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나란히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율법에 대한 예언자적인 해석에 동감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해서 그것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지 율법의 껍데기만을 지키면서 본질을 잃어버리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율법의 본질을 무엇이라고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하느님사랑, 이웃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이냐는 율법학자의 질문에 그렇게 대답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대답은 예수께서 생각해낸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에 이미 나오는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 하느님사랑은 신명기 6장 4-5절을 언급한 것이고 이웃사랑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해서 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성경에 나오고 있지만 율법학자나 종교지도자들이 중요하게 여기지 못한 부분을 예수께서는 거론하신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이 하느님사랑을 율법이나 제의준수에 두었다고 한다면 예수는 이것을 이웃사랑에 연결하고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통찰력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며 하느님이 주신 율법은 바로 이런 정신에서 주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행동하느냐 안하느냐가 중요하지 이 율법을 형식적으로 준수했느냐 않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지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유리잔 속이 더러운데 겉만 번지르르하게 닦는 위선적인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예수께서 율법과 예언서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것이 바로 이런 의미입니다.
바울로도 예수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우리는 초보적인 지식이나 율법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의 상속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예수그리스도에게 임했던 성령이 우리에게도 임해서 하느님이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하느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기 전의 예비적이고 초보적인 것이요, 방편에 불과합니다. 어떤 사람이 강 건너편 언덕으로 건너가기 위해서 배를 타고 갔습니다. 그러나 언덕에 도달한 이후에는 배를 놓고 가지 짊어지고 가지 않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복음을 몰랐을 때는 배를 의지하듯 이러저러한 종교적인 의식이나 율법 등을 절대적인 것으로 알고 믿었지만 그러나 예수의 복음을 알고 난 뒤로는 더 이상 이런 것들이 필요하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장해가 됩니다. 해가 뜨면 형광등이 필요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화 하나 소개합니다. 스승이 신앙의 교리들을 낱낱이 부셔버리자 제자 하나가 외쳤습니다. “제가 붙들 것이 없어져 버렸어요!” “새 새끼가 보금자리에서 밀려 나올 때 하는 소리가 바로 그거라네.” 스승은 덧붙여 말했습니다. “교리들의 보금자리 속에 안주해 있으면서 날게 될 줄로 생각하나? 그건 나는 게 아닐세. 날개를 퍼덕이는 것이지.”
새김말씀: 잘 들어라. 너희가 율법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한다면 결코 ( )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