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총론은 1-8장 개인구원의 완성
9-11장은 전체 구원으로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그리고 그 섭리의 결과를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관이 열립니다.
왜 복음이 팔레스타인에서 출발하여 아시아로 유럽으로
그리고 영국 미국 다시 아시아 태평양시대에 이르렀는가를
알게 되고 현재 다시 팔레스타인으로 접근해 가는 복음의 진로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12장 이후로는 말씀을 듣고 성령에 의해 체화가 되면 행함으로
나타나게 되므로 삶의 제사를 드리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 각론에 들어갑니다.
각론은 각 장별로 나눌 수 있으며 장의 마지막 구절이
그 다음의 장을 이끌어 전개가 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1장1-17절까지는 서론이며
1장18절에서 3장18절까지는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불신자들의 죄, 안다고 하는 자들의 죄 곧 지식적인 신앙들의 죄
다시 말하면 뭐 좀 안다고 비아냥거리는 랍비 서기관 교수 학자들의 죄입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의 죄 다시 말하면 믿는다고는 하지만
표면적인 유대인이나 표면적인 신앙인들의 죄에 대한 말씀입니다.
3장19절부터 31절까지는 죄에 대한 해결책이 제시가 됩니다.
믿음에 의한 하나님의 의를 말씀하는데
여기서 믿음은 믿습니다 하는 믿음이 아니라 수용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수용함에 있어서 자기의 것을
버릴 수가 있느냐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마5:5절에 온유가 복이라고 말씀합니다.
온유는 나를 버리고 주님을 받아들이는 위대한 거래입니다.
마음의 귀가 열린 분은 얼른 깨달으실 겁니다.
죄를 뒤집으면 의가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벗어나면 죄가 되고 하나님의 뜻을 수용하면 의가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면 내가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수용하지 않으면 자신이 의인이 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나를 보느냐
나의 관점에서 하나님을 보느냐 하는 관점이 매우 중요합니다.
인간이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이지
자신의 양심의 책망이나 참소의 문제가 아닙니다.
또한 하나님의 의도 나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수용할 때에 하나님이 됐어 하시는 것이지 내가 됐다가 아닙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죄 또는 의를 다루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하나님의 주장이 일관되게 선포되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 막무가내입니다.
우리는 다만 YES냐 NO냐 양자택일 하라입니다.
주님도 산상보훈에서 예 아니면 아니요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옳다 하든지 아니라 하든지 하라고 하십니다(마5:37)
철학에는 밝아지는 회색이나 어두워지는 회색이 있을 뿐
완전한 백이나 흑이 없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죄면 죄
의면 의, 어둠이면 어둠 빛이면 빛하고 극단으로 분명하게 가릅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믿음에 있어서 결코 붙여서는 안 될 단어는
‘그러나, 그렇지만’입니다. 이는 자기 생각이 개입이 된 거죠.
하나님의 말씀은 옳지만 하고는 자신을 변호하는 겁니다.
아니죠.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인정해야 합니다.
4장에서는 믿음의 실례를 듭니다.
다윗과 아브라함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구원을 받은 선진들의 뒤를 따르라입니다.
성경이 인정하고 공인을 받는 구원이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구원이 진짜입니다.
사람의 말로 꾸민 자기식의 구원은 안 됩니다.
이건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아서 반드시 무너지고 맙니다.
하나님이 심지 않는 것은 반드시 뽑히고 다시 심겨져야 합니다.
구원에 있어서 텍스트와 같은 로마서를 보면서 항상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로마서에는 표적이나 기사를 다루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잘 못하면 1-11장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12장의 산제사로
바로 들어가면 천주교와 같아집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아멘,
행함으로 구원이 완성이 된다 아멘,
고로 행함(사랑)이 곧 구원이다 아멘 하고 망해버리는 거죠.
이건 쌀이 에너지다 하고 외치는 꼴입니다.
맞는 말인데 그 과정이 없잖아요.
쌀이 밥이 되고 먹고 소화를 시켜 몸의 에너지가 되는 과정을
통해서 그 쌀이 우리의 삶의 행동의 에너지가 되는 겁니다.
산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부터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부터입니다.
교회에서 헌신을 강요하는데 사실 헌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부터입니다.
예를 들면 결혼을 하고 난 뒤에 시부모를 섬겨야죠.
요즘의 교회의 헌금 섬김 봉사 등등을 하나님이 보실 때에
그걸 네가 했지 내가 네게 달라고 했냐 하실 경우가 비일비재합니다.
성전이라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진짜 성전은 요14장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계명을 지키면 아버지와 그리스도께서
임하셔서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집이 됩니다.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함께 하리라(요14:23) 하신 대로
몸 성전이 되는 것이 진짜 성전입니다.
그래서 성령이 거하는 몸이 성전입니다(고전3:16)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삶, 하나님이 거하실 수 있는 처소가 바로 성전입니다.
주님께서 나 있는 곳에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3) 이 말씀이 진리의 성령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하면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요일5:12)이며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처소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영생은 길이만 영원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안에 생명, 거룩, 영광, 능력, 충만, 사랑, 영원 등 하나님과 공유할 수
있는 모든 속성이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