洪大裕(홍대유) 기수(現 기수협회 회장)가 명마 「차돌」을 타고 거둔 23승은 한국 경마에서 아직 깨어지지 않는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기록은 한 말이 한 기수를 태우고 달성했다는 점에서, 또 우승마에 대해 핸디캡을 적용하는 우리의 경마장 현실에서 대단한 업적이다. 「차돌」은 1989 년 그랑프리 大賞을 제패하면서 大賞경주 4관왕에 등극했다. 홍대유 기수는 『지금도 차돌과의 이별을 생각하면 눈시울이 붉어져 제대로 말을 이을 수가 없다』면서 속앓이를 한다.
홍대유는 1986년 12월4일 16조 馬房(마방) 에서 미국으로부터 수입된 차돌과 처음 만났다. 차돌은 체중 520kg 정도의 거구였다. 그 당시 몸집이 큰 말들은 성적을 못내고 있었기 때문에 다른 조교사나 기수들은 대체로 차돌을 얕잡아 보았다. 차돌은 최하위 말들로 편성된 1000m 경주에 첫 출전하여 행운의 1착은 했지만, 기록은 부끄러울 정도였다. 그런데도 내리 3승을 함으로써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했다. 드디어 1987년 11월25일, 차돌은 일간스포츠杯 大賞 경주에서 보란 듯이 우승했다. 그때 차돌이 세 살이었고, 홍대유는 기수 경력 2년의 신인이었다. 이 대회 우승 이후 차돌은 갈수록 막강해졌다.
1989년 경주마로서는 최고 전성기인 다섯 살이 되었다. 1월부터 출전하여 1착을 하고 2월, 3월, 4월, 내리 4승을 했다. 언론은 차돌의 연승 행진을 크게 보도하며 5월 무궁화배 大賞 경주의 우승마로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대상경주는 각 組 최고의 정예마들이 출전하 므로 어느누구도 승패를 속단할 수 없었다. 드디어 大賞경주가 시작되었다. 이날을 위해 기수들과 말들은 눈을 부릅뜨고 강훈련을 쌓아 왔다. 출발 신호와 함께 게이트가 열리고 내로라하는 말들이 앞을 다투었다 . 천지를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 수만 관중 의 환호성, 말과 기수들의 거친 호흡 소리에 휘감긴 走路는 흙바람으로 요동을 쳤다. 차돌은 追入馬였기에 다른 말들에 비해 조금 스타트가 느렸다. 그러나 4코너를 돌아 직선 주로에 접어들었을 때 홍대유는 외쳤다. 「추격이다. 차돌, 달려! 달려라!」 차돌은 홍대유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나 둘 앞서가던 말들을 따라붙더니 한 발 한 발 말발굽을 내디딜 때마다 쑤욱쑤욱 미사일처럼 잘도 나아갔다. 차돌은 놀라운 뒷심을 보여 주며 우승의 영광을 차지했다.
무궁화배 大賞 경주에서 우승한 후 차돌의 유명세는 대단했다. 경기도 과천으로 경마장이 옮겨진 후 그 해 10월에 개최된 마사 회장배 大賞 경주에서도 차돌은 폭발적인 힘으로 우승하여 기립박수를 받았다. 차돌이 뛰는 모습이 얼마나 멋있고 시원시원했던지 차돌이 뛰는 레이스만을 보러 온다는 팬도 늘어났다. 차돌은 정말 행복했다. 차돌은 한 해를 마감하는 그랑프리 대회를 대비해 맹훈련을 했다. 그러나 4관왕을 노리는 차돌에게는 너무나 큰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첫째, 그랑프리 대회 개최 일자가 앞당겨지는 바람에 차돌은 일반경주에 出走한지 2 週 만에 出走할 수밖에 없는 불리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한번 레이스를 펼치면 8~ 10kg의 체중이 빠질 정도로 체력 소모가 심해 경주마는 한 달 주기로 出走하는 것이 원칙이다. 둘째, 잦은 우승으로 핸디캡을 먹어 차돌의 부담 중량이 67kg으로 급증했다. 셋째, 기수인 홍대유가 대회 전날 일반경주에 출전하여 다른 騎手의 반칙으로 시속 6 0km로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최악의 컨디션에 처해 있었다. 기절했던 홍대유는 앰뷸런스에 병원으로 실려 가던 중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騎手대기실로 되돌아왔다. 朴元善 조교사와 동료 騎手들은 그랑프리 대회의 출전을 말릴 정도였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1989년 그랑프리 대상 경주의 날(12월11일)은 밝았다. 12필의 준마들이 게이트가 열리자 무섭게 달려나갔다 . 4코너를 돌아 관람대 앞 결승 직선 주로에 들어갈 때까지도 차돌 앞에는 서너 필의 말들이 달리고 있었다.
『이젠 추격이닷!』 차돌은 역시 追入馬였다. 스타트는 느려도 결승 고지에 가까워질수록 가속도가 붙어 先入馬를 제치는 말이었다. 홍대유는 결승선으로 돌진하기 위해 최후의 채찍을 휘둘렀다. 차돌은 하나 둘, 앞서 가던 준마들을 따돌리더니 2착마를 머리차(25~50cm)로 이기며 우승했다. 2착마는 「경주로의 여우 」로 불리는 김종온 騎手가 기승한 우승 예상마 「수평선」이었다. 홍대유 騎手와 차돌이 함께 달성한 기록은 위대했다. 그러나 더욱 위대한 것은 사람과 말 사이에도 진정한 우정이 가능함을 실증한 점이었다. 홍대유 騎手는 「경마장은 아름답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다. 이 책의 내용 중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대목을 조금 소개할 필요가 있겠다.
서울경마장의 천하무적 「차돌」은 성적을 낼수록 부담중량이 늘어나 몸을 혹사당하고 있었다. 어느덧 경쟁마보다 12kg이나 더 얹고 달려야 했다. 그것은 「魔(마)의 12 kg」 이었다. 뚝섬경마장 시절의 명마 「포경선」도 12kg의 추가 부담중량을 짊어지고 뛰다가 갑자기 허물어졌기 때문이다. 1승만 더 올리면 차돌의 추가 중량부담량은 13kg. 그러면 차돌을 다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좋아, 이번 레이스만은 차돌을 위해 달리자. 난 차돌이 쓰러지는 게 싫어』 홍대유 騎手는 차돌에 대한 사랑 때문에 무리한 경주를 펼치지 않고 2착으로 들어왔다 . 조교사는 몹시 화를 냈다. 그는 얼마 동안 조교사를 슬슬 피해 다녔다. 1990년 4월 , 기수들에 대한 인사이동이 단행되어(당시 기수는 오늘날처럼 조교사와 騎乘계약을 맺는 개인사업자가 아니라 마사회 직원의 신분이었음) 홍대유는 16조를 떠나게 되면서 차돌에 騎乘할 수 없게 되었다. 홍대유와 헤어진 차돌은 전성기가 지나면서 먹구름이 다가왔다. 차돌은 두세 달에 한 번씩 출전할 만큼 활력을 잃었다. 마방에 서서 멍청하게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홍대유는 그런 차돌의 신세가 안쓰러워 가끔 차돌의 마구간으로 찾아갔다. 그때마다 차돌은 혀로 홍대유의 손을 핥거나 눈을 껌벅거리며 반가워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안개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후였다. 차돌이 생각나 마구간에 가보니 텅 비어 있었다. 퍼뜩 이상한 생각이 들어 관리사에게 물었다. 『차돌이 어디 아파요?』 『아픈 게 아니라 廢馬(폐마)됐어』 『뭐라구요?』 홍대유는 그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세상에 그렇게 위대했던 차돌이 폐마가 되다니...그는 정신없이 관리사에게 물었다. 『食用(식용)은 아니죠』 경마장에서 쫓겨난 말은 도살되어 고기로 팔리기도 한다. 정력 혹은 신경통에 좋다고 해서 말고기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말 장수가 와서 사 갔다고 그러대』 『말 장수가 왔어요?』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과천에서 제일 잘 뛰던 말을 구해 달라고 부탁했다더군』 『그랬군요…』
홍대유는 차돌이 떠난 텅 빈 마방에서 한참 동안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차돌과 처음 만났던 때부터 그랑프리 우승 때까지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그는 차돌이 먹다 남은 각설탕을 입 안에 넣고는 우물거려 보았다. 조금이라도 차돌의 흔적을 찾고 싶어서였다. 우물거리는 그의 입 속으로 그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줄줄 흘러들었다. 그리곤 그가 철 들고 처음으로 어깨가 흔들릴 정도로 오랫동안 흐느꼈다 . 그는 중얼거렸다. 『미안하다 차돌아. 네가 떠나는데, 배웅도 못했구나. 넌 나에게 준 것이 많은데, 난 네게 준 게 하나도 없어. 정말 미안하다, 차돌아!』
차돌은 1993년 개인마주제가 시행되고 난 후 추방된 첫 케이스였다. 개인마주제 시대엔 마사회가 경주마를 보유했던 시절과는 달리 말을 사오고, 기르고, 훈련시키고, 또한 마구간 사용료 부담으로부터 말먹이 구입에 이르기까지 모두 개인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폐마나 다름없는 말들을 마구간에 그냥 놔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늙거나 능력 없는 말은 두어 달 만에 한 번 출전하기도 어렵다. 그렇더라도 馬主는 매 월 56만 원의 하숙비(마방 위탁관리비)를 내야 한다 . 경주마는 최소한 자신이 먹고 자는 하숙비 정도는 벌어야 쫓겨나거나 말고기가 되는 참화를 모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차돌에게 번듯한 은퇴식은 치러 주지 못한다 해도 이별의 정을 나누는 자리는 마련했어야 할 것 아닌가?
홍대유는 차돌을 찾아 나섰다. 뜬소문만 나돌 뿐 차돌의 행방은 묘연했다. 「스포츠조선」이 차돌을 못 잊는 홍대유의 애절한 사연을 보도했다. 그러던 1995년 3월 중순 어느 날, 차돌의 소재에 관한 제보 전화가 「 스포츠조선」 이규승 기자에게 걸려 왔다. 경기도 용인군에 있는 승마장에서 차돌을 보았다는 것이었다.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용인민속촌 뒤편의 「신갈승마장」이었다 . 아직 승마장 건설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었다. 馬主는 보이지 않았다. 마방에 들어갔다.
『아! 차돌이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차돌도 마방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끄덕이며 인사를 했다. 그는 경마장에서 차돌에게 해주던 대로 손가락을 차돌의 입속에 넣어 주었고, 차돌도 손가락을 열심히 빨아 댔다. 차돌과의 재회는 「스포츠조선」 4월2일자에 크게 보도되었다. 그로부터 보름 후 차돌의 새 주인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건설업을 하는 박상문 사장이었다. 홍대유는 朴사장과 강남 영동호텔 커피숍에서 만났다.
『차돌이 어떤 말인지 알지 못하고 좋은 말이란 얘기를 듣고 샀는데, 신문을 보고서야 정말 훌륭한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난 말을 너무 좋아해 승마를 낙으로 삼고 있습니다. 차돌을 사고 나서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말을 좋아하는 사람이 차돌의 주인이 되셔서 정말 기쁩니다』 『허허, 차돌의 주인이라니요. 차돌의 진짜 주인은 바로 홍騎手입니다. 차돌을 드리겠어요』 그 말을 듣는 순간 홍대유는 어리벙벙했다. 『차돌을 구입하느라고 돈이 많이 들었을텐데요?』 『650만원 주고 구입했는데, 그동안 치료비 와 위탁관리비 등으로 모두 1000여만원이 들었지만, 차돌은 아무래도 홍騎手가 주인입니다. 아낌없이 드리겠습니다』 『차돌을 주셔도 저는 키울 수가 없습니다 . 단지 차돌을 곁에 두고 보살필 수 있도록 마사회의 승마훈련원에 맡겨 둘 수밖에 없어요』
4월27일, 폐마가 되어 쫓겨났던 차돌은 보무도 당당하게 승마훈련원으로 되돌아왔다 . 차돌은 승마인들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노후를 보냈다. 홍대유는 틈나는 대로 훈련원으로 찾아가 차돌과 우정을 나눴다. 차돌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차돌의 등에만 타려고 했다. 그런지 몇 달 후 차돌은 사람을 태우고 가다가 넘어져 더 이상 일어서지 못했다.
|
|
첫댓글 참...슬픈이야기네요..
아~ 차돌이 그립네요 저도 차돌과 경마동기생 (?)입니다 벌써 강산이 두번 바뀌었네요
그리고 영원히 홍대유 기수의 맘속에 들어가 버렸다 ...다시는 차돌의 모습을 홍대유 기수의 마음속 이외에는 볼 수 가 없었다...... 이런 결말이라서 맘이 더욱 아픕니다.. 아 백광도 울리더만 차돌도..그렇네요 ..
horseman의 진정한 애마 전설적인 차돌군이었군요.
애틋한 심정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