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목자를 따르게 됩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방법을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따르면 영생을 주십니다.
영생을 주시고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또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10:27-28)
주님의 손뿐만 아니라 만물보다 크신 아버지 손에서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요10:29) 아무도 빼앗을 자가 없다는 말은
악한 자가 손도대지 못 하게 보호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에 기록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요10:34-35)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너희를 신들(데오이: 복수) 곧 하나님들이라 하였노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것은 기노마이(나타나다)란 뜻인데
말씀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화 된 사람들,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들(요1:14) 다시 말하면 말씀이 자신의
세마포가 되고 말씀이 그의 사상과 사고방식이 된 사람들이며
그 말씀을 알고 따르며 말씀의 가르침을 받는 자들은
데오이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엄청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원래 누구이셨는가요?
아무도 이 말씀 없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모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본체이시고, 말씀이신 그리스도는 본체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는 본체의 영광입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통해서 본체에 이르게 됩니다.
그렇다면 말씀 자체가 본체의 형상이요 본체의 영광이었으면 그 말씀에 의해
우리가 말씀화 되면 본체의 형상과 본체의 영광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 됩니다.
말씀화 된 사람은 신들이라 하였거늘 하신 이 말씀이 이루어진다 말입니다.
말씀화 된 사람은 하나님화 된 사람이란 말입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시는가요?
그래서 말씀의 장아찌가 되는 순간에 말씀에 의하여
나로 인해 환경이 다스려지기도 하고 그 말씀 그대로 내가 말하기만 하면
그 말은 내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축복하면 축복이 되고 그대로 두면 아무것도 안 되는 겁니다.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 하시니”(요10:38)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인 것처럼 바로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하나된 것이 데오이(데오스의 복수) 란 말입니다(롬5:1-2절 참조)
이런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목자이신
주님의 꼴을 공급받는 영생을 얻고 절대적인 보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육체로 판단하는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업무수행만을 위한 종으로 삼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이 종으로서 심부름만 시키고
심부름한 내용을 따라 거기에 상응하는 상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종으로서만 영원히 부려먹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분과 같이 우리를 만들려고 하는
하나님의 열심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땅끝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함께 주셨다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의 종으로서 주의 심부름꾼으로서 사명감은 투철한데
하나님이 우리를 어디까지 불렀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온 세상위하여 이 복음 전하리 하는 데는 굉장히 열심인데,
빛나고 높은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주 얼굴 영광 뵈올 때 내 기쁨 넘치리
하고 주님의 보좌를 향해 추구하는 열심은 너무 부족한 것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제나 주님이 맡기시면 나는 그 일을 해야 될 텐데
하는 조바심과 긴장은 가득한데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체화 시키고
말씀을 자신의 사고방식화 시켜 내가 신의 성품(벧후1:4)에 참여하는
그 열심은 너무 없는 것 같은 것이 지금의 기독교 현실입니다.
수평적인 열심은 특심인데 수직적인 열심은 너무 없는 것 같은 겁니다.
수직과 수평의 열심이 균형과 조화가 이루어져야 됩니다.
언제나 말씀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하나님의 절대적인 소원을
이루면서 업무수행의 하나님의 상대적인 소원을 이루어가는 복이
우리에게 있어야만 그분의 길, 그분의 방법, 그분의 생명,
그분의 영광, 허락하신 모든 속성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들을 우리 것으로 만들어 자기화 시켜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말씀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화 시키고,
증험을 하게 되면 틀림없이 다른 사람에게도 진리를 통해서 실상화 되어,
사람을 살려내어 그 사람을 하나님과 중매를 시키려고 열심을 내며,
어둠에 있는 자를 빛 가운데 건져내려 열심을 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진정한 사역자가 되는 겁니다. 참 영광스러운 사명입니다.
저는 언제나 말씀을 전하면서 마음에 미안함을 가집니다. 이렇게 단단한
식물을 나누어 드리면 은혜에 취한 분들에게 얼마나 큰 부담이 되겠는가는 겁니다.
어쩌면 큰 문제의식이 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을 괴롭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렇지만 성경적인 구원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기에 설령 많은
분들이 저의 괴롭힘을 당한다 할지라도 도시에 하나 성읍에 하나라도 말씀의
사람이 일어나서 한 사람이 천을 두 사람이 만을 감당하는 복된 길로 걸어보십시다.
첫댓글 제겐 좀 아득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신기하지요?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을때 세례요한이 복중에서 뛰놀았던 것처럼, 목사님 말씀만 접하면 마음이 뜨거움을 느껴집니다.
따라서 "일단 묻고 더불로 가" 입니다. (영화 타짜의 김응수 배우의 명대사중에 하나)
할렐루야! 아멘!
좋은 신앙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