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문만복래(開門萬福來)
함석헌
옛날 사람은 ‘복’이란 것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빌면 받는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축생일 축결혼 축졸업 축복 축하합니다. 그러나 지금 그 뜻을 알고, 그것을 믿고, 그래서 정말 엄숙하게 정성으로 하는 사람 별로 없습니다. 그저 형식입니다. 그것이 무슨 말인지 생각도 하려 하지 않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마음이 약해서 이날껏 감히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남처럼 형식따라 하면서도, 형식이거니 하면서도, 그 말하는 그대로 복이 내리려니 생각은 못했습니다. 결혼 주례를 서달라는 때가 가장 딱했습니다. 사양을 해도 해도 굳이 서달라 강요하니 도망을 갈 수도 없고, 부득이 할 수 없어 서면서, 말로나마 정성껏 해볼까 하면, 또 무슨 식이 그리 기냐 비평을 합니다. 그래서, 웃을 만한 이야기지만, 적어도 말로는 복을 빌어준 일이 없습니다. 부도수표인 것을 자신이 분명히 알고서야 어떻게 합니까? 금년에도 많은 세배꾼이 왔는데, 절은 깍듯이 서로 했습니다마는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소리는 받기는 많이 받았어도 하기는 한 번도 하지 못했습니다. 말이 나가지 않아서.
다만 한 가지만은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골목길을 드나드노라면, 이제는 이 집에 20년 넘도록 살아오니, 동리 어린이들을 많이 압니다. 그들 사이에서는 어느새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로 통해 있는데, 그 애들을 보면 자연 그 머리 위에 손을 한번 얹어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또 그것들은 좋아서 “야 내 머리 만졌다. 너는 안 만져줬니?” 하게 됩니다. 그러니 처음에 장난처럼 시작한 노릇이 이제는 아주 하나하나 빠지지 않고 마음먹고 다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다가 어떤 때면 이런 것이 축복이란 것일까 생각하며 혼자서 속이 흐뭇해 지나갑니다.
지금도 못 잊는 것은, 인도 갔을 때 어떤 곳에 갔더니 한 사람이 와서 합장하고 내 발을 만졌습니다. 또 한 번은 어떤 이를 방문하였더니 주인이 그 어린 아들을 안고 와서 아주 머리 위에 축복을 해달라 했습니다. 또 그 애였던지 다른 애였던지는 기억하지 못합니다만 잠깐 동안에 아주 친구가 되어서, 내가 일어서서 간다 하니 울고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 그 아버지와 내가 가까스로 달래어 떼어놓고 왔습니다. 지금도 그 애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축복해 주면 이삭이 그것을 그대로 받았고, 이삭이 축복해 주면, 아버지 눈을 속이고 간 야곱도, 그 빌어준 대로 복을 받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복을 빌어준다는 것은 좋기를 바라는 생각, 마음, 말, 식만이 아닙니다. 그대로 엄숙한 사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온통 생각과 말과 만짐의 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불행하고 무서운 일입니다. 그 까닭은 모두 믿음 없이 헤프게 해온 죄 때문입니다.
헤프게 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기 영혼을 죽이는 일입니다. 흔히 제 본래의 모습, 곧 하나님에 직결되는 모습대로 있게 되면 능력을 갖게 됩니다. 말과 행동이 하나란 말입니다. 예수께서 “아버지께서 만유를 아들에게 주셨다” 하신 것은 이 뜻일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께서 직접 하시지는 않고 모든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 하신 것은 그 사명이 우리 헤매는 것들을 모두 불러 근본자리로 돌아가 아들의 모습을 가지게 하자는 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오늘아침 명상 속에서야『역』(易)에 “잠잠해 옴짝도 않고 있으면 느끼어서 드디어 천하의 까닭을 안다”(寂然不動 感而遂通天下之故)의 고(故)가 뭔지를 비로소 알았습니다. 그것이 노자가 “석지 득일자”(昔之 得一者)에서 말하는 ‘一’ 곧 하나일 것입니다.
그것을 쉽게 말한다면 ‘마음 열음’입니다. 옛날 입춘이 되면 ‘개문만복래’ (開門萬福來)라고 써 붙였습니다. 문만 열어놓으면 온가지 복이 다 들어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문이 아니라 마음입니다.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문을 나무로 짠 대문으로 알아서는 잘못입니다. 마음입니다. 마음은 하늘의 문입니다. 우리의 개천절도 마음문 열리는 것을 말한 것이고, 예수님이 “하늘문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같이 내리시는 것을 보았다”는 것도 마음문의 일입니다. 하늘에 무슨 열고 닫음이 있겠어요. 우리 마음이 닫혔다 열렸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80이 거의 다된 오늘 와서야 “올해에는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의 의미를 알았습니다. 복을 줄 아무 능력도 없는 것들이 뭘 복 많이 받으셔요 합니까? 나는 받는 절을 감히 도로 드리지 않을 수는 없어 같이 깍듯이 하기는 했습니다마는 이날껏 한번도 “복 많이 받으셔요” 소리는 감히 못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와서야 그 말을 알아들었습니다.
“오늘부터는 서로 나쁜 마음 먹지 맙시다” 하는 뜻입니다. 나쁜 것이 무엇이야요? 닫는 것입니다. 본래 열린 하늘인데 제각기 마음을 닫고 보니 어둠뿐입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면 어두움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본다”고 했습니다. 세계를 하나로 오고가는 큰 바닷물인데, 우리집 마당 도랑에 들어오면 더럽습니다. 본래 하나인 것을 갈라가지고 서로 닫고는 너, 나 하기 때문에 고움, 미움, 슬픔, 선, 악이 생겼습니다.
통일, 통일 하지만 ‘統一’이 아닙니다, ‘通一’이지. ‘統’은 모든 실오리를 한 손에 쥐는 것입니다. 옛날 못된 지배자의 소리입니다. 피는 물보다 걸다지만 건(濃) 것이 좋은 것 아닙니다. 맑아야지, 제발 핏줄 소리 하지 마셔요. 피 가지고 나라 건지지 못합니다. 피로 된 나라는 망하는 날이 옵니다. “물과 영”으로 나지 않고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을 들은 믿는 사람들도 그 소리를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압니까? 금이 좋습니까? 옥이 귀합니까? 그것 다 이미 지나간 것, 썩은 것, 굳은 것, 죽은 것입니다. 물이야말로 살리는 생명입니다. 물, 불, 바람, 하늘이 다 하나를 표시 하는 상징입니다. 빔이란 빔이고, 열림이란 열림이고, 없음이란 없음이고, 있음이란 있음입니다. 그 하나를 함이 믿음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속이요, 볼 수 없는 것의 확증입니다.
그런데 누가 알고 누가 모른단 말입니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단 말입니까? 안다는 건 갈라놓음이요, 한다는 것은 무너뜨림이요, 이긴다는 것은 죽임입니다. 시비 초월함이 앎이요, 되고 못 되고 보지 않음이 이룸이요, 지고 이김 없음이 큼이요, 죽고 삶 안 보임이 생명입니다.
그래도 따지고 싶거든 힘껏 따져보시오.
그래도 싸우고 싶거든 실컷 싸워보시오.
무엇이 남을까?
마음의 문 활짝 열어보시오. 거기 영원한 하늘 바람 드나들고 그 하늘 음악 들으면 모든 시름이 가위눌림 사라지듯 사라질 것입니다.
씨알의 소리 1979. 1월 80호
저작집; 9- 243
전집; 8- 4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