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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따뜻해 졌습니다 항상 나같은 죄인 때문에 가슴 아파서 울고만 계신줄 알었는데 자기의 자녀들의 기쁨 앞에서 웃음을 참지 못하시다며 시원하게 웃으시는 그 주님을 들어내고 싶었지만 점잖은 성도들은 외면하였고 권력을 가진자들은 나를 이상한 목사라고 추방하려고 시도하더군요 주님이 눈물만이 아니라 웃으셧다는 기록이 없다고 일생동안 눈물로만 사셨다면 어찌 죽음앞에서 얼굴이 천사처럼 감옥에서도 기쁨으로 찬송할 수가 있었가 나는 성경에 주님이 화장실 가셨다는 기록이 없어도 뒤로 나오는 것이 더러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보면 안다
그들이 외면한 파안대소의 주님의 모습을 내가 안고 와서 에배처소에 걸었습니다 주님이 자기를 안고 기뻐한다는 환영을 보는이도 생깁니다 참으로 웃음이 필요한 가난한 이들이기에 그런가 합니다
그리고 이 액자와 사진을 내게 준 그 분도 언제나 예수로 인하여 웃으시시기를 빕니다
주여 여기서는 마음껏 웃으십시요 나도 올 한해 내내 웃으며 살도록 하겠습니다 (설교 한편)
창세기 21:5-6 웃으며 살자
사람은 일생동안 살면서 자기 감정을 표현하면서 삽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은 감정이 살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희노애락의 감정을 표현하면서 살아갑니다. 웃기도 하고, 분노하기도 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애통해 하기도 하고, 때로는 즐거워하면서 살아갑니다. 어떤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온순하게 태어나서 잘 웃으면서 살아가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너무 불행한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기 성격대로 자라지 못하고 어두운 모습으로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태어났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든 과거는 일단 지나간 세월이고 앞으로 남은 생애가 길든 짧든 우리는 하나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뜻이 무엇일까? 성경은 분명히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을 웃으며 살도록 창조하셨습니다. 항상 기쁘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저는 예수를 믿은 이후에 제 삶에 있어서 많은 변화를 체험해 가는데 하나님께서 또 어떻게 나를 변화시킬지는 잘 모릅니다. 그러나 계속 변화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처음 믿을 때는 주께서 얼마나 많이 눈물을 담아주셨는지 계속 울게 하셨습니다. 또 주께서 바치라 하는 감동을 주셨기에 일생동안 바치는 심정으로 땀도, 눈물도, 피도 바치는 심정으로 살게 하시는데 최근에는 주께서 저에게 주는 감동이 놀라운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주께서 이 종으로 하여금 많이 웃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본능적 감정이 있고 중생 후에 주시는 감정이 있는데 본능적 감정으로 우는 것은 슬퍼서 울고 감격해서 웁니다. 본능적 감정에서는 기쁘면 웃고 화가 나면 분노합니다. 그런데 중생 후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감정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울게 하셔서 울고, 하나님께서 웃게 하셔서 웃고, 하나님께서 분노케 하셔서 분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분노할 때 하나님의 은혜로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의 표출입니다. 웃을 때도 하나님께서 웃게 하셔서 웃는 것은 하늘과 통하는 웃음입니다. 울게 하는 것도 한맺혀 운다든지, 억울해서 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울게 하셔서 우는 것은 하늘과 통하는 눈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주신 감정 가운데 가장 많은 감정은 웃는 감정입니다. 눈물 흘리는 것도 잠깐이요, 분노하는 것도 잠깐입니다. 많은 시간을 웃도록 하신 창조의 신비를 에덴에서부터 담았습니다. 에덴이라는 말은 ‘웃음, 즐거움, 기쁨’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에덴동산에 인간을 살게 하신 것은 웃으며 살라는 하나님의 뜻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웃으며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한맺혀 탄식하며 사는 곳이 지옥입니다. 많이 웃으면서 산 사람은 복 받은 사람이요, 웃지 못하고 탄식하며 사는 사람은 복없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웃음을 잃어버렸다는 것은 저주받은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가난해서 또 억울해서 많은 상처를 입고 성장해 왔을지라도 이제는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되셨으니 하나님을 모신 아버지의 자녀처럼 웃으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웃음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마귀가 주는 웃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남을 비웃고, 멸시하는 웃음입니다. 거짓된 웃음이 있습니다. 가롯 유다와 같이 속에는 살인적 마음을 품었으면서도 겉으로는 웃는 웃음입니다. 독재자의 웃음이 있습니다. 속에 무서운 악을 품고 있으면서도 겉으로 웃는 스탈린, 히틀러가 웃는 웃음입니다. 이것은 소름끼치는 웃음입니다. 인간이 주는 웃음이 있습니다. 코미디언들이 억지로 웃기는 웃음입니다. 하나님이 주는 웃음이 있습니다. 성도가 은혜로 웃는 웃음인데 우리는 이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독일의 신학자 몰트만은 “웃음은 영혼의 해방이요, 우리 마음을 결박하고 있는 죄에서 구원받은 자의 기쁨의 표현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로 9가지를 얘기했는데 희락을 두 번째에 놓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웃음은 성령의 열매요, 천국의 상징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웃음’이라는 단어가 제일 먼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됩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창 17:17) ‘믿음’이라는 단어도 아브라함에게서 제일 먼저 시작되었습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 또 ‘경배’라는 단어도 아브라함이 제일 먼저 사용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창 22:5)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 웃음의 조상, 경배의 조상, 십일조 찬송의 조상입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우리가 믿음으로 본받는다면 얼마나 큰 은혜가 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나이 100세가 되던 때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래는 이름을 사래라 하지 말고 그 이름을 사라라 하라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네게 아들을 낳아주게 하며 내가 그에게 복을 주어 그로 열국의 어미가 되게 하리니 민족의 열왕이 그에게서 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기를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창 17:15-17)라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고 했습니다. 엎드려 웃었다는 것은 은혜의 웃음을 웃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엎드려서 웃음으로 경배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울면서 예배할 수도 있고, 웃으면서 예배할 수도 있고 예배 때 감정의 표현을 자유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다’ 이것이 최고의 예배의 모형입니다. 첫째, 믿음으로 웃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아니라 네 아내 사라가 정녕 네게 아들을 낳으리니 너는 그 이름을 이삭이라 하라 내가 그와 내 언약을 세우리니 그의 후손에게 영원한 언약이 되리라”(19절)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삭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데 이삭은 히브리어로 ‘웃음’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웃음의 언약을 인류에게 주시는데 그 이삭을 통해서 하나님의 웃음의 언약을 이루실 것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삭을 통해서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태어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삭은 웃음을 가져올 신비를 담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이삭의 출생은 인류에게 웃음을 주시는 은혜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죄로 말미암아 잃어버린 인류의 웃음을 회복시켜 주러 오십니다. 괴로워하는 자에게 기쁨을, 우는 자에게 웃음을, 슬퍼하는 자에게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러 예수님이 오시는데 그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하십니다. 아브라함이 엎드려서 웃은 것은 이런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 나이 백살 내 아내는 구십세 할아범, 할멈의 기력으로 어떻게 아들을 낳겠는가 백번 생각해도 불가능한 나에게 아들을 준다니 하나님이 나를 웃기시네.’ 성경은 하나님을 웃으시는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은 인격을 가지신 분이기 때문에 눈물도 있고, 분노도 있지만 하나님께서 웃으신다는 말씀이 시편에 계속 기록되고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시 2:4), “주께서 저를 웃으시리니”(시 37:13), “여호와여 주께서 저희를 웃으시리니(시 59:8). 하나님의 웃음에는 깊은 비밀이 있는데 장차 아들을 보낼 약속을 하시면서 웃으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우셨다는 기록만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눈물 속에서 웃음을 찾아야 합니다. 울기 위해서 우는 것이 아니었고 웃기 위해서 우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웃기시네’ 했는데 결국은 때가 되매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심으로 그 말씀을 이루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를 권고하셨고 여호와께서 그 말씀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사라가 잉태하고 하나님의 말씀하신 기한에 미쳐 늙은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아브라함이 그 낳은 아들 곧 사라가 자기에게 낳은 아들을 이름하여 이삭이라 하였고 그 아들 이삭이 난 지 팔 일 만에 그가 하나님의 명대로 할례를 행하였더라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낳을 때에 백 세라 사라가 가로되 하나님이 나로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1-6) 사라도 ‘하나님이 나를 웃기시네’ 그럽니다. 부부가 잘 맞아 떨어졌습니다. 남편도 하나님이 웃기시고 아내도 하나님이 웃기십니다. 그런데 그 웃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하와 때문에 웃습니다. 아브라함과 하와가 낳은 아들 이삭 때문에 웃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아브라함이 백세에 아들을 낳았을 때 그 이삭을 보면서 동네 사람들이 ‘저거 웃기네.’ 그랬을 것입니다. 그 아들을 보면서 다 웃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듣는 사람마다 다 함께 웃으리라’ 했는데 사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도 웃지만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구원자로 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 웃음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지 않고 산다면 어떻게 살까’ 그런 생각을 종종 해 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얼마나 우리 마음속에 기쁨이 있고, 우리 마음속에 생의 소망이 있고, 은혜가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면서 종종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저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예수를 믿나’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은 무슨 맛으로 세상을 살까’ 그럽니다. 이삭은 웃음의 아들이요, 웃는 사람의 모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삭은 계속 ‘하나님이 웃기시네’ 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는데 그가 청년이 되었을 때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계시가 옵니다.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 그래서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기 위해서 장작을 그 아들 등에 지우고 산으로 오릅니다. 번제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의 한 형식으로 짐승을 잡아서 내장까지 불살라서 향기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사입니다. 그러니까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는 말은 이삭을 향기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갑니다. 그 언약의 아들, 백세에 준 아들을 데리고 제물을 드리려고 올라가는데 아들이 그냥 가면 될텐데 아버지에게 한마디 묻습니다. “아버지, 불도 있고 나무도 여기 있는데 번제할 양은 어디 있습니까?” 그때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모리아 산에 올라가서 판판한 바위 위에 이삭이 지고 간 장작을 내려놓고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우러러 보고 기도하고 아들에게 말합니다. “이삭아, 네가 번제할 양이다.” 아브라함의 말에 이삭은 순종하여 아무 말없이 장작더미 위에 어린양으로 누울 때 아브라함이 이삭을 꽁꽁 묶어 결박을 해서 그 목에 칼을 대려고 할 때 하늘로부터 여호와의 사자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손대지 말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알았노라” 하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고 보니 숲속에 뿔달린 어린 양이 있습니다. 그 양을 끌어다가 이삭과 함께 잡아서 아들 대신에 번제로 제물을 드립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이 모리아 산을 내려올 때 기분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마 기분이 너무 좋아서 산이 떠나가라 ‘하나님이 웃기시네’ 하면서 웃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랬을 것 같아요. 믿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빼앗겨버린 인간의 모든 불행을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회복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으로 주시는 웃음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기쁨을 인간 내면 세계의 표현이라고 말한다면 즐거움은 외면 세계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려움이 변하여 내 기도 되었고 전날의 한숨 변하여 내 노래 되었네” 웃고 살아야 할 많은 사람들이 울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 비극이며 이것은 마귀가 인간에게 가져다 준 불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모양으로든지 마귀에게서 해방을 얻기 위해서 웃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웃으면 마귀는 왔다가 일곱 길로 물러갈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웃음을 주십니다. 우리는 웃되 하나님과 함께 웃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 있으면서도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고 했는데 그 기쁨이 하나님을 대면한 믿음에서 얻는 기쁨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참 믿음은 하나님을 향해서 웃는 믿음을 얻는 것입니다. 가끔 저는 혼자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내가 어떤 표정을 해야 하나님의 효자가 될까 어떤 표정을 하면 하나님이 좋아하실까’ 웃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웃겨드려야 합니다. 하나님도 나를 웃기시고 나도 하나님을 웃겨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온 세상을 웃음으로 바꾸어놓는 새 창조의 역사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효자는 부모님을 웃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슴에서 눈물을 뺀다든지, 탄식하게 만드는 것은 불효자입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복받은 증거는 뭘 많이 가진 것이 아니라 많이 웃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사업 하고, 웃으면서 가정생활 하고, 웃으면서 예배하는 것이 복받은 증거입니다. 어느 교회 여 집사님이 간증한 내용입니다. 자기는 남편 구원을 위해서 금식기도도 하고, 울면서 기도도 하고, 남편에게 별별 방법을 다 써봤지만 남편으로부터 교회 오겠다는 응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새벽에 남편 구두를 가지고 교회 강대상 밑에 놓고 기도하기를 “주님, 제 남편 구두가 먼저 왔습니다. 구두 주인도 속히 따라나오게 하옵소서.” 하고 웃으면서 기도했습니다. 그 기도를 하면서 얼마나 웃었는지 다른 기도는 하나도 못하고 웃기만 하다가 집에 왔습니다. 다음날 아침 남편이 출근할 때 남편 구두를 챙겨주면서 또 웃었습니다. 속으로 ‘구두 주인님 잘 다녀오십시오.’ 하면서 또 웃었습니다. 남편이 아내 얼굴을 보더니 “오늘 따라 당신 얼굴이 유난히 아름답네.” 하고 말하니까 아내가 은혜 받아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그때 남편이 “사업도 안되고 세상살기도 힘든데 당신 따라 웃고나 살까?” 하면서 교회에 간다고 하더랍니다. 그 부인의 간증의 결론이 하나님을 한바탕 웃겼더니 기도 응답이 빨리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웃기는 기도, 웃기는 예배, 이것이 은혜로운 예배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사랑으로 서로 웃고 살아야 됩니다. 좋은 남편 따로 있는 것 아닙니다. 자기 아내에게 웃음을 선물하는 남편 좋은 남편입니다. 자기 남편에게 웃음을 주는 아내 좋은 아내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우리가 어떤 자세를 가질까? ‘하나님을 생각하니 세상은 괴로워도 웃음이 나옵니다.’ 이렇게 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겠습니까 한국민족의 새로운 민족 개조론을 부르짖었던 도산 안창호 선생이 말년에 평양에서 오십리 떨어진 태보산에 조그만한 산장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는 산장 입구에 문을 세우고 “빙그레, 벙그레, 방그레”라고 써 붙였습니다. 그리고 “누구든지 어린 아이는 방그레, 청년들은 빙그레, 노인들은 벙그레 웃어 웃는 민족으로 웃는 얼굴로 새 민족을 이루자고 호소했습니다. 웃는 집에 만복이 깃든다고 한 것처럼 웃으면 행복이 찾아옵니다. 웃으면 장수합니다. 동의보감에 “웃음은 보약보다 좋다”고 했습니다. 최근에 발행된 프랑스 보건지 “쌍떼”라는 잡지에 따르면 프랑스 의사들이 뽑는 가장 좋은 약은 ‘웃음’이라고 했습니다. 웃으면 엔돌핀이 생기고 따라서 우리 몸에 침입해 들어오려는 모든 암의 병균들을 물리쳐 줍니다. 웃음은 건강의 특효약이고 최근에는 웃음 요법으로 병을 고치는 내적 치유를 개발하고 있습니다. 미국 의학팀이 연구한 결과 만약에 하루에 열 다섯 번씩 웃는다면 모든 환자의 반절을 줄일 수 있다고 합니다. 웃음은 돈으로 살 수도 없고 팔 수도 없고, 벌 수도 없고 꿀 수도 없고, 훔쳐갈 수도 없습니다. 이것은 성공과 행복의 비밀의 보화입니다. 사람이 웃을 수 있으면 그는 가난하지 않다. 네가 웃을 때 온 세상이 너와 같이 웃는다. 한번도 웃지 않은 날은 완전히 잃은 날이다. 웃으면 세상이 너와 함께 웃고 울면 너 혼자 운다. 셋째, 소망으로 웃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웃게 하시니 듣는 모든 사람이 웃으리로다” 우리가 웃고 살려면 내 속에 있는 정과 욕심을 못박아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웃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은 웃음을 다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어느 것 하나 인간에게 웃음을 주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소망 중에 웃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최후로 웃는 자가 승리한 자다” 마지막 내가 인생을 마칠 때 웃고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승리자인데 그가 바로 스데반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원수들의 돌에 맞아 쓰러져 죽으면서도 그 얼굴이 천사처럼 빛났다고 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핍박자에 의해서 수없이 괴롭힘을 당할 때도 끝까지 저들을 사랑했으며, 사형장에 끌려갈 때도 찬송하고, 사자의 밥이 될 때에도 저들은 로마의 원형극장에서 웃으면서 갔습니다. 수많은 기독교인들을 핍박했던 네로가 원형 경기장에서 기독교인들을 놀이개감으로 삼아 사자의 밥이 되게 하고 마지막 원형 경기장을 돌아볼 때 죽은 그리스도인들의 얼굴이 다 하늘을 향하여 웃음띤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어떤 슬픔이 있습니까 어떤 억울함이 있습니까 어떤 비극이 있습니까 하늘을 향해서 한바탕 웃으십시오. 김활란 박사가 그의 마지막 유언에서 “내가 죽거들랑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켜 천국에 가니 구슬픈 장송곡을 부르지 말고 승리자의 노래를 불러다오. 천국을 환송하는 환송의 노래를 불러다오.” 그래서 헨델의 메시아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것입니다. 최후에 웃는 사람, 하늘나라 소망 중에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최고의 영광입니다. 이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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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주님의 파안대소를 아무나 들을 수 없고 아무나 맞을 수 없지요. 진정 주님으로 인해 기뻐하고 그 주님께 기쁨의 찬양을 드릴 때 우리를 향해 파안대소하시는 주님을 볼수 있지요. 저 역시 파안대소하시는 주님을 볼수 없었지만 빙그레 웃으시는 주님을 맞이한 적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파안대소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행복한사람들교회의 예배가운데 항상 계실 것을 믿습니다.
할레루야.. 그렇습니다 그렇고 말고요 주님께서 파안대소하고웃으셔야지요 웃음을 증거하는이가 없었지요 목사님께서 하시는군요 이제는 감람유와 포도주가 되지않으면 죄의 본질을 이길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웃음의 소리가 이한국을 흔들어 주실줄믿습니다 ...웃으시는 주님과 함께 걸어가시는 목사님과 주님께 감사를드립니다 ..아멘..
어려움도 아픔도 시간이 지나가매 잊어지고 다시다가오는 새로운 사명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님께 <예>..라고 대답하는 이작은종을 기억하실지요 구원의 완성으로 걸어가는 길이 고달프고 부셔져야하지만 ..예수님이 계시기에 부셔질수있습니다 부셔진 잿더미에서 위에서 발견되시는 예수님의사랑의 웃음이 있기에 기쁘고 새롭게 살아갑니다 건강하신모습에 하나님께 감사를드립니다 예수님의 기쁨과 함께 행복하시길 기도합니다 ....
아멘 ! 아멘 입니다 정말 기분좋아요 예수님 웃으시는 모습 . ㅎㅎㅎ 이래서 목사님이 좋다니까요
가슴이 시원해 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