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기행 여덟 번 째 여강을 걷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42F1505D96A42435)
9월 28일 도리에서 여주보까지 9월29일 여주보에서 이포보까지
9월 28일
지난달 기행을 마쳤던 도리 늘향골 마을에서 차를 내려 기행을 시작했다. 날씨는 약간 흐렸다. 햇빛이 내리 쪼이지 않아 걷기 좋았다. 우리가 걷는 길이 여주시에서 강변을 따라 조성한 여강길 1코스였다. 남한강이 여주에 오면 여강이라 불린다. 1코스의 끝이 도리마을이다. 우리는 도리마을에서 여주대교까지 1코스를 거꾸로 올라가는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D9D505D96A4E036)
강변 따라 난 산길을 걸었다. 공기가 습해서 땀이 많이 났다. 두 시간 걸려서 흔암 나루터에 도착했다. 지금은 관광 안내판만이 옛날 나루터가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1364F5D96A53F37)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0504F5D96A54137)
![](https://t1.daumcdn.net/cfile/cafe/994103505D96A64537)
나루터를 지나 개인 정원을 지나갔다. 조경수가 가꾸어져 있고, 큰 나무에 그네가 매달려 있고, 잔디가 잘 깎여져 있는 정원이었다. 집주인이 지나가는 나그네를 업수이 여기지 않는 사람이었다. 입구에서 출구까지 안내를 해주었고, 차 한잔 도 대접하지 못해서 미안하다 하면서 배웅을 했다. 다시 산길을 올라섰다. 숲길을 걸어도 후덥지근했던 더위는 여전했다.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 산을 넘었던 곳에서 길이 없어졌고, 2미터도 넘는 콘크리트 옹벽이 나왔다. 돌아가야만 했다. 강변택지가 조성되고 있는 현장이었다. 강물이 보이고 경치가 좋은 곳에는 난개발이 되고 있었다. 우리 일행은 길을 잃었고, 세 갈래로 흩어졌다. 마을 사람들에게 물어 간신히 길을 찾았다. 산을 넘어 우만리 나루터에 도착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0DD495D96A67037)
![](https://t1.daumcdn.net/cfile/cafe/9959B5495D96A67202)
수령 300년된 느티나무 아래 그림 동호인들 이십여명이 자리를 잡고 풍경을 스케치하고 있었다. 밑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을 보니 작업시작한지가 얼마 되지 않아보였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길을 걷는 모임이라 소개를 했다. 강원도 삼척에서 한강을 따라 걸어 내려오고 있다했더니.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나루터를 지나 다시 산길에 들어섰다. 오전 내내 강변의 산길을 오르내렸다. 배낭 멜빵에 젖은 땀을 자낼 정도로 땀벌창이 되었다. 지리산 종주에 나선 기분이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4404C5D96A75C07)
강천보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8BD4C5D96A75E04)
오후에 고달사지에 들렸다. 승탑을 보고 다시 강천보에서 내려 강변길을 걸었다. 땡볕 길을 걸었다. 캠프장에 오니 그늘이 좀 있다. 건너편이 신륵사 강월헌이다. 남한강을 다녔던 배들의 랜드마크가 강월헌이었다. 경치가 좋았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C20505D96A7AC04)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C39505D96A7AE04)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C7A505D96A7B004)
우리가 묵었던 숙소가 신륵사 바로 옆이다. 시골의 중소도시에서 보기 드문 고층아파트가 강건너에 있다. 금강그룹 KCC에서 지은 아파트였다. 40층은 되어 보였다. 강바람이 시원해 걸을만 했다. 수상스키, 제트스키들이 멋지게 강심을 가르며 지나갔다. 손을 흔들어주었더니 손을 들어 화답을 했다. 여주보에서 일정을 마쳤다.
9월 29일
아침 여섯시에 일어나 신륵사에 갔다. 신륵사 정문 앞에 우리가 묵었던 모텔이 있었다. 안개가 잔뜩끼어 강건너가 어슴프레 보였다. 마치 수묵화 같았다. 여강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경속에 우리가 있다. 우리가 그림속에 신선(畵中仙)이 된 것이다. 어제 건너편에서 보았던 절경에 이른 것이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DB2425D96A85F37)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D27425D96A86137)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C8D425D96A86336)
![](https://t1.daumcdn.net/cfile/cafe/998413425D96A86502)
벽돌로 쌓아올린 전탑과 사리가 들어있는 승탑을 보았다. 신륵사 앞에 전통가마가 있었다. 장인들이 밤새워 장작을 태워 그릇을 굽고 있었다. 굵은 장작은 큰 아궁이에 넣고 가는 장작은 측면에 태워서 가마의 열을 유지하고 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CC1505D96AB8803)
아침 식사를 마치고 다시 여주보에서 걸어내려갔다. 안개가 아침보다 더 짙었다. 안개에 가려서 풍경이 거의 보이지 않는 길을 두어 시간 이상 걸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1527465D96A92F05)
계신리 마애불을 보러 강변까지 다시 큰 길로 나왔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B4C5465D96A94B3B)
대기 중에 습기는 가득하고 후덥지근한 지근한 길을 세 시간 가까이 걸었다. 길가에 참외를 파는 원두막이 보였다. 이름하여 금싸라기 참외였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37D54F5D96A97304)
행수 신정일 선생이 선뜻 참외를 사서 나눴다. 갈증과 허기를 달랠 수 있었다. 거기에다 원두막 옆에 있는 대추를 따서 하나씩 입에 넣었다. 대추알이 커서 못난이 사과만 했다. 금사면 소재지를 지나서 이포재를 넘어간다. 땡볕은 내리쪼이고 피로는 쌓였고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열두시 쯤 드디어 이포보에 도착 오전의 일정이 끝났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E9B8425D96A99201)
점심 이포 쌀밥 정식. 031-883-5993. 상차림이 깔끔했고 음식 값은 저렴했다. 무엇보다도 맛있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F53F495D96A9B201)
점심식사 후에 파사산성에 올랐다. 해발 200여미터를 올라가야했다. 점심에 안주가 좋아서 막걸리를 몇 잔 걸쳤더니 아주 불콰한 기분이 되었다. 날씨는 더웠고, 한발 짝 한발 짝 띠는 것이 천근만근을 옮기 듯 힘들었다. 하지만 정상에 오르니 고생한 보람이 있었다. 통쾌무비한 경관이 전개되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62584F5D96A9F204)
![](https://t1.daumcdn.net/cfile/cafe/99EC0F4F5D96A9F407)
파사산성은 남한강의 군사요충지였다. 강물의 흐름이 한눈에 들어왔다.
다시 내려와 영릉으로 갔다. 여기에는 이조의 임금 들 중에 두 분이 모셔져 있다. 세종의 영릉(英陵)이 있고 효종의 영릉(寧陵)이 있는데, 세종의 영릉은 옛 모습으로 복원작업 중이라서 볼 수 없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C05F475D96AA2D06)
![](https://t1.daumcdn.net/cfile/cafe/99DFC5475D96AA3005)
효종은 인조의 아들로서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병자호란 때 볼모로 청나라에 잡혀갔다. 청나라에 가서 놀라울 정도의 발달된 서양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이 문물을 접한 소현세자는 개혁을 꿈꾸고 귀국했다. 결국은 아버지 인조의 눈에 벗어나 독살을 당했다는 것이 역사학자들의 분석이다. 실록에는 병사로 되어 있다. 세자였던 형이 죽으니 그 뒤를 이어 세자가 되었고, 왕위에 오른 이가 효종이었다. 그는 이완장군과 함께 북벌을 준비하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다. 이조 중기 이후 멸망한 명나라를 섬기고 서슬이 시퍼런 청나라를 오랑캐라 했던 것은 빗나간 사대주의였다. 그 어설픈 사대주의가 나라를 망쪼에 들게 한 원인이었다는 것은 후세의 역사가들의 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