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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힘을 얻는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다만 힘을 키우는 지혜를 얻는다고 하면 수긍이 간다. “한 해의 계획은 봄에 세워야 하고, 하루의 계획은 새벽에 세워야 한다.”고 한 남조시대 소탁(蘇鐸)의 말은 일리가 있고, 마치 고전의 대명사처럼 들린다. 또 이 말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논어》에 이런 말이 있다. “자신이 말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그것을 실천하기는 어렵다.”말을 너무 쉽게 하는 사람, 말만 늘어놓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 사람, 큰소리치며 자신을 과시하기에 급급한 사람을 경계하라고 한 말이다. 말 한 뒤에 오는 결과에 대해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사람, 심지어 자신이 말한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사람, 잊어버린 척하는 사람도 있다.
여기까지 읽었다면 이 책이 무엇을 담고 있는지 대략 짐작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세상에 나쁜 책은 없다’고 생각하는 나는 좋은 책을 만난 것 같다는 생각이다. 저자 조윤제 선생은 고전연구가로 경희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삼성전자에서 근무하다, 《논어》《맹자》《사기》등 동양고전 100여 종을 원전으로 읽었다고 하는데,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이 책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고전을 통해, 하루하루를 완성해 감으로써 우리의 삶을 완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하고, “삶의 기적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충실하게 하루하루가 쌓여 기적적인 삶이 된다.”고도 했다. (3.2)
한때 사람들을 이끄는 리더가 되려면 카리스마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알기로 YS때만 해도 그랬다. 하지만 오늘날은 카리스마보다는 같이 생각하고 함께 느끼는 감성을 가진 러더를 따른다. 상대의 마음을 얻고 싶다면 “사람들과 좋아하는 바가 같으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고, 미워하는 바가 같으면 한마음으로 따를 것이다.”고 한 이 말은 《삼략(三略)》에 나온다.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입장이 되어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공자(孔子)는 부를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는 어려서부터 생계를 위해 천한 일을 해왔으며, 청년이 되어서는 창고지기, 목장지기 등 거칠고 힘든 일을 많이 했다. 그는 당당하게 벌고 아름답게 쓰라고 했는데, “부를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말채찍이라고 잡겠다.”(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고 한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초지일관(初志一貫)이라는 말이 있지만,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인내가 필요하다.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내가 성공을 바라고 내가 변하지 않으면 세상이 나를 변화케 하기 때문일 것이다. “진실로 하루를 새롭게 하고, 날마다 새롭게 하고, 나날이 새롭게 하라.”이것은 《대학(大學)》의 가르침이다.
실력이 없이 이상만 높다면 그것은 허망하다. 아무리 높은 이상도 내가 밟은 땅에서 시작해야 한다. 굳건히 기반을 다진 후에 한 걸음 한 걸음 높은 이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명심보감(明心寶鑑)》에 있는 말로, “사람이 배우지 않는 것은 아무런 기술도 없이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다.”(人之不學 如登天而無術)고 했다. 높은 곳에 올라야 멀리, 넓게 볼 수 있다. 사람은 보는 것을 통해 이상을 가질 수 있고, 광대한 꿈을 품을 수 있다. 그래서 누구나 더 높은 곳에 오르고 싶은 소망을 가지는지 모른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여씨춘추》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산에 걸려 넘어지지 않지만, 개미 언덕에 걸려 넘어진다.”사람들이 중요한 일을 하려고 할 때는 마음을 굳건히 다지고 치밀한 계획과 준비를 한다. 하지만 작은 일에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방심하는 경우가 많다. 사소한 일 같지만, 결과는 다르다. 작은 구멍 하나가 거대한 둑을 무너뜨리고, 작은 불씨가 큰불로, 잘못된 명령이 나라를 망치기도 한다. 매일 하는 일은 작은 일로 보이지만, 실상은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것이 자신이 바라는 이상을 이루기 위한 바탕이 됨은 물론이다. 매일매일 하는 일을 루틴(reutine)이라고 하는데 ‘판에 박힘’,‘타성적인’이란 뜻이다. 이 루틴이 지루하게 여겨진다면 되는 일이 없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항상 되새겨야 한다.
공부를 많이 했다면 반드시 자신의 삶에서 배운 것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머리 안에서 머물고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오히려 지식이 삶을 기만하는 것이 될 수 있다. 맹자가 말했다. “널리 배우고 자세히 말하는 것은 나중에 돌이켜 요점을 말하기 위함이다.”폭넓게 배우는 것은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보여주는 데만 열중하다 보면 말이 장황하고 지루해지기 때문이다.
‘물질의 노예로 살면 삶의 주인이 될 수 없다.’유가에서는 “군자는 물질을 지배하고, 소인은 물질에 지배당한다.”(君子亦物 小人亦於物 - 순자)라고 하여 군자와 소인을 구분했다. 다시 말해 부를 대하는 태도에서 군자와 소인을 구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자리에 올랐어도 물질에 최고의 가치를 두는 사람은 소인에 불과하다. 부 앞에서 비굴해지는 것도, 끊임없이 부를 불리려 쫓는 것도, 모두 부의 노예가 되는 길이다. 이들의 삶은 행복할 수가 없다. 무엇의 노예로 사는 것이 어찌 행복할 수 있겠는가?
인간이 살아가는 데는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그중에 시간은 지금이 지나고 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18년간 귀양살이 하면서, 500여 권의 귀중한 책 《여유당전서》를 쓴 다산은 시간이 아주 절실했던가 보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가르쳐서 안 되는 글자가 있다. 바로 소일(消日-그럭저럭 한가롭게 보내는 세월)이다.”고 하고 이어어, “슬프다. 그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의 처지에서 말하는 1년 365일, 1일 96각이 스스로 이어대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농부는 밤낮으로 농사일에 힘쓰니, 만일 해를 붙잡아 둘 수만 있다면 끈으로 묶어 끌어당길 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기에 곧 이날을 보내지 못하는 것을 근심하고, 고민하여 장기, 바둑, 공놀이 등으로 도모하지 않는 바가 없단 말인가? 남당의 〈숙홍야매장〉(夙興夜寐藏)은 때를 안배하고 순서를 정한 기한이 있으니, 참으로 학자들에게는 보배와 같은 글이다.”라고 했다. 남당, 즉 송대의 학자 진백이 〈숙홍야매장〉이란 글에 대해 퇴계 이황과 노수진이 서로 논박한 글이 있는데, 정약용이 이를 인용해 〈도산사숙록〉(陶山私淑錄)에 실었고, 여기에 하릴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일을 크게 질책한 것이 다산의 일갈이었다. 아무리 좋은 글과 좋은 고전도 지루할 수가 있다. 장기, 바둑, 공놀이를 허송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금은 많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면서 더욱 그런 생각을 가지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어느 것이 옳은지는 각자가 판단할 몫이다.
큰일을 하려면 어떤 태도라야 할까? 《여씨춘추》에 이런 말이 있다. “망국의 군주는 반드시 스스로 교만하고,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고, 스스로 사물을 경시한다.”(亡國之王 必自驕 必自智 必輕物) 항우는 이들 세 가지 모두 부족했다. 교만해 한신과 같은 부하들을 믿지 않았고, 자신만이 지혜롭다고 생각해 상대인 유방을 경시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가장 용맹하고 뛰어났지만, 하늘이 돕지 않았다고 하늘을 원망했다. 성공하기도 어렵지만 무너지는 것도 한 순간이다.
《시경》에 “물 없는 곳에 배를 띄운다.”(罔水行舟)는 말이 있다. “안 되면 되게 하라.”(군대용어), “내 사전에 불가능은 없다.”(나폴레옹), “해보기는 했어?”(정주영 회장) 이것들은 정면 돌파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그래서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는 일도 의지력으로 밀어붙이면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의지로 이겨낼 수 있다고 하면 필요한 자세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의지로 도전할 수 있는 일이 있고 도저히 불가능한 일도 있다. 물이 없는 곳에서 배를 띄우면 배는 어디로 갈까.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속담도 있다. 의욕인지 과욕인지 혹은 무모한 도전인지 냉철하게 판단해야 하고 그 일이 합리적인지도 짚어보아야 한다. 조직을 책임지는 리더라면 더욱 그렇다.
“천 권의 책을 구하기는 어렵지만 물리치기는 쉽고, 의복과 음식을 구하기는 쉽지만, 물리치기는 어렵다.”《명심보감》에 있는 말이다. 요즘은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책이 흔한 시대다. 하지만 쉽게 구한 만큼 책을 아껴 읽는 사람은 드물다. 귀하고 구하기도 어려웠던 옛날보다 책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다이어트나 명품은 내 겉모습을 꾸미지만, 책은 내면을 아름답게 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도 그렇다. 제갈량은 주군 유비가 죽고 아들 유선을 받들면서 책 읽기를 권하면서 4권의 고전을 자신이 직접 써서 주었다고 한다. 《신자》《한비자》《관자》《육도》가 그것인데, 옛날에는 일일이 손으로 직접 써서 책을 만들었기 때문에 구하기 어려운 것이 책이었다. 비싸기도 했을 테고.
이상 1월에 읽어야 할 고전으로 저자가 뽑은 것들 중의 일부다. 앞으로 12월까지 어떤 내용이 책에 담겼을까 하는 궁금함도 있지만, 그것을 옮겨 적는다면 다시 책 한 권을 만들고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그래서 책이란 언제나 가치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논어》의 마지막 구절은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지 못한다.”(不知言 無以知人也)인데, 맨 처음의 “때때로 배우고 익히면 기쁘지 아니 한가?”와 비교되는 말이다. 공자의 말씀 모음인 《논어》에 실린 것들은 공부, 사람, 말로 집약될 수가 있는데, ‘말은 곧 그 사람 자신이다’라는 명제가 떠올려진다. 말은 사람의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므로 그의 말을 들으면 그 사람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 공자는 배움에 대해 태어나면서부터 아는 생이지지자(生而知之者), 나중에 배워서 아는 학이지지자(學而知之者), 공경에 빠진 후에 배우는 곤이학지자(困而學知者), 그리고 어려움에 처했을 때도 배우지 않는 곤이불학자(困而不學者)로 구분했는데, 이 중에 가장 높은 단계인 생이지지자는 이미 모든 것을 통달하고 있어서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이에 반해 학이지지자와 곤이학지자는 배움의 필요성을 알기에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마지막 곤이불학자는 어려움에 처해도 스스로 변화하지 않는 사람을 말하는데, 자신이 왜 변화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삶이 힘들고 어려운 것은 자기탓이 아니라 환경의 탓, 다른 사람 탓이라고 생각하기에 남을 원망하고 심지어 하늘을 원망한다. 변화하려는 의지가 그래서 중요하다. “유상지여 하우불이(唯上知與 下愚不移) 오직 가장 지혜로운 사람과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정한 가왕인 나훈아가 며칠 전 사람들이 박수칠 때 떠난다며 은퇴를 선언했다. 몇 해 전에는 패티킴도 그렇게 했다. 정치인 중에 그런 사람을 아직까지 별로 보지 못했다. 나훈아와 패티킴은 아마도 《채근담》에 나오는 구절을 읽은 게 아닌가 보인다. “일에서 떠날 때는 마땅히 전성기에 물러나야 하고, 몸을 둘 때는 홀로 뒤져진 곳에 두라.”(謝事 當謝於正盛之時 居身 宜居於獨後之地) 자리에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훌륭한 사람일수록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어두운 곳, 뒤처진 곳에 자리한다. 그래서 더욱 빛이 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다. ‘자리에 있을 때는 겸손하고, 떠날 때는 모두의 축복 속에서 아름답게 물러난다.’고는 하지만 역시 말보다 실천이 어려운 문제가 아닌가 싶기는 하다.
“충성스런 간언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투지 말고 뒤로 물러서라.”(忠諫不聽 蹲循勿爭-충간불청 존순물쟁) 마치 공자나 순자가 한 말 같은 이 말은 장자의 말이다. 이에 대한 고사가 있다. 오자서는 오왕 합려의 뒤를 이은 오왕 부차에게 간언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비록 충성스런 간언이었지만, 충정을 알아주지 않은 왕에게 목숨을 잃은 것이다. 결국 충직한 신하를 잃은 부차 역시 나라를 잃었지만, 충직한 신하라면 자신의 명예를 내세우기 전에 모시는 군주와 나라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뜻으로 간언해도 윗사람이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한 걸음 물러서서 다음 기회를 보는 것이 좋다. 물러서서 다음을 도모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다.
율곡 이이 선생이 스무 살 때 자신을 경계하기 위해 쓴 《자경문》(自警文)에는 “만약 빠른 성과를 구하고자 한다면 이 또한 이익을 탐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부모가 물려준 몸에 형벌과 치욕을 당하게 되니 곧 사람의 자식이 아니다.”라고 했다. 공부하면서 빠른 결과를 얻으려고 하면 조급해진다. 당장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실망하고 점점 공부와 멀어지기도 한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것은 좋으나, 게으름이나 방만함은 안 된다는 것이다. 인생의 이치도 마찬가지다. 눈앞의 성과에 집착하면 조급하고 초조해지기 마련이다. 편법과 불법이 성공할 리 없다. 그래서 “공부에 힘쓰되 느리게도 급하게도 하지 말며 죽은 뒤에야 그치는 것이다.”(用功不緩不及 死而後已-용공불완불급 사이후이)라고 율곡이 말했던가 보다.
“仁은 사람의 마음이요, 의는 사람이 걸어가야 할 길이다. 길을 버리고 따라갈 생각을 하지 않고, 그 마음을 놓아버리고 찾을 줄 모르니 슬프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르던 닭이나 개를 잃어버리면 그것을 찾으려고 하면서도 잃어버린 마음을 찾을 줄을 모른다. 학문의 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마음을 찾는 데 있다.”《맹자》〈고자상(告子上)〉에 나오는 말이다. 흔히 공부는 지식을 습득하는 것으로 알지만 진정한 공부란 욕심과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바른 마음을 회복하는 데 있다. 《근사록》에 이런 말도 있다. “사람을 움직일 수 없는 것은 정성이 없기 때문이고, 일에 실증을 내는 것도 모두 정성이 없기 때문이다.”요즘 시중에는 사람을 설득하는 기술에 관한 책들이 아주 많이 나와 있다. 책들은 마치 설득에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설득은 기술이나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다. 기술로 접근해 잠시 사람을 현혹시킬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 사람을 진정으로 사로잡기는 어렵다. 사람을 설득하고 일을 제대로 해내는 것의 근본은 정성이다. “정성이 지극하면 쇠와 돌도 열린다.”(精誠所至 金石爲開)고 했다. 그것으로 나의 앞길과 사람과의 관계도 열릴 것이다.
성인이라고 하지만, 공자도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을 어떻게 살았을까? 《논어》〈자한(子罕)〉편에 “子絶四 毋意 毋必 毋固 毋我”라고 했는데, 그것은 “공자는 네 가지를 절대 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사사로운 뜻을 품지 않았고, 반드시 해야 한다는 일이 없었고, 고집을 버렸고, 아집을 버렸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마음의 병이랄 수 있는 터무니 없이 자신을 높이는 자존심이 아니라, 정확히 자신을 알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갈 때 하루하루 변화하는 자신을 만들 수 있다. 솔직하고 겸손한 사람은 따르는 사람이 많다.
배운 것이 있다면 그것을 익혀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의 핵심은 실천이다. 실천하는 것은 배움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드는 일이다. 공부를 하면서도 욕심을 갖지 않는다면,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기는 어렵다. 뚜렷한 목적 없이 되는대로 해서는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기 때문이다. 《중용》에 이런 말이 있다. “배우지 않으면 모를까 배운다면 능하지 못함을 그대로 두지 마라.”제대로 알 때까지 배움을 추구하라는 말이다. 배움과 실천은 둘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 《논어》에서는 이것을 “학문은 다 배우지 못할까 안타까워해야 하고, 배운 것을 잃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 (學而不及 猶恐失之)”고 했다.
다가오는 4월에는 어떤 기회가 올까? 누구를 만나게 될까? 그런 기대가 없다는 것은 너무 맹랑할지 모른다. 봄에 할 일을 생각해 보면서 맹자의 경구가 한 번 더 돌아보인다. “지혜를 지녔어도 형세를 타는 것만 못하고, 농기구를 가졌어도 농사철을 기다리는 것만 못하다.”(雖有智慧 不如乘勢 雖有鎡基 不如待時) 좋은, 인생을 살려면 지식과 지혜를 갖추어야 하고, 농사를 잘 지으려면 최소한 농기구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때를 잘 타야 한다. 서양 속담에 ‘준비가 기회를 만나면 행운이 된다.’는 말이 있다. 지금 처해 있는 상황은 각자 다르지만, 철저히 준비하고 기다리면 기회는 반드시 올 것이다.
《안자춘추》에 “행하는 자는 성취하고, 걷는 자는 도달한다.”(爲者常成 行者常至)라는 말이 있다. 당연한 말 같지만, 무슨 뜻인지 애매하다. 제나라 재상 양구거(梁丘據)는 평생 2인자였다. 그는 스스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1인자 안자(晏子)에게는 미치지 못할 것 같다고 한탄했다. 이것은 안 안자가 말했다. “꾸준히 노력하면 반드시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역시 다른 사람과 특별하게 다른 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항상 포기하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타고난 성품이 남과 다름없지만 쉬지 않고 노력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일도 공부도 마찬가지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이라고 많이 쓰는 말이 있다. ‘넘치는 것은 모자란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충분히 날카로운 칼을 가졌는데도 더 예리한 칼을 탐내는 것은 사람의 욕심이 한계가 없기 때문이다. 권력과 부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어서 절제하지 않으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이런 말을 했다. “지니고 있음에도 더 채우는 것은 그만두느니만 못하고, 갈아서 더 날카롭게 되면 오래 보존할 수 없다.”(持而盈之 不如其已 惴而銳之 不可長保-지이영지 불여기이 췌이예지 불가장보) 지나친 욕심은 항상 화를 부른다.
인류의 역사는 변화의 역사라고 해야 할지 모른다. 그 변화는 사람이 만든 것이다. 변화를 주도하고 이끄는 사람은 성공하고 변화에 둔감한 사람은 변화에 휩쓸려 사라지고 만다. 특히 지금의 IT시대는 변화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졌다. 찰스 다윈이 말한 것처럼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변화에 잘 적응해야 살아 남는다.”세상의 변화를 이끄는 사람, 변화에 휩쓸려가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다. “萬物有無常(만물유무상)-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한비(韓非)는 법가의 대가로서 진시황의 부름을 받았으나, 동문수학하던 이사(李斯)로부터 모함을 받아 자결했다. 그는 《한비자》라는 사상서를 남겼는데, 진시황을 만나면 무슨 말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가 자신의 앞날을 결정할 중요한 순간에 이렇게 말했다고 썼다. “알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함이고, 알면서 말하지 않는 것은 불충이다.”(不知而言 不知 知而不言 不忠)”라고.
「공자가 3000여 명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말한 것을 후에 제자들이 모은 책을 《논어》라고 한다. 여기에 보면 “과거에는 자신을 위해 배웠지만, 요즘은 남을 위해 배운다.”는 말이 있다. 자신을 위해 배운다는 것은 자기 성장과 발전을 위해 배운다는 것이고, 남을 위해 배운다는 것은 남에게 과시하기 위해 배운다는 의미다. 자기완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오늘보다 나은 내일을 바라기 때문에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세속적인 영달과 자기 과시를 위해 공부하는 사람 즉, 출세만을 위한 공부는 출세하고 나면 그만두기가 쉽다. 즐거움을 누리는데 바쁘기 때문이다. 자기완성과 출세를 위한 공부, 이 두 가지는 다 필요할지도 모르지만, 자기 성장을 위한 공부라야 즐겁게 할 수 있고, 남을 돕기 위한 공부라야 진짜 공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3.5. 손자들에게 보낸 문자
한자 말에 ‘부화뇌동(附和雷同)과 화이부동(和而不同)’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출처는 《논어》에 “군자는 조화를 이루되 동화하지 않고, 소인은 쉽게 동화되지만,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君子和而不同 小人同而不和)가 그것이다. 고전 중의 고전 《춘추좌전》에는 이에 딱 들어맞는 고사가 있다. 양구거는 제나라 경공으로부터 훌륭한 신하라고 칭찬받았던 인물로 양구거를 일러 “유일하게 나와 마음이 맞는 신하다.”라고 할 정도로 경공이 신임했다. 하지만 안자는 경공에게 “양구거는 군주의 뜻에 무조건 따르기만 할 뿐 잘못된 점을 간언해 고치려 하지 않습니다. 부화뇌동으로는 군주와 조화를 이루어 옳은 일을 도모하지 못합니다.”라고 했다. 군주의 뜻에 무조건 따르는 양구거의 행동은 부화뇌동한 것이고, 잘못된 쪽이 설사 임금이라 해도 거침없이 간언한 안자는 화이부동한 것이다. 나라와 군주를 위하는 것은 한마음이 되어야 하지만, 그것의 해법은 바르고 창의적이어야 한다.
형제간에 갈등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가장 흔한 것이 재산 문제다. 북제 시대 임하 고을에 보명 형제가 전답을 두고 몇 년째 다투고 있었다. 이에 태수 소경이 형제들을 불러서 타일렀다. “천하에 가장 얻기 힘든 것이 형제고, 구하기 가장 쉬운 것은 토지다. 설사 토지를 얻는다 한들 형제의 마음을 잃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이에 형제는 스스로 부끄럽게 여겨 화해했다. 재물은 노력하면 구할 수 있지만, 형제는 아무리 원해도 자기 뜻대로 구할 수 없다. 사회생활로 형제보다 친한 인연을 얻을 수는 있지만, 같은 부모를 둔 형제와는 다르다. 형제간 우애는 혼자 지킬 수 없고 함께 노력해야 한다. 《안씨가훈》에 “형을 공경하는 것이 아버지를 섬기는 것과 같지 않으면서 어찌 아우를 사랑하는 것이 자식 사랑에 미치지 못함을 원망하는가?”라고 한 것은, 형을 공경하고 아우 사랑을 자식 사랑처럼 하라고 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구하기 힘든 것이 형제다.”(世間最難得者兄弟) 새겨 볼 만하다.
《춘추좌전》에는 “군자는 머리를 쓰고, 소인은 힘을 쓴다.”(君子勞心 小人勞力)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또 맹자는 “생각하면 얻지만 생각이 없으면 얻지 못한다. 마음을 따라야 대인이 된다.”라고 했으며, 《대학》〈경1장〉에도 “멈출 것을 안 다음에야 정해지는 것이 있고, 정해진 후에야 마음이 고요해질 수 있고, 고요해진 후에야 편안해질 수 있고, 편안한 후에야 생각할 수 있으며, 생각한 후에야 얻을 수 있다.”라고 했다. 이것의 공통적 의미는 무언가를 얻으려고 하면 반드시 생각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병법서들이 힘으로 싸워 이기는 장수보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장수를 최고로 쳐주는 것만 봐도 그렇다.
지식을 쌓는 것은 지혜를 얻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지혜란 무엇인가? 노자 《도덕경》에 “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고,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한다.”(知者不言 言者不知)라고 했다. 지혜롭고 지식이 많은 사람은 오히려 말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마음에 종일 떠들고 다닌다. 완성된 사람은 드러내지 않아도 그 인격이 언행에서 저절로 풍겨 나온다. ‘말이 곧 그 사람’이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요즘은 말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모두 열심이다. 하지만 이 시대에 정말 필요한 것은 말해야 할 때 말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군자 일언중천금(君子一言重千金)이라는 말이 있다. 말의 무게가 천금인 사람은 그 사람의 가치 또한 천금이다.
탈무드에 “먹을 것을 주기보다 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라.”라는 말이 있다. 이것을 가장 잘 실천한 민족이 유대인이다. 보물은 상할 수도, 도둑 맞을 수도, 빼앗길 수도, 탕진해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지혜는 어떤 상황에서도 지킬 수 있다. 늦은 나이(70 혹은 80)에 주나라 개국 공신이 된 강태공이 말했다. “좋은 밭을 백만 결 가지고 있어도 작은 재주 한 가지만 못하다.”(良田萬頃 不如薄藝隨身) -《명심보감》‘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것, 그것이 지혜다.’
흔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사기》에 「심장약허(深藏若虛)」라고 하는 고사가 있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 가르침을 구하자, 노자가 말했다. “내가 듣기에 장사를 잘하는 사람은 물건을 깊숙이 감춰두고 남에게 보여주지 않듯이, 군자는 고상한 덕성과 학식을 갖춰두고 있지만, 겉으로는 어리석은 듯 재능을 보이지 않는다 하였소. 그대의 교만과 욕심, 그리고 꾸미는 듯한 그 태도와 부질없는 야망을 버리도록 하시오.”
겉으로 드러나는 재능은 진정한 탁월함이 아니며 뛰어난 사람은 오히려 어리석은 듯 보인다고 말한 것이다. 북송 시대 개혁가이자 시인인 왕안석(王安石)이 말했다. “보기에는 평범한 것 같으나 그것은 특이하게 우뚝 솟고 쉽게 이뤄진 듯하지만, 도리어 어려움을 거친 것이다.”(看似尋常最奇崛 成如容易卻艱辛) 평범해 보이지만, 뛰어난 사람은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순수하고 소박하고 평범해 보이나 자기 일에는 남다른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노자나 왕안석이 말한 그런 사람이다.
이 책의 제목이 〈하루 한 장 고전 수업〉인 것은 하루 한 장씩 1년 365일 동안 읽으라는 것 같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월요일은 言, 화요일은 態度, 수요일은 學, 목요일은 關係, 금요일은 富, 토요일은 心, 일요일은 休로 나누어 기술한 것은 저자의 의도이지만 독자의 마음도 헤아리려고 편집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 많은 고전이 있지만, 이렇게 여러 고전의 핵심만을 뽑아서 간단명료하게 기술한 책은 없었던 것 같아 도움된다 싶다.
《사기》에 “가진 것이 없으면 몸을 쓰라, 조금 가졌다면 지혜를 쓰라, 이미 부자가 되었으면 시간을 이용하라.”(無財作力 小有鬪智 旣饒爭時)는 말이 있다. 마치 종잣돈을 먼저 만들고, 머리를 써서 키우고, 이미 재물이 모아졌다면, 상황에 따라서 사업을 운영하라는 것이다. 사마천은 같은 《사기》〈화식열전〉에서 이런 말도 했다. “세력을 얻으면 더욱 세상에 드러난다(得埶(심을 예)而益彰者乎)”공자가 천하에 알려진 것도 제자 자공의 도움이 컸다고 하는데, 자공은 공자의 제자로 정치적으로 성공했을 뿐 아니라 큰 부자가 되기도 했다. 그가 이름을 떨쳤던 세력이 뒷받침되었기에 공자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라는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는 “아름다움이란 모든 과잉을 제거한 것이다.”라고 했다. 겉치레와 군더기를 제거하고 단순화되면 그것이 아름다움이라는 것이다. 지금 하고 있는 일상의 일들에 충실하지 않으면서 남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내면의 충실함이 가장 소중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배움은 날마다 채우는 것이고, 도는 날마다 비우는 것이다.”(爲學日益 爲道日損)《도덕경》- 도를 ‘비우는 것’이라고 한 것은 도를 닦으면서 욕심과 아집을 버린다는 것이다. 머리는 채우고 마음을 비우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을 ‘날마다’함으로써 완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날마다 채워야 할 것, 날마다 비워야 할 것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 본다.
누구나 해보면 알지만,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면서 왼손으로 네모를 그리는 것은 쉽지가 않다. 상하 간, 팀원 간도 마찬가지다. 서로 따로 놀면 무엇이 잘 안 된다. 잘 다스려지는 나라는 ‘군주가 북채고 신하는 북과 같고, 신하가 수레라면 군주는 그것을 끄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 한 손만으로 손뼉을 칠 수 없듯이 신하와 군주는 하나의 조합을 이루어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간다. 리더십이란 구성원들이 모두 한 방향을 바라보게 하고 중단없이 이끌어 가는 것을 의미한다. 《한비자》가 말한“右手畵圓 左手畵方 不能兩成(우수화원 좌수화방 불능양성)”이 그것이다.
“아침에 도를 듣는다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朝聞道 夕死可矣) 조금은 과한 것 같지만, 들어본 말이다. 이 말을 공부에 적용하면 ‘단순히 지식을 쌓는 공부는 참된 공부가 아니다. 공부를 통해 완전히 변화되어야 참된 공부다.’라고 될 것이다. 공자가 옛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태어나는 것을 보고 한 말이다. 공부란 머릿속 신경세포인 뉴런과 뉴런을 연결하는 시냅스가 변화하는 것으로 시냅스가 변화하는 것은 기존의 생각이 새로운 생각으로 바뀌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은 아무리 공부를 해도 나 자신이 변화하지 않으면 진정한 공부라고 할 수 없다. 성리학자 二程(정호, 정이)형제는‘《논어》를 읽되 읽은 후에도 같은 사람이라면 《논어》를 읽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다.
“우물 안 개구리에게 바다를 말해 줄 수 없는 것은 공간의 제약을 받기 때문이다.”(井蛙不可以語於海者 拘於虛也) 《장자》에 있는 말이다. 우물에 갇힌 개구리에게 바다를 설명할 수 없고, 여름에 사는 곤충에게 겨울의 얼음을 알려줄 수는 없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설픈 전문가에게 진정한 도의 세계를 말해준들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는 자신의 지식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시간과 공간만이 아니다. 활동하는 무대, 살고 있는 곳, 지식의 한계가 둘러싸고 있다. 이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면 우물 안 개구리밖에 될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은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현실을 박차고 나가야 한다.
《대학》에 많이 들어본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이라는 말이 있다. 혼자 해석해도 말이 되지만, 이것 앞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한 집안이 仁하면 온 나라가 인을 일으키게 된다. 한 집안이 사양의 도리를 지키면 온 나라가 겸양할 것이다. 한 나라가 탐욕스럽고, 사나우면 온 나라가 혼란을 일으킬 것이다. 군주의 작용이 이와 같다.”
군주라는 지도자는 나라를 살리기도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는 것으로 본 것인데, 지도자의 솔선수범을 말한 것이다. 또 이어서 “명령하는 바가 자신의 행함과 어긋나면 백성은 따르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먼저 덕을 갖춘 후에 다른 사람에게 요구하고, 자신에게서 악한 것을 없앤 후에 다른 사람을 비판한다.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람에게 미치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을 깨우칠 수 있는 자는 없다.”라고 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솔선수범의 의미를 깊이 새겨야 하는 것이다.
“붙들면 보존되고, 놓아두면 달아난다.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정한 때가 없으니 제 갈 곳도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맹자》에 있는 말이다. 《예기》에는 사람의 7가지 감정 ‘희로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즉 기쁘고 화나고 슬프고 두렵고 미워하고 싫어하고 욕망하는 감정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어려움을 겪는다. 마음의 병인 것이다. 그래서 감정이 드러나기 전의 상태인 평상심을 다스리는 것이 우선이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수양과 공부가 필요하다. 마음을 묶어 둘 수 있는 방법으로는 수시로 나를 돌아보는 성찰뿐이다.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고 노래했지만, 자주 보아야 정들고 마음도 가까워진다는 것은 상식이다. “산속의 작은 길도 많이 다녀야 큰 길이 되지만, 잠시만 다니지 않아도 금방 풀이 우거져버린다.”(山徑之蹊間 介然用之而成路 爲間不用 則茅塞之矣)고 한 말은 《맹자》에 나온다. 맹자가 제가인 고자를 가르친 말로, 학문이나 덕을 닦는 것은 마치 길이 생기는 것과 같아서 꾸준히 노력해야 이룰 수 있고 조금만 게을리하고, 방심하면 풀이 우거져 길이 막히듯 하고 만다는 것을 비유한 것이다. 서양 속담에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말이 있다. ‘눈이 닿지 않으면 마음도 멀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상대방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는 상대가 좋아하는 것, 상대가 잘 아는 것을 소재로 대화하면 된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樂山樂水)라는 말은 많이 회자 되고 있어서, ‘나는 산을 좋아하니 어진 사람이 아닌가?’하고 자만해 생각해 보기도 한 것 같다. 맹자는 성선설을 바탕으로 4단설(四端說)을 말했는데, 사랑의 마음인 惻隱之心은 仁, 악을 미워하는 羞惡之心은 義, 예의를 지키는 辭讓之心은 禮, 옳고 그름을 아는 是非之心은 知가 그 바탕이다. 이 말 ‘知者樂水 仁者樂山’은 《논어》〈옹야〉편에 나오는 것으로, 인자와 지자의 특성을 말해준다. 제혜로운 사람은 동적, 어진 사람은 정적, 지혜로운 사람은 즐겁게 살고, 어진 사람은 오래 산다. 지혜로운 사람은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고 변화를 꾀하여 사리에 통달해 막힘이 없는 성품이며, 어진 사람은 깊이가 있어서 움직임이 적고 따뜻한 마음으로 사람과 세상을 포용한다. 변함없이 자리 잡고 있어서 마치 물과 산과 같다. 이것이 요산요수의 해석이다.
공자는 사귀면 안 되는 친구 세 부류를 말했는데, 아부하는 사람, 말을 잘 바꾸는 사람, 말만 잘하는 사람이다. 이들은 개인간 관계를 나쁘게 할 뿐 아니라, 조직의 분위기를 해치고 분쟁을 일으킨다. 크게는 나라 사이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경솔하고 무례한 말일수록,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일수록 말을 무겁게 여겨야 하는 이유다. “오직 입에서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고,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惟口出好興戎)은 《묵자》가 한 말이다.
가족 다음으로 많이 만나고, 좋은 사람은 친구일 것이다. 오늘 만나고 온 친구가 좋은 친구인지 아닌지 아는 방법이 있다. 만나고 돌아왔을 때 내 마음을 보면 알 수 있다. 여운이 깊어서 오래가면 좋은 친구다. 그저 마음이 공허하고 배운 것이 없다면 좋은 친구가 아니다. 즐거울 때 곁에 있지만, 어려울 때 찾을 수 없다면 좋은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 《명심보감》에 “군자의 사귐은 물과 같이 담담하고 소인의 사귐은 단술처럼 달다.”(君子之交淡如水 小人之交甘若醴)라고 한 것은 그 때문이다.(3.8)
《성경》에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라는 구절이 있다. 구하지도 않고 찾지도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구한다는 것은 구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고, 찾는다는 것도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맹자》에 이런 말이 있다. “구하면 얻고 내버려 두면 잃는다.”(求則得之 舍則失之) 스스로 구하지 않기 때문에 얻지 못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마음과 몸이 하나 되어서 노력한다면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임영웅은 노래를 잘해서 영웅이가 된 것이 아니다. 원래 이름이 영웅이다. 노래를 잘해서 출세하고 있다. ‘내 안의 힘을 믿으면 삶의 영웅이 된다.’고 하는 말도 있고, 또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실패했을 때도 포기하지 않으면 이것이 진정한 영웅이다.”(小處不滲漏 暗中不欺隱 末路不怠荒 제是個眞正英雄)라는 말이 《채근담》에 있다. 작은 일에 충실하고 남이 보지 않아도 양심에 따라 행동하고, 인생의 굴곡을 만나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진정한 영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평범하지만 정직하게 노력하는 사람, 위대한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성실하게 삶을 일구어낸 사람이다. 우리 안에는 모두가 영웅의 기질이 들어 있다.
다시 재물 이야기로 《논어》〈里仁〉편에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했다. 이는 군자는 이익보다는 의리를 중시하지만, 소인은 의리보다 이익을 중시한다는 말이다. “이익에 따라서 행동하면 원한을 사는 일이 많아진다.”(放於利而行 多怨)가 그것인데,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한 것으로, 예나 지금이나 다른 사람의 원망을 사는 일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닌 것은 분명한 것 같다.
공자는 제자 안회가 제나라에 간다고 하자 걱정했다. 이에 다른 제자인 자공이 안회는 능력이 출중한데 왜 걱정하시는지 물었다. 이에 공자는 “제나라 군주가 도량이 넓지 못해 안회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결국 안회를 해칠지도 몰라 걱정이 된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을 《장자》가 인용해 이렇게 말했다. “주머니가 작으면 큰 것을 담지 못하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곳의 물을 긷지 못한다.”(褚小者不可以懷大 綆短者不可以汲深) 아랫사람은 윗사람의 그릇을 볼 수 있어야 하고, 윗사람 또한 아랫사람을 제대로 잘 골라서 뽑아야 한다는 말이다.
《예기》에 이런 말이 있다. “군자는 말을 아끼고, 소인은 말을 앞세운다.”요즘에는 말 잘하는 것이 대세여서 그런지 웅변학원이 성업 중이고, 말을 배우려고 한다. 유창하게 말한다고 해서 말을 잘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자기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 유려함도 중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말의 실천이다. “태산처럼 무거운 죽음도 있고, 깃털처럼 가벼운 죽음도 있다.”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지 않고는 함부로 죽을 수 없다는 각오로 한 이 말은 말의 무게가 느껴진다. 말을 무겁게 한다는 것은 말을 많이 하는 것과는 별개다. 말한 것을 꼭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함부로 말하지 않는다. 말은 실천이 중요하다.
‘溫故知新’이라고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옛것을 익혀 새로운 것을 배운다’는 뜻이다. 배움의 목적은 배운 것을 활용하려는데 있다. 머리에 쌓아두는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라고 할 수 없다. 이를 경계하기 위해 《순자》가 말했다. “듣지 않는 것은 듣는 것만 못하고, 듣는 것은 보는 것에 못 미친다. 보는 것은 아는 것만 못하고, 아는 것은 행하는 것보다 못하다.”그래서 “배움은 실천하는 단계가 되어서야 그치는 것이다.”(學至於行之而止矣)라고. 모든 지식은 실제로 삶 속에서 행함으로써 그치는 것이다.
《사기》에 따르면 진나라 수도 함양에 먼저 입성하는 자가 그곳을 차지 하기로 했고, 먼저 입성한 것은 유방이었다. 아방궁에는 궁녀 수천 명이 있었고 금은보화로 휘황찬란했다. 이에 현혹되어 유방은 궁에 눌러앉고 싶었으나, 곧 들이닥칠 항우의 공갹을 우려한 부하이자 동료이던 번쾌가 간언했지만, 유방은 듣지 않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의 장자방’이라고 한 장량이 “충언은 듣기 싫지만 행하면 도움이 되고, 좋은 약은 입에 쓰지만 병에는 도움이 됩니다.”(忠言逆耳利於行 毒藥苦口利於病)라고 해 결국 성을 떠나게 했다. 유방은 항우에 비해 용맹하지도 뛰어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귀에 거슬리는 말을 받아들임으로써 천하통일을 이룰 수 있었다.
세상에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없다. 그러나 아이 기를 살려준다며 공공장소에서 떠들어도 그냥 두고 심지어 학교로 찾아가 선생님에게 항의하며 지나치게 교육에 관여하는 부모도 있다. 이런 아이는 커서 부모의존적이 되기 십상이다. 《순자》는 “군자는 자식을 대할 때 사랑하되 얼굴에 나타내지 않고, 일을 시키되 구체적으로 보여주지 않고, 바른길로 인도하되 강요하지 않는다.”(君子之於子 愛之而不面 使之而勿貌 道之而道而勿疆)라고 했고, 《대학》에서는 “사람은 자기 자식의 악함을 알지 못하고 자기 논의 싹이 자란 것은 알지 못한다.”라고 하여 사랑에 눈멀거나 욕심에 눈이 가려진 것을 경계했다.
당나라 때 문장가이자 개혁가였던 유우석(劉禹錫)은 환관 세력 전횡에 반대하다가 좌천되는 등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는 포부를 잃지 않았는데 〈浪淘沙(낭도사)-모래를 씻는 물결〉라는 시를 써 자신의 생각을 밝혔다. “천 번 만 번 파도에 씻겨 비록 고생스러워도 모래를 불어내니 비로소 금이 나타나네.”(千淘萬漉雖辛苦 吹盡狂沙始到金)라고 했다. 이것은 모래를 걸러내어 황금을 찾듯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노력한다면 결실을 거둘 수 있다는 의지를 보여준 시로, 같은 시에서 “참언이 파도처럼 심하다고 하지 마라, 귀양살이 모래처럼 파묻혔다고 하지 마라.”하면서 상황을 극복하려는 의지와 희망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서양 속담에 ‘하루를 행복하려면 꽃을 사고, 일주일을 행복하려면 옷을 사고, 한 달을 행복하려면 차를 사고, 일 년을 행복하려면 집을 사고, 평생을 행복하려면 친구를 사귀라.’는 것이 있다. 이에 비해 관포지교로 유명한 관자는 “1년의 계획은 곡식을 심는 것만 한 것이 없고, 10년의 계획은 나무를 심는 것만 것이 없으며, 일생의 계획은 사람을 키우는 것보다 더한 것이 없다.”(一年之計莫如樹穀 十年之計莫如樹木 終身之計莫如樹人)라고 했다. 《관자》의 말이 더 실감난다 싶다.
북송시대 정치가이자 학자이던 범중엄(范仲淹)은 “선비는 당연히 천하의 근심거리를 먼저 걱정하고, 천하의 즐거움은 나중에 즐겨야 한다.”(士當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악양루기〉에 섰다. 선거철이 다가오니 더욱 다가오는 말 같다. 귀족들의 도덕적 의무를 말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동양적 표현이기는 해도, 서양은 귀족들이 누리는 지위나 특권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것이고, 범중엄은 선비의 의무와 책임을 강조한 점에서 조금 다른 차이가 있다. 《맹자》에서는 지도자는 책무를 다한 뒤에 여민동락(與民同樂)하라고 했는데, 왕이 음악과 사냥을 즐기더라도 백성과 함께한다면 원망듣지 않는다는 의미다.
《삼국지》에 보면 제갈량이 사마의의 군대를 협곡으로 유인해 화공으로 궤멸시키려는 순간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 실패하자, 내뱉은 말이 “일을 꾸미는 것은 사람이지만 일을 성공시키는 것은 하늘에 달려 있다.”(謀事在人 成事在天)고 통탄했다. 이는 자연현상 앞에서 사람의 노력은 무익한 것처럼 보이지만 《삼국지》에는 그럴 때는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해답을 내놓고 있다. 바로 ‘수인사대천명(修人事待天命)’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바를 다한 후에 하늘의 뜻을 기다린다.”는 말이다.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긴다.”는 말은 《도덕경》에도, 《여씨춘추》,《삼략》에도 있다. 하지만 이 말은 인과관계가 분명한 경우에 쓰인다. 유방의 손자인 유안이 지은 책인 《회남자》에는 치폐설존(齒敝舌存)이라 하여 “늙어서 이가 없어져도 혀는 남는다.”고 하였는데, 단단한 것이 먼저 없어지고 부드러운 것은 오래 남음을 비유한 말이다. 강풍에 거목은 쓰러지지만 부드러운 풀은 부러지지 않는 것처럼 자연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도 세상도 다르지 않다.
보통은 《육도삼략》이라고 부르지만, 둘은 따로다. 《육도》에 “아는 것이 남과 다르지 않다면, 나라의 스승이 될 수 없다.”(智如衆同 非國師也)라는 말이 있다. 어떤 분야에서라도 남과 똑같이 한다면 결코 남보다 앞설 수 없다. 지위가 높다고 해서 모두 훌륭한 지도자는 아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과 다른 강점을 갖고 있어야만 진정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남들보다 뛰어난 점은 무엇인가? 나는 무엇으로 따르는 사람을 책임질 것인가? 고민해야 한다.
공자는 인과 군자의 자격에 대해 말했다면 맹자는 그에 더해 대장부의 자격에 대해서도 말했다. “부귀를 가졌어도 부패하지 않고, 가난하고 힘들어도 포부를 버리지 않고, 권위와 무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사람.”을 군자라고 하고 그는 “천하의 넓은 곳에 거하고, 천하의 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를 행한다. 또한 뜻을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하고, 뜻을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를 행하리라.”고 했다. 이는 대장부라면 마땅히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절제할 수 있고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아야 하는 부동심을 갖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을 굳고 바르게 지키는 사람을 말한 것이다.
한때 YS도 ‘나는 마음을 비웠다.’고 말하고는 대통령이 지냈지만,‘마음을 비운다.’는 것은 복잡한 세상에서 뜨거운 머리를 식히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을 비우면 어떻게 될까? 비우면 채워지고자 하는 것이 자연의 섭리로 비우면 악이 끼어들 소지가 많다. 그래서 《명심보감》에 “하루라도 선을 생각하지 않으면 여러 가지 악이 스스로 일어난다.”(一日不念善 諸惡皆自起)고 했다. 《삼국지》에서 유비는 자신의 큰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임종하면서 아들 유선에게 유언을 남겼다. “악이 작다는 이유로 행해서는 안 되며, 선이 작다는 이유로 행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라고. 악과 선은 크고 작고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일 것이다.
《주역》에 항룡유회(亢龍有悔)라는 말이 있다. “천하를 호령하는 용과 같은 인물도 가장 높은 자리에 올라 스스로 겸손하지 않으면 반드시 추락하고 만다.”는 뜻이다. 만약 힘이 강한 상대를 꺾고 싶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상대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 있던 간에 교만은 쇠락의 첫걸음이다. 이 책은 병법서가 아니라 이런 反計의 계락은 없지만, 이 말은 하나의 계략처럼 들린다. 《여씨춘추》에도 “장차 부수려거든 반드시 높이 쌓아주고 장차 무너뜨리려거든 반드시 높이 올려주라.”(將欲毁之 必重累之 將欲踣之 必高擧之-장욕훼지 필중루지 장욕북지 필고거지)고 했다. 이에 대한 고사로 제나라가 연나라의 사신을 죽이자 연나라 왕이 크게 분노하여 제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이에 범요라는 신하가 지금 연나라는 힘이 부족하므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간언하고, 오히려 제나라에 사신을 보내 부족한 신하를 보낸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고 용서를 구하라고 했다. 그러나 제나라 왕은 크게 교만해졌고, 국력이 쇠퇴해졌다. 이에 힘을 기른 연나라는 제나라를 응징할 수 있었다.
그리스의 델포이 신전 입구에는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Know thyself)”고 한 말이 새겨져 있다. 진시황의 책사이기도 했던 이사(李斯)와 한비(韓非)를 가르쳤던 귀곡자(鬼谷子)는 “남을 알려면 먼저 자신을 알아야 하고 나 자신을 알아야 비로소 남을 알 수 있다.”(知之始己 自知而後知人也)고 했다. 이는 다른 사람을 알기 위해서는 받드시 자신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마음이 밝지 못하고 뭔가 가려 있으면 나 자신을 정확히 알기 어렵다는 것이다. 자존심, 자만심, 이기심, 자기연민, 교만 등으로 흐려진 마음으로는 자신을 물론 다른 사람을 알기가 어렵다.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알고 싶다면, 자신을 아는 것이 먼저다.
공자는 《시경》에 있는 아름다운 시 “산 앵두나무꽃이 바람에 흔들리는구나. 어찌 그대가 그립지 않을까만은 그대 머무는 곳이 너무나 머네.”라는 시 구절을 인용해 제자들을 가르쳤는데, 정말로 사랑한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한달음에 달려갈 것이다. 길이 멀어도, 형편이 어려워도 그리움은 참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배움도, 일도 마찬가지다. 진정으로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다면, 그 마음이 참을 수 없이 절실하다면,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꿈은 결국 이루고야 알 것이다. 시간이 없다, 능력이 부족하다, 여건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모두 핑계에 불과하다. “사랑이 깊지 않은 것이다. 진정 그리워한다면 어찌 그대 있는 곳을 멀다 하는가?”(未之思也 夫何遠之有) -《논어》에 있는 말이다.
‘대부재천 소부재근(大富在天 小富在勤)’으로 알고 있었는데, 아닌가 보다. 《사기》에 ‘대부유천 소부재근(大富由天 小富在勤)’이라고 쓰여있다고 한다. 어쨌든 “큰 부자는 하늘이 낳지만, 작은 부자는 부지런함이 낳는다.”는 뜻이다. 그 말에 이어서 부자가 되는 원칙 중 첫 번째가 ‘무재작력(無材作力)’이다. 가진 것이 없다면 몸을 써서라도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난하더라도 열심히 노력한다면 작은 부자는 될 수 있다.’그럴듯한 말이다. 그다음에는 하늘이 왜 나에게 부를 허락하지 않는지를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세상은 부가 지배하는 세상이 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뛰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부가 좋다고 해도 돈을 자신의 목숨과 바꿀 사람은 없다. 지금 가지고 있는 부는 언제든 없어질 수 있다.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시간이 지나면 누구나 얼마든지 성공해 돈을 모을 수 있다. 그래서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은 틀렸다. 재산에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이다. 《명심보감》에는 “한 자 크기의 구슬이 보배가 아니라, 한 치의 시간을 다툴 일이다.”(尺璧非寶 寸陰是競)라고 했고, 《사기》에서도 “부자가 되려면 시간을 이용하라.”고 했다. 또 영국의 정치지도자 시즈레일리는 “시간을 지배하는 자는 모든 것을 지배한다.”고 하고, 그리스 최초의 철학자 탈레스는 “가장 현명한 것은 시간이니 모든 것을 결국은 명백히 밝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맹자》가 말했다. “사랑은 사람이다. 둘을 합치면 그것이 바로 도다.”(人也者人也 合而言之道也) 도는 학문과 수양을 넘어 사랑과 하나가 될 때 완성되는 것이다. 사랑을 알고 나눌 줄 아는 사람이 가장 강력한, 가장 진정한 사람이다. ‘인자무적’그것이 가장 강한 사람이다. 사람이 사람인 이유는 사랑을 알고 실천하기 때문이다. 마더 테레사 수녀는 《테레사의 단순한 길》이라는 책에서 “오늘날 서구의 가장 큰 질병은 폐결핵이나 나병이 아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배려에서 제외되고 무시당하는 것이, 가장 큰 질병이다. 신체적 질병은 의약품으로 치료할 수 있으나, 외로움, 질병, 희망 없음을 치료하는 약은 사랑뿐이다.”라고 했다.
맹자의 제자였던 순자는 스승이 “어떤 일이든 끝까지 한 우물을 파야한다. 아무리 파도 샘물이 나오지 않는다고 포기하면 그때까지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고 만다.”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래서 순자는 당시 최고의 교육기간이던 적하학궁의 좨주를 세 번이나 역임하는 등 전국시대 최고의 학자가 될 수 있었다. 《순자》에 이런 말이 있다. “중간에 그만두지 않으면 쇠와 돌에도 무늬를 새길 수 있다.”(鍥而不舍 金石可鏤-계이불사 금석가루) “반걸음 반걸음 쉬지 않고 걸어가면 절름발이도 천 리를 갈 수 있고 한 줌 흙이라도 끊임없이 쌓으면 언덕을 만들 수 있다.”또 이런 말도 했다. “아무리 가까운 거리도 걷지 않으면 도달할 수 없고 아무리 간단한 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이루지 못한다.”(하지만, 순자는 스승과는 달리 성악설을 주장한 대표적 인물이다.) 실패란 일을 포기하거나 끝내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는다.
마지막에 살펴볼 것도 《논어》의 한 구절이다. “날이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잎이 더디 시듦을 안다.”(歲寒 然後知松 柏之後凋也-세한 연후지송 백지후조야)가 그것인데, 여름에 무성한 다른 나무에 비해 소나무와 잣나무는 초라할지 모른다. 그러나 겨울이 되면 그들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공자는 학식과 인품은 존경받았지만, 위정자들에게는 쓰임을 받지 못했다. 56세라는 늦은 나이에 14년간 천하를 돌며 자신을 써달라고 했지만 외면당했다. 이 시절이 공자에게는 최악의 시기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붙잡아준 인생철학이 있었다. 어떤 어려움이 닥치더라도 소명과 가치를 잊지 말자는 다짐이었다.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되어 이를 인용한 〈세한도〉를 그려 어려움에도 자신을 도와준 제자 이상적의 변치 않는 의리와 우의에 그것을 선물했다는 것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학문의 길, 인간의 길, 인간의 도리, 군자의 사명, 사리의 판단, 시간의 중요성, 지도자의 길, 백성의 길, 실천과 인간관계, 인내 등 참으로 다양한 인간사와 세상살이에 대하여 모든 길을 살펴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면서 곱씹으며 되새겨 보아야 할 부분도 많다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오늘이 지나면 내일이 오듯이 오늘에 감사한다. - 3.12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