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복음에 대하여(2)"
3. 마가복음의 사회적·정치적 배경에 대하여
당시 유대는 사회적, 정치적으로 긴장과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B.C. 40년경 헤롯 왕은 로마와 동맹을 맺고 그 허락을 얻어 갈릴리와 베레아를 다스렸고 유대와 사마리아 및 이두매는 로마 제국의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통치받고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유대가 어느 정도 독립성이 있었던 것 같으나 지리적인 중요성 때문에 로마의 철저한 통제하에 있었다.
그리고 B.C. 63년경 폼페이우스(Pompeius)장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유대인들은 세금을 로마에 바치게 되었는데 이 납세 제도는 수탈의 형태를 띤 것으로 그들은 상당히 경제적인 곤경을 당하고 있었다.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세리들이 유대인의 비난과 멸시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그것은 이 같은 사회·정치적 배경에서 이해가 가능하다(참조, 2:16; 마 9:11; 눅 3:12~13). 이처럼 로마의 침략이 빚어낸 혼란으로 말미암아 유대인들이 통일된 이념으로 단결할 수 없었던 때를 배경으로 마가복음의 내용이 전개된다.
4. 마가복음의 종교적 배경에 대하여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는 유대교였다. 이 유대교에는 3대 주요 종파가 있었다. 그중에 가장 유력했던 종파는 바리새파이고 그다음은 사두개파요 에세네파(the Essenes)였다. 당시 바리새파의 수는 약 6천 명 정도였다. 이들은 경건주의자들로서 율법의 규칙을 강조하였고 배타적이었으며 회당 교육을 전담하였다. 사두개파는 자연주의자들로서 수적으로는 바리새파보다 적지만 주로 교육을 많이 받은 자들이며 정치적, 경제적으로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성전 예배를 전담하였다. 에세네파는 금욕주의 자들로서 흰옷을 입었고 독신을 강조하였다. 이 분파의 회원이 되려면 3년이란 수련 기간을 거친 후 서약을 하고 세례를 받아야만 하였다.
B.C. 586년 솔로몬 성전이 파괴된 후 예배와 율법 연구를 위하여 유대인들이 회당을 세우기 시작하였는데 예수 당시에 와서는 그 수가 많이 증가하였다(1:39). 그리고 이 율법 연구와 바른 가르침을 위해 서기관과 랍비들이 생기게 되었다. 이들은 예루살렘은 물론 유대와 갈릴리 각 지방에도 흩어져 있었고 이들 중 대부분은 바리새파에 속해 있었다. 그런데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대개가 외식주의적(外飾主義的)이고 위선적이었으므로(12:40; 마 23:1~36) 예수와 가장 많은 논쟁을 하였으며 예수의 책망을 심하게 받았다(7:6~13).
- 2021. 12. 12. (Q.A.시스템 성경연구시리즈 11권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