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든 책꾸러미
사랑의 선물
박찬교 파주지회
‘어린이날’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 있어요. 바로 운이 좋다가 말았던 기억이에요. 내가 살던 마을에는 코딱지만 한 작은 구멍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과자라곤 유통기한이 언제인지도 모를 눅눅한 오란다 몇 개가 고작이고 막걸리만 잔뜩 쌓여 있었어요. 그 가게에는 한 달에 두 번 정도 물건을 배달하는 용달차가 다녀가는데 마침 어린이날이었던 그날 용달차가 내 집 앞을 지나갔어요. 방 안에서 텔레비전을 보다가 밖에서 ‘퍽’ 하는 소리가 나서 가보니 라면 중에 제일 비쌌던 S라면 상자가 떨어져 있었어요. 그 시절엔 다른 라면보다 두 배나 비쌌던 S라면은 먹기가 힘들었거든요. 하늘에서 어린이날 선물이 툭 떨어진 것 같았어요. 나는 마음속으로 “라면 아저씨 제발 가던 길 가세요, 제발요.” 하고 바랐어요. 꼬불꼬불한 면발을 젓가락에 칭칭 감아 호로록 입에 넣을 생각을 하니 침이 고였어요. 어린이날 텔레비전에서는 특별한 선물을 주잖아요. 라면 선물이라도 받으면 나도 텔레비전 속 어린이처럼 특별해질 것만 같았어요.
저녁에 일하고 돌아온 엄마에게 라면 이야기를 떠들어 댔지만 엄마는 곧장 라면 상자를 구멍가게에 주고 왔어요. 주인이 찾아가게 돌려주어야 한다고요. 맞는 말인데 내 눈에서는 무언가가 핑 돌았어요. 운이 좋다가 말았지요. 나는 꼬들꼬들 꼬불꼬불한 면발 대신 푹 퍼지고 쫙 펴진 국수를 먹었답니다.
또 다른 기억은 ‘방정환’이라는 인물이에요. 초등학교 때 담임 선생님은 어린이날을 만든 사람이 방정환 선생님이라며 고마워하라고 했어요. 낯선 이름이지만 덕분에 학교를 안 가도 되니 고마운 분인 건 틀림없었지요. 나는 친구들과 뒷산의 주인 모를 산소에 가서 “방정환 선생님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며 절을 세 번 했어요. 어린 시절 방정환 선생님에 대한 기억은 그게 전부였지요.
어른이 되어 선생님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되었는데, 선생님은 어린이들을 위해 읽을거리를 많이 만들었습니다. 특히 우리 옛이야기를 많이 찾아내려 애썼고 외국 동화를 우리나라 상황에 맞게 고쳐 쓰고 새로 썼습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어린이들과 문학을 만나게 해주는 오작교 역할을 자처했습니다. 외국 동화를 번안한 작품이 바로 《사랑의 선물》입니다. 이 작품은 발간된 지 열흘 만에 다 팔려 열 차례나 다시 찍었다고 하니 어린이들에게 맞춤한 ‘사랑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 외에도 옛이야기를 재화하고 동요, 동시, 동극을 위한 각본까지 썼습니다.
선생님이 쓴 모든 작품을 읽어보지 않아 미흡한 점이 많지만 읽어본 중에 흥미로웠던 작품과 조금은 결이 다른 작품들로 보따리를 꾸려보았습니다.
《4월 그믐날 밤과 방정환 동화나라》
방정환 글 | 한병호 그림 | 웅진주니어 | 2007
방정환 선생님이 이야기를 너무 재미있게 들려주는 바람에 이야기에 폭 빠진 어린이가 오줌 누러 가는 것도 잊어버려 입고 있던 옷을 푹 적셨다는 이야기를 알고 계시나요? 〈4월 그믐날 밤〉 이야기도 그중 하나로 《4월 그믐날 밤과 방정환 동화나라》에 수록되어 있는 세 편의 이야기 중 하나입니다. 1924년에 발표됐다고 하니 100년이 되어갑니다.
“절에서 치는 종소리도 그친 아주 깊은 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밖에 아무 소리도 나지 않는 고요한 밤에 아가의 숨소리보다도 가늘게 속살속살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조용히 귀 기울이는 이에게만 들리는 속살거리는 소리는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바로 4월 그믐날 밤 온갖 빛과 소리를 자랑하는 꽃들과 새들과 나비가 5월 초하루 날 있을 음악회를 위해 연습을 하는 소리입니다. 드디어 날이 밝고 기다리던 5월 초하루 날, 모든 생명들은 그동안 갈고닦은 솜씨를 맘껏 발휘합니다. 지금과는 다른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삼았던 시절의 이야기로 5월 초하루였던 ‘어린이날’을 축하하기 위해 쓴 이야기입니다.
당시 어린이는 특별한 호칭 없이 ‘이놈아’, ‘이 녀석아’로 불렸다고 합니다. 어린이에 대한 생각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라 사람들 대부분이 가난하고 굶주림에 힘들어하던 시절이라 어린이를 위해주고 돌봐줄 여력이 없었겠지요. 이런 때 선생님은 ‘어린이 선언문’을 선포하고 어린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동화를 썼다고 하니 놀라울 뿐입니다.
다가올 어린이날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고 계시나요? 〈4월 그믐날 밤〉의 꽃들처럼, 새들처럼, 나비처럼 어린이를 위해 멋진 솜씨 한번 발휘해 보는 건 어떨까요? 마트에 쌓여있는 공산품이 아닌 어린이를 위한 마음이 담뿍 담겨있는 것으로 말입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어린이》
염희경 엮음 | 이상권 그림 | 산하 | 2019
언제부터인지는 모르지만 봄에 피는 꽃들이 동시에 피더니 봄을 누릴 새도 없이 여름이 성큼 다가옵니다. 올해 여름은 또 얼마나 더울지 벌써부터 땀이 나려 합니다.
여름의 더위를 날려버릴 강력한 주전부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빙수입니다. 요즘엔 얼음에 인절미, 망고, 초코와 같이 빙수의 종류도 많습니다. 빙수에 관한 노래도 있고, 빙수를 소재로 한 유쾌한 그림책도 있습니다.
1920년대 우리나라에도 빙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어린이》는 방정환 선생님의 수필이 담긴 수필집입니다. 그중에 〈빙수〉 이야기가 아주 재미있습니다.
“뚝 떠서 혀 위에 놓으면 서늘한 기운만 (중략) 달큼한 맛만 혀 속으로 스며들어서 전기 통하듯이 가슴과 배로 등덜미로 쫙 퍼져 가야 하는 것이다. 그 시원한 맛이 목덜미를 식히고 머리 뒤통수로 올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옷을 적시던 땀이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이다.”
문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서늘한 빙수 한 그릇을 먹은 것처럼 목덜미와 뒤통수와 옷의 땀이 소문 없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또 빙수를 제대로 만드는 맛집 소개와 가게 인테리어에 대한 소견까지 자세히 기록해 놓았습니다. 맛집 소개는 재미있지만 가게 인테리어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날카롭습니다. 요즘 인터넷에 맛집 소개 글이 많은데, 선생님의 글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빙수의 맛을 제대로 즐기는 방법도 흥미롭습니다. 첫째, 꼭 딸기 빙수를 먹을 것. 둘째, 천천히 혀끝으로 음미할 것. 셋째, 맛이 없는 사람은 닭 알(달걀)을 한 개 깨어 넣고 휘휘 저어 먹을 것. 네 번째도 있지만 직접 확인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시골 쥐의 서울 구경》
방정환 글 | 김동성 그림 | 장정희(방정환연구소장) 해설 | 길벗어린이 | 2019
이솝의 〈집쥐 들쥐〉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시골 쥐의 서울 구경》의 전신이 바로 〈집쥐 들쥐〉랍니다. 〈집쥐 들쥐〉는 두 쥐가 서로의 집에 초대되어 함께 지내다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는 이야기지만 《시골 쥐의 서울 구경》은 이야기의 내용과 소재와 배경이 우리나라 시대 상황에 맞게 새롭게 쓰여 있습니다.
시골 쥐가 경성(서울) 구경을 하다가 죽을 고비를 넘기고 고향으로 되돌아가는 이야기로, 《4월 그믐날 밤과 방정환 동화나라》에 수록된 세 편의 동화 중 하나를 김동성 그림의 단행본으로 펴냈습니다.
어수룩한 시골 쥐 한 마리가 죽기 전에 경성 구경을 하고 싶어 경성으로 올라와 서울 쥐를 만나 경성 여러 곳을 구경합니다. 시골 쥐와 함께 서울 쥐를 따라가다 보면 옛날 남대문 정거장, 경성의 거리 풍경, 전차 등을 구경할 수 있습니다. 본문이 아니더라도 앞 면지와 뒤 면지를 펼쳐보는 것만으로도 당시 시골과 경성의 풍경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그림을 그린 김동성 작가는 그 시절 경성의 풍경을 그대로 옮겨 놓으며 독자의 눈을 사로잡았습니다.
《칠칠단의 비밀》
방정환 글 | 김병하 그림 | 사계절 | 2016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 중 하나가 탐정 이야기가 아닐까 합니다. 《칠칠단의 비밀》은 일본인에게 납치된 여동생을 구하는 탐정 소설입니다. 나는 이 동화를 읽고 별점 다섯 개 중 다섯 개를 주었습니다. 그럴만한 몇 가지 이유를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책 속 인물입니다. 《칠칠단의 비밀》 주인공인 순희와 창호는 부모도 고향도 없는, 의지할 데라고는 남매 둘 뿐인 슬픈 신세입니다. 부모도 없이 고아 신세가 된 인물의 처지를 생각하니 안됐다는 생각과 측은한 마음이 들면서 꼭 부모님을 만나기를 응원하게 되었습니다. 인물이 가지고 있는 결핍은 읽는 사람의 이해와 공감을 일으킵니다. 다음은 배경입니다. 이야기의 배경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통치를 받던 일제강점기입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역사적 배경은 읽는 사람의 몰입을 도와줍니다. 또 직접 가 볼 수 없는 과거의 시간과 장소는 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안성맞춤입니다. 마지막으로 사건입니다. 동생이 납치되어 타국으로 팔려가는 사건은 너무나 큰일입니다. 당시엔 실제로 납치 사건이 있었다고 하니 순희가 납치되는 사건은 허구가 아닌 실제 이야기입니다. 창호가 순희를 찾기 위한 과정 또한 외줄 타기 하듯 아슬아슬해서 읽는 사람은 책이 끝날 때까지 긴장을 늦출 수가 없습니다.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상황 속에서 인물들이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포기하지 않고 용감히 싸우고 통쾌하게 이겨 내는 모습을 보며 어른인 나도 용기를 얻었습니다. 출간된 지 90여 년이 지난 이야기지만 지금 읽기에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원고를 준비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방정환 선생님이 남긴 많은 작품에 비해 단행본으로 출간된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겁니다. 작품보다 선생님의 이름이 더 많이 알려진 이유인 듯합니다. 방정환 탄생 120주년을 맞아 방정환 재단과 창비 출판사에서 선생님의 작품을 모아 《정본 방정환 전집》을 펴냈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보다는 더 많은 작품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어린이들이 쉽게 볼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선생님이 남긴 많은 작품이 어린이를 위한 ‘사랑의 선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