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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나라의 침략 전쟁에 패해서 망한 나라의 3가지 유형!
기원전 3000년경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서 국가가 세워진 후에 5천년 동서고금 인류
역사는 전쟁의 역사이니.... “침략전쟁” 에서 승리한 나라는 제국이 되고 그 지도자는
영웅으로, 후세에 흠모와 존경을 받으니 다른 나라와 민족에서도 부러움의 대상 입니다.
이집트 람세스 2세, 바빌로니아 함무라비, 아시리아 센나케립과 아슈르바니팔, 페르시아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마케도니아 알렉산드로스, 로마의 카이사르, 고구려 광개토 대왕, 훈족의
아틸라, 오스만투르크의 메메트 2세, 몽골의 징기스칸과 쿠빌라이, 스페인 펠리페 2세, 청나라의
강희제, 러시아의 페트르 대제, 프랑스의 루이 14세,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에 프랑스의 나폴레옹!
“영웅” 으로 불리는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침략전쟁” 을 일으켜 무고한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살인자” 들이니.... 도스토예프스키는 소설 “죄와 벌” 에서 푼돈 때문에 전당포 노파를
죽인 라스콜니코프의 입을 빌려 변명이랍시고 살인자 등급에 대해 말하니 대강 이런 뜻입니다.
한사람을 죽이면 살인범이고 열사람을 죽이면 살인마이며 백사람을 죽이면 희대의 흉악한
살인마 짐승이며...... 천사람을 죽이면 장군이라 부르고 만사람을 죽이면 영웅으로
높이며, 십만명을 죽이면 세기적 대영웅이자 위인전에 실릴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침략전쟁은 나쁘며 그 전쟁을 일으킨 지도자는 잔인한 침략자에 독재자라고 부르며 욕을
하다가도.... 그 침략자가 자기나라 사람이면, 금새 얼굴이 돌변하여 입에 침을 튀기며 얼마나
대단한 영웅인지 칭찬하며 그 사람의 후손인게 자랑스럽다고 말하면서 뿌듯한 자부심을 갖습니다.
광개토대왕! 하면 한국인들은 금새 얼굴이 펴지며 대왕께서 얼마나 넓은 영토를 얻었으면 시호를
“광개토” 라고 했겠냐며, 대왕께서 심지어 중국땅으로 쳐들어갔다고 마냥 자랑스러워 하는데...
“침략이면 다같은 침략” 이지 여기에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것이니 바로 “내로남불” 인가 합니다?
대왕은 즉위한 해에 백제를 침략했고 부여와 옥저, 동예, 숙신, 거란과 연나라를 침공했으니 침략전쟁에서
죽은 자는 얼마이며 불탄 집은 얼마이고, 또 수많은 과부와 고아들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한 살인자에
그치지 않고 남의나라 사람들을 잡아와서 노예로 부리고, 그중 수백명은 당신의 묘를 지키는 수묘인
으로 삼았으니 그들은 다른데로 이사갈수도 없고 평생 강제로 침략자의 무덤을 돌보며 살아야 했습니다?
침략전쟁에서 승리한 나라는 이웃나라를 자기 국토에 병합하고 그 백성들은 포로로 잡아와
노예시장에 팔거나 자국민에게 노비로 주거나 농노로 부렸으며, 여러 전쟁에서 승리하면
대왕을 넘어 제국을 세우고 황제를 칭했는데.... 그럼 망한 나라는 어떻게 됐으며 그
민족은 어찌됐는지 인류 5천년사를 보면, 나라가 망하면 대개 3가지 경우가 된다고 봅니다?
1. 나라는 물론 민족도 없어지다.
(1) 트로이
라오메돈이 아폴론과 포세이돈의 힘을 빌어 트로이를 세웠지만 두 신에게 제물을 바치지 않아 재앙을
받자 헤라클레스에게 도움을 받아 극복했으나, 또 제물을 제대로 바치지 않자 도시가 파괴되는
보복을 받았다는데.... 프리아모스왕 시절에 차남인 파리스가 스파트타의 왕비 헬레네를 유혹해
데려온 탓에 미케네의 아가멤논이 주도한 1만 그리스 연합군에 의해 BC 1194년에 또 다시 멸망합니다.
최초의 세계대전인 카데시 전투” 는 기원전 1274년 5월 12일 “시리아의 카데시Qadesh”
에서 이집트 람세스 2세 2만 5천과 히타이트 무와탈리스 2세의 4만 5천 간에 벌어
졌는데.... 이집트는 히타이트가 동맹국 군대를 총동원했다면서, “트로이의 이름인
윌루사” 와 또 호메로스가 트로이의 동맹국으로 언급한 “다르다니아” 를 기록했습니다.
슐리이만이 트로이 발굴에 들어갔는데 가장 위층은 고대 로마 시대의 유적이며, 그 아래
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 시대에 건설된 도시이고, 그 아래의 유적층이 바로 후기
청동기 시대의 《일리아스》에 나오는 트로이 이며, 가장 아래층이 전기 청동기
시대의 유적으로..... 바로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 라고 잘못 판단한 유적이라고 합니다.
그리스군의 공격으로 결국 트로이는 멸망하고 성은 파괴됐으며 살육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세계 각지에 노예로 팔려갔으니.... 호메로스는 일리어드와 오디세이를 써서 이 전쟁을
표현했는데, 훗날 로마는 성이 함락될 때 탈출한 아이네이아스가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주장했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없으며 성공한 자들이 스스로 조상을 높이는 것에 불과합니다?
(2) 이스라엘 10부족
유대민족은 기원전 1200년경 이집트를 탈출해 여호수아의 지도로 팔레스타인에 정착했다가 암몬
인이나 불러셋인과 전쟁을 위해 기원전 1047년에 사울이 이스라엘왕으로 추대되었는데...
다윗과 솔로몬이 죽은후 르호보암이 독재를 행하니 르우벤, 시므온,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에브라임, 므낫세 10부족은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 북 이스라엘 왕국을 세웁니다.
기원전 732년에 이스라엘의 베가는 아람 왕 르신과 동맹해 예루살렘을 위협하자 유다 왕
아하즈는 아시리아의 티글라트-필레세르 3세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아시리아는 남진
해서는 다마스쿠스, 이스라엘, 아람을 병합하였으며 길르앗에 거주하던 르우벤, 가드,
므나쎄, 납달리,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아시리아에 끌려가 하부르강 유역에 정착합니다.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720년 아시리아의 재침공을 받아 완전히 멸망하고 남은 사람
들도 모두 끌려갔으니 사르곤 2세는 자기 자신을 사마리아의 정복자로 기록
했는데.... 이 때 27,280명이 아시리아로 끌려가 하부르강 유역과 메디아 땅에
정착하여 엑바타나 등에 유대인 공동체를 형성하지만 그후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의 유다왕국은 아시리아의 침공을 받으니, 센나케립은 즉위하자마자 네르갈
의 신전을 재건하고 대외 전쟁을 치루어 아시리아의 패권을 공고히 확립하는 중에 남유다 왕국의
예루살렘을 침공했으며... 기원전 586년 신바빌로니아 제국의 침략으로 멸망당하고 백성들은 바빌론
으로 끌려갔으나 신바빌로니아를 멸망시킨 페르시아가 유대땅을 통치하기 위해 일부를 돌려보냅니다.
(3) 카르타고
고대 지중해에서는 인구가 늘면 고국을 떠나 남의 땅으로 이주하여 도시국가를 세우는
일이 많았으니 그리스와 페니카아가 그러했는데.... 페니키아(레바논) 티레의
공주 디도는 부왕이 죽은후 왕이 된 형제가 그녀의 남편을 죽이자 위협을 느껴
기원전 814년에 티레를 떠나 서쪽 땅에서 신도시 카르타고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지중해 페니키아 도시들은 어머니 도시 티레에 상납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티레는 페르시아와 싸우면서
쇠퇴했고 기원전 332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에게 멸망하니, 그 역할을 시돈이 대신했지만 외적의 침입
을 받아 쇠퇴하니 카르타고가 뒤를 이었는데.... 지중해 서부 광물과 동부의 문화 생산물을 교환해
번영을 누렸고 페니키아 도시들의 맹주 역할을 하면서 상납금이 들어오자 부유한 도시로 성장합니다.
카르타고는 페니키아 이주민들이 다수의 원주민들을 몰아내고 세운 나라였으니 원주민들 보다
수가 적은 페니키아인들은 노예를 부려 산업화된 농업과 상업으로, 특히 해양 활동으로
번영을 누렸으니.... 이베리아 반도, 시칠리아 섬을 비롯한 서지중해에 식민도시들을 세웠
지만 본토의 인구 압력을 줄이는 것 보다 안정적인 무역 및 해군 거점확보에 목적이 있었습니다.
지중해 최강의 해상국가는 카르타고 였으니 지중해는 물론이고 대서양 연안으로 진출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서해안까지, 북쪽으로는 영국의 도버 해협까지 이동하며
교역했는데... 기원전 218년에 카르타고는 이베리아 반도의 발레아레스 제도,
사르데냐섬, 시칠리아 섬의 서부, 북아프리카의 해상과 해안 대부분을 차지했습니다.
이후 로마와 세차례 포에니 전쟁에서 2차전은 한니발이 이탈리아를 석권하며 로마군에 연전
연승을 했으나 기원전 149년 3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인 40만이 무장한채 로마군
과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고,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는데... 기원전 146년
로마는 카르타고를 함락했지만 얼마나 식겁했는지 40만 중 살아남은 5만명을 노예로
팔아버리고 성을 허물고 바닷물을 끌어들여 소금밭으로 만드니 카르타고인은 소멸합니다.
2. 나라는 없어지고 백성들은 침략국에 흡수당하다.
(1) 악카드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와 페르시아의 점령국들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기원전 3천년경 부터 수메르인들의 도시 국가가 건설됐으니
키시, 니푸르, 라가시, 우루크, 우르, 움마 및 에리두등 수많은 나라들은 수메르
북쪽에 위치한 "아카드" 에서 세력을 키운 사르곤왕에 의해 기원전 24세기에 이르
러, 차례로 점령된 후 아카드는 우루크 마저 정복해 세계 최초로 “제국” 을 세웁니다!
점령국을 관대하게 다스린 로마는 토지의 3분지 1을 몰수해 로마 귀족들에게 불하했는데, 수메르
지역은 가혹하게 몰수한것 같으니 아카드 제국은 기원전 2154년 구티족의 침략으로 무너진후
라가시의 구데아가 부흥했고, 기원전 2119년 우루크왕 우투헤갈이 구티족을 메소포타미아에서
몰아내고 기원전 2112년 우르남무왕이 우르 제3왕조를 건설했으며 이후 바빌로니아로 넘어갑니다.
기원전 21세기에 북부 아수르에서 건설된 앗시리아는 기원전 9세기에는 시리아와 페니키아,
이스라엘 왕국에 바빌론까지 정복하는데... 수많은 국가들을 점령해 가혹하게 통치
했으니 점령당한 백성들은 수탈에 시달리는데, 이집트를 정복한 아슈르바니팔 사후
후계자 지위를 놓고 내란을 겪으며 쇠퇴하니 속국인 바빌로니아가 반란을 일으킵니다.
"아시리아" 는 이집트, 리디아와 동맹을 맺었지만 기원전 612년 신바빌로니아, 메디아,
스키타이, 킴메르, 유다, 엘람, 킬리키아 연합군의 공격으로 멸망했는데... 함락될때
이슈쿤왕은 성에 불을 질렀고, 연합군 역시 아시리아에게 당한 그대로 보복하여
흔적조차 남지 않게 되었으니 매번 침략당한 나라의 백성들은 침략국에 흡수동화 됩니다.
(2) 중국에 흡수당한 55개 소수민족
중국은 56개 다민족국가(多民族國家)이니 인구를 92%인 한족(漢族) 외에도 55개 소수민족
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국 정부는 소수민족들이 다른나라에 병합되거나 독립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소수민족들이 거주하는 변방에 한족(漢族)을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고 있으니 한족 이주 정책은 해당 지역 소수민족과의 끊임없는 갈등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수민족 내지 북방민족이 중국군을 격파하고 중국을 점령해 나라를 세우기도 했으니 몽골족
의 원나라와 만주족(여진족)의 청나라가 있었으며. 양자강 이북 화북을 점령한 나라로는 흉노,
선비, 갈, 강족, 저족이 전진과 북위 통일왕조를 세웠으며 여진족의 금나라는 개봉을 점령해
송나라 황제를 포로로 잡았고 흉노, 돌궐, 거란족의 요나라도 중국왕조 에서 조공을 받았습니다.
소수민족은 좡족, 후이족(회족), 몽골족, 만주족, 조선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등이 있는
데, 오늘날 2천년간 이어진 이주정책으로 한족들은 소수민족들이 사는 지역에도
많이 거주하며, 소수민족에 따라 자신들의 언어를 구사하는 경우도 많지만 중국어
를 주로 쓰는 경우도 많으며.... 한족화 때문에 고유언어를 잃어버리는 경우도 생깁니다.
중국의 소수민족 중에서는 만주에 남은 러시아계 중국인과 홍콩 반환 후에도 남은 잔류
영국인처럼 백인 민족도 있고, 아리아계의 타지크족 처럼 원래부터 거기에 살고
있던 백인 계통 민족도 있는데... 소수민족 중 모국이 있는 민족이 상당수 있고 분리
주의가 위험한 상태이거나 가능성이 있는 민족인 티베트와 위구르를 주의하고 있습니다.
좡족은 광시좡족자치구와 윈난성 및 광둥성에 사는데 인구는 천칠백만에 달하고 회족은 한어
를 쓰지만 종교가 이슬람이니 회교는 회골에서 건너온 종교라는 뜻이며 인구는 천 60만명
이며, 중앙아시아의 영향으로 순니 하나피파에 속하지만 베트남의 참족 무슬림들과 마찬
가지로 동남아 샤머니즘과 결합된 형태의 이슬람을 믿기 때문에 종교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만주족은 말갈, 여진이라는 이름으로 역사서에 등장하여 우리에게 친숙한 민족이니 금나라
와 청나라를 세운 이들로 인구는 천 40만명이며, 위구르족은 중앙아시아 투르크계
민족으로 독립 운동이 활발한데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주로 거주하며 인구는 천 10만
명에 달하며...... 묘족은 구이저우성과 윈난성 등에 거주하며 인구는 9백4십만에 달합니다.
이족은 쓰촨성과 윈난성 등에 거주하며 인구는 8백 7십만이고 토가족은 후난성과 후베이
성에 살며 8백 4십만이고 티베트족은 중국에서는 짱족이라 부르는데
6백 3십만이며, 몽골족은 내몽골 자치구에 살며 600만이니 독립국 몽골국은
할하 계통이고, 중국내의 몽골인은 차하르 계통으로 사이가 좋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그 외 동족과 포의족이 각 2백 9십만이며 바이족 1백 9십만은 윈난성에 대리국을 세웠던 민족
이고 조선족은 연변 조선족자치구등에 1백 8십만이 살며, 하니족 1백 7십만, 여족1백 5십만,
카자흐족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1백 5십만, 태국으로 이주하지 않은 태족 1백 3십만
에 또 라후족 50만은 당나라에 잡혀온 멸망한 고구려 유민들의 후손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3) 아메리카
북아메리카의 수십개 인디언 부족 외에 중남미에 스페인에 코르테스에게 정복된 아즈텍제국과 피사로
에게 점령된 잉카제국은 고유 종교 대신에 가톨릭을 받아들이고 여성들은 백인 스페인 남자와
결혼해 혼혈이 되니 오늘날 국민 대부분을 차지하는 메스티조가 되어 민족 정체성이 사라져 버렸
고 포르투칼이 점령한 브라질은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가 유입되어 혼혈이 되니 물라토로 불립니다.
3. 나라는 없어졌으나 민족은 사라지지 않고 살아남다.
(1) 고구려 : 백성 일부가 신라로 피란해 살아남다.
고구려는 기원전 58년 해모수의 아들 해주몽이 졸본부여에 와서 과부로 왕비 소서노와 결혼해 세운 나라
인데... 244년 위나라 유주자사 관구검과의 싸움에서 2만중에 1만 8천이 죽는 대참패를 당하고 수도
환도성(국내성) 이 함락되니 동천왕은 단기로 달아났으며, 342년 모용선비 전연의 모용황이 침공해
수도가 함락돼 고국원왕 역시 단기로 도주하니.... 왕모와 왕비에 수도 백성 대부분인 5만을 잡아갑니다.
이후 전연에 항복하고 칭신해 책봉을 받은 고국원왕은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백제를
침공했으나 근구수왕자에게 패했고, 다음해 근초고왕 3만 대군의 공격으로 평양성
에서 전사해 위기를 맞았으나.... 소수림왕이 국력을 키워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에 국력이 신장해 백제와 부여, 동예, 옥저, 숙신, 거란을 공격해 영토가 늘어납니다.
하지만 영양왕때에 수나라 침공을 이름을 알수 없는 요동성주와 왕제 건무 및 을지문덕의
활약과 외교전으로 4차례나 물리쳤고, 당나라의 침공도 역시 이름을 모르는 안시성주
활약으로 물리쳤지만 60년간 지속된 전쟁에서 골병이 들었는데 연개소문 사후 세아들
사이에 내란이 일어나 장남 남생이 부하들과 당나라에 항복해 향도가 되어 쳐들어 옵니다.
당나라군은 거란족 용병에 남생등 항복한 고구려군을 앞세우고 북쪽에서 침공하고 남쪽에서는 당군
과 연합한 신라군이 북상해 평양성이 포위되니, 막내 남산등이 항복하면서 멸망하는데... 중국인
들은 고구려를 꺼우리로 불렀으니 수나라때 598년부터 당나라 668년까지 고구려와 70년 전쟁입니다.
전쟁은 돈으로 하는 것이니 백성들은 엄청 세금에 시달리고 식량을 모두 뺏기며 전쟁무기와 함선 건조에
혹사당하고 군인으로 나가 죽고 식량을 운반하느라 끌려가서 죽고 해서 요동으로 가면 죽음을 뜻하니
.... 중국인에게 고구려는 공포스럽고 원망스러운 존재인데 마침내 당나라가 고구려를 멸망 시켰습니다.
저 지긋지긋한 꺼우리놈들과 전쟁에 우리가 두번다시 시달리는 일은 없어야 되겠다. 지금은 안동
도호부를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다스릴수가 있겠지만 훗날 변란(안사의난등)이
일어나면 저 꺼우리들이 반란을 일으켜 다시 고구려를 세울 것이니 그런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스라엘 10부족 처럼 고구려인들을 모두 당나라로 잡아가니 장안까지 조리돌림을 합니다.
연도의 중국인들은 침을 뱉고 돌과 나무 막대기를 던지며 오랜 원한을 화풀이 했는데...
장안에서 일부는 노비로 주고 또 3만호(15만명)는 실크로드 오르도스에 추방했으며
또 일부는 전쟁에 참가한 거란족에 전리품으로 주니 영주로 잡혀갔고, 나머지는
강남의 숲속에 처박아 농노로 부렸는데..... 훗날 중국이 혼란에 빠지니 그 일부가
남쪽으로 도망쳐서는 미얀마 국경에 라후족과 아카족에 이수족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신라가 차지한건 고구려 면적과 인구에서 10분지 1에 불과한 황해도 뿐이라? 그후 잡아갈때 도주한
피란민이 남하하고 발해멸망후 일부 귀순하니 그럼 살아남은 고구려인의 20% 정도는 신라가
거두었나 봅니다. 성씨로 보면 오늘날 한국인 중에 고구려 후손은 진주 강씨등 3% 정도인가 합니다.
(2) 아일랜드 : 400년간 영국 지배에도 민족 정체성은 유지하다.
프랑스의 갈리아인이 기원전 5세기경에 아일랜드로 건너와 원주민인 게일인과 함께 혼거
하며 자리를 잡았으며, 그후 브리튼섬에서 침략자인 게르만 앵글로색슨인에게 밀려난
브리튼인이 건너왔는데..... 5세기에 성 파트리치오가 아일랜드에 기독교를 전파했습니다.
8세기부터 11세기 초에 바이킹이 아일랜드를 침공했으며, 바이킹으로 백수십년 전에 프랑스에 정착
했던 노르만 가문은 1066년 1만 5천으로 앵글로색슨계 잉글랜드를 침공하여 정복하고 잉글랜드
의 왕이 된후 1172년 아일랜드 남동부 렌스터 왕국의 도움 요청을 빌미로 아일랜드를 침공하였습니다.
1534년, 노르만 왕조를 이은 프랑스인 플랜타지넷왕조의 후사가 끊겨 장미전쟁 내란끝에 방계로 영국
왕이 된 튜더왕조 헨리 7세의 아들인 헨리 8세가 본격적인 아일랜드 침공을 감행하여, 1542년
아일랜드 왕위를 만들고 잉글랜드 왕과 겸임하여 잉글랜드와 동군 연합의 형태로 완전히 복속됩니다.
헨리 8세는 아일랜드인의 토지를 빼앗아 잉글랜드인에게 불하했는데 또 북아일랜드 역사는 종교 갈등
의 역사이니 18세기 스코틀랜드 장로교인들이 올리버 크롬웰의 침공으로 아일랜드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으니 북아일랜드의 얼스터에 이주온 장로교인들은 아일랜드의 천주교인들을 탄압했습니다.
아일랜드 사람들은 영국의 통치에다가 또 영국에서 온 개신교인들에게 차별과 억압을
받았으니.... 아일랜드 사람들이 천주교를 신봉함으로써 아일랜드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고자 한 것도 영국 개신교인들의 혹독한 지배에 기인했는데, 반면에 아일랜드
지주 계급은 천주교에서 장로교로 교파를 바꿈으로써 그들의 재산을 지키고자 했습니다.
아일랜드인들은 1916년에 부활절 봉기를 일으켜 아일랜드 공화국군 결성등 무장 투쟁으로 싸웠
으나 진압되는 과정에서 영국이 무고한 수많은 아일랜드인들 까지 체포하고 고문해 죽이니
아일랜드인들은 게릴라전인 영국-아일랜드 전쟁을 벌여 1921년 영국-아일랜드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아일랜드 32개 주 가운데 남부 26개 주가 아일랜드 자유국으로 독립합니다.
이 때만 해도 북아일랜드 6개주가 영국령인데다가 국회의원들이 명목상 원수인 영국왕
에게 충성 맹세 선서를 해야 하는지라 완전 독립을 바라는 강경파들이 반란을
일으키니, 온건파 자유국 정부군과 내란을 거쳐 강경파를 모두 처형한후 훗날 1949
년에 아일랜드는 영연방에서 탈퇴하면서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완전하게 독립 합니다.
(3) 중국 거대한 인구와 문명으로 살아남다!
화하족(華夏族)의 나라 중국은 허난성 낙양과 산시성 장안이 중심지인데, 서진(西晉)이
흉노에게 망해 5호 16국이 차지한적이 있으며.... 또 여진족의 금나라가 이 지역
을 차지하니 남쪽으로 도망친게 남송(南宋)이고, 아예 나라가 망한 적은 2번
있으니 남송은 몽골족 원나라에 망하고 명나라는 만주족(여진족) 청나라에 망합니다.
1) 몽골 원나라 때
1259년 몽케가 남송 원정중 죽으니 카라코룸을 수비하던 막내 아리크 부케는 쿠릴타이를 열어 차가타이
가문등 여러 왕가의 지지를 얻어 대칸의 지위를 얻자, 몽케와 함께 남송 원정중이던 둘째 쿠빌라이
는 11월에 군대를 되돌려서는 3왕가(칭기즈칸의 동생 가계)의 지지를 얻어 이듬해 3월에 본거지
내몽골의 개평부(開平府; 상도) 에서 쿠릴타이를 열어 대칸의 지위에 올라 아리크 부케에 대항합니다.
쿠빌라이는 1268년 양양을 포위하고 후난성과 장시성을 유린하였고 남송은 허페이 지역과 항저우에서
대몽항쟁을 벌였지만 쿠빌라이는 3번의 원정을 통해 광저우까지 함락시키니 남은 것은 수도 항저우
지역뿐이었는데, 전쟁은 수십년이나 지속되었고 몽골인들과 여진족은 남송 도시들을 지속적으로
유린하였고 남송은 그때마다 1271년 원(元)나라로 국호를 바꾼 몽골에 조공을 했으나 점점 약해집니다.
남송의 한족들은 이민족인 몽골을 몽고라고 폄하하며 저항했으나 1273년에 이르러 양양이 함락되고
원나라군이 성과 도시에서 약탈, 방화를 저질렀으며 특히 항주의 피해는 심각했으니... 1274년
쿠빌라이는 대병력으로 공세에 나서 1276년 수도 임안(臨安;항주)이 함락되어 남송군이 전멸되자
남송 지역을 모두 성(省)으로 나눠 행성을 설치하고 몽골인 통치자들을 보내 행성을 통치하게 합니다.
공제를 비롯한 남송의 황족은 사로잡혀 원나라의 수도로 연행되었고 황족의 여성들은
기생관으로 보내 뭇 남자들을 접대하게 하니.... 남송의 귀족들은 이민족을 섬길수
없다며 저항하다가 죽는데, 그후 해상으로 도망친 남송의 유민을 쿠빌라이는 원정
정벌하였고 1279년 애산 전투에서 전멸시켜 북송 이후 150년 만에 중국을 통일합니다.
쿠빌라이는 투항한 한족들은 벼슬을 주었지만 대부분의 한족들은 이민족 몽골군에 투항하지
않고 목숨을 잃거나 노예로 전락하였으니... 몽골인들은 한족들의 토지를 빼앗아 거대한
농장들을 만들었고 한족들은 재산을 빼앗기고 흩어졌으니 몽골인들은 계급을 4단계로
나누어 1단계 계급은 몽골인과 색목인, 2단계 계급은 부마국 고려인과 투항한
여진족에 거란족, 3단계는 복속된 화북의 한족 그리고 4단계 최하층은 남송인으로 나눕니다.
쿠빌라이는 구 남송 지역의 부(富)를 대도로 모이게 하여 그 이윤을 국가에 흡수하였고, 각종 경제제도
정비를 통해 화북을 중심으로 했던 정권으로서는 유례없는 번영을 맞이했는데... 쿠빌라이는 베트남
을 3차례 공격하는 중에 1288년 3차 원정은 몽골군 10만에 구 송나라 군인 20만을 동원하니 고려
를 침공할 때 1~ 3만에 불과했던데 비해 그 열배가 넘는 30만 대군으로 침공했으나 모두 실패합니다.
쿠빌라이의 사후, 1294년 손자 테무르가 뒤를 이었고, 그의 치세 때인 1301년 하이두가 죽자, 1304년
오랫동안 원나라와 항쟁을 벌였던 서쪽 여러 칸과의 화의가 성립되었으니 이 동서 울루스의
융화로 인해 몽골 제국은 대칸을 정점으로 한 느슨한 연합으로 다시 묶어지는 동시에, 실크로드
교역의 호황이 찾아오니...... 이를 팍스 몽골리카 (Pax Mongolica : 몽골의 평화) 라고 불리었습니다.
원나라의 수도인 대도(베이징)는 정치 경제의 센터가 되어, 마르코 폴로 등 수많은 서방
의 여행자가 방문하고 그 번영은 유럽에까지 전해지게 되었으니.... 강남의 항만
도시에서는 해상무역이 융성하였고, 일본 원정을 통해 국교가 단절되었던 일본
에서도 사적인 무역선 및 유학승의 방문이 끊이지 않아 어느 정도 교류가 지속됩니다.
북방 기마민족인 동호족, 선비족, 거란족에 몽골족과 만주족(여진족)은 변발(辮髮)을 하는데 앞
머리털을 밀고 뒤 머리털만 남기고 땋는 머리 매무새이니 거란, 여진, 몽골 등 유목민족들은
이 머리를 한족들에게도 강요했는데, 특히 훗날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 시대에 제일 심했습니다.
2) 만주족(여진족) 의 청나라 때
명나라가 망한 이유는 여러 가지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조선파병이니 7년간 연인원 25만을 보내 은화
700만냥을 썼는데, 나라를 세운지 224년이 지나 관리들의 부정부패에 환관의 발호가 심해지고
농민이 토지를 잃는등 빈부격차가 심해져 쇠락해가던중, 만력제는 태자 세우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모후와 싸우고는 수십년간 정사를 완전히 팽개치고 궁녀들과 술로 지새며 파업하면서 궁녀와
내시를 무려 2천명이나 몽둥이와 가죽채찍으로 때려죽이는 걸 즐기던 중에 임진왜란이 발발합니다.
북쪽 오이라트에 명나라 황제 영종이 포로가 되는 참변에다가 1550년에는 수도 베이징이 포위되는 경술
의 변이 일어났고 남쪽에는 왜구가 분탕질을 쳤으며.... 당시에는 몽골족 발배가 영하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이여송등 명군 주력이 1년치 예산의 절반을 쏟아부으며 진압하느라 사력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조선 사신이 달려와 바닥에 머리를 찧어 피를 흘리며 살려달라고 애원하니 꿈에 자기는
유비의 환생이고 조선 임금은 장비의 환생인데 유비가 도우랬다며 파병을 결정하는데
신하들은 모두 파병을 반대했으나 오직 단 한사람 병부상서 석성만이 찬성하는데......
이 때문에 조선인 역관 홍순언과 석성의 첩으로 들어가는 기생 류씨 얘기가 떠돌게 됩니다.
“조선은 대대로 공순하다고 일컬어졌는데 곤란을 당했으니 좌시만 할 것인가. 만약 약자를 부축하지
않으면 누가 은덕을 품을 것이며, 강자를 벌주지 않으면 누가 위엄을 두려워하겠는가. 더구나 동방
은 팔다리와 같은 번방(藩邦)이다. 그렇다면 이 적은 집뜰에 들어온 도적인 것이니, 그를 저지하고
죄를 주는 것은 나 한사람에게 달려 있다. 만력제의 조서, 선조실록 선조 32년 (1599) 5월 20일”
만력제는 급한대로 은화 2만냥을 군자금으로 조선에 보내고 심유경을 보내 시간을 번다음 영하에서
반란을 집압한 이여송에게 명하니.... 집에 들러지도 못하고 우물맛만 보고 다시 전장으로
떠났다는 김유신 처럼 무려 3천리를 달려서 평양성을 수복하는데, 정유재란 참전병력을 보면
일본군 14만에 명군 11만 7천 그리고 조선군 3만 8천이란 병력에서 보듯 전쟁을 떠맡은 것입니다.
그런데 선조는 저 많은 은화를 군비에 쓰지않고 왕비와 후궁에 왕자 그리고 대신과 내시들에게
하사하니, 유성룡과 광해군은 황망해서 사양하느라 진땀을 흘리는데 왜 영리한 선조가
저런 짓을 했는지를 짐작해 보면.... 조선군을 믿을수 없으니 왜군을 막을자는 오직 명나라
원군이라 해서 글을 써서 그들을 초빙해 오고 접대할 자들에게 미리 인심을 쓴 것으로 보입니다.
경상좌수사 박홍은 겁에 질려 단 한척의 배도 띄우지 못하고 대포를 바다에 쳐넣고 배를 불지르고 수군을
해산시킨후 달아났으며 경상우수사 원균도 당황해 배를 불지르고 서쪽 남해로 물러났고, 경상 죄병사
이각과 우병사 조태곤도 왜군과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으며.... 대구에 모인 10만(?) 제승방략군을 지휘
할 이일은 300명 병사를 구하지 못해 서울에서 3일간 출발조차 못하니 저 군대는 흩어져 달아나 버립니다.
이일은 상주에 도착해 수백을 모았으나 왜군이 습격하자 바로 흩어져 도주했고 신립이 8천(1만 6천?)으로
충주 탄금대에서 고니시군과 싸웠으나 서너시간만에 전멸하고 살아서 도주한 자는 이일등 단 4명이며,
한강방어를 책임진 김명원은 적이 배가 없으니 기마 서너기로 물에 뛰어드는 시늉을 하자 놀라 달아
났으며 한성방어군의 이양원은 왜군이 온다는 소문에 밤에 병사들이 성루에사 사라지자 역시 도주합니다.
임진강 방어선에 김명원과 한응인의 1만 3천은 적의 유인작전에 넘어가 도하한 신활과 유극량에 병사
들이 죽은후 가토군이 강변에 모습을 드러내자 겁에질린 검찰사 박충간이 말을 몰아 달아나니...
겁먹은 병사들은 앞다투어 도주했으며, 전라감사 이광등 8만 남도근왕군은 용인에서 와키자카
야스하루 1천 6백명에게 몰살당해 흩어졌고, 윤두수등 4천명이 지키던 평양성은 적이 대동강을
건너자 무기를 풍월루 연못에 던져버리고는 모두 도주했으니 이런 조선군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이라.....
조선에 참전한 명군 지휘부는 양곡을 비롯한 군수물자를 현물로 수송하는 번거로움을 피하기
위해 은을 가져와 현지에서 군수물자를 매입하려고 했으나... 조선은 중국과는 달리 화폐가
유통되는 사회가 아니고 대다수 백성은 면포와 쌀을 화폐로 사용했던 물물교환 처지라,
명군 장졸들이 은을 내밀면서 거래를 요구하면 손사래를 쳤으니 월급을 은으로 받았던
명군 장졸들은 “조선에서는 은이 있어도 술과 고기를 살 수 없다” 라고 불만을 터뜨립니다.
조선 백성들이 수확을 못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은 만력제는 명나라의 재정을 털어 곡창 산둥성의
쌀을 매입해 조선 백성을 위해 원조했으니 “지난해 왜적의 변란에 수확을 못하였고 지금 파종기에
모 한포기 없으니 사람이 모두 절망하였다. 곡식을 거두어들일 사람이 없고, 분탕은 심하여 황폐한
땅이 천리인데다, 길가의 곡식은 왜적이 거두어 가니, 인민이 죽음에 임박하여 하늘을 우러러 한탄하였다.
다행히 하늘과 같은 황은(皇恩)을 입어 산동성 소미 백여만석을 우리나라에 운송하여
구제하게 되니, 전라의 고금도·전주·남원 같은데는 각 역참에 온 쌀이 수천여석이라
굶주린 백성이 많이 의지하여 생명을 연장하였다. 다음 가을에 대미(大米) 로써
갖추어 바친 까닭에 이름을 환대미(換大米) 라 하였다. 조경남, 난중잡록(亂中雜錄)“
7년간 연인원 25만이라는 대군을 조선에 보냈으니 전비가 무려 700만냥으로 엄청났는데 특히나
원거리에 보급이 심각한 문제니.... 옛날 수양제가 보급으로 고생했던 것처럼 명나라는 장거리
보급으로 길바닥에 은자를 까는 셈이라, 안그래도 어려웠던 국고가 바닥나 재정이 파탄에
이르자 농민들에게 세금을 폭징하니 도저히 살수 없게된 농민들이 도처에서 반란을 일으킵니다.
없는 돈에 군대를 다시 조직해 농민 반란군을 토벌하다 보니 여진족들이 흥기해 후금을 세우는 것을
막지 못했고, 뒤늦게 보낸 대군은 분산 격파돼 요동을 잃으니 만리장성 산해관에 전 병력이라고
할수있는 30만 대군을 배치하자 그 틈을 노려 농민반란군이 세력을 만회했으니 이자성은 서안
을 점령하고 국호를 대순으로 한후 1644년 북경을 함락시키자 숭정제가 자살하니 나라가 망합니다.
중국인들은 비꼬는 의미에서 만력제를 “조선황제”라고 부르는데, 명나라가 쇠락해 가던 자기 분수를
알고 조선에 파병하지 말고 대신에 압록강에 성채를 쌓고 대군을 주둔시키며 여진족들을 잘 통제
했더라면 세금을 폭징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니, 그럼 농민반란이 대규모로 일어나거나 여진족
이 후금을 세울 기회가 없었을 것이고 명나라는 망하지 않고 좀 더 오래 지속될수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는 명군이 파병하지 않았으면 조선을 점령한 왜군이 명나라로 진격했을거라고 하는데
명나라를 치겠다는 말은 허세가 심한 히데요시의 말에 불과하고 당시 일본의 국력은
중국을 침략할 힘이 전혀 없었으며.... 사위 대마도주를 통해 조선에 세견선과 왜관
무역으로 엄청난 이들을 취하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전쟁을 막기 위해 필사적 이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전쟁이 터지자 고니시는 자원해 제1선봉을 차지한후 동래성에서 사로잡은 울산군수 이언성
에게 편지를 주어 조선조정에 화의를 제의했으나 이언성이 도망치는 바람에 실패하고 이후 고니시는
계속 사람을 조선 조정에 보냈는데, 그 중에 역관 하나가 서신을 전달하니 조선은 이덕형을 보냈
는데...... 화의할 마음이 있었던게 아니라 적정을 정탐하고 왜군의 진격 속도를 늦추려 한 것으로 봅니다.
탄금대 전투가 불과 서너시간만에 끝나 조선군이 전멸당하고 충주성이 함락되니 이덕형은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는데... 고니시와 가토는 서로 평양으로 진격하겠다며 칼부림 일보 직전에 총사령관 젊은이
우히다수가에게 수를 쓴 고니시가 평양성을 함락하고는, 진격하지 않고 조선에 편지를 보내니 명나라
심유경과 화의에 매달리느라 서너달 귀중한 시간을 허비했으니 이여송이 영하에서 달려올 시간을 법니다.
선조는 명군이 올때까지 평양성을 사수할 생각으로 쌀 10만석을 모아두었으니 고니시는 고스란히 챙겼는데
왜군이 북진하면 선조가 암록강을 건널 것이니 그럼 교섭 상대를 잃을까 염려해 진군을 멈춘 것으로....
왜군이 만주로 진격할 생각이었다면 9개군 중에 6개군 정도는 평안도로 진군 시켜야 하지만, 9분지 1
인 고니시군만 평안도에 진주시켰으니... 9명 장수가 각 1개 도와 한성을 점령해 다스릴 의도였다고 봅니다.
세월은 흘러 산해관의 명군 오삼계는 베이징이 이자성 농민군에게 함락되고 숭정제가 자살한지라
보급이 끊기자 항복하니, 청군은 오삼계군을 앞세워 베이징을 함락하고 한족 귀족과 황후를
포함 많은 한족 여성들을 사로잡아 후금의 수도 혁도아랍에 끌고가 노비로 삼았는데.... 베이징을
잃은 명나라는 수도를 난징으로 옮기고 청나라와 대립하여 치열한 전쟁이 수년간 더 지속되었습니다.
명나라 왕조에 충성하던 한족들은 이민족 여진족 국가에 강하게 저항했지만 오삼계를 앞세운 청나라
만주족은 남진을 계속해 난징을 함락하니... 난징에서 노비로 끌려간 한족들만 200만명이 넘었다고
하며, 명나라 잔존 세력들을 소탕해 40년만인 1683년에 이르러서야 명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킵니다.
청나라의 황제들은 만주족의 전통은 기본적으로 유지하였으나 티베트 불교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티베트인들을 포용하였고, 몽골인들을 대할 때에는 스스로를‘복드 칸’ 이라
지칭하였으며 한족들을 지배했는데, 수많은 명나라의 여성들이 공녀나 노비로
끌려 갔으며 성리학에선 용납될 수 없는 치욕스러운 변발이 한족들이 강요 되었습니다.
동호족, 선비족, 거란족에 몽골족과 만주족(여진족)은 변발(辮髮)을 하는데 앞 머리털을 밀고
뒤 머리털만 남기고 땋는 머리 매무새이니 거란, 여진, 몽골에 이어 만주족의 청나라도
이 머리를 한족들에게도 적용했으니... 1644년 순치제는 치발령을 내려 이 머리를
모든 한족들에게 강요했으며.... 이는 청 대를 이어가며 중국의 풍속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치발령이 떨어질 당시에는 남명과 같은 명나라의 잔존 세력이 남아있었기 때문에 자존심 강한
한족들은 야만족의 풍습을 따를수 없다면서 전국에서 반발을 일으켰으니, 머리를 한 가닥
만 남긴다는게 조선의 유생들이 단발령에 반발한 것 처럼 유교의 "신체발부수지부모
(身體髮膚受之父母)" 에 완전히 대치되는 것이었는데.... 체발(剃髮)에 불응하는 자가
새벽에 잡혀오면 아침 해가 뜨기 전에, 저녁에 잡혀 오면 저녁 해가 지기 전에 처형했습니다.
보수적 경향이 강했던 양쯔강 이남에서 극심하게 반발했는데, 이 때문에 본보기로 성 하나를
전부 도륙한다는 도성(屠城)을 시행해 양주 대학살과 가정삼도가 일어나 100만명이 살해
됐으니, 머리카락을 자를래 (留頭不留髮)? 아님 머리(목) 를 바칠래 (留髮不留頭)?
게다가 호복까지 입을 것을 강요하니 훗날 노신은 "유맹의 변천" 에서 "협의 기질" 이
있는 과감한 사람들은 사라지고 중국인들이 오랑캐 앞에 굴종으로 떨어졌다고 한탄합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모습이 기묘해 보였는지 보통 '돼지꼬리(변발)를 거부하면 죽음을 당했다' 라는
식으로 언급하곤 했는데.... 한편 변발령 시행과 아울러 청나라는 한족의 복식을 종래의 한푸
에서 자신들의 복식인 치파오로 바꾸는 역복(易服)도 강제했는데, 체발은 즉시 집행되었으나
역복은 옷감과 실의 수급 문제가 있으므로 1년의 유예 기간을 두고 그 이듬해에 시행되었습니다.
(4) 폴란드 : 나라가 3개로 찓겨져도 민족 정체성은 유지하다.
960년에 슬라브계 폴란인 '미에슈코 1세' 가 폴란드 서쪽 '그니에즈노'에 둥지를 튼 것이 폴란드
의 시작으로, 미에슈코 1세가 966년에 가톨릭을 받아들인 이래 992년 '볼레스와프
1세' 는 동서남북으로 진출해 키예프 대공국과의 전쟁에서 승전하여 영토를 넓히기도 했습니다.
이후 1004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과의 전쟁으로 날을 지세우고 12세기에 벌어진 내란으로
나라가 쪼개졌으며 그후 몽골 제국의 침략을 막아내느라 국가가 황폐화 되었는데,
1260년 브와디스와프 1세는 북쪽 독일 기사단국과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압박
을 막아내면서 폴란드를 통일하기 시작해 카지미에시 3세가 폴란드를 부흥 시킵니다.
카지미에시 3세는 아들이 없었으니 폴란드의 왕위는 헝가리 왕이 계승하는데 폴란드 영주들이
반발하니, 헝가리 왕이 죽자 1383년 프랑스 앙주 왕가의 10살 소녀 야드비가가 계승
하고는 13살인 1386년에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33살 노총각 요가일라와 결혼을 하니 리투
아니아도 발트 신화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하는지라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연합왕국이 탄생합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1410년 그룬발트 전투를 통해 십자군의 후예인 독일 기사단국을 박살내니,
리투아니아 기병대가 독일 기사단을 유인하기 위해 일부러 패주하며 후퇴했고 그 뒤를
독일 기사단이 추격하자 숲에 매복했던 폴란드 군대가 나타나니, 독일 기사단은 산산조각
나서 27,000여 명에 이르는 기사단은 8,000여명의 전사자와 14,000여명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는 독일 기사단국을 속국으로 만든후 1480년에는 킵차크 칸국에
대항해 독립전쟁을 벌이던 모스크바 대공국의 뒤통수를 치며 몽골 킵차크 칸국
과 동맹을 맺었는데..... 당시 독일 기사단국은 폴란드의 속국이었지만
계속해서 독립을 시도하자 폴란드군은 기사단국을 향해 북진해서 반란을 짓누릅니다.
카지미에시 4세 시기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헝가리-보헤미아를 별도의 왕국으로 다스리
기도했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에 패해 동부 영토의 1/3을 뺏겼고 지그문트 2세
시기에 부흥했는데, '스테판 바토리' 는 2천명으로 반란을 일으킨 그단스크군
12,000명과의 전투에서 4,500명을 죽이고 5,000명은 포로로 잡아 대승을 거둡니다.
이후 이반 뇌제의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전해 동부 영토의 일부를 되찾았고 지그문트 3세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중요한 영토였던 스몰렌스크도 되찾았으니 폴란드의 그 유명한 윙드
후사르의 활동 시기인데, 루스 차르국(러시아)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적극 개입하여 차르를
바꾸기도 했고 1611년에는 클루쉬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둠으로써 모스크바까지 함락시킵니다.
오스만투르크는 오스트리아 빈을 포위했으나 1683년에 2차로 빈을 포위해 함락 일보 직전에 폴란드군
윙드 후사르가 빈을 포위해 공성에 여념이 없던 오스만투르크군의 후미를 공격해 결정적인 돌격
으로 승패가 결정되었으니, 빈 전투의 승리는 오스만 제국의 유럽 침공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큰데.... 빈이 함락됐으면 중부 유럽은 기독교가 아닌 이슬람교를 믿게 되었을 것입니다.
브와디스와프 4세 바사는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침공도 격퇴하고 스웨덴과도 유리한
조약을 맺으면서 동유럽의 전통적인 강대국임을 입증했으나, 17세기 중반 스웨덴과 루스 차르국의
집중견제를 받았고 그 와중에 오스만제국과의 전쟁에서도 국력의 한계를 보이면서 기울기 시작합니다.
이때 속국인 흐멜니츠키의 카자크(훗날 우크라이나)가 반란을 일으키니 1651년 베레스
테츠코(Beresteczko) 에서 63,000여명 폴란드군이 140,000명 카자크-타타르(몽골)
연합군에 대승을 거둠으로써 겨우 진정되었으나, 이 봉기에서 엄청나게 많은 군인이
희생되었고 또한 국력이 계속 소모되어 결과적으로 대홍수(Potop) 시기를 맞이합니다.
카자크는 루스 차르국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공격해 왔고 이어 루스 차르국(러시아)이 직접 공격에 나서면서
폴란드는 순식간에 국토 절반이 점령당했으며 이후 스웨덴왕 칼 10세 구스타브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과 손잡고 침공해 오면서 나머지 절반을 점령해 폴란드는 거의 패망 직전에 이르렀지만,
폴란드 농민들이 스웨덴의 폭압적인 지배에 민중봉기를 일으켰고 타타르가 폴란드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이후 스테판 차르니에츠키등이 이끈 폴란드군이 스웨덴군과 브란덴부르크, 루스 차르국 등에 맞서 여러번
승리를 거두었고... 1660년에 올리바 조약으로 스웨덴과의 전쟁을 끝냈지만 러시아와의 전쟁은 1668년
까지 계속되었으며, 양측 모두 엄청난 피를 흘린 끝에 안드루소보 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끝맺었습니다.
이 전쟁의 결과 폴란드는 전체 인구 중 1/3이 사망하거나 외국으로 편입되는등 엄청난 피해
를 입었고 리보니아와 스몰렌스크, 키예프 등 폴란드 변경의 주요 지역이 다 날아가
버려 정치적, 경제적으로 심각한 손실을 입었으며 귀족회의도 나라가 망조가 드니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침투에 넘어가 이후로는 나라 정치 자체가 돌아가지 않게 됩니다.
1772년에 폴란드에 살던 여러 민족들이 폭동을 일으켰는데, 여기에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가 개입함으로써 1773년 8월 영토가 쪼개지니 영토가 4등분 된 것인데, 포니아토프스키는
개명군주로 의회 제도등 헌법 제정등 나라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1793년에 러시아가 폴란드를 침공하니 다시 한번 영토가 러시아, 프로이센으로 분할됩니다.
최전성기에 100만 제곱킬로미터가 넘는 면적을 자랑했던 폴란드의 영토는 이제 21만 제곱킬로미터로
축소되었고, 왕국은 370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소국으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이후 1795년에
프로이센, 러시아, 오스트리아 3국간에 세번째 분할이 이루어져 폴란드는 아예 지도에서 사라졌습니다.
이때 부터 눈물없이는 보기 힘든 폴란드의 시련이 시작되었으니... 그후 독립을 위해 프랑스 혁명정부와
협력했던 폴란드 군단의 공로로 나폴레옹이 폴란드 분할에서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이 병합한
영토를 토해내게 하고 그 자리에 바르샤바 공국을 세운 기간 동안 잠시 괴뢰국으로나마 독립하였습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몰락한후 빈 회의의 결과 바르샤바 공국은 또 다시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에
분할되어 두번째로 지도에서 사라졌으니... 이에 폴란드인들은 11월 봉기, 1월 봉기, 크라쿠프 봉기,
포즈난 봉기등 수많은 봉기를 일으키면서 삼국의 폴란드 지배를 거부하였으나 철저히 탄압 받았습니다.
나라가 없어진지 100년후 1차 세게대전이 발발하니 1915년에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가
공동으로 지배했는데, 폴란드인 150만명이 동맹국(독일-오스트리아)과 협상국(러시아)
에 소속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었으며 동맹국이 항복
하면서 1918년 11월 11일 폴란드는 123년만에 폴란드 공화국으로 독립할 수 있었습니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1918년 11월 조약의 파기를 선언하고는 유럽을 공산화할 목적으로
동유럽의 모든 신생국들에 대해 대대적인 침공을 단행하자, 피우수트스키는 동유럽
의 다른 신생국가들과 연대해 소비에트 러시아를 몰아내기 위해 1919년 2월 붉은
군대를 공격해 빌뉴스와 민스크 그리고 5월에 키이우를 점령하는 등 우세를 점합니다.
그러나 소비에트 러시아는 반격을 개시해 빌뉴스와 민스크, 키이우를 재점령하고 폴란드를 밀어붙여
8월에 바르샤바까지 붉은 군대가 진격했으나, 폴란드군은 기적적으로 비스와강에서 붉은 군대를
대파해 폴란드에서 붉은 군대를 몰아냄으로써 국가 존망의 위기를 넘겼으며 1921년 3월 리가
조약을 체결해 벨로루시 서부와 우크라이나 서부는 폴란드령이 되고 나머지는 소련령이 됩니다.
폴란드는 1939년에 독일과 소련에 동시에 침공을 받아 분할 점령되니 2차세계대전으로 이후 폴란드는
독일과 소련 양측에 저항하자 소련은 폴란드 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지식인들과 장교들을 학살
하였고, 독일도 폴란드를 무자비하게 탄압했으니 아우슈비츠등 유대인 학살 중심지가 되었으며 수도
바르샤바는 1944년 8월 봉기때 독일군이 도시를 다 쓸어버려 아무것도 안 남을 정도로 파괴 되었습니다.
폴란드는 런던에서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소련에 억류된 폴란드인과 망명 폴란드인들을 모아 자유 폴란드군
을 조직해 연합군과 함께 이탈리아, 노르망디, 네덜란드에서 피터지게 싸웠으니 연합군 내에 폴란드군이
네다섯번째로 큰 군대였는데 망명정부는 소련군이 바르샤바를 점령하기 전에 자력으로 탈환코자 무리한
봉기를 시도해 대패했고, 40만 폴란드 국내군도 큰 피해를 입고 뒤따라온 소련군에게 박해받아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