꼰대들이 살아온 시대 (2)
청림 남택수
우리는 ‘일제고사’ 시대를 살았고 ‘입학시험’을 쳐서 상급학교에 진학했다.
한글을 익히기 시작한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전교생이 일제고사를 보아 한 달에 한 번씩 과목별 점수와 총점, 평균을 내고 등수까지 적힌 성적표를 받아 부모님께 도장을 찍어오게 하였다. 성적의 등락에 따라 보상과 훈육이 엄격하던 시절이라 치열한 경쟁을 운명처럼 받아들이며 살았다. 이 성적을 근거로 중, 고, 대를 선택하여 입학시험을 치르고 들어갔는데 일류 학교에 들어가면 ‘개천에서 용 났다.’하여 온 동네가 부러워했고 가난하면 후원자도 생겨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처럼 정보가 발달하고 일자리가 많아 자신이 노력하면 얼마든지 공부 할 수 있는 시대는 아니어서 돈이 없거나 머리가 나쁘면 일찍 포기하고 생활전선에 뛰어 들었다.
우리는 ‘공돌이, 공순이’ 시대를 살았다.
대부분이 먹고 살기도 힘들어 상급학교 진학은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다.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도 67명이 졸업하고 28명이 중학교에 진학하였으니 그 비율이 50%가 안 되었다. 남자는 먹고 살만하여 부모님은 가르치려 하나 입학시험에 떨어져 못간 애들도 있었고 여자는 아예 공부를 시키려 하지 않아 진학률이 낮았다. 졸업 후에 남자애들은 지개를 만들어 주어 농사일을 돕거나 기술을 배우러 대처로 나갔고, 여자애들은 대도시로 나가 공장, 식모살이, 버스 차장 등으로 취직을 해서 나갔다. 이때 외지의 공장에 취직을 해 나간 남자를 공돌이라 하고 여자를 공순이라 불렀는데 향학열이 높은 애들은 그 곳에서 산업체 부설야간학교를 다녀 뒤늦게 공부한 아이들도 많았다.
우리는 ‘월남전 참전’ 시대를 살았다.
우리 연배가 군대생활을 하던 1,965년에서 73년까지 9년간 연인원 32만 명이 참전했고 그 가운데 전사자가 5,000명, 전상자가 16,000명이나 되는 고귀한 희생을 치른 전쟁이 월남전이었다. 우리는 그 대가로 2억 달러 이상을 국내에 송금을 했고 간접수입액이 7억 달러, 전체적으로 보면 50억 달러 이상의 경제적 효과를 거두었다. 단 1달러가 소중했던 그렇게 허기졌던 나라가 가난의 강을 건너 모세의 기적을 이루는 토대를 마련한 것이 그나마 월남전 덕분이었다. 여기에는 조국을 위해, 가족을 위해, 죽음의 땅을 두려워하지 않고 의연하게 참전했다 산화한 우리의 동년배 젊은이의 피와 땀과 눈물이 녹아있다. 그 한 많은 돈이 발판이 되어 이룩한 나라가 지금의 우리 대한민국인 것이다. 적어도 우리가 어떻게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는지는 똑바로 알아야 한다.
우리는 ‘파독 광부와 간호사’ 시대를 살았다.
민생고와 배고픔의 해결을 최대의 과제로 삼았던 박정희 대통령이 돈을 꾸러 미국에 갔지만 면전에서 거절당하고 서독으로 간다. 그래도 분단국가의 설음과 고통을 함께 이해해 주지 않겠느냐는 막연한 기대에서였다. 눈물겨운 호소 끝에 일억 사천만 마르크를 빌린다. 독일의 탄광 지하 수 천 미터의 사지에서 일하는 광부들의 월급과 알콜이 묻은 거즈로 싸늘하게 식은 시신을 닦아서 번 간호사들의 임금을 담보로 한 돈이다. 이들이 매년 송금한 5,000만 달러는 경제발전의 종자돈 역할을 했고 82년도 까지 서독은 5억 9천만 마르크의 차관을 제공하여 가난한 대한민국이 보릿고개를 벗어나게 하는 디딤돌 역할을 하게 해 주었다. 이런 눈물겨운 노력으로 이룩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그 노력과 희생의 덕분에 우리 후손들은 아무 부족함 없이 유복하게 자랄 수 있었던 것이다. 피눈물로 얼룩진 조상들의 경제 발전사를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중동의 건설 노동자’ 시대를 살았다.
섭씨 40-52도에 이르는 열사의 땅에서 피땀 흘려 일한 대가로 받은 돈이 한 달에 50-70만원이었다. 당시 환율을 860원으로 치면 약 700불 내외를 번 셈이다. 국내에서 일하는 것보다 2-3배를 더 받았으나 먼 이국땅에서 가족과 떨어져 피 말리는 더위를 이겨내며 번 돈으로는 결코 많은 돈이 아니었다. 그래도 우리는 돈을 벌기위해 앞 다투어 지원을 했다. 오직 가족의 행복과 자식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안위는 돌보지 않았다. 지금은 사정이 역전 되어 우리나라가 돈을 많이 벌수 있는 기회의 땅이 되었다. 그렇게 키운 자식들은 일자리가 없다며 먹고 노는데 80만이 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와 한 달에 수 천 달러씩 본국으로 송금을 한다. 자식교육을 잘못 시킨 것인지, 세상이 이상해 진 것인지, 무언가 뒤틀린 야릇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꼰대라 함은 일반적으로 나이를 먹은 어른이나 특히 아버지 또래의 권위적인 인간 유형을 빗대어서 부르는 말이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인가 할 말이라도 한마디 할라치면 바로 꼰대소리를 듣는다. 나이가 들면 겸손하고 어른답게 살라고 충고까지 하면서 조건으로 내세우는 꼰대의 특징은 이렇다. 남의 일에 참견을 잘하고 궁금한 게 많아서 물어보는 것도 많고 아무튼 말이 많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뻔뻔해져서 아는 체를 잘하고 남의 말은 듣지를 않으며 우기기를 잘하고 고집이 세며 혼자 떠든다. 그래서 만든 것이 꼰대의 육하원칙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who), 뭘 안다고(what), 어딜 감히(where), 왕년에(when), 어떻게 나한테(how), 내가 그걸 왜(why)이다. 어찌보면 요즈음 우리 자식들이 바라보는 어른상이고 꼰대라는 이름으로 소외된 이방지대의 구비 조건이다. 그러니 아예 대화 자체가 안 될수 밖에 없다. 꼰대라는 어른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다. 그러니 어른들로 부터 훈계를 듣고 배우는 사회교육, 가정교육은 아예 없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학교 교육은 살아 있지만 그것도 제구실을 못한지가 오래 되었고 거기에다 도덕과 양심마저 실종된 한심한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제 멋대로 되어 가는 세상에서 제 멋대로의 인간이 판을 친다. 꼰대들만의 생각이지만 바야흐로 세상은 말세다. 그래도 우린 이런 시대를 살아야만 한다.
한 평생 어려운 시대를 살았던 그들은 지금도 꼰대라는 간판을 달고 새벽같이 일어나 재활용 폐품을 수거하며 열심히 산다. 아버지라는 이름표를 달고 가장이라는 무거운 짐을 진 채, 늙은 부모님을 모시고 캥거루가 된 자식까지 보살피며 산다. 그 사이에서 샌드위치가 된 아버지는 아무리 신세가 처량해도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도 모르게 마시는 아버지의 소주 한 잔은 소주가 아니라 눈물이 절반이다. 가슴을 저며 내며 삼키는 피울음의 한이다.
너희들이 꼰대의 마음을 아는 날은 언제 이겠느냐? 얼마 안 있어 너희들도 꼰대가 될 것이다. 너희들이 누리는 젊음이 너희들이 노력으로 얻은 상이 아니듯이 꼰대들의 늙음도 우리들의 잘못으로 받은 벌이 아니다. 처자식과 가족을 위해 죽어라 돈 번 죄밖에 없다. 그러나 너희들은 우리처럼 고생 안하고 잘 살기를 바랄 뿐이다. 나이 들어 경험이 많고 생각이 깊다보니 나라 걱정, 자식 걱정으로 잔소리를 자주 한 것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 지난해 남미의 페루 와카치나 오아시스의 모래 언덕에서 만난 베네주웰라의 젊은 연인들의 한마디가 귀를 울린다. “우리는 망해가는 나라를 탈출하여 여행을 왔어요. 베네주웰라는 공짜 좋아하는 좌파 포퓰리즘으로 수렁에 빠졌어요. 한국도 조심하세요.” 앞으로의 세상은 너희들 몫이다. 부디 열심히 잘 지켜나가기를 꼰대들은 기원한다.
첫댓글 가슴에 와닿은 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