물물의 광명을 이해하고 서로 소화한다.
화엄산림이라고 하는 이것도 또한 큰 광명인데 우리 내면에 본래 갖추고 있는 광명의 힘을 통해서 우리가 화엄산림의 광명을 이렇게 보게 된다.
ㅍ.광명의 인연
여기본행소득광(如其本行所得光)이 수피숙연동행자(隨彼宿緣同行者)하야
금방광명고여시(今放光明故如是)하니 차시대선지자재(此是大仙智自在)니라
본래의 수행으로 얻은 광명이
저 숙세의 인연과 함께 행한 자를 따라서
이제 광명을 놓은 까닭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이 큰 선인의 지혜가 자재함이니라.
큰 선인은 앞에서도 있었지만, 대선(大仙)이 누구인가? 바로 부처님이다. 큰 선인, 큰 신선
본래의 수행으로 얻은 광명이
저 숙세의 인연과 함께 행한 자를 따라서
이제 광명을 놓은 까닭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이 큰 선인의 지혜가 자재함이니라
눈을 뜨고 보면 전부가 광명 아닌 것이 없다.
또 내 광명을 통해서 밖의 광명을 알게 된다.
마치 태양이 저렇게 밝게 떠오름으로해서 태양을 알게 된다. 태양빛을 통해서 태양을 알게 된다. 태양빛 뿐만 아니라 일체 사물도 보게 된다.
태양빛을 통해서 태양을 알고, 태양빛이 없다면 우리가 태양을 어떻게 알겠는가?
왕석동수어복업(往昔同修於福業)하며 급유애락능수희(及有愛樂能隨喜)하며
견기소작역부연(見其所作亦復然)일새 피어차광함득견(彼於此光咸得見)이니라
지난 옛적에 복업(福業)을 함께 닦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능히 따라 기뻐하며
그 지은 바를 보는 것도 또한 다시 그러할새
그는 이 광명에서 다 얻어 보느니라.
지난 옛적에 복업(福業)을 함께 닦으며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능히 따라 기뻐하며
그 지은 바를 보는 것도 또한 다시 그러할새
그는 이 광명에서 다 얻어 보느니라
우리가 화엄경 공부를 9개월이나 하고 있는데 ‘우리가 화엄산림을 하고 있다’ 하는 말씀을 오늘에사 비로소 드리게 된다.
우리가 화엄산림을 한다. 각자 방에서 편리한 대로 핸드폰을 통해서, 컴퓨터를 통해서, 또 TV를 통해서 동참을 하는 경우들이다. 오늘날 시대 상황이 그러니까 그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대로 위대한 화엄산림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 당시 화엄경을 설할 때의 산림 다음으로 화엄경 산림을 이렇게 알뜰히 하는 경우가 아닐까, 이런 자부심도 갖게 된다.
약유자수중복업(若有自修衆福業)하며 공양제불무앙수(供養諸佛無央數)하며
어불공덕상원구(於佛功德常願求)하면 시차광명소개각(是此光明所開覺)이니라
만약 온갖 복업을 스스로 닦으며
모든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하며
부처님의 공덕에 항상 원하고 구함이 있으면
이것이 이 광명의 열어 깨우치는 바니라.
만약 온갖 복업을 스스로 닦으며
모든 한량없는 부처님께 공양하며
부처님의 공덕에 항상 원하고 구함이 있으면
‘아 부처님 공덕 훌륭하다, 훌륭하다’ 하면서 부러워하고 또 그것을 원하고 ‘나도 그렇게 해야지’하는 구하는 마음이 있을 것 같으면
이것이 이 광명의 열어 깨우치는 바니라
광명을 통해서, 우리 마음 광명을 위시해서 또 화엄경이라고 하는 그 광명이 서로 만나서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하나하나 깨우쳐 가는 것이다. 우리 마음에서부터 광명이 나오고 화엄경이라고 하는 광명을 비추니까 그 빛이 서로서로 반사가 되어서 이러한 이치를 우리가 아는 것이다. 말하자면 태양이라고 하는 광명이 비춰서 그 빛들이 온 우주에 퍼지니까 태양도 보고, 달도 보고, 사물도 보고, 산도 보고, 온갖 두두물물을 다 보는 이치와 똑같다. 참 신기한 이치다.
비여생맹불견일(譬如生盲不見日)이나 비위무일출세간(非爲無日出世間)이니
제유목자실명견(諸有目者悉明見)하야 각수소무수기업(各隨所務修其業)이니라
비유컨대 소경이 해를 보지 못함이
세상에 해가 없음이 아니니
모든 눈 있는 자가 다 밝게 보아서
각각 힘쓰는 바를 따라 그 업을 닦는 것과 같으니라.
비유컨대 소경이 해를 보지 못함이
세상에 해가 없음이 아니니
비유하자면 타고난 맹인이 해를 보지 못한다고 해서 해가 없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구름이 좀 가렸다고 해서 해가 없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밤이 되었다고 해서 해가 없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지구의 우리가 사는 곳이 해를 등지는 위치에 가 있으면 밤이라고 하고 태양을 못보지만 우리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은 또 환하게 태양을 보고 산다. 태양이 없는 것이 아니다.
모든 눈 있는 자가 다 밝게 보아서
각각 힘쓰는 바를 따라 그 업을 닦는 것과 같으니라
좋은 비유다. 명쾌한 비유다.
대사광명역여시(大士光明亦如是)하야 유지혜자개실견(有智慧者皆悉見)이요
범부사신열해인(凡夫邪信劣解人)은 어차광명막능도(於此光明莫能覩)니라
대사(大士)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지혜가 있는 자는 모두 다 보건만
범부와 삿되게 믿는 이와 소견 좁은 이들은
이 광명을 능히 보지 못하느니라.
대사(大士)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대사(大士) 큰선비, 부처님이다.
지혜가 있는 자는 모두 다 보건만
지혜 있는 사람들은 다 부처님을 안다. 그것도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이라고 사람 사람이 자기 그릇 따라서 이익을 얻는 것과 같이, 부처님의 광명,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 부처님의 훌륭한 가르침도 우리들의 지혜가 얼마나 있느냐, 그 그릇만치만 본다. 지혜 있는 자가 모두 다 본다고는 하지만 자기가 보는 만치만 본다.
저 태양빛이 아주 저렇게 빛나게 또 뜨겁게 내려쬐고 있지만 작은 1cm짜리 풀은 1cm 만치 받아들이고, 거기에 하루종일 커봐야 얼마 못 큰다. 아니 일생을 커봐야 1cm 풀은 그 그릇만치만 큰다.
그런데 감나무나 활엽수 같은 것은 일 년에 얼마나 크는지 모른다. 쑥쑥 자란다. 지금 제가 매화나무를 금년에 가지치기를 많이 했는데 가끔 나가서 살펴본다. 가지치기를 해놓으니까 새로운 가지에서 순들이 얼마나 빨리 자라는지 모른다. 그와 같이 부처님을 우리가 이해하고, 화엄경을 이해하고, 나아가서 인생을 이해하는 것, 그것도 자기 인생만치만 이해한다. 자기 그릇만치만 이해한다. 화엄경도 자기 그릇만치 이해하고, 인생이라고 하는 것, 사람이 살아가는 일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제일 분명한 것, 제일 확실하게 아는 것이 결국은 사람 살아가는 일이다. 그것도 자기 삶이다. 자기 삶을 아는 것같이 이 세상에 제대로 아는 것은 없다. 자기 인생도 제대로 알기는 어렵고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살펴보면 모든 것은 다 그냥 아는 둥 마는 둥 긴가민가하게 넘어가는데 그나마 자기 인생을 자기가 아는 것이 그래도 제일 잘 아는 문제다.
거기에서 우리가 깨우쳐서 뭔가 소신있게 이야기하면 먹혀든다.
대사(大士)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앞에서 해를 비유했다. 그와 같이 부처님의 광명도 또한 이와같아서
지혜가 있는 자는 모두 다 보건만
지혜 따라서 자기 그릇 따라서 화엄경도 이해하고 부처님도 이해하고 불교도 이해한다.
많고 많은 사람들이 불교를 안다고 하지만 천차만별이다.
백이면 백, 천이면 천, 만이면 만 전부 아는 것이 다 다르다.
얼마나 부처님의 가르침에 공을 들였느냐, 뭔가 좀 알고 싶어서 마음을 썼느냐 못썼느냐, 이것 따라서 그렇게 엄청난 차이가 있다.
절에서 50년 60년 70년을 살았다 해도 관심없이 그냥 사는 사람들이 많다. 크게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흘러가는 세월 따라서 사는 사람들, 답답하게 불교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지를 못한다.
범부와 삿되게 믿는 이와 소견 좁은 이들은
이 광명을 능히 보지 못하느니라
부처님에 대해서 잘 모른다. 불교에 대해서 잘 모른다. 화엄경에 대해서는 더 말할 나위 없이 모른다. 참 안타깝다.
사람 사는 일이라는 것이 그렇다. 원효스님께서 발심수행장에서 말했듯이 ‘밥을 먹어서 사람들이 주린 창자를 위로할 줄은 안다. 배가 고프면 밥 찾아 먹을 줄은 안다. 그런데 성인의 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 고칠 줄은 알지 못한다’그랬다.
모든 사람이 다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열심히 이 화엄산림에 동참해서 한마디라도 깨우치려고 하고, 한마디라도 들으려고 하고, 그렇게 들어놓으면 어느날 이 화엄산림하는 장소가 아니라, 잠자려고 하다가도 또 잠에서 깨어나다가도, 설거지를 하다가도, 청소를 하다가도, 산책을 하다가도, 어떤 경우라도 들어두면 ‘잊어버렸다’ 생각했는데 그 들었던 것이 때가 되어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되는 경우가 있다.
우리 사람은 밥을 먹어서 음식을 취해서 육신을 관리하고 육신을 유지해 나가는 것 그것 한가지가 제일 근본적인 일이다. 그것은 누구든지 제일 우선적으로 하는 일이고 해야할 일이다. 음식을 섭취해서 우리 육신을 키워나가는 일, 육신을 유지해 나가는 일이 제일 우선적인 일이고 제일 중요한 일이다.
그다음에는 뭔가 사람으로 태어났으니까 인생사도 알고 세상사도 알고 세상에 눈뜨고 보니까 성인이라고 하는 이들도 많이 계셨고, 지금도 그분들의 가르침이 이 세상에 꽉 차 있고, 그런 데서 또 눈을 떠서 ‘어떻게 사는 것이 보다 더 유익하고 가치있고 보람된 삶을 사는 것인가’ 하는 것을 배워가는 것이다.
화엄산림의 목적은 바로 그것이 아니겠는가.
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꾸는 것, 법을 배워서 어리석은 마음을 지혜의 마음으로 바꿔가는 일이다.
우리가 음식을 먹어서 우리 몸을 유지해 가는 것도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리는 습관에 의해서 음식을 섭취하고, 먹어온 대로, 어느 가정 하면 그 가정에서 늘 먹어온 대로 하고, 또 태어나 보니 부모가 그렇게 음식을 섭취하고 있으면 그 습관대로 식생활을 해 나간다.
그러면서 성장하고, 다른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섭취하고 무엇이 건강에 좋을까, 이런 것을 연구하고, 그러다 보니 조금씩 개선이 되고 ‘우리가 습관적으로 먹어온 이 음식이 꼭 맞는 것도 아니고 꼭 좋은 것만도 아니구나, 좀 바꿔가면서 먹어야 되겠다’ 하는 경우가 있어야 되고, 많이 있게 된다.
밥을 먹으면 이 육신이 유지된다. 그런대로 살아간다. 어리석게 살든지 어떻게 살든지 간에, 그러나 그것만이 아니니까, 세상에 눈을 뜨고, 돌아보면 배울 것이 많고, 우리가 본받을 점도 있다. 외국 여행을 가는 것도 사실은 수학 아닌가. 배우러 가는 것이다. 하나하나 그 나라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하고, 거기서 깨우치기도 하고, 본받을 것은 본받고 또 거기서 깨우쳐서 우리가 고칠 점은 고치는 것이다.
그와 같이 이 화엄경이라고하는 아주 위대한 가르침을 통해서 그것이 학법(學法)이다. 법을 배우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가 몰랐던 것을 하나하나 깨우쳐 가고, 어리석은 마음, ‘그렇게 살면 안된다’ 하는 것도 새롭게 눈을 떠가는 일이다.
이것이 산림의 본뜻이다.
화엄산림의 본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통도사 같은 데는 일 년 중에 가장 신경을 많이 쓰고 공을 많이 들이는 행사가 화엄산림 아닌가.
범어사도 얼마전부터 초하루마다 화엄산림이라고 해서 법회를 했는데 코로나가 생기는 바람에 그만 그것을 못하고 있다.
저 같은 경우는 결국은 이렇게 그 코로나 덕택에 강의를 더 많이 하고, 저의 공부도 더 많이 한다.
스님들에게 한달에 한 번씩 강의하고, 신도님들에게 사경시간까지 세 번 하고 그랬는데 이 유튜브 방송이 생기는 바람에 일주일에 네 번 강의를 하고, 또 금요법회는 금요법회 대로 하고, 월요일날 스님들 법회는 스님들 법회대로 한다.
좋은 점도 많다고 봐야겠다.
마니궁전급연승(摩尼宮殿及輦乘)을 묘보령향이도형(妙寶靈香以塗瑩)이라
유복덕자자연비(有福德者自然備)요 비무덕자소능처(非無德者所能處)니라
마니보석 궁전과 연(輦)을
묘한 보배와 신령스러운 향수를 발라 빛나게 하니
복덕이 있는 자는 자연히 갖출 것이요
복덕이 없는 자는 능히 있을 곳이 아니니라.
마니보석 궁전과 연(輦)을
연(輦)은 가마다. 세상에는 보석궁전, 가마
묘한 보배와 신령스러운 향수를 발라 빛나게 하니
묘한 보배와 신령스러운 향수를 발라서 멋지고 빛나게 한다. 궁전도 그렇고 가마도 그렇다. 그런데
복덕이 있는 자는 자연히 갖출 것이요
갖추려고 안해도 저절로 그것이 온다. 그런데
복덕이 없는 자는 능히 있을 곳이 아니니라
복덕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갖추려고 해도 그것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 원인을 바로 잡아야지, 원인을 바로 잡지 않고 우리가 결과만을 취하려고 한다. 그런데 이치가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이치도 우리 화엄행자 화엄학인이 이런 데서 듣고 하나하나 개선해 갈 일이다.
대사광명역여시(大士光明亦如是)하야 유심지자함조촉(有深智者咸照觸)이어니와
사신열해범우인(邪信劣解凡愚人)은 무유능견차광명(無有能見此光明)이니라
대사(大士)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깊은 지혜가 있는 자는 다 비추거니와
삿된 믿음을 가진 자와
소견이 좁은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능히 이 광명을 보지 못하리라.
대사(大士)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부처님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화엄경의 광명도 또한 이와 같아서
깊은 지혜가 있는 자는 다 비추거니와
화엄경 도리를 우리가 먹고 마시고 내 것으로 하고, 그것을 가지고 인생사, 세상사를 다 비추어 보고, 거기에서 또 바른 길을 취하고 판단한다. 그런데
삿된 믿음을 가진 자와
삿된 믿음을 가진 자 할 때는 늘 부처님이나 보살들이 염두에 두는 말이다. 그것이 무슨 뜻이고 하니 인과를 어기고, 인과의 이치를 모르고 사는 사람을 삿된 믿음, 삿된 사람 그런다.
인과의 이치를 잘 알아서 인과의 이치대로 사는 사람은 바른 믿음, 바른 소견을 가진 사람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다.
삿된 믿음을 가진 자와
소견이 좁은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이 모두가 뭉뚱그려서 ‘인과의 이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이렇게 묶어서 표현해도 아무 상관이 없다. 똑같은 의미다. 그런 사람들은
능히 이 광명을 보지 못하리라
화엄경 이치를, 우리가 신라 때 원효스님 의상스님께서 그렇게 만중생들에게 화엄경의 이치를 가르치려고 곳곳에다가 화엄사찰을 세우고 원효스님은 저 화엄벌에서 천 명의 대중을 모아놓고 화엄경을 가르쳤다.
아마도 신라 때 세운 사찰 중에서 원효암이 제일 많을 것이다. 원효사도 있지만 원효암이 아주 많은데 그것이 뭔가?
원효스님께서 잠깐씩 머물기도 하고, 하룻밤 정도 스쳐 가시면서 ‘화엄경이 우리 삶의 진정한 진리의 가르침이다’ 라고 하는 영향력을 끼치고 지나간 곳이다.
거기에서 원효스님이 화주를 해서 그 절을 짓는데 서까래를 몇 개 준비하고, 기둥을 몇 개 준비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그 절은 거기 그 절을 유지하고 운영해 가는 스님들이 짓고, 그 절에 정신을 불어넣는 일, 이것을 원효스님이 했다는 뜻이다.
그 정신이 무엇인가? 화엄경의 이치다.
‘화엄경의 이치를 가지고 그 사찰의 정신을 불어넣었다’ 그런 뜻이다.
여기 범어사만 하더라도 의상스님이 큰 절을 짓고 원효암에서 원효스님이 계셨다. 곳곳에 원효암이 없는 데가 없을 정도로 큰 산에는 다 원효암이 있다. 원효스님이 사시면서 또는 거쳐가면서 불과 그렇게 긴 시간은 아니라 하더라도 화엄사상을 거기에 다 심어놓고, 불어넣고, 그렇게 인연을 맺었다 하는 의미가 된다.
그만치 우리나라와 화엄경과는 소중한 인연이 있다.
그래서 저는 어떤 종파를 막론하고 한국불교는 모두 화엄경으로써 소의경전을 삼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을 오래전부터 줄기차게 해온다.
우리가 열심히 자꾸 이렇게 화엄경 공부를 하고 들은 분들이 인연 따라서 자꾸 화엄경을 널리 펼치고 하면 언젠가 화엄경이 우리의 소의경전이 되어서 많은 국민들에게 널리 전파되리라고 생각한다.
오늘은 산림에 대한 이야기, 원효스님의 ‘공지끽식(共知喫食)이 이위기장(而慰飢腸)호대 부지학법이(不知學法而) 개치심(改癡心)이라’고 한 훌륭한 가르침을 말씀드렸다.
오늘 시간 거의 다 됐다. 여기까지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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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신 분들 한 번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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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중생을 다 건지오리다)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번뇌를 다 끊으오리다)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법문을 다 배우오리다)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불도를 다 이루오리다)
성불하십시다.
첫댓글 _()()()_
_()()()_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_()()()_
고맙고 감사합니다 _()()()_
과학이 발달되고 그 과학을 우리가 이용하는 이 모든 일들이
원래부터 있었던 것을 모르고 있다가 이제야 찾아낸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듭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사실을 다 아시고 우리들에게 깨우쳐주려고 하셨던 것이었나...
하는 생각이 또 듭니다.
부처님과의 인연을 깊이깊이 감사드리고 고마와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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摧絶人我山 長養功德林...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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