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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로마 인문학 산책
이 책의 광고가 마음에 든다. “7일에 완성하는 서양 고전의 모든 것”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서양의 역사철학신화언어예술문학건축과학 등을 한 권에, 그것도 7일 만에 마스터할 수 있다고 한 것이 믿기지는 않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겠다 싶어서다. 김현, 이원익, 천병희 등 서양철학과 그리스 로마 신화를 해석한 책을 낸 우리나라 교수들도 많지만, 이 책은 ‘캐롤라인 타가트’라는 영국 여류작가가 냈다. 어쩌면 그것에 다가가는 느낌을 좀 더 가깝게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책은 2020년 11월 나왔고, 서정원 선생이 번역했다.
제목이 「그리스 로마 인문학 산책」이므로, 아마도 그리스 로마신화를 바탕으로 했다는 것을 짐작한다. 이 책은 이들 신화에 대한 기본적 상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라고 생각되어서 어쩌면 그것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라고 생각도 된다. 많은 부분 절제되고 질릴것 같은 감을 느끼게 될 것이라고 미리 짐작되기 때문이다. 첫장 ‘서양 문화의 뿌리 신화이야기’에서부터 처음 듣는 이야기다.
▢ 고대 그리스 신화와 역사
“처음에는 카오스라고 하는 무(無)의 상태에 있었다. 그로부터 가이야, 또는 게(지구)가 태어났다. 그녀는 아들 우라노스를 낳았고, 이후 그녀가 낳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되었다.”이것은 말이 안 된다. 아들이 아이들의 아버지라니…. “만약 여러분이 이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면 나머지 부분을 건너뛰어도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이아의 아들들로부터 이야기, 즉 신화가 시작된다. 테티스를 포함한 거대한 타이탄족 아이들은 호머가 신들의 조상이라고 부른 무리였다. 하지만 우라노스는 또 다른 타이탄의 아들 크로노스에게 타도되고, 크로노스 역시도 자신의 아들 제우스에게 타도된다.
제우스는 형제들인 포세이돈과 하데스와 함께 제비를 뽑기를 했는데, 결국 제우스가 신들의 왕이 되어, 여자 형제 헤라와 결혼한다. 그들은 올림포스산에서 살았고, 그곳은 제우스 형제들의 거주지였다. 주요 신들은 그들 근처에서 살고 싶어 했다. 하늘의 군주 제우스는 자신을 불쾌하게 하는 사람에게 벼락을 던지고, 움직이는 어떤 것이든 성관계를 갖기 위해, 자신을 각양각색으로 바꾸었다. 그는 백조가 되어 트로이의 레다를 유혹하여 헬렌을 낳았고, 황소로 변해서는 카스트로와 플룩스 쌍둥이를 유혹했다. 또 크레타의 왕 미노스를 낳은 유로파도 유혹했으며, 황금비로 변해서는 다나에에게 접근해 페르세우스를 낳았다. 세멜레와 관계해서는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를 낳았다. 헤라와의 사이에서는 헤파이스토스와 아레스 그리고 아테나를 낳았다. 합법적 아이는 이 셋이 전부다.
아테나는 무장한 모습으로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났으며, 포세이돈은 제비뽑기에서 2위를 해 바다의 신이 되었다. 성격이 급한 그는 땅을 흔들 수 있는 삼지창을 휘둘러 누구든 불쾌감을 주면 죽였다. 포세이돈을 기쁘게 하는 것은 배에 탄 이들의 필수적 일이 되었으며, 괴팍한 신을 달래는 것은 현명한 처사라고 여겼다. 제비뽑기를 원하지 않았던 플루토는 히데스라고도 불리는데, 그는 저승의 신이 되었다. 농업의 여신 데메테르의 딸 체르세포네와 사랑에 빠져 그녀와 함께 저승에서 살기 위해, 그녀를 납치했다. 이에 데메테르는 딸을 찾느라 농사를 소홀히 해 땅은 불모지가 되었고, 결국 히데스와 체르세포네는 1년 중 6개월은 저승에서, 나머지 반은 지상에서 보내는 데 합의했다.
신화에는 타인을 막 대하는 나쁜 놈들도 있지만, 아름답지만 심술궂은 여신도 있다. 플루트(히데스)는 사탄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저승에 가면 고통을 받았다. 멘탈로스는 영원한 굶주림과 목마름으로 타들어 가게 되고, 물을 마시러 몸을 굽힐 때마다 물은 멀어지고 머리 위에 있는 과일은 점점 그를 애태우기만 했다. 그렇지만 생명이 유한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천국이라 불리는 엘리시움(낙원)은 저승에도 있었다.
베스비오산 근처에 저승의 입구가 있는데, ‘거기 내려가기는 쉬우나 돌아오는 일은 쉽고, 간단하지가 않았다.’고 한다. 저승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뱃사공 카론에게 뱃삯을 지불해야하고 스틱스강을 가로 질러 노를 젓도록 해야 한다. 장례식을 치른 자만이 카론의 배를 탈 수 있고, 장례식에서는 반드시 망자의 입에 동전 한 닢을 물려 주어야 한다. 저승이 초만원일 때는 문제거리가 있으므로, 천 년이 지난 후에 아래에 있던 영혼들은 다른 육신을 취하여 지상으로 올 수 있었다. 저승에 도달하면 길이 나뉘어져 지옥인 타르타로스와 엘리시움(낙원)으로 연결된다. 지옥은 물론 음산하다. 그곳에는 플레게톤이라는 불의 강이 있고, 복수의 여신 중 한 명인 티시포네는 뱀으로써 거기 온 사람들을 위협하지만, 엘리시움에서는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고 말들이 끄는 전차를 타고 노닥거리며 즐겁게 지낸다. 거기에는 소수 사람들만 죽지 않은 상태에서도 내려갈 수 있었는데, 헤라클레스, 테세우스, 오르페우스가 그들이었다.
슈퍼 영웅 헤라클레스는 힘, 용기, 식욕으로 유명한데, 그는 미케네왕의 딸인 알케네와 제우스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었다. 제우스의 다른 혼외 자식들과 마찬가지로 헤라의 핍박을 받았다. 그녀는 헤라클레스를 죽이기 위해 요람에 수많은 뱀을 보냈지만, 헤라클레스는 전혀 무서워하지 않고 손으로 뱀을 목 졸라 죽였다. 그러나 헤라의 저주로 헬라클레스는 아내와 아들을 살해했고, 자신의 죄를 씻기 위해 델포이의 오라클을 찾아 물었다. 오라클은 티린스로 가서 메우리스테우스 왕을 섬기라는 계시를 준다. 이에 메우리스테우스 왕은 ‘네메아의 사자와 레르나의 히드라를 죽일 것, 아르테미스의 암사슴을 생포해 올 것, 에리만코스산에 사는 맷돼지를 잡아 올 것, 크레타의 황소를 붙잡아 올 것,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타의 벨트를 가져올 것’등의 과업을 주었다. 이에 헤라클레스는 헤르메스와 아테나의 도움으로 저승으로 내려갔다.
헤르메스 등도 헤라가 미워하였지만, ‘내 적의 적은 내 친구’와 상통한 데서 헤라클레스는 무력으로 게르베로스를 제압하고, 에우리스테우스에게 데려가서 보여준 후 다시 저승으로 돌아가 게르베로스를 풀어준다. 그의 과업은 결혼식 장소로 허가받은 웨일즈에 있는 ‘헤라클레스 홀’의 전장에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곳에서 신부 혹은 신부의 미용사를 기다리면서 오랫동안 천장을 구경하게 된다면, 아마 목에 쥐가 날지 모른다.
현재 크레타섬의 수도 이라클리온 고고학 박물관에는 이곳에서 기원전 6000년부터 정착촌이 있었으며, 미노아 문명은 위대한 왕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거나, 미노스라고 불린 여러 왕의 이름을 딴 유적이 남아 있다. 기원전 1500년까지 미노아 문명은 번성했으며, 아마도 화산폭발이나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전설적인 유적들을 보여주는 벽화와 크노소스 궁전의 폐허가 된 미로와 황소타기 축제를 묘사한 그림들이 잘 보존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곳에 미로가 있었다는 것까지 상상할 수 있게 한다. 크로노스는 포세이돈이 미노스 왕에게 재물로 바치라고 준 황소를 왕이 소의 살육을 거부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화가 난 포세이돈은 황소와 미노스 왕의 아내 파시파에가 사랑에 빠지게 했고, 그녀는 반인반소의 아들 미노타우로스를 낳았다. 왕은 미노타우로스와 아내에게 책임을 떠넘기며, 기뻐하지 않았고, 왕은 장인 다이탈로스에게 아내가 나은 미노타우로스가 살되 빠져나올 수 없는 미로를 만들도록 했다. 그리고 매년 아테네 청년 7명과 처녀 7명을 그에게 주었다. 이에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는 희생을 막겠다고 결심하고는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기 위해 미노스 왕의 딸인 아드리아드네와 사랑에 빠져, 미로를 빠져나갈 수 있는 실로 만든 공을 받았다. 괴물은 사라졌고, 희생의식은 끝났다. 영웅과 여주인공의 만남은 잘 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이야기는 끝이 아니었다. 테세우스는 아리아드네에게 질려서 낙소스섬에다 그녀를 버렸다. 후에 디오니소스가 그녀를 아내로 맞았고, 그녀는 포도주 향기에 취해서 행복하게 살았는지 모른다. 아드아드네를 버린 테세우스는 그녀의 언니 페드라와 관계를 맺고, 페드라는 의붓아들 히폴리토스에게 빠졌지만, 거절당했다. 이렇게 음모와 비난과 저주가 뒤따라, 페드라와 히폴리토스는 죽고, 후세인들은 테세우스의 정절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은 고대 역사의 전환점이었고, 신화에서 역사로 바뀌는 시점에 있었다. 기원전 606년 아시리아의 제국 니네베가 몰락하면서 메디아 왕국이 세워졌다. 그리스는 다른 중요한 도시국가들이 있었지만, 아테네가 최고의 도시국가로 부상했다. 아테네의 건설은 테세우스와 연관시키기도 하지만, 그가 실존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리스의 위대한 극작가, 철학자, 웅변가, 정치가들 모두 아테네로 왔고, 아테네에서 일했다. 아테네인들은 민주주의를 탄생시켰는데, 30세 이상의 남성 시민들은 모든 주요 에클레시아(공공의회)에서 발언권을 얻게 되고, 재산이 얼마이고, 아버지가 누구인지 상관없이 1개의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당신이 여자, 외국인, 노예라면 소용 없었겠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경이적인 일이었다.
기원전 490년 어느 날, 아테네에서 동북쪽으로 약 37㎞ 떨어진 마라톤 평야, 아테네인들은 1만 명의 힘으로는 침략하는 페르시아를 저항할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가장 빠른 주자 페이디피데스를 보내 스파르타에게 약속했던 도움을 요청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이 이야기를 놓치지 않았다. 페이디피데스는 이틀 동안 250㎞를 달려가 상황을 알렸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보름달이 뜨기 전에 출발하기를 거부했고, 페르시아인들은 아테네를 공격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결정짓지 못했다. 스파르타 도움 없이 아테네인들은 승리했고, 페이디피데스는 승리를 알리기 위해 마라톤 평원에서 아테네까지 달려가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순간 기진맥진 쓰러졌다.
여기에는 아테네인들의 위대함도 있었지만, 그전 페르시아인들이 약 100년(기원전 550∼460) 동안, 3명의 왕 키루스, 다리우스, 크세르크세스가 지중해 동부 전역에 걸쳐 꾸준히 세력권을 확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그리스 도시들을 점령하고 그리스 본토로 진출했다. 그리스인들은 단결된 전선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마라톤 전투에서는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힘을 모았다고 볼 수 있다. 이때에 루키디데스라는 아테네인이 〈필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썼는데, 그의 작품은 쉽게 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편견이 없고, 정치와 전략에 대해 빈틈없이 분석한 것이 돋보인다. 그는 이 작품 하나로 잊혀지지 않고 오늘날까지 살아남았다.
스파르타는 영어로 ‘억제되고 사치스럽지 않은’이란 의미를 지닌다. 이 도시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어려서부터 공동생활을 했고 충분히 먹을 것을 주지 않음으로써 군기를 강화했다. 그들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거나, 여리지도 않았다. 스파르타인들은 아테네인들을 자신들과 극명하게 대조된다고 보았다. 스파르타인은 소수가 지배하는 과두정치를 지지했다. 기원전 480년에서 360년 사이, 120년 동안 페르시아 침략에 대항하는 그리스 방어를 끌어냈고,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이틀 동안, 레오니다스 왕의 지휘 아래 300명의 스파르타 영웅들이 거대한 페르시아군에 저항했다. 전투에서는 패배했지만, 영웅적인 태도는 그리스인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효과와 지속적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기원전 461년에서 446년까지, 그리고 431년부터 30년 동안의 아테네와 스파르타 간의 필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아이러니하게도 스파르타군은 페르시아 함대의 지원을 받아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스파르타가 테베의 성채를 점령한 것은 매우 적절치 못한 것이었다.
기원전 371년 테베의 반격으로 스파르타를 무찔렀으나, 스파르타는 물러서지 않았고, 아테네와 마케도니아의 필립 왕이 와서 싸움을 멈추기 전까지 몇십 년이나 더 싸웠다. 이후 아테네의 몰락은 마케도니아의 부흥과 동시에 알렉산더 대왕의 정복을 위한 길을 열어주었다. 알렉산더(재위 335∼323BC)는 마케도니아 필립 2세 아들로 아버지가 암살당하자 20세에 왕이 되었다. 아직 이름이 남아 있는 마케도니아는 그리스 북부와 지금의 유고슬라비아 공화국과 불가리아 일부 지역을 차지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리스 동쪽은 페르시아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알렉산더는 지중해 동쪽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행군하여 가자지역과 이집트까지 이르렀고, 동쪽의 이란, 이라크 지역에서 5년간 게릴라전을 치러 고대 페르시아 수도 페르세폴리스를 멸망시켰고, 인더스강(현 파키스탄)까지 점령했다. 알렉산더 덕분에 현재의 중동과 이집트 북부, 지중해 중부와 인도 북부에 이르는 지역은 공동언어를 구사하고 문화사상을 공유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어떤 정복 세력(로마?)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라틴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할 때까지 몇백 년 동안 지속되었다.
▢ 고대 로마의 역사
로마인 조상은 트로이 왕자 아이네이아스라고 하는 설이 있기도 하고, 로물루스와 레무스에 의해 세워졌다고도 한다. 이것은 신화가 역사 속으로 흘러들어왔을 때 겪게 되는 혼란인지도 모른다.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로마를 건국했다는 신화는 여느 나라의 건국 신화와도 크게 다르지 않다. 두 형제는 자신들이 버려졌으나, 목동에게 발견된 장소에 도시를 건설하기로 하고, 신의 뜻을 묻기로 했다. 새들로 점을 치기로 했고, 각자 다른 장소에서 새를 보았는데, 레무스는 독수리 6마리를, 로물루스는 12마리를 보았다. 신의 뜻이 로물루스를 선택했다고 믿으면서 성벽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으나, 화가 난 레무스는 몰래 성벽을 무너뜨리는 등 방해했다. 그러나 로물루스는 레무스를 죽이고, 건축을 계속했다. 도시 건설이 완성된 날이 기원전 753년이었다.
로물루스 이후에 여섯 명의 왕이 더 있었다.
·누마 폼필리우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안쿠스 마르티우스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가 그들이다.
기원전 510년 로마인들은 타르퀴니우스를 내쫓고 공화국을 세워 이후 황제가 로마를 다스리게 했다. 기원전 1세기 무렵 알프스산맥 반대편의 갈리아 트란살피나를 최초로 정복하고 프로빈스라고 불렀다. 현재의 프랑스 프로방스 지역이다. 갈리아인들은 파리 부근에서 동쪽으로 스위스와 벨기에를 차지했다. BC 58년에서 51년 사이에는 카이사르가 그 땅을 정복했으며, 일부 저항이 있었으나, 그것으로 끝이었다.
기원전 3세기 중엽에는 로마 서쪽에 자리한 카르타고(현재의 튀지니)가 상당히 힘 있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세수를 받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무력으로 통합할 기회를 엿보고 있던 로마는 23년간의 싸움(1차 포에니 전쟁) 끝에 시칠리아를 장악했다. 그러나 카르타고인들은 짓눌려있지만은 않았다. 30년이 채 지나기 전에 한니발이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가서 로마로 향했다. 이탈리아 칸네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기원전 202년 자마전투에서 완전히 패하고 말았다. 로마인의 목표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는 것이었다. 기원전 146년 목표가 달성되었다. 오늘날 미국에는 카르타고라는 도시 이름이 5개나 있고, 한니발이라는 도시도 있다는 것은 단순한 향수만은 아닐 것이다.
장군 폼페이우스는 스페인, 시칠리아, 마리우스파를 상대로 성공적인 전투를 벌였다. 집정관이 된 그는 지중해 동부 군대를 담당하면서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오면서 떠오르는 별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부딪쳤다. 기원전 62년 카이사르는 두 번째 부인 폼페이아와 이혼하고, 칼푸르니아와 결혼했다. 중요한 건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서로 견제했다는 것이다.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배할 때까지 제국의 전투에 모두 가담했고, 전투에서 패하자 이집트로 도망갔다. 카이사르의 환심을 사고자 했던 이집트 왕자인 프톨레마이오스가 그곳에서 그를 살해했다. 카이사르는 이런 신뢰의 균열에 염증을 느끼고 프톨레마이우스 대신에 누나인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 왕위에 앉혔다. 카이사르는 그녀와 불륜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전초기지에서도 몇 번 승리를 거둔다. 그후 로마로 돌아왔지만, 암살당했다. 이런 이야기만으로도 드라마가 되지만, 카이사르의 업적은 이전까지 1년이 355일이던 것을, 카이사르의 고문들은 정확히 365일로, 오늘날과 같이 4년마다 하루 윤년을 제정했는데, 이때가 기원전 45년이었다. 이것은 1582년 교황 그레고리오 13세가 바꿀 때까지 계속됐고, 그것은 나쁘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부하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에게 암살당하자, 카이사르의 친구이자, 지지자였던 마크 안토니우스가 권력을 이양받을 준비를 했지만, 카이사르는 권력을 물려받을 준비가 되지 않은 양아들 옥타비아누스에게 권력을 이양했다.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이 되었고, 이에 안토니우스가 군대를 이끌고 몰려오자, 한발 물러서 삼두정치를 구성하기로 동의했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의 누나인 옥타비아와 결혼하는 등 이후 10년동안 싸움과 합병으로 얼룩졌으나, 결국은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를 상대로 이겼다.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악티움해전에서 패배하여 둘 다 자살했고, 옥타비아누스는 자유롭게 자신의 이름을 아우구스투스로 바꾸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내가 남기는 로마는 대리석으로 되어 있을 것이오.”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이렇게 자신을 과신하는 황제가 있는가 하면, 어머니도 죽인 네로라는 악한 황제도 있었다. 로마가 불타는 동안에 네로가 빈둥거렸다는 증거는 없다. ‘소문은 끊이지 않는다’는 속담처럼 “정부보다 섹스, 노래, 연기, 전차 경주에 관심이 많았던 네로는 국가를 소홀히 했고, 부패가 시작되었다.”고 캠브리지 백과는 쓰고 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즐기면서도 어머니를 살해할 시간은 있었다.
로마제국 막바지로 가면, 로마가 기독교를 받아들일 분위기가 되었고, 콘스탄티누스는 둘로 나뉘었던 로마를 다시 통합했다. 비잔티움(현 이스탄불)을 수도로 만들고, 콘스탄티노플로 명명했다. 로마는 넓고 부유하고 명망도 있었지만, 이후로 다시는 세계의 중심이 될 수는 없었다. 마침내 410년 알라릭이 이끄는 비스가스라는 게르만 민족에 의해 침략과 약탈을 당했다. 비록 콘스탄티노플은 창대했지만, 이때부터 로마의 멸망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로마의 리비우스를 고대의 가장 웅변적인 저술가로 평가한다. 아마도 그가 142권에 달하는 역사책을 썼고, 아우구스투스 시대까지 일어난 모든 일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실질적으로 말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리비우스는 왕국의 시대, 카르타고와 전쟁, 미리우스와 술라, 카이사르의 침공, 폼페이우스의 내전 등 온갖 사건을 다 다루었다. 그러나 그는 역사학자는 아니었고, 실제로 그가 한 일은 고대 로마의 인품과 덕목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외에도 카키투스는 〈연감(年鑑)〉에서 티베리우스의 통치에서부터 시작해 칼리굴라, 네로 그리고 통상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하는 재미있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다. 또 수에투니우스는 가십 작가로서 허구적 엄격함을 추구하지만 않는다면, 재미 있는 읽을거리를 썼다. 그가 쓴 〈황제들의 생애〉는 율리우스와 도미티아누스까지 11명의 황제를 다루고 있는데, 이런 저서들이 없다면 우리는 로마의 역사를 어떻게 알겠는가.
▢ 고대 고전과 예술문화철학
‘빗변의 제곱이 나머지 두 변의 길이의 제곱의 합과 같다.’는 것을 ‘피타고라스 정리’라고 한다. 이는은 아마도 그의 추종자들에 의해서 개발되었을 것이다. 사실 피타고라스는 도덕적 금욕과 정화를 강조하고 무엇보다 삶의 방식을 옹호하는 철학자였다. 이름이 생소한 아리스타르코스라고 있는데, 그는 ‘고정된 별과 태양이 흔들리지 않고 지구는 원의 둘레 위에서 태양을 공전하며, 그 결과 우주가 당시 대부분의 과학자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거대했다.’라는 가설을 세웠다면 믿겠는가? 이 말은 아르키메데스로부터 인용한 것이지만, 아르스타르코스의 이런 생각을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지구는 공식적으로 우주 중심에서 1800년 정도 더 머물러 있었야 했다. 만일 그의 이론이 받아들여졌더라면,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는 많은 짐을 들었을 것이다.
수학자 아르키메데스는 돌을 발사할 수 있는 포승줄과 목재를 떨어뜨리는 기중기, 물에서 배를 끌어내는 발톱 모양의 장치 등도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 도중에 수학적 문제에 몰두하다 병사에 의해 살해되었다고 한다. 그는 누가 뭐래도 목욕탕에서 몸이 물을 이동시키는 것을 보고 몸의 부피를 계산한 것이었다. 아마 알몸으로 목욕탕을 뛰쳐나와 ‘유레카!(찾았다)’라고 외치지 않았을까? 그리스인들은 숫자를 적는 방법에 있어 로마인들보다 간편하지 못했다. 13세기까지 유럽에서 널리 쓰인 로마식 방식은 숫자 4(IIII)의 경우 (Ⅳ)로 표시하는 방법이었는데, Ⅴ보다 하나가 빠진다는 것이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상징이 뱀이 지팡이를 감고 있는 모양인데, 이건 스타벅스의 상징이 싸이렌처럼 상징적이기는 해도 왜 거기 저것이 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아폴로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는 기원전 3세기 무렵 그리스에서 의술의 신이었고(아폴로도 그렇지만),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이 뱀이었다. 뱀은 허물을 벗고 활기를 되찾기 때문으로 상징으로 삼은 것이다. 지팡이를 휘감고 있는 뱀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의학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는 여전히 의학의 아버지다.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그때까지 누구나 갖고 있던 의학적 지식을 집대성한 것인데, 그는 혈기, 침착성, 냉혈성, 우울증이 네 가지 기질이 균형있게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중 어느 하나라도 지나치면 건강이 나빠진다고 여겼다. 이런 체계는 기원후 2세기에 그리스 태생의 의사 칼렌에 의해 정리되었다.
현존하는 발라드를 바탕으로 하여 호머(BC8세기)는 〈일리아드〉와 〈오디세이〉라는 위대한 서사시를 남겼다. 〈일리아드〉에 따르면 헬렌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였고, 많은 그리스 귀족들이 그녀를 따라 다녔다.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와 도망쳤다. 이에 아킬레우스, 아가멤논, 오디세우스 등 그리스 전사들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10년 동안 그리스 외곽에 진을 쳤다. 아킬레우스는 위대한 전사였지만, 전쟁은 유리하게만 진행되지 않았다. 단짝 친구인 파트로클로스가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대신 싸우러 나갔지만, 트로이 왕자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야기는 오디세우스에게로 향해 그리스인들은 목마를 이용해 승리했으나, 오디세우스의 귀국은 10년이나 걸렸는데, 7년을 갈립소 여신들과 시시덕거렸기 때문이었다. 아내 페넬로페는 남편이 죽었다고 하면서 재혼을 재촉하는 구혼자들에게 둘러싸였으나, 남편의 수의가 완성되면 재혼하겠다고 하고는 낮에 짠 옷감을 밤에 푸는 방식으로 버텼다.
제우스가 갈립소에게 오디세우스를 풀어줄 것을 명하여 오디세우스는 풀려났지만, 그가 탄 배가 난파를 당한다. 포세이돈의 아들 키클롭스가 그의 눈을 멀게하였고, 나중에는 한쪽 눈마저 잃게 되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나우시카라 공주에 의해 구조되었다. 오디세우스는 집으로 돌아와 구혼자들이 그의 음식을 다 먹어 치우려 들었다는 사실을 발견했고, 그들과 활쏘기 시합을 제안해 우승함으로써 구혼자들을 죽였으며, 아내와 행복하게 살았다. 꼭 전설같은 이야기다.
이렇게 전설 같은 이야기들 속에서도 이솝우화라고 하는 것은, 그래도 들을 만한 이야기들이다. 기원전 620년∼560년 사이를 산 이솝은 동물을 통한 교훈을 담고 있는데, 〈토끼와 거북이〉,〈여우와 포도〉,〈여우와 두루미〉등과 양의 옷을 입은 특대에 대한 경고,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죽이는 어리석은 주인에 관한 이야기 등 지금도 아이들에게 일깨움을 주는 주옥같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그리스 철학자 하면,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를 꼽지만, 키케로는 어떤 사람인가? 정치, 문학, 철학 중 어느 분야에서 다루어야 할지 모를 그는 기원전 106년 태어나 법학을 공부하고 스물일곱에 처음으로 훌륭한 연설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영향력 있는 클로디우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표적이 되었다. 키케로는 공화정 출신의 변호인이었다. 카이사르를 존경하기는 했지만, 그가 휘두른 권력에 소름 끼쳐했다. 또 그런 이유로 전제정치를 펼친 마크 안토니우스도 통열히 비판했다. 안토니우스는 기원전 43년 키케로를 살해하고, 머리와 손을 전시했다. 그러나 키케로는 자신의 이상을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죽었고, 그런 점에서 그에 대해 싸구려 농담을 할 수는 없다.
대영박물관에는 소크라테스의 외모를 묘사한 기록이 있다. ‘그는 키가 작고, 뚱뚱하며 못생겼다.’소크라테스(기원전 469∼399)는 처음 철학이란 단어를 만들거나, 사용한 사람은 아니었다. 당시에 철학(philosophy)은 ‘지혜에 대한 사랑’을 의미하며 삶의 의미, 옳고 그름, 우리가 알 수 있는 지식에 대해 이해하려고 노력한다는 개념으로, 기원전 6세기 그리스에서 등장한 것이었고, 최초로 이런 개념에 도달한 이는 헤라클레이도스였다. 당시는 그를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후 유명한 철학자는 100년 뒤에 나타났다. 이 사람은 결코 책을 쓴 적이 없지만, 많은 이야기를 했고, 이후에 나타난 철학자들에게 미친 영향력은 실로 엄청났다. 그가 바로 테스형, 바로 소크라테스다.
소크라테스는 명성이 높아지자, 자신보다 더 현명한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그는 권위 있는 신부에게 독실함(piety)을 정의해 달라고 부탁했고, “그것은 신들을 기리고 그들의 의지를 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 하지만 소크라테스는 “우리에게는 많은 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신화는 그들이 종종 그들끼리 싸운다고 말합니다. 만약 두 신이 다투고 있다면, 나는 그 중의 어느 신에게 경의를 표해야 하는가요?”라고 물었다. 물론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가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 ‘이 도시가 인정하는 신을 인정하지 않고 다른 신을 불러들인다.’라는 이유와 젊은이들을 타락시킨다는 죄로 기소되었다. 그는 사형을 선고받고, 독미나리 독을 마시고 죽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오늘날까지 기억 속에 살아 있다.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아버지라면, 또 다른 철학의 아버지, 아버지Ⅱ가 있다. 플라톤(기원전 429∼347)은 소크라테스의 가장 유명한 제자 중 한 명이다. 플라톤이 행했던 가장 중요한 일은 이성적인 논쟁을 바탕으로 철학의 체계를 마련한 것이었다. 그가 쓴 - 논란이 되기도 - 한 작품은 〈국가론〉인데, 그는 전적으로 공익을 위해 헌신적이었다. 그들은 가정생활도 어떠한 소유물도 없었다. 빅토리아 시대는 이 책이 특권층 청년들에게 공적인 삶에 전념하도록 장려되기도 했다. 하지만 20세기 들어서는 우아함보다는 나치즘이나 냉전 시대와도 불편한 유사성을 가진 전제주의, 혹은 공산주의를 제시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플라톤 계승자는 아리스토텔레스(기원전 384∼322)이다. 마케도니아 태생인 그는 그리스에 와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에 합류했다. 플라톤이 죽자 마케도니아로 돌아가 알렉산더 왕자의 가정교사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미덕이 행복에 필수적이며, 그것은 규칙적인 상황에서 두 개의 반대되는 결함 사이의 평균 지점으로 여겨져야 한다고 했다. 미덕, 즉 행복은 자신의 상황과 관련된 방식으로 그러한 자질들을 실천하는 개인의 행위에서 나온다고 했다. 이런 행복론은 20세기까지 유럽을 지배했다.
많은 철학자들은 삶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말의 번역에는 논쟁이 많다. 그리스어로는 유다이모니아, ‘인간의 번영’이지만, 그것을 더 나은 번역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복잡하기에 그냥 ‘행복’이라는 말을 고수하고 있는 것이다. 행복은 행복한 하루나 시간이 아니라 ‘행복한 삶’을 의미했다. 행복으로 가는 길은 한순간, 일시적으로 즐거운 기분을 희생할지도 모른다. 쾌락주의적인 접근은 이와는 반대였는데, 바로 순간에 사는 것, 다시 말해 지금 포도주를 즐기며 숙취에 대해 내일 걱정하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사실 철학적 접근이 아니었다. 적어도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행복은 미덕을 통해서 지속될 수 있었다. 이것은 성적인 억제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포괄하는 단어로 몸에 깊이 밴 도덕성을 의미했다. 그것은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 이성과 욕망을 구분했다.
앞서 본 세네카(BC4∼AD65)는 네로 못지않은 악한 황제 칼리굴라 휘하에서 상원의원이었지만, 쉽게 틀어졌고, 클라우디우스 휘하에서는 그의 조카 줄리아와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 이후 클라우디우스의 의붓아들 네로가 황제가 된 이후에 네로를 가르치던 시절을 상기하기도 했다. 네로는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듯이 점점 미쳐갔고, 그를 전복키시는 음모가 벌어졌다. 세케카는 연루 혐의를 받고 자살 명령을 받았다. 세네카는 자신의 손목을 자른 후, 친구들과 가족에게 보내는 이별의 말은 슬퍼하지 말고 철학의 격언을 기억하라는 것이었다.
황제로서 유명한 철학자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그는 실용적 윤리를 담은 짧은 단편 〈명상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여기에는 어떻게 하면 덕이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다. 스토아학파의 주장에 따른 감정을 억제하는 것에 집중해 있으며, 성교를 ‘내장의 한 조각의 마찰과 일종의 경련에 따른 어떤 점액질의 배출’이라고 하여비성교적인 것으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아마도 빌 클린튼이 좋아할 작가일 것 같다.
선한 일을 추구하며 성교마저 자제한 마르쿠스가 악한 아들을 낳았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들이 결국 암살당했다는 것은 사람은 덕만으로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 같다.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 호아킨 피닉스가 연기한 황제의 아들 코모두스는, 러셀 크로우에게 그렇게도 반칙을 행하던 바로 그 아들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 7대 불가사의는 고대에는 완전히 달랐다. 기원전 2세기 안티파트로스라는 잊혀진 그리스 시인은 ‘그들이 화려함이나 규모에 대하여 과연 주목할 만한 것’을 선정했다고 했다고 하면서 다음 일곱가지를 선정했다.
·바빌론의 공중정원
·할리카르나소스의 대영묘
·알렉산드리아의 파로스(등대)
·로도스의 크로이소스 대거상(大巨像)
·에페수스의 아르테미스 신전
·올림피아의 제우스 여신상
·이집트 가자의 쿠프왕 피라미드
이들 일곱 개 가운데 아직도 건재한 것은 피라미드 뿐이지만, 나머지도 이름은 들어본 것 같다.
오늘날 대부분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가장 중요한 건축물로 아테네의 파르테논 신전을 꼽는다. 우리는 모두 그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상징적이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크로폴리스 일부였고, 아크로폴리스는 ‘높은 마을’을 의미하며, 민주주의의 상징적 장소다. 다른 역사적 도시들처럼 공격하기 어려운 언덕 위, 바위 고원에 세워졌다. 따라서 이는 요새화된 중요한 종교 건물과 도시건물들이 있는 도시의 중심부를 지칭하는 것이 되었다. 페르시아인들이 공격해 파괴된 후에 페리클레스의 후원으로 재건된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인들의 상징으로, 무적으로, 생각되었다. 높이 11m, 46개 외곽기둥만 남아 있는 이 건물은 밑단 모서리에서 약간 아래쪽으로 기울어져 있고, 기둥은 약간 안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신들과 다양한 적들에 대한 아테네인들의 승리의 그림이 조각되어있고, 건물 안에는 13m ‘금과 상아상’도 있었다. 그래서 이곳은 약탈의 대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었다.
지금 신전 안은 휑하지만, 대영박물관에서는 그곳에 있던 조각상들을 볼 수 있다. 19세기 초만 해도 그리스는 영국의 동맹이던 투르크에 의해 통치되고 있었다. 엘긴경은 터키 주재 영국 대사였고, 투르크 당국으로부터 몇 가지 기념품을 가져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엘긴경이 그 조각상들을 절반이나 떼어 갈 것이라는 것을 알았는지 여부와 함께 그것을 영국 박물관에 두어야 할지, 아니면 아테네로 돌려보내야 할지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기원전 5∼6세기에 이미 기하학적 모양의 항아리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인간과 동물을 표현하고, 장식하면서 장례 항아리와 같은 특별한 항아리도 만들었다. 조문객과 같은 특별한 이미지를 장식하기도 한 이것들은 대부분 검은색이었으나 때때로 빨간색과 흰색 점토색을 찍어 바르기도 했다. 이는 로마로 이어졌고, 단순한 실루엣 그 이상인 것들이 많이 남았다. 18세기 영국 시인 키츠는 〈그리스 항아리에 부치는 노래〉에서 “무슨 신들이며 무슨 인간들인가? 싫어하는 몸짓을 하는 저 여인들은 누구란 말인가? 무슨 광란의 추적이며, 탈출을 위한 그 무슨 필사의 몸부림인가? 피리들과 손북들은 또 어떠하고, 이 무슨 광란의 환희인가?”라고 그리스 항아리를 노래하기도 했다.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부터 태양의 신 제우스를 기리는 축제로 4년마다 올림피아에서 열렸다. 그 후에 달리기, 5종 경기, 복싱, 마차경주 등으로 확대되었으며, 기원전 1세기 재정적 이유로 축소되었고, AD 393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의해 금지되기도 했다. 1896년 아테네에서 열린 제1회 근대올림픽에서는 알몸을 가리고 옷을 입는 것으로 해서 부활되었다. 성화 봉송은 당초에는 종교의식으로 올림픽과 관련이 없었으나,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서 육상선수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 나치하의 베를린 올림픽 홍보담당은 요제프 괴벨스(반유대주의자, 전무후무한 나치 선동가)였는데, 성화봉송 의식은 아리안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기 위한는 섬뜩한 아이디어에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