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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원일기(混元一氣)
혼원일기는 무엇이라 형용할 수 없는
태초의 한 기운이다.
우주 창조 원리로 일기화삼청(하나의
기운이 세 가지 맑음으로 변화함)하고,
삼청화일기(세가지 맑음이 하나의
기운으로 변화함)하는 우주의 한 기운으로
무극 태극 오황극의 원리 즉 시종이다.
혼(混) 혹은 혼돈(混沌)은 혼잡하다거나 무질서하다는 식의
부정적 의미의 ‘chaos'가 아니라,
모든 것의 근원으로서 그 안에 모든 것을 잠재력으로 포괄하고 있는
’분화되지 않은 무엇(the undifferentiated)‘을 말한다.
이 혼(混)을 모든 것의 시원으로 본다.
통전 적, 통일적 실체로서 모든 가능성을
그 속에 머금고 있는 ’완전한 무엇’이다.
이것은 분화되기 이전,
창조 이전의 개물(個物)들의 근본자리이기 때문에
물론 소리도 형체도 있을 수 없다.
무엇에 의존하지 않고 독립된 자존적(自存的)존재이다.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다’고 했지만
고착되거나 정적인 무엇으로 가만히 있다는 뜻이 아니라
이랬다저랬다 변덕부리지 않고 항 존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또 두루 편만 하다.
‘두루 편만 하다’는 것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여
어디서나 역동적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변화의 근원이지만
그 자체로서는 변하거나 지치거나 없어지지 않는 무엇이다.
모든 것이 여기서 나온다는 뜻에서
이것은 세상의 모든 것, 이름 붙일 수 없는 ‘무엇(無名)’이다.
[출처] 봉우 선생님의 말씀 中 '혼원일기(混元一氣)' 의 궁구 ?작성자 깨어있음
[출처] 混元一氣(혼원일기), 太極(태극)|작성자 구건 |
혼원일기 混元一氣의 변화
상고시대(上古時代)에 우주 역사 이래 처음으로 동방(東方)의 임금이 되신 단군 성조(檀君聖祖)께서 백두산에 내려오셔서 혼원천지(混元天地, 하늘과 땅의 질서가 아직 서있지 않은 혼돈 상태)의 민족의 첫 임금이 되시고 “위로는 하늘을 받들고, 아래로는 땅을 내디디며, 그 가운데 사람이 존재한다.”는 《삼일신고(三一神誥)》의 가르침을 베푸셨으니 이것은 《천부경(天符經)》의 ‘일시무 무종일(一始無 無終一, 하나는 없음에서 비롯했고 없음은 하나에서 그친다)이요, 일이삼 삼이일(一而三 三而一, 하나이며 셋이고 셋이며 하나이다)’의 원리로서 그 본(本)은 태양의 앙명(昻明, 밝음)이라고 하셨다. 혼원시대(混元時代)란 곧 캄캄한 밤중이라는 말이다.
아무 것도 알 수 없고,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때는 인간의 숙면기(熟眠期)와 같다가 자축인시(子丑寅時)가 되어서 태양이 밝으니 상천(上天), 하지(下地), 중인(中人)이라, 무(無)에서 하나가 생기고, 하나가 또 하나가 되고, 또 하나가 되어서 삼재(三才, 천, 지, 인)로 나뉘어지니 이것은 태양의 앙명(昻明)에서 근본이 생긴 것이다.
단군 성조의 이러한 가르치심이 중국에 가서 유교(儒敎)가 되어 “가운데에서 사방으로 흩어져 만물을 이루고, 끝에서 다시 모여 하나의 이치가 이루어진다(中散爲萬象, 末復合爲一理)”라고 유정유일(維精維一, 오로지 하나로 사무침)로 가르치는 법이 되니 역시 《천부경(天符經)》의 ‘일시일종(一始一終)’을 그대로 가르치심이요, 이 가르치심이 남방(南方)으로 나가서 불교(佛敎)가 되니 이 《천부경》의 ‘무종일(無終一)’이라는 것을 그대로 가르치심이요, 허무적멸(虛無寂滅)이 모두 그 무자(無字)를 일컬음이다. 또 그 가르치심이 곤륜산(崑崙山)으로 가서 선교(仙敎)의 명(明)이 되니 이 명(明)은 또한 천부경의 본태양(本太陽)의 앙명(昻明)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일기화삼청(一氣化三淸, 하나의 기운이 세 가지 맑음으로 변화함)하고, 삼청화일기(三淸化一氣, 세 가지 맑음이 하나의 기운으로 변화함)’ 되는 원리이다.
이 가르치심을 가지고 말씀하신 이가 성조 단군(聖祖檀君)이니 단군은 우리 대황조(大皇祖, 큰 할배)요, 우리의 종교상 교조(敎祖)는 아니시다. 우리의 교조(敎祖)로는 일기화삼청(一氣化三淸) 하고 삼청화일기(三淸化一氣)하는 혼원일기(混元一氣, 무엇이라고 형용할 수 없는 태초의 한 기운)를 숭배하고, 이 교를 받드신 대황조(大皇祖)를 대종교(大倧敎)의 교조(敎祖)로 모시나 우리는 대황조를 당시의 사람으로서 하늘의 가르침을 받드신 분이요, 우리 민족 종교의 교조라면 당연히 태극(太極), 무극(無極), 유극(有極)의 원리인 혼원일기라고 본다.
우리의 교리는 《삼일신고》를 주로 하되 우리가 보고 알게 해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의 이 교(敎)는 우리만이 걷는 노정(路程)이 아니요, 우주에서 움직이는 군생만물(群生萬物)들이 모두 걷는 대도(大道)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의 그 가르치심은 과거만도 아니요, 현재만도 아니요, 미래만도 아닌 과거무량수겁(過去無量數劫) 전에서 시작한 것이요, 미래무량수겁(未來無量數劫)에도 그 끝이 없을 대도(大道)라는 것을 거듭 이야기해 둔다.
이 교리는 문자화하지 않는 것이 종리(宗理)이나, 부득이 세상 사람을 상대할 교리가 멀지 않은 장래에 세상에 나올 것이다. 그러니 우리의 민족 종교는 이 가르침으로 정하고 종교의 믿음은 당연히 자유인 것이다.
출처 단 봉우 권태훈옹
자연은 혼원일기(混元一氣)를 타고났고
* 老子 道德經 第四十二章 *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物。
도생일, 일생이, 이생삼, 삼생만물
萬物負陰而抱陽, 沖氣以爲和。
만물부음이포양, 충기이위화
人之所惡, 唯孤, 寡, 不穀, 而王公以爲稱。
인지소악, 유고, 과, 불곡, 이왕공이위칭
故物, 或損之而益, 或益之而損。
고물, 혹손지이익, 혹익지이손
人之所敎, 我亦敎之。
인지소교, 아역교지
强梁者, 不得其死, 吾將以爲敎父。
강량자, 불득기사, 오장이위교부
자연은 혼원일기(混元一氣)를 타고났고
혼원일기는 시간과 공간을 활성화하였으며,
시간과 공간 중에서 에너지가 생겨났고
에너지의 상호 전환이 만물을 생기게 하였다.
만물은 모두 음기를 지니고서 양기를 껴안아서
음양의 상호작용이 조화롭게 됨을 근본으로 한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바는
‘외로움’, ‘부족함’, ‘보잘 것 없음’ 보다 더한 것이 없어서
통치자는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호칭으로 여긴다.
이로 인하여 만물은 아마도 잃음이 있기 때문에 얻음이 있고
혹은 얻음이 있기 때문에 반대로 잃음을 야기하는 것이다.
선인들이 간곡하게 가르치는 바를
우리들도 후세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동량지재(棟梁之材) 육성에 힘쓰는 사람의 정신은 죽지 않으니
우리들은 그들에게 장차 학습의 본보기로 삼는다.
※ 혼원일기(混元一氣)
: 천지(음양)가 분별되기 전의 우주에 가득 찬 혼돈한 기운
[출처] 자연은 혼원일기(混元一氣)를 타고났고작성자 JAMWA
옛날의 ‘하나(混元一氣)’를 얻은 것이 있으니
※ 混元一氣(혼원일기) : 천지(음양)가 분별되기 전의 우주에 가득 찬 혼돈한 기운
하늘은 그 ‘하나’를 얻음으로써 맑음이 되고
땅은 그 ‘하나’를 얻음으로써 편안해 지며,
신은 그 ‘하나’를 얻음으로써 영험을 얻고
계곡은 그 ‘하나’를 얻음으로써 가득 차며,
만물은 그 ‘하나’를 얻음으로써 생명을 얻고
통치자는 그 ‘하나’를 얻음으로써 천하를 세우는 것이다.
그 때문에,
하늘이 맑지 못하다면 반드시 무너져 갈라질 것이고
땅이 편안하지 못하다면 반드시 소란하고 어지러울 것이며,
신이 영험하지 못하다면 반드시 멈춰 달아날 것이고
계곡이 가득차지 못하다면 반드시 메마를 것이며,
만물이 생겨나지 못한다면 반드시 절멸될 것이고
통치자가 고귀하지 못하다면 반드시 전복될 것이다.
고로 귀함은 천함을 근본으로 삼고,
높은 것은 낮은 것을 근기로 삼는다.
그래서 통치자는 스스로 외롭고,
덕이 부족하고, 선하지 못하다 일컫는 것이니,
이것이 천함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그러하지 않다 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최고의 명예는 칭찬할 필요가 없다.
이런 까닭에, 자신을 옥처럼 진귀하게 여기지 말고,
자신을 돌처럼 흔하게 여길 지어라.
[출처] 옛날의 ‘하나(混元一氣)’를 얻은 것이 있으니|작성자 JAMWA
"허(虛), 공(空), 무(無) : 무극(無極), 태극(太極)"
<요약시작>
1) 허(虛)
인간이 5감(五感)을 통하여 인지할 수 있는 ‘존재(存在, being)’가 있으려면 먼저 그 바탕이 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바탕을 "허(虛)"라고 합니다. “(5감으로 인지할 수 있는) 존재가 없다”라는 것은 “허(虛 ; 바탕) 조차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허(虛)조차 없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허(虛)는 아래와 같은 특징이 있습니다.
- 불변(不變) : 허(虛)에 무엇이 존재하더라도 허(虛)는 변하지 않습니다.
- 불생불멸(不生不滅) : 허(虛)는 새로 생기거나 없어지지 않습니다.
- 부증불감(不增不減) : 허(虛) 안에서 무엇이 생기고, 변하고, 없어지더라도 허(虛)는 줄어들거나 늘어나지 않습니다.
- 불구부정(不咎不淨) : 허(虛) 안에서 무엇이 생기고. 변하고. 없어지더라도 더러워지거나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 무시무공(無時無空) : 무한(無限), 절대(絶對), 본래(本來), 불변(不變)인 허(虛)의 차원에는 시간(時間)도 공간(空間)도 없습니다.
2) 공(空)
허(虛) 안에 지극히 미세(微細)하여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존재’들을 공(空)이라고 합니다. 이 공(空)이 모여 커지면 물체[기체, 액체, 고체]가 되고, 흩어져 작아지면 공기(空氣)가 됩니다.
3) 무(無)
허(虛) 안에 있는 공(空)의 일부를 한정하여 “(그것의) 유(有)”라 하고, “(그것의) 유(有)”가 없는 것을 “(그것의) 무(無)”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有)”와 “무(無)”는 반드시 특정한 “무엇”을 전제로 할때만 구체적인 뜻이 있습니다.
4) 기타
- 허(虛)는 공(空) 이하의 차원에 의하여 영향을 받지 않아, “영원히 그대로”라는 의미로 태허(太虛)라고도 합니다.
- 공(空)의 차원에서 생(生)과 멸(滅)이 있는지 여부는 사람의 5감으로 알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허(虛)와 공(空)의 관계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 공(空)이 절대적 차원이라면 그 아래 차원인 체(體)는 상대적 차원입니다.
<요약끝>
이상의 내용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허(虛), 공(空), 무(無)의 개념도 : 실제 허(虛), 공(空)은 인간의 5감(五感)을 통해 인지할 수 없는 개념입니다. 따라서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허(虛), 공(空), 무(無)의 차이점을 이해 해보기 위하여 그림으로 그려본 것입니다. (1) 찻잔만 있는 경우 : 무엇이던지 담을 수 있는 빈그릇과 같은 "허(虛)" 상태. (2) 찻잔안에 물분자 1개가 있는 경우 : 즉 허(虛) 안에 극미(極微)한 존재가 있는 "공(空)"의 상태. (3) 찻잔안에 물분자 여러 개와 포도당분자 1개가 있는 경우 : 즉 물분자가 "유(有)"하다, 또는 포도당분자가 "유(有)"하다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유(有)의 반대가 무(無). (4) 찻잔속에 불분자가 많이 모여 인간이 5감(五感)으로 인지할 수 있는 경우. 또한 동의보감(東醫寶鑑) 신형문(身形門)에서 "하늘의 형(形)은 건괘(乾卦)에서 나오는데, 여기에는 태역(太易), 태초(太初), 태시(太始), 태소(太素)가 있다. 태역(太易)은 기(氣)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것이며, 태초(太初)는 기(氣)의 시작이며, 태시(太始)는 형(形)의 시작이며, 태소(太素)는 질(質)의 시작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을 위 그림에 비유하면 태역(太易)은 (1)의 상태, 태초(太初)는 (2)의 상태, 태시(太始)는 (4)의 상태에 해당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6. 무극(無極) / 태극(太劇) 과 허(虛) / 공(空)
“나 아닌 내”라는 블로그 설명글을 기준으로 한다면 허(虛)는 무극(無極)의 개념에, 공(空)은 태극(太極)의 개념에 해당됩니다. 무극(無極)과 태극(太極)관계 설정은 조선시대 선인들의 논쟁거리였으며, 성리학에서는 "무극(無極) = 태극(太極)"의 입장을 고수한 반면 도교(道敎)에서는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을 낳는다"는 입장을 주장하였습니다.
아래는 한국고전 종합DB의 퇴계선생문집 제39권 "이공호(李公浩)의 문목에 답하다"에서 성리학의 관점으로 태극과 무극이 같음을 설명하는 글입니다.[원문]
<퇴계선생문집 시작>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에 대해, 의심하건대 극(極) 자의 뜻을 비록 지(至) 자로 풀었지만 그런 명칭을 갖게 된 원인을 따져 보면 실은 형상(形狀)과 방소(方所)가 있다는 점을 취하여 말한 것으로, 지극히 높은 데 있어서 사방(四方)의 표준이 되어 여기가 끝이어서 더 이상 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태극(太極)의 경우 실로 모든 이치의 근본이며 만 가지 변화의 근원이 되어 한 데 모여 귀결된다는 뜻이 극(極)과 유사한 점이 있어 극이라 이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태극(太極)이라고 이름한 것이 비록 형상(形狀)과 방소(方所)로 인한 것이지만 유(有)로 무(無)를 비유하고 실(實)로 허(虛)를 비유한 것이지 애초에 찾을 수 있는 형상(形狀)과 방소(方所)가 있어서는 아닙니다. 다만 다른 책에 옥량(屋樑)을 옥극(屋極)이라 하거나 북신(北辰)을 북극(北極)이라 한 것이 있는데 이것은 모두 형상(形狀)이 있는 극이기 때문에 주자(周子)는 사람들이 이러한 극(極)의 예(例)로써 태극(太極)을 이해하려 들면 혹시 그것이 어떤 물질인 양 여기어 형상(形狀)에 구애되어 성인(聖人)이 비유를 취한 본뜻을 잃게 될까 염려하여 다시 무극(無極)이란 두 자(字)를 더한 것입니다.
이는 대개 저것을 빌어서 이것을 비유하여, 이 이(理)가 형상(形狀)도 없고 방소(方所)도 없지만 거기에 지극한 유(有)가 있고 지극한 실(實)이 있다는 것을 밝힌 것입니다. 저의 뜻으로는 이와 같이 보았기 때문에 '극(極)이 없되'로 하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만약 '무(無)한 극(極)이로되'로 하여 무(無)라는 한 글자를 형상(形狀)과 방소(方所)가 없다는 뜻을 지닌 것으로 보고 두 개의 극(極) 자는 모두 지극한 이(理)로 본다면 '무극(無極)'이란 두 글자로도 충분하여 다시 이른바 '태극'이란 글자는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퇴계선생문집 끝>
성리학과 도교의 해석차이가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이지만, 도교에서는 무극(無極)에서 태극(太極)이 나오고 태극에서,,, (중략) 사람이 만들어지므로, 결국 사람이 돌아갈 곳은 무극(無極) 즉, 허(虛 ; 혹은 절대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교에서는 허(虛 ; 무극)와 공(空 ; 태극)을 같은 것으로 취급함으로써, "인간 개개는 그 내면에 절대자를 갖고 있다"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7. 현대물리학 : 소멸(消滅, annihilation)과 생성(生成, production)
입자(粒子, particle)는 물질의 원자핵을 이루는 질량(質量, mass)을 갖는 아주 작은 알맹이를 말하는데 이것이 에너지의 형태로 바뀔 수 있고, 그 반대도 가능합니다. 입자물리학에서는 "질량(mass)을 갖는 입자가 에너지의 형태로 변환되는 것을 쌍소멸(雙消滅, pair annihilation)이라 하고, 그 반대를 쌍생성(雙生成, pair production)"이라고 합니다. 여기에서의 소멸과 생성을 주관하는 것은 무엇이며, 이때 "소멸"과 "생성"이란 동양학의 "허(虛)", "공(空)", "무(無)" 개념 중 어느 것에 해당될까요?
인용하고 참고한 도서와 사이트
1. 《중1이 알아야 할 수학의 절대지식》, 나숙자, 북스토리
2. 《음양이 뭐지》전창선, 어윤형, 세기
3. 《대한한사전(大漢韓辭典》 삼영출판사
4. 나 아닌 내 블로그
- 허(虛), 공(空), 무(無)라는 말의 뜻을 구별해 본다.[원문]
- 허(虛) -라는 글자로 상징하는- 뜻.[원문]
출처사바하
첫댓글 고맙습니다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