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양미술과 그림나눔>
크게 교양으로서의 미술, 생활로서의 미술, 예술로서의 미술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이 가운데 교양미술은 품격 있는 삶을 도모하고자하는 누구나의 미술입니다. 세계를 이해하고 내면을 표현하는 지성인의 문화적 도구로서 정신을 고양하고 깊은 마음을 갖기 위한 미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교양미술이 나의 안쪽을 향해 작동한다면 생활미술은 나의 바깥쪽에 더 관련되어 있습니다. 나를 둘러 싼 타자와 관계 맺는 미술활동에 초점이 두어집니다. 그림은 소유의 대상이기에 앞서 소통의 수단입니다. 생활미술은 생활세계 내에서 일상의 삶을 영위하는 문화 활동의 일환입니다.
예술로서의 미술은 더 높은 수준에서 미적 삶을 풍요롭게 해주거나, 지루하지 않은 미래를 우리에게 제시해줄 수 있는 수준의 미술을 가리킵니다. 정점을 보여주는 빼어난 미술작품 앞에서 우리는 마음의 풍요를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새로움에 도전하는 미술가의 열정적인 시도가 진부한 현실의 탁한 공기를 환기시켜 줍니다.
섣부른 단정일 수도 있겠지만 시대의 한가운데에서 주변을 둘러 볼 때 진부하지 않은 좋은 그림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들만의 리그 안에서 근거 없이 난해한 작품이 난무하고, 기계적으로 숙련된 조악한 작품이 버젓이 판을 차지합니다. 자세히 들춰보면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수요가 없다면 공급도 없을 터, 그렇게 된 데에는 더 많은 사람들의 천박한 안목이 단단히 한 몫을 차지하고 있을 거라고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습니다.
명품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상품이고 아무리 상품 같아 보여도 미학적 전략을 가진 작품은 작품입니다. 교양미술은 명품의 세련미를 지향할 필요가 없습니다. 뿐더러 첨단의 미학적 전략을 구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름의 작품성이 있습니다. 교양미술은 순수한 감성의 비자발적인 기억들과 연결되어 그리움을 부를 수 있는 미학적 덕목을 지향합니다. 새로운 그림에 앞서 좋은 그림을 지향하는 교양미술의 작품성은 숙련도와 상관없이 인문학적 소양으로부터 우선적으로 길어 올릴 수 있습니다.
멀지 않은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압축근대화를 거치면서 시서화 일체의 선비의 상이 옅어졌고, 대신 기술적인 미술전문가의 모습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인문학적 소양은 턱없이 엷어졌습니다. 수준 높은 좋은 작품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나름의 비평을 나누며 풍류를 즐기는 광경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건강한 지성과 함께 하는 교양미술의 담론이 사라졌습니다. 역사의 질곡 속에서 전쟁과 보릿고개를 겪으며 생존을 위협받았던 어려운 시절에 풍류의 놀이가 가당치도 않았겠지만 풍류의 정신만은 질적으로 윤택한 삶을 위해 여전히 유효합니다.
급속히 진행된 산업화를 통해서 양산된 천민자본의 화폐만능주의로 인해 피폐해진 우리의 영혼을 위로해야 할 책무가 미술에 있다면, 그것은 생산적인 풍류의 교양미술일 것입니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반평생을 보낸 일터에서 물러나 이제 안식을 취하려는 은퇴자나, 육아와 가정살림을 맡아 마찬가지로 반평생을 보낸 주부에게 스스로 위무 받아야 할 권리가 마땅히 주어졌다고 한다면 그들에게 적합한 미술은 곧 교양미술일 것입니다.
이기와 무관한 이타는 없습니다. 나를 위한 것이 남을 위할 수도 있다면 아주 자연스러운 이타의 행위가 될 것입니다. 동냥을 구하는 거지에게 적선할 때 나의 정신이 부드럽게 마사지된다면 이기를 통한 이타가 됩니다. 전적으로 나를 위한 교양미술의 결과물이 남에게도 미적 쾌의 위안을 줄 수 있는 수준이라면 응당 나눔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또한 조건 없이 나누어 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교양미술의 생산물이 소통의 도구가 될 수 있다면 생활 속에 풍류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정착될 것입니다.
교양미술이 일차적으로 내안의 타자와 소통하는 것이고, 그림나눔은 내 주변의 타자와 소통하는 것이며, 그것이 더 많은 타자와의 소통으로 이어질 때 수준 높은 예술작품이 될 것입니다. 이에 교양으로서의 미술과 미술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인격을 쌓고 그 결과물을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생산적인 풍류문화를 기획해보고자 합니다.
2014 11.11 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