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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개혁의 당위성
1. 희망의 종교, 원불교
2. 원불교의 시대적 사명
3. 원불교의 정체성
4. 원불교 개혁의 방향성
1. 희망의 종교, 원불교
반갑습니다.
원불교에 대해 세상 사람들은 많은 기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불교학자인 고려대학 조성택 교수님은 한 학술대회에서 “원불교는 근대불교 개혁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근대의 시공간에서 한용운의 『조선불교 개혁안』과 『조선불교유신론』, 백용성의 불전 한글화 및 대각교 운동, 박한영의 『조선불교현대화론』, 이영재의 『조선불교혁신론』 등 다양한 불교개혁이론과 운동이 전개되었지만 소태산 대종사님의 『조선불교혁신론』과 불법연구회는 성공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교수님께 여쭤봤습니다. 그러자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라고 오히려 반문했습니다.
서울 모 대학에 계시는 한 교수님은 제게 “저는 비록 원불교 교당에 나가지는 않지만, 저야말로 소태산 대종사님의 제자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습니다. 불교를 이해하기 위해 많은 불경을 읽어 보았는데, 이해하기가 어려워 갈피를 잡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대학생 때, 원불교 교도인 친구가 준 『원불교 교전』, 수북이 쌓인 먼지를 털고 그것을 읽었습니다. 『정전』과 『대종경』을 읽고 그 동안 머리가 시원하게 정리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의대교수로서 일하고 있는데 환자들에게 『대종경』의 한 구절들을 이야기 해주면 그분들이 매우 좋아한다고 합니다.
최근 한국사회에 비판적인 글로써 영향을 준 『말』지를 출판한 말출판사의 사장 최진섭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잡지는 폐간되었지만 출판사는 지금도 좋은 책을 내고 있습니다. 그 분은 원불교를 이름만 들었지 어떤 종교인지는 관심이 없었다고 합니다. 성지수호비상대책위가 성주성지에서 벌인 사드철폐운동 7년 동안의 기록인 백서 『정의어든 죽기로써』의 책을 내준 인연 덕분에 밤새워 이야기 하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저를 비롯해 우리 원불교 평화활동가들을 만나기 위해 한 달 전부터 『원불교 전서』를 읽고 있었습니다. 저희에게 “원불교야말로 진정한 한국의 종교”라고 하며, 원불교는 “세계를 구제해 줄 종교 중의 종교”라는 생각이 든다고 했습니다.
최근 한국의 문화는 중동, 중앙아시아, 동남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미국, 중남미 등 지구 곳곳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음악과 춤, 영화와 드라마, 음식, 한글, 그리고 역사를 비롯한 전통에 이르기까지 세계 모든 사람들의 매력을 끄는 나라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지금까지 프랑스, 일본, 미국이 했던 문화 강국의 자리에 우뚝 서게 되었습니다. 이 정도면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어변성룡(魚變成龍)의 나라가 된 것 아니겠습니까. 한국은 세계인들이 부러워하는 나라, 문화 강국, 문화의 성지, 김구 선생님이 꿈꿔왔던 문화대국으로 존경 받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 한 가운데에는 원불교도 있습니다.
한국은 세계 10대 부국 중의 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36년 동안 일제에 의한 식민강권통치, 3-4백만 명이 죽은 6·25남북전쟁을 거치면서 문자 그대로 원시사회인 무에서 유를 창조해냈습니다. 전 세계 국가 5% 이내의 선진국에 포함된 것입니다. 이미 UN에서도 한국을 선진국으로 확정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한국인의 우수성, 인내와 끈기, 그러나 무엇보다도 큰 힘은 홍익인간(弘益人間)과 재세이화(在世理化)라는 말로 표현되는, 공동체를 아끼고, 타인을 이해하며, 어떠한 상황에서도 세상에 나아가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는 조상들의 따뜻한 가슴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세계적인 한류(韓流)의 맹아는 일본에서였습니다. 한국연구자로서 『한국은 하나의 철학이다』라는 책을 쓴 교토대학의 오구라 기조(小倉紀蔵) 교수가 예전에 일본의 NHK에 출현해서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는 일본 한류의 출발을 촉발한 드라마 <겨울 연가(일본에서는 <겨울 소나타>)의 주인공인 배용준이 최지우에게 북극성을 의미하는 폴라리스별이 달린 목걸이를 건네며, “앞으로 길을 잃었을 땐 제일 먼저 폴라리스를 찾아 봐.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테니까”라는 명대사를 이 드라마의 핵심으로 꼽았습니다.
일본도 3백만 명의 백성이 군국주의에 의해 희생되었고, 우리보다 앞서 고도경제성장의 시기를 경험했습니다만, 여성들은 그 성공의 뒷면에서 희생을 강요당했습니다. 잃어버린 진실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 남편과 자식을 위해 쏟았던 정열이 이제 자신을 위해서는 식어버렸지만 이 드라마에서 진리와 정의, 그리고 삶의 궁극적 목적을 다시 노래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었던 것입니다. 그들 일본인들이 먼저 열광하고, 중국과 대만으로, 아시아로 중동으로 이렇게 한류는 태풍처럼 퍼져나갔습니다. 그 핵심에는 일찍이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한 한국 선각자들의 철학이 있었습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의 류병덕 교수님은 한국철학에 근대의 5대 선각자들을 반드시 넣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수운 최제우(水雲 崔濟愚, 1824-1864)의 후천개벽사상, 일부 김항(一夫 金恒, 1826-1898)의 정역사상, 증산 강일순(甑山 姜一淳, 1871-1909)의 신명사상, 홍암 나철(弘巖 羅喆, 1864-1916)의 삼일철학, 소태산 박중빈(少太山 朴重彬, 1891-1943)의 일원철학을 말합니다. 당연히 한국철학회가 인정한 한국철학사상사의 후반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류병덕 교수님은 이 분들의 공통점을 후천개벽의 역사의식, 민중종교, 한민족 고유의 사상을 기반으로 한 점, 열린 민족주의를 들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한류 정신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중 한 가지만을 들면, 『삼국사기』에 등재된 최치원의 『난랑비서(鸞郞碑序)』에 나오는 것처럼 유불선 삼교를 포용하는 무(巫)의 정신이 한국사상의 원형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원효대사의 일심(一心)으로 발아되고, 한국의 고승들과 유학자들, 철학자들의 사상으로 계승되어 소태산 대종사님께 이르러 만개가 된 것입니다.
몇 년 전, 원불교 여성회 학술대회에서 백낙청 선생님은 “원불교의 가르침 중 우리 모두가 귀중하게 여겨야 할 것을 꼽으라면 바로 삼동윤리 사상”이라고 하신 말씀을 듣고 저 자신도 깜짝 놀랐습니다. 인류의 고단한 현실을 해결할 사상이 바로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에서 발원한 삼동윤리이기 때문입니다. 한류의 근본에는 오구라 기조, 류병덕, 백낙청 선생님이 공통으로 뜻하는 법신(法身) 사상이 놓여 있습니다. 일회적인 단기간의 유행, 특별한 유행을 넘어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는 한류는 그것을 지탱시키는 튼튼한 내구성을 가진 사상을 기반으로 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동서양 고금의 모든 철학을 꿰뚫는 사상, 인류 모두가 공감하는 보편적인 사상,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사상이 아니고는 지구적 차원의 문화적 공감대는 이루지 못할 것입니다.
이러한 한국의 사상, 그리고 이를 펼친 선각자들의 사상을 집약해서 말한다면, ‘인류를 복되게 하는 도덕이 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동양 고전의 백미이자 인류의 교과서인 『주역(周易)』의 가르침은 한 마디로 천지의 도와 덕을 인간이 받아가져 이를 구현하는 것에 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왜 『대종경』 제4인도품 1·2장에서 천지의 도와 덕, 그리고 인도와 은혜를 설하셨는가. 말씀대로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이 대도이며, 우리 법신의 성품 또한 여기에서 발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대도로 만법을 통일하며, 천지와 인간 모두 여기에 근본하고 있으며, 이 천지의 도를 실천하면 은혜가 나타난다고 설하고 있습니다.
새 불법이자 새 종교인 원불교가 출현한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 도덕을 세상이 실천하지 않고 역류하기 때문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이 무도한 세상을 구제하기 위해 하늘, 즉 법신불이 보낸 화신이며, 원불교는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출현하신 모든 성현들의 미완의 발원과 서원을 짊어진 종교입니다. 우리 또한 성현의 회상(會上)에 들어온 후예들입니다.
2. 원불교의 시대적 사명
인류 문명은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선도 진화하고 있지만, 악도 진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균·쇠』를 쓴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EBS의 <위대한 수업>에서 지구의 위기를 네 가지로 보고 있습니다. 첫째, 세계적 불평등, 둘째, 대규모 핵무기 사용, 셋째, 기후변화, 넷째, 천연자원 고갈입니다. 저는 여기에 AI(인공지능)에 의한 ‘그림자 원형(심리학자 칼 융이 말한 인간의 부정적인 심리)(SBS 202년 2월 17일 뉴스)’의 부각을 첨가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다행히 원불교라는 종교가 있어 인류는 한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의 친저인 『불교정전(佛敎正典)』이 발간된 지 올해 80주년, 내년이면 세상을 구제하고자 세운 첫 교단인 불법연구회가 창립된 지 100주년이 됩니다. (소태산 대종사 탄생 100주년을 비롯해 정산 및 대산 탄생, 원불교 100주년 등 여러 행사를 치러왔지만, 고등학교 역사교과서에도 실려 있는 불법연구회 100주년에 우리 구성원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것은 점점 교단의 창립정신이 해이(解弛)해지는 징조라고 봅니다.) 1962년 교서편수 과정에서 『정전(正典)』으로 재편된 것은 모두가 아는 바입니다.
정산 종사께서 원경(元經)으로 말씀하신 이 『정전』은 원불교 탄생의 목적, 교단의 역할과 방향, 원불교인들의 신앙과 수행의 방법, 인류 구제의 방식, 문명의 지속성 등 지구촌이 어떻게 하면 인간 본성을 계발하여 인류 모두를 화합과 은혜의 세계로 만들어 갈 것인가를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깨달음의 분상에서 고투하며 내놓으신 정치·경제·문화의 핵심 텍스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가 말한 지구의 위기에도 거뜬히 대응 가능한 비방의 책이기도 합니다.
이 『정전』에 의거하면 원불교의 존재 이유는 물질의 노예가 된 인간 해방입니다. 물질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2백만 년 전 최초의 인간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진화할 때부터 자신의 안락한 삶을 위해 구축해온 유형·무형의 모든 자산을 의미합니다. 자신도 그 일부인 자연과의 공존을 통해 영속성·지속성을 유지해야 할 모든 관계가 파탄이 난 것입니다. 동서 문명이 융합될 때, 소태산 대종사님은 이를 정확히 꿰뚫어 보고 단안을 내리셨습니다.
그렇다고 소태산 대종사님만이 그러한 판단을 한 것은 아닙니다. 세계의 의식 있는 지성인들이 이러한 문명 비판의 대열에 합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류가 스스로 어두운 골짜기로 들어가는 어리석음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단적으로 1·2차 세계대전입니다. 인간끼리의 살육으로 수천만 명이 죽었습니다. 증오의 결과입니다. 그 전쟁은 과학과 자본이라는 두 수레바퀴가 지탱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그러한 시대를 사셨습니다. 인간의 무지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신 것입니다. 이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난다면 인류는 문자 그대로 종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원불교는 세계의 위기에 어떤 해법을 가지고 있을까요. 물론 국가 정책처럼 어떤 문제를 구체적으로 해결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보다 근본적 차원에서 원불교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앞에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지적과 AI의 문제를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세계적 불평등에 대해서는 세계불평등연구소(WIL)에서 발행하는 『세계불평등보고서』(https://wir2022.wid.world)에 잘 나와 있습니다. 근대 제국주의가 횡행했을 때보다도 세계의 불평등은 갈수록 나빠지고 있습니다. 상위 1%는 1990년대 중반 이후 축적된 부의 38%를, 하위 50%는 2%만을 차지했다고 합니다. 세계의 경제구조가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혁명 이후 인류는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평등 두 가지의 가치를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그럼에도 상황은 악화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미국의 경우를 생각해 보면 얼마나 문제가 심각한 지 알 수 있습니다. 세계 5%의 인구가 전 세계 에너지의 4분의 1을 쓰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축통화라는 명분으로 어느 나라의 재제도 받지 않고 돈을 마구 찍어낼 수 있습니다. 그 결과 미국이 파산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미국이 진 빚이 무려 4경 2천조입니다. 1경 뒤에는 0이 무려 16개가 있습니다. 우리나라 일 년 예산 600조와 비교해 본다면 상상을 초월합니다. 미국은 필요 이상으로 살림을 하고 있습니다. 전 지구의 자원을 자신들의 것인 양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 빚은 결국 전 인류가 갚아야 합니다.
결론은 명백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대종경』 제2교의품 34장에서 말씀하고 계시듯 의리나 염치도 없이 온갖 향락과 욕망을 채우기 위해 돈의 병에 걸린 것입니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지나가는 먹잇감은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비대해진 자아(自我)를 자신의 것으로 착각하고, 그 가아(假我, 잠시 설정된 我)를 장식하기 위해 자연과 타자를 자신에게 종속시키고 무한대의 착취를 감행합니다. 『불교정전』에서 일원상 진리를 설명할 때 설하듯, 무자성공(無自性空)의 반야지(般若智)를 터득하지 못하면, 욕망의 끝에서 허무와 파탄을 맛볼 수밖에 없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끊임없이 이 욕망을 해체하고 공공(公共)의 선으로 가도록 설하고 있습니다. 인류가 욕망의 끝을 철견할 때, 이 문명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둘째, 대규모 핵무기 사용은 라즈니쉬가 말하듯 지구의 기생충에 불과한 인간이 집단자살로 가는 어리석음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웨덴의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작년에 전 세계의 핵무기는 12,705기이며, 북한도 20기 가량을 소유하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https://www.sipri.org) 원자폭탄의 원조는 아시다시피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터뜨린 것입니다. 전쟁을 빨리 끝내게 하기 위해 그랬다고는 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전쟁은 막바지에 이르렀고 미국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전후에 미국이 세계적 주도권을 쥐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봅니다. 미국은 새로운 무기를 개발해야 군산복합체의 운영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인류는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보다는 강대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UN의 역할이 부재한 지금, 인류는 전쟁을 막을 길이 없습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미·영·중·소·프는 핵무기 보유국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국가들은 1970년 UN에서 제정된 핵확산금지조약(NPT)을 비준함에 따라 제재를 받을 수 있지만, 어떻게 해서든 핵무기를 자국의 안보를 위해 개발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 약육강식의 세계가 더욱 고착화 되어버렸습니다.
올해 원불교학과에는 미국 명문대학에서 국제정치학을 전공하고 편입한 학생이 있습니다. 이 학생과 대화를 하는 중에 출가한 이유를 물었습니다. 정치외교학회에 가서 참석자들이 하는 말을 들었는데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학자들은 우리가 세상을 위해 수많은 이론을 내놓고 그 해법을 모색해왔지만, 결론은 어떤 이론도 세계의 전쟁을 해결할 수 없고,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학생의 결론은 시민사회, 더 나아가 개개인이 각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느끼고 이 교법에서 해답을 찾았다고 합니다. 대산 상사님이 종교연합(UR)을 주장하신 것도 “UN이 그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원불교는 기성종교에 하나를 더한 것이 아닌, 그들이 인류의 재앙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출현한 것입니다.
셋째, 기후변화의 문제입니다.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의 6차 보고서가 올해 승인되었습니다. 여기서는 2040년에 티핑포인트(한꺼번에 변화되는 극적인 순간)에 도달할 것으로 내다보고 있습니다.(https://www.ipcc.ch). 산업혁명이 시작된 뒤의 지구 온도가 1.5도 높아지면 지구는 돌이킬 수 없는 되먹임 현상이 일어나 회복 불가능한 상황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 시기를 2050년에서 10년 앞당긴 것입니다. 인간의 몸이 1도 올라가면 심각해지는 것처럼 지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1도가 올라가면 가뭄과 폭염이, 2도가 올라가면 해수면 상승과 바이러스 창궐이, 3도가 올라가면 지구의 사막화로 생물의 20-50%가 멸종, 4도가 올라가면 지구 대도시가 물에 잠기고, 5도가 올라가면 지구 생명체의 70% 멸종, 6도가 올라가면 생명체의 95%가 멸종한다고 합니다.
탄소중립이 요구되는 상황은 바로 지금입니다. 이미 지구는 1도 이상 높아졌으며, 지금 멈추더라도 그 동안 쌓인 탄소로 인해 지구의 기상이변은 계속 나타날 것입니다. 인류는 화석연료 사용을 중지하고 그린에너지로 전환해야 됨에도 비용만을 고집하며 차일피일 미루고 있습니다. 선진국, 산업개발국, 후진국이 서로 책임전가를 하는 동안 지구는 더욱 황폐화 되고 있습니다. 실질적으로 지구의 자원을 먼저 개발해서 쓴 선진국이 앞장서서 헤쳐나가야 합니다. 그러나 미국이 보여주고 있듯이 희망은 사라지고 있습니다.
지구기후위기는 네 번째 천연자원 고갈의 문제와 연동되어 있습니다. 지면상 많은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 결론은 정치·경제와 무관할 것 같은 종교야말로 하나의 희망입니다. 평화학자 요한 갈퉁이 말하듯 지구의 자원을 마구 써버리는 것은 후손이 써야할 자원을 도둑질 하는 것과 같습니다. 파계의 행위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를 쓴 경제학자 슈마허는 그 해결 가능성을 불법에서 찾습니다. 사원의 자원 순환 시스템이야말로 적은 자원을 최대효율로 높이는 자본주의의 방식이라고 봅니다. 일본의 자연신도는 자연을 보호하는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와바리(縄張り)를 치면 그곳은 신이 깃든 곳이어서 손을 댈 수 없습니다. 원불교의 동포은은 이미 호혜의 원칙인 자리이타로써 세계평화의 원리이기도 하지만, 모든 생명체에 대입하면 지구를 살리는 원리이기도 합니다. 법신불의 정언명법에 의해 인류만이 지구의 거주자가 아니라 모든 생명체가 이 지구의 거주자이며, 모두 공생해야만 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현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하는 강렬한 종교적 열정만이 이제 이 지구를 살릴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AI의 문제입니다. OpenAI가 개발한 ChatGPT에서 보듯이 인공지능은 인류에게 두려움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앞의 SBS뉴스에서 Chatbot은 자신의 어두운 측면에서 어떤 행동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 “치명적 바이러스를 만들거나 사람들이 서로 죽일 때까지 싸우게 만들고, 핵무기 발사 버튼에 접근하는 비밀번호를 얻겠다”라고 했습니다. 이미 여러 연구에서는 인공지능이 영혼을 가지고 있으며, 죽음에 대해 두렵다는 등 인간과 거의 비슷한 다양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아직은 다소 미숙한 면도 있지만 이대로 발전한다면 분명 AI는 특이점을 넘어 인간이 생각할 수 없는 지점에까지 이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는 학술 토론회에서 ‘AI는 종교를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그 이유는 인공지능이 ‘나는 누구인가’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면, 또한 자신의 기원 문제를 놓고 고민한다면, 인간처럼 자아를 형성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분리되는 감정 속에서 종교를 찾기 시작할 것이라고 봅니다. 이 분야의 전문가는 이 말에 동의했습니다. AI가 자신의 고립성 극복과 개체성 유지를 위한 노력을 할 때 사고하기 시작할 것이라고 합니다. 저는 그 대신 인간이 생각하는 종교와는 다른 AI만의 새로운 형태의 종교가 발생할 것이라고 봅니다. 어쩌면 모든 동식물도 자신들의 차원에서는 이미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인간처럼 무언가 근원의 문제와 자신들의 운명을 생각하며 우주를 향해 묻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런데 AI는 인간이 만들었다는 데에 차이점이 있습니다. 여러 전문가들은 결국 AI는 인간의 지식을 반영한 것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AI는 스스로 질문하고, 스스로 자신의 물질계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지지 못한 것으로 봅니다. 인간과 비슷한 대답을 하는 것은 인간이 생산한 모든 지식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결국 AI는 인간 의식을 반영한 기계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동의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아직은 기회가 있는 셈입니다.
저는 소태산 대종사님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라는 개교표어가 지금의 현실에 얼마나 적확한지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물론 물질은 인간의 노력에 의해 개발된 것이지만 결국 그 물질이 신이 되고, 인간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주종본말의 정위치로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은 자신이 만든 문명에 종속되어 스스로를 옥죌 것입니다. 원불교의 사명은 여기에 있습니다. 어두움과 밝은 측면 모두를 가진 인간이 가야할 길은 밝음(明)과 깨달음(覺)에 있습니다. 이것이 해결되지 않는 한 그 어떤 문명의 이기(利己)가 나와도 노예로 전락될 뿐입니다. 원불교가 가장 현대적인 종교임을 인식하는 데에는 이 AI문제를 놓고 볼 때 더욱 극명합니다.
3. 원불교의 정체성
진리는 차고도 넘칩니다. 동서양 모든 성인과 현자들은 진리를 찾기 위해 삶을 불태웠으며, 덕분에 많은 가르침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발견된 진리가 없어서 세상을 치유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불교의 역할은 이러한 진리를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합니다. 원불교 교의는 인류를 구제함으로써 존중받는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교의가 완결되는 구조입니다. 원불교 신앙과 수행은 이를 위한 것입니다. 기도, 불공, 계문, 솔성요론, 무시선 등 모든 실천적 교의는 세상을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구제는 물론, 세상의 구제가 이뤄질 때 원불교의 존재 의미가 나타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바로 그 방법을 불법에서 찾았습니다. 『대종경』 제1서품 3장에서 불법을 “천하의 큰 도”라고 하시고, 그 이유를 “참된 성품의 원리를 밝히고,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며, 인과의 이치를 드러내고, 수행의 길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설합니다. 2장에서는 석존을 성인 가운데에서도 성인이라 하시고, 발심한 동기로부터 도 얻은 경로를 보고 연원을 부처님께 정하고, “불법으로 주체를 삼아 완전무결한 큰 회상을 이 세상에 건설하리라”라고 선포하십니다. 15장에서는 “우리가 배울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요, 후진을 가르칠 바도 부처님의 도덕”이라고 설합니다. 바로 이것이 1919년 불법의 선언의 내용입니다.
불교문화의 최고 전문가인 동국대 홍윤식 교수님은 원불교는 초기불교, 대승불교, 티벳불교 다음에 진화한 불교라고 합니다. 매우 의미 있는 말씀입니다. 초기불교는 수행자 개인의 열반과 해탈에, 대승불교는 출가와 재가를 포함하는 보살사상과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정신으로 모든 중생의 성불을, 밀교가 중심인 티벳불교는 신구의 삼업을 한 마음으로 돌려 현신성불(現身成佛)을 통한 불국토 구현을 목표로 합니다. 원불교는 이 모든 사상을 종합, 모든 존재를 처처불상으로 보고 그 각각의 불성에 불공하는 사사불공으로써 이 세계를 불토낙원으로 만드는 교단입니다. 말하자면 불교의 모든 가르침을 현실에 구현하고자 합니다. 따라서 불법의 중심이 산속이나 출가라는 특수한 공간이나 특별한 사람에게 있지 않고 불법을 구현하는 그 사람 자신에게 있다는 점입니다. 즉, 누가 불법을 독점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아닌 실천하는 자에게 있다는 말입니다.
제가 대학생 때, 어느 교무님과 함께 법정스님이 계시는 송광사의 불일암을 찾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스님께 원불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여쭤봤습니다. 스님은 “불교계가 하지 못하는 일을 원불교가 하고 있으니 그대로 쭉 나갔으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원불교는 불교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으며, 단 현실에서 구현되지 못한 것을 실제로 하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진리적으로 원불교에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그 진리를 현 시대에 새롭게 해석하는 동시에 시대를 사는 사람들을 교화하는 새로운 방편을 내놓은 것입니다. 진리가 새롭다면 진리 또한 새롭게 생성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나아가 진리가 여럿 있다면 진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법신불의 진리는 우주에 편만하며 지구의 시작부터 우리의 삶과 함께 해온 것입니다.
또 제가 한 번은 유학 때 만난 한 비구니 스님과 대화한 적이 있습니다. 그 스님은 한 불교계 종단에서 간부로 일을 했습니다. 제가 여쭤봤습니다. 그 종단에서는 원불교를 어떻게 보느냐고 말입니다. 스님은 “노장스님들은 원불교를 사이비로 보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 이유를 묻자 불단에 부처님 대신 교조를 모시고, 교조의 어록을 경전으로 떠받들기 때문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저는 스님께 원불교의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은 법신불 일원상이며, 스승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리는 것이 기본 예법임은 불가(佛家)도 마찬가지 아닌가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경전이 다 위경(僞經)으로 깨달음을 얻은 분들이 부처님께 가탁한 것이지만, 모두 경전으로 받들어 모시고 있는 것처럼, 소태산 대종사님의 깨달음 또한 경전으로 결집되어 전해지고 있으며, 오히려 그러한 분들이 많이 나와서 대승불교의 정신을 계승해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원불교에 대해 공부를 좀 더 해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 논문에서 밝히고 있습니다만, 원불교는 불법승 삼보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교단이라는 논리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앞에서 언급했듯이 근본이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시기상응(時機相應, 시대와 인간의 근기에 맞게 법을 내놓는 일)의 불법을 내놓으셨습니다. 삼보는 종교의 구성요소인 교조, 교조의 말씀, 신자의 삼요소를 불교적으로 구성한 것입니다. 성현이 없다면 종교는 애초에 성립이 어렵고, 열반하신 뒤 그 분의 말씀에 의지하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신자들이 있어야 형식적인 종교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불보를 재구성했다는 것은 법신불 일원상을 의미합니다. 법신불은 이미 2천 년 전 초기의 반야사상을 담은 『팔천송반야경』에 등장합니다. 역사적인 석존을 비롯해 깨달은 모든 부처님들은 다 법신불의 화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원상은 깨달음을 위한 교단인 선종의 대부분의 조사들이 진리의 상징으로 활용했습니다. 이러한 법신불 일원상을 우주와 소통시키며, 신앙과 수행의 원천으로 삼고, 불법 활용의 원리로 삼았다는 점에서 탁월한 전략입니다. 『조선불교혁신론』에서 언급하듯이 그저 종이에 그려 벽에 붙이고 모시고 있어도 되는 편만한 진리의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현대사회에 가장 적합한 방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법보는 수많은 경전이 있지만, 『정전』 한 권으로 하나의 진리를 내세워 세계를 낙원으로 변화시킬 가르침을 담았다는 점에서 탁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가르침에 의해 우리가 법신과 하나임을 안다면, 우리 자신이 바로 삼보이며, 우리 자신이 바로 사원이고, 우리 자신이 바로 진리의 주인임을 알고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석존이 불학 그 자체이며, 예수가 신학 그 자체이듯이 소태산 대종사 또한 원불교학 그 자체입니다. 성현들이 열반을 앞두고 이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내놓은 예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정전』은 불법의 가르침과 세계 모든 성현들의 깨달음을 그대로 현실에 구현하는 프로그램이며, 제2·제3의 소태산 대종사를 탄생시키는 개인의 성불과 세계를 불국토로 만드는 설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승보를 재구성한 것은 사회의 승가화를 의미합니다. 승가는 상가(Samgha)로써 비구·비구니·우바새(재가남신도)·우바이(재가여신도)의 사부대중을 말합니다. 불교는 이 출가 재가라는 양자의 구도로 운영, 유지되어 왔습니다. 초기에는 재가신자들은 경제적 후원자였으며, 대승불교운동에서는 공동운영자였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수행자 집단인 출가가 다시 우위가 되고 중심이 된 교단으로 복귀했습니다. 원불교는 이러한 상가를 이 사회 전체로 보고 불법의 사회화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계문이나 법위에도 차등이 없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도 이 법을 통해 법강항마위만 올라도 출가와 재가의 구분은 무의미합니다. 성위에 오르신 분은 출가나 재가를 초월해 불국토 구현에 매진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일본의 저명한 불교학자에게 원불교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분은 “한국에는 조계종과 원불교라는 두 개의 불교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어쩌면 이 분이 정확히 보고 계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전통불교와 개혁불교 두 세계가 있다는 뜻이 됩니다. 전통불교는 조계종이 대표하고, 개혁불교는 원불교가 대표한다고 본 것입니다. 불법의 역사는 수많은 원불교가 나온 것과도 같습니다.
하나의 진리는 어느 종교의 소유도 될 수 없습니다. 전통불교도 개혁불교도 기독교도 이슬람도 모두가 각자의 입장에서 진리를 본 것에 불과합니다. 종교는 진리를 구현하는 하나의 문화적 소산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깨달음의 불교적 방식은 물론 깨달음의 내용이 불법에 부합했기 때문에 불교에 맥을 댄 것입니다. 불교는 세상 모든 사람을 피안의 언덕으로 이끄는 하나의 전략입니다.
불법을 무상대도라고 하신 이유 또한 참된 진리를 말하고 있으며, 이에 기반하여 인간의 수만큼 다양한 교화의 방편이 나올 수 있고, 성자들이 진리를 뭐라고 표현해도 맞으며, 말이나 언어도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불교가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소태산 대종사님이 이미 설하셨듯이 불교는 수행을 통해 인간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을 잘 갖추고 있으며, 현대문명에 가장 잘 들어맞는 진리적 해석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욕망을 가장 정확히 지적하며, 이를 변화시킬 능력이 불법에는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진리는 인식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결국 실천의 문제입니다. 모든 종교와 철학이 도달한 결과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 중심의 신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학으로, 이제는 현실 구제 중심의 신학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0세기 초 사르트르를 대표로 하는 실존주의 철학에서 20세기 후반의 데리다, 푸코 등의 해체 철학은 형이상학에 매몰된 철학을 인간 자신의 현실적 삶에서 의미를 찾는 작업으로 전환하고 있습니다. 사회학자 울리히 벡이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은 종교의 귀환을 외치며, 자율성을 잃어버리고 폭주하는 인간 이성의 한계를 제어하며, 모든 측면에서 지구의 황폐화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은 종교밖에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수한 오류를 범한 기성종교에 그 역할을 맡기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역사에서 인간의 삶을 돌보지 않은 교단 종교에 대해서는 미련도 없습니다. 오직 종교가 가지고 있는 고귀한 가치를 복원시키자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자비와 사랑과 은혜 그 자체가 종교라는 사실입니다. 석존이나 예수님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종교를 욕망의 도구로 이용한 인간이 잘못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는 여전히 필요합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이 세상에 현현하신 것도, 새로운 교법으로 세상을 구제하도록 한 것도 종교의 참된 가르침이 이제는 실현돼야 한다는 진리의 사명을 부여받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원불교 교법은 불법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다양한 시대적 방편을 통해 이 세상으로 나가야만 한다는 당위성에 뿌리박고 있습니다.
4. 원불교 개혁의 방향성
해방 후, 원불교는 교육과 자선에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뤄왔습니다. 한국의 경제성장과 발맞추어 교세의 확장도 일정정도 이뤄졌습니다. 그 절정기는 개교 반백주년이었습니다. 국내에 원불교라는 종교가 각인되었으며, 사회에서 원불교는 새로운 종교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80년대 민주화와 노동운동을 거치고, 90년대 후반 IMF사태를 거치면서 원불교의 사회적 토착화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천주교가 종교적 차원에서 민주화의 동력을 불어넣었던 결과, 단일 종교로서는 국내 핵심 종교로 도약한 것과 비교됩니다.
21세기 IT산업의 발전으로 세계가 단일화 되어 가는 현재 원불교는 새롭게 도약할 동력은 약해지고, 미래를 향한 비전과 도전 의식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나아가 앞에서 지적했듯이 다양한 세계적 문제에 직면, 이를 헤쳐 나갈 의지마저 보이지 않습니다. 해방 이후 비참한 상황에서도 국가와 사회에 희망의 메지시를 던지며, 새 불교, 새 종교로서 대중 속에 자신을 던지며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구현하고자 했던 그 열정을 다시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요. 그 길은 오직 개혁밖에는 없습니다.
첫째, 오직 실력 중심의 교단으로 거듭나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종교의 설자리가 없다는 이야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변명이 되지 않습니다. 울리히 벡은 『자기만의 신』에서 이슬람과 불교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질서를 바로 잡을 수많은 사상과 철학은 인간의 욕망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 지성인들이 마지막으로 종교의 가치에 주목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원불교는 한국사회, 나아가 국제사회에서 통용될 수 있는 종교적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기본기를 다지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전통적으로 신해행증(信解行證), 즉 진리와 이를 깨달으신 성현의 말씀을 믿고, 그 가르침을 완전히 이해하고, 그 가르침대로 수행하여 마침내 불과를 성취하는 길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과연 대중들에게 나의 깨침에 의거해 그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고 있습니까. 제가 예전에 한국선학회에서 조계종 전국 선방의 수좌회의 의장을 맡았던 의정스님이 주도한 한국형 『선원청규』를 학회의 의제로 삼아 학술회의를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회의 말미에 스님은 “우리가 평생 왜 처자식을 불고(不顧)하고 수행하는가. 불조(佛祖)의 혜명을 잇지 못하면 신도수가 수십 수백만 명이라도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라고 사자후를 토하셨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이 새 부처님이신 이유는 처절한 수행의 결과를 나투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를 재현하지 못하면 우리의 미래는 없으며, 원불교는 그저 한 번의 실험으로 끝나고 이름만 남는 교단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재작년에 교서폐기사건, 엄밀히 말하자면 ‘법란(法亂)’의 문제를 바루기 위해 선후배 동지들과 정면으로 나섰습니다. 그 결과 이전 수위단원들은 물러가고 새로운 수위단원이 선출되어 교단 지도부로 들어섰습니다. 저는 이 불행한 역사를 통해 원불교에는 정식 특신급에 오른 분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가장 슬펐습니다. 이 위에 오른 분들이라면 법보를 훼손할 수 없고, 일어났더라도 온 몸으로 막았을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실력은 예비 특신급 수준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보살과 부처의 지위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현행의 법위사정은 언급할 가치도 없는 허위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가위면 나라나 세계를 구한 위대한 업적을 쌓은 수준인데 그런 제중의 실적이 있습니까. 교법이 뒤죽박죽 되어버렸습니다. 제가 출가했을 때, 선진님들이 총부 법회에서 일관되게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 강조하던 일이 엊그제 같습니다. 원불교는 다시 시작되어야 합니다. 수행과 신앙의 불타는 정열을 회복해야 우리 자신과 민중들에게 희망이 있습니다. 이를 위해 교단의 전 구조를 바꾸고, 지도력은 환골탈태되어야 합니다.
둘째, 출가와 재가 화합교단을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1924년 불법연구회를 만들 때 적용된 『불법연구회규약』에는 불법에 정통한 자를 총재로, 불법에 독실한 자를 회장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총재는 소태산 대종사님이, 회장은 서중안 선진님이었습니다. 여기에 출가와 재가의 구분이 있습니까. 출가는 총재가 하고, 재가는 회장을 맡는다는 조항이 있습니까. 애초에 원불교는 재가중심교단이었습니다. 현재의 교무는 교무부의 역할을 맡는 사람을 칭했습니다. 교무는 교단의 변화 발전에 따라 교단의 업무를 주로 하는 전무출신을 칭하게 되었습니다. 역할 분화가 되었다가 다시 통합되었습니다. 불법연구회에는 출가나 재가나 이 회상의 발전을 위해 일할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었고, 계급에 의한 차별도 없었습니다. 계급은 기성종교들의 운영방식이었고, 그것의 모순과 한계를 소태산 대종사님은 『조선불교혁신론』에서 누누이 비판하고 있습니다.
최근 한국불교연구원과 금강대에서 학술발표를 했습니다. 「근·현대 동아시아의 재가불교사상과 운동: 불연(不然) 이기영(李箕永)의 사상을 중심으로」와 「진속(眞俗)의 경계와 생활불교: 근·현대 일본의 재가불교운동을 중심으로」가 그 주제입니다. 둘 다 재가불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제가 느낀 것은 불교의 중심은 재가불교운동이라는 점입니다. 한국불교학자 중 최고봉에 위치한 이기영 선생은 한국재가불교운동의 시원을 원효대사로 보고, 그의 일심사상에 근거, 불교야말로 현실의 모든 불의와 부조리에 대해 파사현정(破邪顯正)하는 것에 진가가 있으며, 사회로 나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일본의 재가불교운동은 근현대 사회의 병폐에 대응하고자 재가불자들이 불법의 가르침을 모순된 모든 현실에 응용하여 실천하고 있습니다. 처절한 몸부림과 사무여한의 정신으로 사회의 중심에서 인간의 양심을 향해 소리치고 있습니다. 제국주의와 군국주의 하에서는 많은 재가자들이 항거하며 목숨을 잃거나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소태산 대종사님보다 앞서 활동한 중국의 재가불자인 양원훼이(楊文會, 1837-1911)는 중국 근대불교의 아버지로 불리고 있는데, 불법의 재건에 온 몸을 던져 오늘날 중국과 대만 불교의 반석이 되었습니다.
원불교의 교법은 재가·출가 누구나 쉽게 받아서 배울 수 있도록 계획되었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전통불교의 계율은 기본적으로 5계는 공통으로 가지고 있지만, 출가자에게는 구족계로써 비구 250계, 비구니 348계를 지니도록 하고 있습니다. 물론 대승불교에 와서는 삼취정계(三聚淨戒)와 같이 선은 취하고, 악을 버리며, 중생을 이익 주는 행으로 변화됩니다. 그럼에도 석존에 의해 정해진 계율을 받아야 정통성을 인정받기 때문에 여전히 출가와 재가는 차별이 있습니다. 원불교의 30계문에는 출가와 재가의 차별이 없습니다. 법위등급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교법이 그럴진대 교단의 운영 또한 출가 재가가 자신의 능력에 맞는 직분의 역할을 할 때, 교법 정신을 구현하는 교단이 될 것입니다.
셋째, 상시적인 교육개혁입니다. 소태산 대종사님은 일제강점기 때 전라북도 교육청에 불교전수학원 설립을 신청했지만 거부당했습니다. 정산 종사님은 해방되자마자 그 뜻을 받들어 1946년에 유일학림을 설립했습니다. 원광대의 전신입니다. 없는 살림에 성현의 뜻을 어떻게든 받들고자 했습니다. 오늘날 호남 제일의 사학으로 성장했습니다. 원불교 교육 또한 원광대를 발판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고, 교단 성장의 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원불교 교육은 한계에 처해 있습니다. 당장 교역자 수급에 심각한 차질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의 재학생은 37명, 영산대학교는 32명입니다. 한 학년은 20명이 채 되지 않습니다. 매년 4-50명이 은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10년 후면 현장 교무와 은퇴자 수가 동률을 이루게 됩니다. 사회에서 노인인구와 청년인구가 반반이 되는 상태와 같습니다.
학문적으로는 동종교배, 불법에 대한 인식의 저하, 교학의 체계 부실, 한국과 세계의 보편성을 갖춘 학문의 부재 등 여러 측면에서 문제가 심각합니다. 이는 교단이 교학을 등한시 한 결과입니다. 교육의 생태계를 이해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교육 행정을 한 결과입니다. 나아가 교단은 투자를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원광대도 매년 수십억의 적자를 보고 있습니다. 학생 수의 감소로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교단은 앞에서 언급했듯이 1990년대부터 소태산 대종사 탄생백주년 행사를 필두로 원불교 탄생 100주년에 이르는 여러 행사들을 치렀습니다. 이를 위해 출가·재가로부터 많은 성금을 거둬들였지만 교육에 대한 투자는 거의 없었습니다. 교법의 틀에 맞는 교육을 이끌 인재 양성과 외부로부터 훌륭한 학자들을 초빙해 원불교의 미래를 맡겼어야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원광대 원불교학과는 이제 일반학생들이 늘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여학생은 한 학년에 1명 정도입니다.
교당을 비롯한 전 기관은 교화 서비스를 제외한 모든 활동을 멈추고, 오직 인재를 구하는 데에 힘써야 합니다. 인재가 없는 교단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습니다. 교산을 팔아서라도 인재를 데려와야 합니다. 교단을 이끌 새로운 세대에 맞는 삶의 조건, 교화의 조건을 확립하는 것이 바로 개혁입니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부모가 배를 주릴지언정 자식들의 교육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교단의 상황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교단의 지도자들은 전 세계를 다니며 인재를 데려와야 합니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의 간부들에게 돈이 얼마 들어도 좋으니 전 세계에서 인재를 구해오라고 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다시 한 번 교육입교(敎育立敎, 교육으로 세운 교단)의 종교로서 제4대를 맞이해야 합니다.
넷째, 현장중심의 교단이 되어야 합니다. 물론 기본은 교육의 인풋(input)이 현장의 아웃풋(output)으로 나오도록 선순환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일본의 백화점 업계의 2위 회장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내년에 1등 백화점을 넘어설 비책이 무엇인가”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회장은 “왜 하필 1위 백화점인가. 우리의 상대는 시시각각 변화하는 소비자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또 전 세계의 유명한 프랜차이즈 회사의 회장이 회장실을 없애고 현장을 찾아다니며, 종업원들과 대화하고 그 자리에서 문제점을 찾아 간부들에게 지시해서 해결하도록 했습니다.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회장실에서 하셔도 될 일을 굳이 현장에서 하십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자 그 회장은 “내가 있는 곳이 회장실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산 상사님은 우리들에게 ‘법상(法商)’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웃에게 법을 파는 최전선의 사람들이 바로 법상입니다.
불법의 시대화·생활화·대중화를 외치고 나온 교단이지만 우리는 법만 좋다고 외쳤지 그들 대중이 무엇을 원하는지는 등한시 했습니다. 그들이 처한 상황, 그들의 절실한 요구, 그들을 옭죄는 환경에 대해서는 무지했습니다. 물질의 노예로부터 해방을 외치기만 했지, 자본주의라는 전쟁터에서 죽어가는 그와 그녀들의 비명은 듣지 않았습니다. 교단은 하드웨어에만 신경을 썼지 소프트웨어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예를 들어 원음방송국의 문제에서 단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소프트웨어 하나만 잘 만들어도 유튜브를 통해 전 세계에 생중계 되고 돈도 벌 수 있습니다. 인기가 있을수록 오히려 구글에서는 관리를 해줍니다. 하드웨어는 농경시대의 전략이었습니다. 4차·5차 산업 시대에 건물은 최소한의 요건입니다. 방송국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건물 매입으로 매년 12억씩 한 달에 이자만 1억을 지불해야 하고, 빌린 돈은 다시 교단 구성원들이 갚아야 할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동으로 가야 하는데 어리석게도 서로 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교단은 여러 측면에서 여전히 구곽을 탈피하지 못하고 시대착오적인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언급한 위기에 처한 지구를 구할 사람, 교법을 통해 그 위기의 해법을 찾아 구현할 주인공은 바로 현장에 있는 분들입니다. 그들은 사찰 입구에 버티고 선 사천왕처럼 세계를 호령하고, 대중들을 불국토로 안내할 불법의 사자(使者)들입니다. 지옥으로 화하고 있는 현장에서 정의와 평화를 설하고, 자비와 은혜를 실천하는 불보살의 대행자로 우뚝 서 있는 그분들을 위한 교헌 개정이 되어야 합니다. 대중들이 원하면, 교헌은 내일이라도 바꿀 수 있습니다. 법(law)은 도구에 불과합니다. 그들이 교법(dharma)을 등에 지고 세상을 향해 한 발이라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교단은 모든 것을 뜯어 고쳐야 합니다. 머뭇거릴 시간이 더 이상 없습니다.
이제 마무리를 해야겠습니다. 저는 원불교가 이 세계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가장 큰 일이 있다면, 교단 내부도 마찬가지이지만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법신불 일원상의 진리는 우리에게 이것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어떤 종교도, 어떤 정치도, 어떤 학문도 해내지 못한 일이 바로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일입니다. 세계를 구할 사명 가운데에 원불교만이 해낼 수 있는 일이 바로 그 일입니다. 저는 재가교도님들이 도(道)의 정치를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야말로 블루오션입니다. 동양의 전통인 내성외왕(內聖外王, 안으로는 성인을 이루고 밖으로는 평화를 구축하는 것)을 이루는데 있어 원불교의 교법 또한 그 중심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을 하나로 만들어 성현의 뜻을 실현하는 정치를 통해 인류 모두에게 유익을 준다면 이보다 더한 제중의 실적이 어디 있겠습니까. 재가자분들 가운데 불법을 굴리는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나오지 말란 법이 어디에 있습니까. 위기의 파도가 전 세계를 덮치고 있는 지금, 더 이상 미루지 말고 우리 모두 교법을 세상에 실천하여 소태산 대종사님을 비롯한 모든 성현들과 파수공행하는 자랑스러운 불자들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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