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1월 24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호명되지 않은 영웅’ - 4. 날마다 미문에 떠 메다준 사람들
본문 : 사도행전 3장 2절(1~10절)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새번역>
이 기적으로 병이 나은 이는 마흔 살이 넘은 사람이다. <사도행전 4장 22절, 새번역>
사도행전 3장의 문을 열면서 등장한 한 인물,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에 대한 결과는 길고 긴 이야기와 우여곡절 끝에 이렇게 기록되며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에게 기적이 일어났다는 것이고, 그 기적을 통해 병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사람은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아니고, 나면서부터 못 걸었지만 지금은 걷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기적을 베푼 사람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아는 인물입니다.
베드로가 말하기를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을 그대에게 주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시오"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는 즉시 다리와 발목에 힘을 얻어서, 벌떡 일어나서 걸었다.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갔다. <사도행전 3장 6~8절, 새번역>
오순절 성령의 임재를 경험한 베드로와 요한은 그 날도 변함없이 기도 시간이 되어서 성전으로 올라가던 길이었습니다. 분명히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기 전에도 오가던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임재를 통하여 달라진 시선을 가진 그들의 변화가 드러나는 장면이 있습니다. 한 사람을 주목합니다. 평상시에도 미문을 지날 때마다 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지나가면서 안타까운 마음과 도와주고 싶었던 마음은 있었지만 그냥 지나치기 일쑤였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습니다.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그를 눈여겨 보고, 그에게 말하였다. "우리를 보시오!" <사도행전 3장 4절, 새번역>
성령의 임재를 통해 달라진 시선을 소유하게 된 베드로와 요한은 이제 하나님의 눈이 향하는 곳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 그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과 시선이 베드로와 요한이라는 통로를 통해 흘러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는 베드로의 강력한 선포를 통해 일어나 걷게 되는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주목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처럼 기적을 베풀 수 있는 제자들의 모습에 크게 놀랐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물론 동시에 예수님 때와 동일하게 불청객들의 주목도 받아야만 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아직도 사람들에게 말하고 있는데,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몰려왔다. <사도행전 4장 1절, 새번역>
이 일로 베드로와 요한은 종교재판을 받게 됩니다. 하지만 사도들을 처벌할 방도가 없었기에, 다시 위협만 하고서 놓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일을 통하여 앞으로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디를 가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처단했다고 기뻐했던 제사장들과 무리들은 또 다시 머리가 아파오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베드로와 요한이나 병이 낫게 된 사람이나 다시 위협하는 제사장 등등에게서, 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사람들에게로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없었다면 이 모든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통해 일어난 모든 아름다운 복음의 일들의 기초가 되었던 사건은 바로 ‘호명되지 않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로, 이 나면서부터 걷지 못했던 사람을 날마다 성전 미문에 떠메다 준 사람들입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사람들이 떠메고 왔다. 그들은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게 하려고, 이 못 걷는 사람을 날마다 '아름다운 문'이라는 성전 문 곁에 앉혀 놓았다. <사도행전 3장 2절, 새번역>
아쉽지만 그들의 이름도 등장하지 않고, 아무런 정보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성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을 받아 살 수 있도록, 그렇게라도 돕기 위하여, 매일을 성전 문 곁에 떠메다 준 사람들이란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그런데 이 짧은 구절에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반드시 실천해야 할 내용이 담겨져 있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첫째, ‘날마다’ 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 호명되지 않은 영웅들의 반복되던 하루 일과 중 어쩌면 가장 첫 번째 일은 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성전에 떠메다 주는 일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한 번, 두 번 몇 번을 도와준 것이 아닙니다. 놀랍게도 ‘날마다’, 그들은 똑같은 행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걷게 된 때의 나이가 40살이 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최대한 길게 40년을 매일같이 성전 문 곁으로 떠메다 주었다는 것입니다. 가족이라는 기록도, 친구들이었다는 기록도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가족일 수 있고, 친구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가족이라고 해도, 친구들이라고 해도, 40년을 매일 매일 떠메다 줄 수 있을까요? 이 노력과 섬김에 대해서 어떻게 경의를 표해야 할까요? 나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이내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루, 이틀, 아니 한 달까지는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매일 매일, 40년이 넘는 시간동안 날마다 똑같은 일을 할 수 없는 것을 제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 기록은 그저 놀라움으로 다가오는 것입니다. 그렇게 떠메다 준다고 해서 내가 먹을 음식까지 구걸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가가 없었습니다. 아마 겨우 그 자신이 먹을 음식정도 구걸해서 사는 정도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되면 집으로 옮겨 다 주었을 것입니다. 날마다 떠메다 주고, 떠메어 오고!
아무리 몸무게가 많이 나가지 않는다고 해도 걷지 못해 누워있거나 앉아 있는 사람을 떠메다 주기 위해서는 최소한 2명에서 4명의 사람들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 상황상 가난한 이 걸인이 사는 지역이 예루살렘일리가 없었기에 어쩌면 예루살렘 동쪽 근처에 있는 병이 들거나 가난하거나 배경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던 베다니에서 매일을 여기로 떠메다 줘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베다니에서 예루살렘 성전 미문으로 떠메다 주고 떠메어 왔다고 가정한다면 이 호명되지 않은 영웅들은 날마다 왕복 6km의 거리를 아침, 저녁으로 다닌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호명되지 않은 영웅들의 수고와 섬김의 ‘날마다’가 쌓여서 오늘의 기적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만약 ‘날마다’가 아니라 ‘가끔씩’이었다면, 베드로와 요한과의 만남은 성사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날마다’가 아니었다면, 성전 문 곁 늘 같은 자리를 사수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모든 기적의 첫 단추는 그래서 이 호명되지 않은 영웅들의 ‘날마다’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오늘 우리도 이 ‘날마다’의 삶을 살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떤 기적과 결과를 위해서가 아닌 매일 매일의 나눔과 섬김이 생활 속에서 루틴으로, 습관으로, 반복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 원하기는 그 ‘날마다’가 기도였으면 좋겠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한 중보이고 축복의 기도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바탕으로 지금 내가 날마다 할 수 있는 섬김이 무엇인지, 날마다 할 수 있는 나눔은 무엇인지 생각해보고 실천하는 삶이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지혜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2024년을 넘어, 살아가는 순간의 모든 ‘날마다’ 사랑과 관심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교회로 우리를 세워 가실 것입니다.
둘째, 한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 즉 ‘동역자’로 서로 함께 했었다는 것입니다.
혼자서 날마다 행하면 지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함께 도와주려고 했던 ‘동역자’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떠메다 주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든 한 사람 이상의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은 날마다 이 일을 감당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적게는 2명에서 많게는 4명, 그 이상의 사람들이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 주변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름도 없고, 정보도 없었던 그냥 평범하게 보이지만 호명되지 않은 영웅과 호명되지 않은 영웅이 만나 기적을 만들어 낸 동역자가 된 것입니다. 정말로 호명되지 않은 영웅들입니다. 혼자였다면 결코 이루어낼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기적은 함께 하는 ‘동역자’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동일한 일을 함께 할 ‘동역자’가 있으십니까? 날마다 함께 기도하고 있는 동역자가 있으십니까? 어렵고 힘든 일,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이기에, 함께 하고 있기에 힘이 되는 동역자가 있으십니까? 우리 교회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그런 동역자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의 동역자가 되어 날마다 아름다운 섬김과 나눔의 현장에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그저 날마다 누군가를 위하여, 아픈 이들을 위하여, 가정을 위하여, 나라를 위하여, 이 땅의 수많은 교회를 위하여, 저 북한을 위하여, 전쟁과 분쟁이 있는 지역을 위하여, 각 종 문제가 산적한 이들을 위하여 기도할 수 있는 동역자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이 걷게 된 것을 본 동역자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요? 정말 벅차오르는 감동 그 자체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은 동역자들에게 어떻게 감사를 표현했을까요? 아마, 평생에 감사를 갚으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딜 가든 이 동역자들을 호명되지 않은 영웅이 아닌 진짜 영웅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주었을 것입니다.
날마다 미문에 떠메다 준 사람들이야말로 이 시대의 교회가 반드시 본받아야 하고, 따라가야 할, 그리고 되어야 할, 인물이라고 저는 강력하게 요청하고 싶습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 중 하나임을 분명하게 선포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과 하나님을 이어줄 수 있도록 날마다 사랑과 섬김과 기도를 실천할 그리스도인이 필요합니다. 그런 교회가 필요합니다. 그런 축복의 통로, 생명의 통로, 사랑의 통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저는 날마다 미문에 떠메다 준 사람들을 통하여 우리가 가져야 할 ‘일상의 나눔과 섬김의 실천’, ‘일상의 말씀 실천’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일상의 영성’에 대해서 깊게 묵상하는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우리라는 작디작은 통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면 이 얼마나 큰 축복입니까?
하나님이 필요한 사람이 우리라는 동역자들의 날마다의 작은 섬김을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감사의 현장입니까?
비록 통로의 이름은 등장하지 않더라도 통로가 더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우리를 통하여 흘러간 하나님의 사랑을 보며 뿌듯하지 않을까요?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동역자들과 함께, 당장은 아무 증거 보이지 않고 아무런 변화가 보이지 않더라도 인내로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해 나가는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사랑하고 축복하고 존경하는 예배자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날마다’ 성전에 나면서부터 못 걷는 사람을 떠메다 준 사람들처럼 오늘부터 그 ‘날마다’의 사역이 시작되기를 축복합니다.
결단 찬양 - 빛을 들고 세상으로 + 주의 나라가 임할 때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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