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기행 열한 번 째
12월 14일 토요일
여덟시 반. 마곡나루 2번출구에서 도반들을 만나 기행을 시작했다. 마곡 생태공원을 지나간다
아침 날씨가 쌀쌀했다. 미세먼지는 없고, 공기는 맑았다. 방화대교를 보면서 걸었다. 강서구 방화동과 고양시 강매동을 연결하는 다리이다. 한강 다리 중에 두 번 째 긴 다리다.
가운데 유선형의 철 구조물은 날라 가는 비행기를 형상화했단다. 김포공항이 가장 가까운 다리이다. 세계적으로 비상하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상징하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방화대교 바로 아래 투금탄이 있다. 지금은 한강 하구 둑이 있어 여울이 사라졌지만 전에는 이 여울을 건너는 나루가 있었을 것이다.
투금탄의 전설은 이렇다. 형제가 길을 걷다가 황금을 주웠다. 의 좋은 형제였다. 그 황금을 놓고 욕심이 생기자 형이 그 황금을 나루를 건너는 배위에서 강에 버려버렸다. 그리고 그 뒤로 형제는 더욱 우애했다는 이야기 이다. 이런 류의 전설은 중국이나 일본이나 고대 유럽국가에도 있다. 물욕을 자제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나이들어서 이 전설을 뒤집어 분석을 해보니. 통치자들의 정치적인 책략이 이 미담에 숨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들 무지랑이 백성들은 욕심 부리지 말고 순리대로 살아라, 하라는 대로 하고, 시키는 대로하다가 갈 지어다, 나머지는 전지전능한 절대 권력자들이 다 알아서 할 것이다.’
MB정권의 치적 아라뱃길에 이르렀다. 인천 앞바다와 한강을 잇는 운하이다.
인천항에 들어오는 화물들을 이 뱃길을 이용하여 수도권에 좀 더 가까이 운반하여 물류를 원활하게 해보자는 원대한 뜻을 가지고, 거대한 야적장과 부두 등을 만들었지만 거의 활용되지 못하고 있다. 하루에 몇 편 유람선만이 오가고 있다. 유람선선착장 요트계류장이 있다. 화물선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까지 서울이었고, 아라뱃길이 보이는 곳부터 김포시이다. 김포시 고촌읍.
아라뱃길 근처에서 길을 해매다 차로를 넘고 넘어 다시 강변로에 들어섰다 . 전방에 들어온 느낌이다. 펜스 위에 원형 철조망이 튼튼하게 쳐져있다.
강변을 따라 철조망은 끝없이 이어졌다. 굴포천을 넘어서 남원 윤씨 묘역 영사정을 지났다.
한강을 내려보는 조망이 좋은 곳에 묘소가 잘 가꾸어져 있다. 윤집, 윤계의 비석이 보인다. 윤계는 윤집의 형이고 윤집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다가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가서 처형을 당했다.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척화 때문에 나라는 폭싹 망했다. 청나라와의 싸움에 패해서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의 용골태에게 무릎을 꿇었고, 백성들은 말할 수 없는 고초를 당했다. 윤집은 순국을 한 충신이 되어 죽은 뒤 영의정으로 추서되었다.
철조망을 따라 걸었다. 풍곡리 쉼터에서 배낭을 벗고 쉬었다. 열두 시 십분 걸포 사거리에서 오전 일정을 마쳤다.
오후 일정을 시작했다. 운양동에 있는 김포 에코센타를 지났다. 오후세시에 양촌읍에 들어섰다. 철조망 옆 가드레일을 이십분여 걸었다. 대형차들이 질주를 했다. 차들이 뜸한 틈을 타 길건너 자전거 도로에 올라섰다. 별로 아름답지 못한 길이었다. 철조망과 번잡한 차로를 따라 걷는 길이다. 오후 네시에 전류리 포구에 도착했다. 이중으로 쳐진 철조망 너머로 어선이 대여섯 척 정박해있다. ‘어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한다’는 프래카드가 걸려있는 것을 보니, 무슨 다툼이 있고, 아직 조업을 하고 있는 어민의 배였다.
전류리 포구에서 철조망을 멀리하고 내륙으로 들어섰다. 하성면 마곡리, 마곡 사거리에서 일정을 마쳤다.
12월 15일 일요일
하성면 금성초등학교에서 차를 내렸다. 아침 바람이 차다. 마스크와 귀 덮개를 썼다. 수곡동 마조1리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여기 저기 빈집에 눈에 들어오고, 다른 한 켠에는 전원주택이 들어서고 있다. 수도권이라 마을마다 좋은 집들이 서너 채 씩은 있었다. 들판을 건너기 위해 논길에 들어섰다. 갑자가 바람 이는 소리가 들렸다
논 가운데 모이를 주워 먹던 기러기 수백 마리가 날개 짓을 시작했다. 급하게 저어 비상을 하더니. 높이 나르면서 여유 있는 몸짓으로 저멀리 날아가고 있다.
멀리 보이는 애기봉을 향해 가고있다 무논에는 살얼음이 얼어있고 낙우송 울창한 논자락을 걷고 있다. 북쪽 들녘의 끝에는 철조망, 강건너 보이는 산이 이북의 땅이다.
들녘이 끝나고 마을 안길에 들어섰다. 가금리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서서 민통선 통제초소를 비껴 지났다. 드디어 해병부대 안으로 들어섰다. 가금리 애기봉 입구에서 우리와는 거꾸로 걷는 도보여행자들을 만났다. 평화누리 3코스를 걷는 도반들이었다. 오늘 17키로를 걸어야한다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군사 지역 안으로 들어섰다. DMZ민간인 통제소처럼 경비가 삼엄하지는 않았다. 통제구역이라고 써진 비닐 가림막을 제치고 수월케 안으로 들어갔다. 완만하게 경사진 임도를 따라 올라갔다. 애기봉에 오르는 길이다. 몇 군데에 해병부대의 구호가 써진 간판이 서있다.
빨간 바탕에 노란색 글씨다. 빨간 색은 피를 상징하고 노란색은 땀을 상징한다. 해병대의 정신이다. 최강의 상륙군이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피와 땀이 요구된다. 나는 사십여 년 전에 연평도에 근무를 했고, 사오년 전에 아들놈이 여기 김포 2 해병사단에 근무를 했다. 부자 해병대인 것이다.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해발 156미터의 애기봉에 오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등에 땀이 차는 듯 완만한 구비 길을 삼십분 정도 걸어서 정상에 도착했다.
이십 오년 년 쯤 전이었을 것이다. 군대 동기생이 김포부대에서 대대장을 하던 때, 가족 동반해서 애기봉을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때 차를 타고 올라가서 기억이 희미한데 오늘은 저 아래로부터 찬찬히 올랐으니. 기억에 뚜렷이 남겠다. 애기봉은 공사 중이었고, 철탑이 철거된 자리에 평화의 종이 세워져 있었다.
6.25 전쟁 시에 사용되었던 총알의 탄피와 철탑을 녹여서 만든 종이라고, 종의 표면에 돋을새김으로 써져 있다. 종 옆에는 18층 높이의 전망대를 짓기 위해 기초공사를 하고 있었다. 휴일이었던지 아무도 없었다. 공사하는 사람들도 해병대원도 없었다. 좋은 경관을 사진에 담아왔다. 임진강과 한 강이 만나는 이후부터는 조강이라 부른다. 할아버지 祖자 조강이다. 여기서부터는 강보다는 바다라고 해야 할 것이다. 서해와 바로 닿는 하구이다. 강 건너가 이북의 개성이다.
애기봉을 내려와 조강포에 도착했다.
조선시대에 삼남지방에서 올라왔던 세곡선들이 거쳐갔던 유명한 나루터 였다. 지금은 표지석만이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고 있다. 주위는 간척지로 개간이 되었고, 강으로 나가는 수로는 수문으로 막혀있다. 점심시간이 다되어 시장기가 돌 때였다. 살구 님이 막걸리 두병을 조강포 표지석 앞에서 펼쳐놓았다. 한 모금이었지만 속이 짜르르 했다. 나주 쌀 막걸리 최고! 살구님 꽤 괜찮은 남자!
점심을 먹고 문수 산성에 들렸고, 보구곶에 차를 내려 한강 천삼백리 완주증 수여식이 있었다. 이번 한강 길은 건너뛰지 않고 비교적 종주에 충실했는데 마지막이 좀 어설펐다. 수여식이 끝난 다음 강화도 둘레길을 강화대교에서 연미정까지 걸었다.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평화누리길 3코스를 걸어봐야겠다.
연미정에서 보이는 유도, 남북한 어느 쪽 군인도 주둔하지 않는 무인도이다.
2019년 2월부터 12월 까지 열한 번 나누어 걸었던 한강 천 삼백리길은 오래 기억에 남을 아름다운 길이었다. 태백의 검룡소에서 시작하여 삼척을 지나서 정선, 영월, 단양, 제천, 충주, 원주, 여주, 양평, 남양주, 구리, 서울, 김포까지 걸어 내려왔다. 역시 한강은 한반도의 대동맥이었다. 삼국시대 이후 한강을 장악했던 나라가 한반도를 지배했다. 이번 한강 길을 걸으면서 그 역사의 현장을 답사했고, 왜 한강이 그 토록 중요했던가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 기회가 주어진다면 다시 답사를 해보고 싶다.
당장 오늘 밤 잠자리에 들게 되면 그 아름다운 산천에 눈에 어릴 것이다.
Bye Bye 한강!
첫댓글 카톡에서 대충 읽었더 기행문을 아침일어나 맑은 기운으로 찬찬히 읽고간다..
한강 완주 부럽고 탄탄한 다리 빌리고 싶다...
자네야 젊을 적에 관절을 너무 많이 써서 그렇지. 원래 다리는 내다리보다 튼튼했지. 요즘 좋은 치료법이 개발되니 관절 회복하면 같이 다니세.
한강은 아름다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