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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穆
趙穆字士敬, 號月川, 橫城人。 中宗甲申生。 以學行薦授敎。 官歷三道都事, 至工曹參判。 宣祖丙午卒。 享禮安陶山書院。
退溪李先生以道學倡東南, 一時魁人碩士之摳衣者甚衆, 先生其領袖矣。 先生之美質, 得退溪而有成; 退溪之道學, 得先生而有光。
庚午, 李先生易簀, 公服朞, 行素三年。
癸酉, 公丁先公憂, 廬于墓, 朞而啜粥, 鹽而不醬, 骨立幾不能支。政府、吏曹同議, 以學行著聞者五人薦聞, 先生其首也。
在陜川時, 朝廷與日本講和, 先生答李宣慰德馨之書曰: “李汝受居相位, 亦作此等事耶?” 汝受, 鵝溪之字。 而宣慰, 其婿也。
除軍資主簿, 陳疏曰: “講和之說, 不勝憤痛。 豈有率百萬之師, 屠戮我生靈, 隳毁我陵寢, 彌漫不去, 而謂之講和乎? 古人有一旅一成中興者, 請修德以格天, 施仁以撫民, 以爲攘夷之本。”
除掌樂院正, 有旨曰: “目今筵中進講《周易》, 義理精微, 知者蓋寡。 聞爾閑居林下, 白首窮經, 從事《易》學, 用工最多云。” 特除掌樂正, 俾參講席。 後又以經學校正堂上被召者四, 以病不能赴。
公嘗曰: “《大學》只是‘知行’二字爾。 以格、致屬之知, 誠、正、修屬之行, 齊、治、平爲推行之理。” 如有一字一句有疑處, 必就李先生面稟, 貫通而後已。 嘗就李先生所抄錄《朱子書節要》中, 又抄其尤切於後學者爲一冊, 以備觀焉。 至於亂離奔竄之際, 猶不忘敎誨曰: “陸秀夫在舟中, 猶講學。” 講讀不輟。
先生性謹嚴深厚, 踐履端實, 任眞天然, 不事矯飾, 蓋其得於天者如是。 而早歲又得依歸, 耳濡目染, 皆在典禮之內, 發言行事, 莫不惟師之視。 先生之於爲人, 可謂不勞而成矣。 鄭蘊撰碑。
[주-D001] 酉 : 底本에는 “丑”으로 되어 있다. 《月川集附錄・嘉善大夫……趙先生神道碑銘》 및 《桐溪集・月天趙先生神道碑銘》에 根據하여 修正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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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선대부 공조 참판 월천 조 선생의 신도비명 병서(幷序)〔嘉善大夫工曹參判月川趙先生神道碑銘 幷序〕
鄭蘊 찬
퇴계(退溪) 이 선생(李先生)이 도학(道學)을 동남 지역에서 창도할 때에 당시의 뛰어난 사람과 큰 선비들이 와서 배움을 청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는데, 선생이 그 중에서 영수(領袖)였다. 선생은 휘가 목(穆), 자가 사경(士敬), 성(姓)이 조씨(趙氏)이고, 선계(先系)는 횡성(橫城) 사람이다. 휘 익(翌)은 고려 광종조(光宗朝)에 벼슬하여 관직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이르렀다. 이로부터 명공(名公)과 거경(巨卿)이 역사서(歷史書)에 끊이지 않았고, 선생에 이르기까지 대개 20여 세(世)가 된다. 증조(曾祖)의 휘는 윤손(胤孫)이니 사온서 직장(司醞署直長)을 지내고 통훈대부(通訓大夫) 통례원 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증직되었고, 조부의 휘는 경(瓊)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 겸 경연참찬관(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고, 부친의 휘는 대춘(大春)이니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 참판(吏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에 증직되었는데, 3세를 추은(推恩)한 것은 선생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조씨는 처음에 문경현(聞慶縣)으로 옮겼다가 중간에 예천군(醴泉郡)으로 옮겼다. 참판공이 동지(同知) 권수익(權受益)의 딸에게 장가들어 또 예안현(禮安縣)으로 집을 옮겼고, 가정(嘉靖) 갑신년(1524, 중종19) 3월 23일에 월천리(月川里) 집에서 선생을 낳았다. 선생은 태어나면서부터 기이한 자질이 있었고, 나이 5세에 참판공의 품안에서 구술(口述)로 《대학(大學)》을 수학하였다. 12세에 경서(經書)를 모두 배웠고, 15세에 비로소 퇴계의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였다. 이때부터 닥치는 대로 공부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몸을 단속함에 예의로써 행동하니, 퇴계 이 선생께서 매우 귀중하게 여겼다.
병오년(1546, 명종1)에 모친의 상(喪)을 당하였고, 임자년(1552, 명종7)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계축년(1553, 명종8)에 성균관에서 유학하였다. 집이 가난하고 부친이 연로한 까닭으로 힘써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자 “우리 도가 여기에 있는데 어찌 꼭 과거를 보겠는가?”라 말하고서 드디어 과거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문(師門)에 전념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더욱 부지런히 하여 세상의 큰 선비가 되었다.
병인년(1566, 명종21)에 이조(吏曹)가 천거하여 공릉 참봉(恭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무진년(1568, 선조1)에 관천(館薦)으로 집경전 참봉(集慶殿參奉)에 제수되자, 부임하였다가 얼마 되지 않아 사직하고 돌아왔다.
경오년(1570, 선조3)에 이 선생이 세상을 뜨자, 선생은 1년 동안 소복(素服)을 입고 3년 동안 안방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잔치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임신년(1572, 선조5)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유년(1573, 선조6)에 참판공의 상을 당하여 묘소 곁에다 여막을 짓고 1년 동안 죽을 먹으면서 소금을 먹되 장(醬)을 먹지 않아 뼈만 남을 정도로 앙상하여 거의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 뒤에 정부(政府)가 이조(吏曹)와 함께 의논하여 학행(學行)으로 널리 알려진 자를 다섯 사람 천거하였는데, 선생이 그 중에 첫째였다. 을해년(1575, 선조8)에 종부시 주부(宗簿寺主簿), 조지서 사지(造紙署司紙),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초수(超授)되었고, 병자년(1576, 선조9)에 또다시 사지(司紙)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10월에 봉화 현감(奉化縣監)에 제수되자 사직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아 선생이 비로소 부임하였지만 오래지 않아 재상(災傷)으로 인해 파직되어 돌아왔다. 경진년(1580, 선조13)에 공조 좌랑, 전라 도사(全羅都事), 경상 도사(慶尙都事),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제수되고, 신사년(1581, 선조14)에 고령 현감(高靈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4월에 충청 도사(忠淸都事)에 제수되었으나 8월에 관직을 버리고 돌아왔다.
임오년(1582, 선조15)에 형조 좌랑(刑曹佐郞)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제수되었고, 계미년(1583, 선조15)에 신녕 현감(新寧縣監)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가지 않았다. 갑신년(1584, 선조16)에 영덕 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도중에서 상소를 올려 먼저 부임하기 어려운 뜻을 진달하고, 이어서 호강(豪强)한 자들의 적체되는 옥사(獄事)와 원악(元惡)을 함부로 초출하는 억울함을 간절하게 주달하였다. 또 조정이 바야흐로 북정(北征)을 논의하는 것이 잘못된 계책이라 하고서, 심도 있게 근본을 견고[固本]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아뢰기를 “삼사(三司)의 종관(從官)이 말 때문에 죄를 얻어 북변(北邊)으로 귀양을 가게 된 사람이 세 사람인데, 그들을 죽이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말이 매우 강직하였다.
을유년(1585, 선조18)에 공조좌랑 겸 교정청낭청(校正廳郞廳)에 제수되자 사은숙배한 뒤에 상소하여 면직을 빌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공조 정랑으로 옮겨지자 정장(呈狀)하고 남쪽 고향으로 돌아왔다. 전생서 주부(典牲署主簿)에 제수된 것이 두 차례이고, 교정청 낭청(校正廳郞廳)에 전지(傳旨)를 내려 소명(召命)한 것이 네 차례였는데, 모두 병으로 사양하였다. 11월에 또다시 공조정랑(工曹正郞) 겸 낭청(郞廳)에 예전처럼 제수되자, 그제야 비로소 소명에 나아갔다. 병술년(1586, 선조19) 2월에 소장을 올려 물러가기를 빌었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3월에 사직하고 돌아왔으나 상서원 판관(尙瑞院判官)과 금산 군수(錦山郡守)에 제수되었다. 정해년(1587, 선조20)에 단양 군수(丹陽郡守)와 장원서 장원(掌苑署掌苑)에 제수되고, 두 차례 공조 정랑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은숙배를 하지 않았고, 겨울에 합천 군수(陜川郡守)에 제수되자 비로소 부임하였다. 당시에 조정이 일본(日本)과 강화(講和)를 하자, 선생이 선위사(宣慰使) 이덕형(李德馨)의 편지에 답장하여 이르기를 “이여수(李汝受)가 정승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 같은 짓을 하였는가?”라고 하였는데, 여수는 이산해(李山海)의 자(字)이고, 선위사는 그의 사위이다. 경인년(1590, 선조23)에 사직하고 돌아왔는데, 짐 보따리가 간단하여 서책(書冊)만 서너 짐뿐이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제용감 첨정(濟用監僉正)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여름 4월에 왜구(倭寇)가 갑자기 쳐들어와서 향하는 곳마다 막을 자가 없어 서울을 핍박하니, 양궁(兩宮)이 관서(關西)로 가서 국사(國事)를 담당할 사람이 없었다. 선생이 동료들과 함께 높은 언덕에 올라가 북쪽 대궐을 향하여 통곡하고 내려왔다. 이듬해에 임금의 거가(車駕)가 의주(義州)에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선생이 바야흐로 길을 나서 임금님의 모습을 직접 우러러보려 하였으나 병 때문에 가지 못하였다.
갑오년(1594, 선조27)에 흡곡 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자, 선생은 지난날의 계획을 이루려고 억지로 길을 나서서 도성에 들어갔는데, 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체직되었다. 군자감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먼저 ‘몸이 영외(嶺外)에 있어 난리에 달려갈 수 없었고, 거가(車駕)가 서울로 돌아왔는데도 아직 맞이하지 못하였다.’는 뜻을 진달하였다. 또 이르기를 “강화(講和)의 말은 더욱 통분(痛憤)을 이길 수 없습니다. 어찌 왜적이 백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백성들을 도륙하고 우리 종묘사직을 뒤엎고 우리 능침(陵寢)을 파헤치고 우리 영토에 가득하게 있으며 떠나지 않는데도 강화(講和)를 말할 수 있습니까? 옛 사람 중에서 일려 일성(一旅一成)으로 중흥을 이룩한 임금이 있었는데, 지금 우리나라가 비록 이미 쇠잔하고 파괴되었다고 하여도 저 일려 일성(一旅一成)에 견주면 어찌 백배(百倍)가 되지 아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덕을 닦아 하늘을 감동시키고 인정(仁政)을 베풀어 백성들을 어루만져 오랑캐를 물리치는 근본으로 삼으십시오.”라고 하였다. 임금이 칭찬하는 비답(批答)을 내리고 서울에 머물며 벼슬을 하도록 하였으나 선생이 즉시 남쪽으로 돌아가니, 임금이 가상하게 여겨 찬탄하였다.
10월에 특별히 봉정대부(奉正大夫)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되었다. 전지(傳旨)에 이르기를 “지금 경연에서 《주역》을 진강하고 있는데, 의리를 정미하게 아는 자가 적다. 듣자하니 ‘그대는 산림에서 한가로이 지내며 백발(白髮)에도 경문(經文)을 연구하며 역학(易學)에 종사하여 공부를 가장 많이 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특별히 장악원 정(掌樂院正)에 제수하니 강석(講席)에 참여하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말의 뜻이 매우 간곡하였지만 선생은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을미년(1595, 선조28) 봄에 또 부르자 선생이 사직 상소를 올려 면직되었다. 5월에 양양 부사(襄陽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자 본도(本道)에 음식물을 지급하게 하였다. 또 장악원 정(掌樂院正)과 사섬시 정(司贍寺正)에 제수하였다.
기해년(1599, 선조32)에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제수되었고, 신축년(1601, 선조34)에 사재감 정(司宰監正)에 제수되었다. 또 경서교정청 낭청(經書校正廳郞廳)에 임명하고 전지(傳旨)를 내려 불렀다. 임인년(1602, 선조35)에 상의원 정(尙衣院正)과 예빈시 정(禮賓寺正)에 제수하였다. 또 특지(特旨)로 당상(堂上)에 승직되고 절충장군(折衝將軍) 의흥위 부호군(義興衛副護軍)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뒤에 공조 참의로 옮겼다. 교정청 당상으로 부름을 받은 것이 네 차례였으나, 모두 병으로 나아가지 못하였다. 갑진년(1604, 선조37) 가을에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陞資)되고 용양위 상호군(龍驤尉上護軍)에 제수되었다가 공조 참판으로 옮겼으나 모두 사은숙배하러 나아가지 않았는데, 당시에 선생이 병을 앓은 지 이미 2개월이나 되었다.
병오년(1606, 선조39) 겨울 10월 29일에 정침(正寢)에서 별세하니, 향년 83세였다. 부음(訃音)이 알려지자 임금께서 매우 슬퍼하고 예관(禮官)을 보내 조전(弔奠)을 올리게 하였으니, 대개 특별한 은전(恩典)이었다. 성균관[泮宮]의 많은 선비들이 모여서 곡(哭)을 할 때에 소복(素服)을 입었다. 영남 지역의 향교와 서원에서도 모두 제문을 지어 제사하고 부조를 하였다. 이듬해 1월 모일(某日)에 부용산(芙蓉山) 남쪽 건좌손향(乾坐巽向)의 언덕에 장사를 지내니, 선영(先塋)을 따라 하였다.
선생은 성품이 근엄하고 심후(深厚)하며 행실이 단정하고 진지하였으며, 천진(天眞)이 자연스러워 꾸밈을 일삼지 않았으니, 대개 천성에서 얻은 것이 이와 같았다. 그리고 어린 나이에 또한 스승에게 나아가서 귀로 듣고 눈으로 본 것이 모두 전례(典禮)에 맞았고, 말을 하고 일을 행함에 오직 스승에게서 본 대로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선생의 사람됨은 애쓰지 않고서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참판공을 봉양할 때 아침저녁으로 보살핌을 부지런히 하였고, 즐거운 낯빛으로 봉양하여 모든 방도를 다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비록 맛있는 음식을 계속 올릴 수 없었지만 일찍이 의(義)가 아닌 것으로 남에게 요구한 적이 없었다. 평소에 날이 밝기 전에 일어나 의관(衣冠)을 정제한 다음 사당(祠堂)에 나아가서 재배례(再拜禮)를 행하고, 서실로 돌아와 책상을 마주하고 책을 읽으며 잠자고 먹는 일도 잊는 지경에 이르렀다.
항상 글을 배우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소학(小學)》은 여러 경전의 기괄(機栝)로 진실로 이 책을 통달해야 하는데, 성인이 되는 근본은 여기에 달려 있다.”라 하였고, 또 말하기를 “《대학(大學)》은 단지 ‘지행(知行)’ 두 글자일 뿐이다. 격물(格物)과 치지(致知)는 지(知)에 속하고, 성의(誠意)ㆍ정심(正心)ㆍ수신(修身)은 행(行)에 속하며, 제가(齊家)ㆍ치국(治國)ㆍ평천하(平天下)는 미루어 실행하는 이치가 된다.”라고 하였다. 만약 글자 하나나 구절 하나라도 의심나는 곳이 있으면 반드시 이황 선생에게 찾아가 직접 여쭈었고, 간혹 조목별로 질문을 하여 반드시 확실하게 통달한 뒤에야 그만두었다.
일찍이 이황 선생이 초록(抄錄)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보고, 그 중에서 후학들에게 더욱 절실한 것을 다시 뽑아 한 책을 만들어 뒤에 살피고 성찰하는 자료로 삼았으며, 특히 《심경(心經)》을 좋아하여 입으로 외우고 마음으로 체득하였다. 《황명통기(皇明通紀)》를 읽다가 황돈(篁墩)이 시제(試題)를 팔아넘긴 사건과 《도일편(道一編)》의 글을 보고 비로소 그의 사람됨과 학문을 의심하여 그것을 적어 이황 선생에게 질문하였고, 선생은 이에 《심경후론(心經後論)》을 지었다. 스승과 제자 사이에 서로 보탬이 된 것이 이와 같았다.
항상 설 문청공(薛文淸公)의 《독서록(讀書錄)》을 열람하고 중요한 어구(語句)에 손수 권점(圈點)을 찍어 책상에 두고 보았으며, 또 유원성(劉元城)이 언급한 “망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自不妄語始.]”라는 말을 취하여 항상 스스로를 단속하고, 또 작은 책자를 두고 전현(前賢)들이 언급한 몸에 절실한 말을 기록하여 《곤지잡록(困知雜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자기의 마음과 몸에서 일찍이 진작하고 성찰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혹시라도 혼망(昏茫)하거나 방도(放倒)한 지경에 떨어질까 염려한 것이 대부분 이러한 유형이었다.
책에 있어서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구입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밤이 되면 반드시 촛불을 밝히고 향불을 피운 다음 《근사록(近思錄)》, 《주자대전(朱子大全)》과 여러 성리서(性理書)를 읽었고 간혹 《도연명집(陶淵明集)》, 《격양집(擊壤集)》, 《염락풍아(濂洛風雅)》 등의 시(詩)를 외우곤 하였는데, 읽는 소리가 온화하고 장중하면서도 또렷하여 들을 만하였다. 난리가 나서 바쁘게 피난을 갈 즈음에도 오히려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을 잊지 않고 말하기를 “육수부(陸秀夫)는 배 안에서도 강학(講學)하였으니,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 하고 강독을 그만두지 않았다.
벼슬에 본래 뜻이 없어서 힘써 몸을 숨겨 은거하려고 하였지만 명성이 더욱 드러나 해마다 벼슬에 임명되고 달마다 옮긴 것이 40여 관직이었지만, 관직에 나간 것은 거의 없었다. 간혹 관직에 나아갔더라도 또한 오래 머물지 않았다. 매번 호 문정공(胡文定公)이 언급한 “춥고 따뜻한 것과 굶주리고 배부른 것은 스스로 짐작하여 알았다.[寒溫飢飽, 自知斟酌.]”라는 말을 가지고 자신을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나아감을 어렵게 여기고 물러남을 쉽게 여긴 자취가 광명정대(光明正大)하였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산림(山林)에 있을 때에는 일찍이 당시의 일에 대하여 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혹시 와서 말을 하면 선생이 말하기를 “산림에 있으면 마땅히 산림에 대하여 말을 해야지 시사(時事)에 어찌 참여하겠는가?”라고 하였으니, 진실로 이른바 ‘침묵으로 몸을 보전한[默足以容]’ 분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국가에 큰일이 있으면 또한 일찍이 깊이 걱정하고 통렬하게 배척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상국(相國)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과는 동문(同門)의 의리가 있었는데, 서애가 영상(領相)으로 있으면서 화의(和議)를 주장하였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내 이르기를 “상국은 평생 성현(聖賢)의 글을 읽고서 얻은 바가 단지 이 ‘강화오국(講和誤國)’ 네 글자입니까?”라고 하였는데, 글이 매우 준엄하였으니 선생의 지업(志業)을 여기에서 볼 수 있다.
선생은 안동 권씨 참봉 개세(蓋世)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권씨는 태사(太師) 행(幸)의 후손이다. 1남 3녀를 낳았다. 귀붕(龜朋)은 성인(成人)이 되기 전에 일찍 죽었다. 장녀는 김유길(金裕吉)에게 시집가고, 2녀는 권병(權昞)에게 시집가고, 3녀는 김광찬(金光纘)에게 시집갔다. 부실(副室)은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은 수붕(壽朋)으로 진사이고, 차남은 석붕(錫朋)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주부(主簿)를 지냈고, 딸은 변수(卞綬)에게 시집갔다.
김유길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지선(之善), 취선(就善), 종선(從善), 낙선(樂善)이고, 딸은 권익창(權益昌)에게 시집갔다. 권병은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상건(尙健), 상의(尙義), 상준(尙寯)이고, 딸은 권률(權瑮)에게 시집갔다. 김광찬은 2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확(確)과 연(䂴)으로 확은 생원이고, 딸은 참봉 정시형(鄭時亨)에게 시집갔다. 수붕은 4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균(昀), 온(㬈), 환(㬇), 성(晠)이고, 딸은 황중경(黃中敬)에게 시집갔다.
나 정온(鄭蘊)은 약관의 나이에 일찍이 선생을 찾아가서 뵌 적이 있었다. 선생의 후덕하고 단정한 모습을 보고 이미 흠모하고 감복하는 마음을 이길 수 없었지만 어찌 선생의 심오한 경지를 엿볼 수 있었겠는가? 이제 선생의 표손(表孫) 김확(金確)과 김연(金䂴)이 나에게 찾아와서 신도비명(神道碑銘)을 부탁하였다. 나는 나이가 많고 또 글 솜씨가 없으니 어찌 만 분의 일이나마 유광(幽光)을 드러낼 수 있겠는가? 그러나 김군(金君)의 요청을 의리상 사양해서는 안 되는 바가 있어 삼가 장문(狀文)에 의거하여 개괄적인 것을 가려 뽑고, “선생의 아름다운 자질은 퇴계(退溪)를 만나 이루어졌고, 퇴계의 도학(道學)은 선생을 만나 빛이 났다. 선생이 아니라면 어찌 퇴계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었겠으며, 퇴계가 아니라면 어찌 선생의 발명(發明)을 보장할 수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내가 선생의 언행(言行)과 사업(事業)에 대하여 대부분 생략하고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것은, 뒷날에 선생을 알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퇴계를 보고서 얻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이어서 명(銘)을 짓는다.
우뚝한 저 문순공은 / 卓彼文純
우리 동방의 주자인데 / 我東考亭
보고서 알았던 분은 / 見而知之
오직 우리 선생이셨네 / 惟我先生
선생의 도는 / 先生之道
스승에게 질정을 받았고 / 繩墨於師
선생의 학문은 / 先生之學
연원이 여기에 있었네 / 淵源在玆
정자 문인 중에 양시이고 / 程庭之楊
주자 문하에서 장식이라 / 朱門之張
전함도 있고 받음도 있는데 / 有傳有受
그 빛이 드러나지 않으랴 / 不顯其光
도산의 아래에 / 陶山之下
월천이 굽이쳐 흐르니 / 月川濊濊
산이 만약 사라지지 않는다면 / 山如不朽
냇물도 마르지 않으리라 / 川亦不渴
가의대부(嘉義大夫) 이조참판(吏曹參判) 겸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 춘추관사(春秋館事) 의금부사(義禁府事) 팔계(八溪) 정온(鄭蘊)이 찬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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