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선생과 그의 삶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국가만년대계를 위해서 개혁의 커다란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지만 실현하지 못한 실패한 정치가, 조선의 개국이래 가장 많은 책을 펴냈던 학자, 프랑스의 계몽철학자 루소의 민약론을 능가하는 민본정신을 주창했던 정치철학자, 배다리와 수원화성을 건설했던 토목가, 아방강역고를 저술했던 역사학자 지리학자, 마과회통을 저술하여 천연두 예방법을 저술했던 의학자, 형법서 흠흠신서를 펴냈던 형법학자, 청백리가 되는 지침서 목민심서를 썼던 행정학자, 수많은 시를 써냈던 당대최고의 시인 등 그의 업적을 이야기하자면 동서양의 어떤 천재와도 견줄 수가 없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재주보다도 그가 지금 후손들의 사랑을 존경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시대를 넘어섰던 애민사상일 것이다. 그의 목민심서는 만고의 명저가 되었고, 지금 대한민국의 고위직 관리들은 마음에 한 번씩은 품어봤던 마음가짐과 행동지침서가 되었다.
그는 일찍이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아 홍문관의 교리와 사간원의 사간직을 수행했다. 직급은 하위직이었지만 국가의 중요사 결정에 기여할 수 있는 자리였다. 이런 직급을 옥당이라고 했다. 암행어사를 지내기도 했다. 정조는 다산을 아주 총애했다. 그의 탁월한 능력과 당파에 휩쓸리지 않고 올바르게 정무를 수행하는 품행을 높이 산 것이다. 그는 당파로 분류하자면 남인계열에 속했다.
인조 반정 후 조선후기까지 요직을 독차지하며 세도를 누렸던 벽파(벽파는 노론 계열이었다,) 정상 모리배들의 모함을 끊임없이 받아야했다. 그의 주위에는 서양학을 공부했고, 천주교를 신봉했던 남인계열의 학자들이 많았다. 그의 바로 위의 형 약종은 천주교도로 처형을 당했다. 정조가 죽자 그 동안 숨을 죽이고 있던 벽파 간신모리배들이 벌 떼 같이 일어나 정약용을 처형해야한다고 나섰다. 서용보, 이기경, 홍낙안, 목만중 등의 벽파 간신모리배들이었다. 정약용을 천주학쟁이라고 몰아부쳤다. 정약용의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던 것이다. 바로 위의 형 약종과 약종의 아들 하상이 처형을 당했고, 약용과 둘째형 약전은 간신히 극형을 면해 귀양살이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약용이 재임시절에 선정을 베풀었고, 나라에 헌신했던 공을 몇몇의 관료들과 선비들이 상소하여 극형을 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역사에 가정이라는 것은 없다. 하지만 잘못된 역사에 아쉬움은 말할 수 있다.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여 개혁의 꿈을 가졌고, 부국강병한 제국을 꿈꿨던 정조가 뚜렷한 병명이 없이 죽었다. 그때까지 정조는 아주 건강했다. 독살을 당했다는 설도 있다. 개혁을 두려워했던 벽파들과 그들과 한통속이었던 대왕대비가 독살을 꾸몄다는 것이다. 그후로 훈구대신과 외척들의 세상이 되었다. 그들은 백성들의 고혈을 착취했고 매관매직을 해서 나라가 파탄지경에 이르렀고, 결국은 왜놈들에게 통째로 나라를 바치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가 재위 시에 튼튼하게 개혁의 시스템을 구축했더라면 설혹 그가 갔을지라도 개혁은 지속되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있다. 혼자서 개혁을 해보겠다는 야심이 좌절되자 사리사욕만 채우고자했던 훈구대신의 나라가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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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삶은 네 단계로 구분되어진다. 첫 단계는 태어나서 벼슬길에 오를 때까지, 28세에 과거에 급제해서 관직에 오른다. 두 번째 서른아홉까지 관직에 있었다. 세 번째 귀양지에서 보낸 18년, 그리고 네 번째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와서 죽을 때까지 18년.
역설적이었고, 그를 모함했던 조무래기들이 바라지 않았겠지만, 그는 귀양을 갔던 강진의 18년 동안에 학문의 최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강진에 유배를 가서 처음에는 죄인이라 하여 강진의 바닥쇠들이 그가 살던 집에 돌을 던지고 담을 부수는 행패를 부렸다. 참담했던 시절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그의 학문과 인품이 소문이 나자, 젊은 학도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그가 항상 학문에 뜻이 있었지만, 국가대사에 몸 바쳐 일해왔던 터이라 집중해서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드디어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그의 유배 생활 18년은 찬란한 학문의 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이 대표적인 저작 일표이서(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가 강진생활에서 저작되었거나, 저서의 기틀을 잡았다. 특히 목민심서는 한자문화권(중국, 일본, 한국, 베트남)에서 최고의 행정지도서였고, 청백리 지침서였다. 목민심서는 고위공직자들에게 마음가짐의 표상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생각지도 않은 엉뚱한 자들이 그의 목민정신을 흉내내 웃음을 사기도 했다. 전두환의 용비어천가인 “황강에서 북악까지”를 보면 그의 머리맡에는 목민심서가 놓여 있었다고 그려져 있었다. 전두환이 머릿글이라도 읽었다면 그런 무도한 일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에피소드 한 가지, 베트남에 여행갔을 때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의 머리맡에 “목민심서”가 놓여있었다고 들었다. 왜? 그 당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도 아니었는데, 목민심서가 전해졌을까하는 의문이 있었다. 그 사실을 최근에 읽었던 박헌영의 평전에서 알아낼 수 있었다. 박헌영과 호치민이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같이 다녔다. 그때 박헌영이 호치민에게 권해주었던 책이 목민심서였다는 것이다.
다산 선생은 단군 이래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책을 펴낸 학자이다, 500여권의 책을 펴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도 자신의 기억에만 의존하지 않았고, 특정사안에 특정의 사건을 거론하게 되면 반드시 참고문헌을 찾아내고, 각주를 올렸다. 오래 앉아 있으니 엉덩이에 종기가 나자, 서서 읽는 독서대를 만들어 집필을 계속했다.
다산 선생은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썼던 책들이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고 묻혀 버릴까하는 조바심에 후손들에게 “ 세상에 알려지지 못하면 그냥 태워버리라.” 는 유언을 남겼다. 그럴 조바심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고위직에 올라 이름을 높인 적도 없었고, 학파를 이룰만한 무리를 거느리지도 못했으니. 그의 저술에 세상에 빛을 본 것은 일제 강점기 그의 자손들과 위당 정인보 선생이 뜻을 같이해서 여유당 전서를 세상에 내고나서부터였다. 다산 선생이 지금은 가장 위대한 선조 중의 한 분이 되셨다.
한 가지 더 유학자들은 먹고 마시는 인간의 금욕을 다스리는 것을 학자들의 첫째가는 덕목으로 생각했는데, 다산 선생은 맛있는 음식을 즐겼고, 술을 음미할 줄 알았다. 학문에 열중했지만, 풍류 또한 즐길 줄 하는 멋쟁이셨다. 강진에 있을 때 달밤에 뱃놀이 하는 장면은 생각만해도 절로 감탄이 터져나왔다.
서울에 가서 강남이나 강동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다산생가를 가보자고 제의를 해서 마현리에 여러 번 가봤다. 연잎에 막걸리를 따라마시기도 했고, 강바람에 맞추어 노래도 불러가며 다산 선생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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