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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313 / 여호와 보레 (사40:26-31)
넌센스 퀴즈를 내겠습니다. 여기에 큰 건초더미가 하나 있습니다. 저쪽에도 큼지막한 건초더미가 또 하나 있습니다. 노새 한 마리가 그 가운데에 서 있었는데, 이 노새가 굶어 죽었습니다.
노새는 왜 양쪽에 건초더미를 두고도 굶어 죽었을까요?
답은 이쪽 풀을 먹을까? 저쪽 풀을 먹을까를 망설이다가 먹어 볼 시도조차 하지 못한 채 굶어 죽었다고 합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들을 하지만 성공한 사람들의 속담은 조금 다르답니다. 그들은 “시작은 곧 성공이다.”라고 한답니다. 그만큼 ‘시작’이나 ‘시도’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주일은 한 주간을 시작하는 첫날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배를 통해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시작이라면 이번 한 주간은 물론이고 여러분의 모든 시작이 곧 성공이 될 것입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차라리 돌아갈까. 세 갈래 길 삼거리에 비가 내린다.’라는 유행가 가사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이걸 할까? 저걸 할까?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되나?’라는 고민을 하고 계시지는 않는지요?
지금은 아니라도 예전에 한 번이라도 그런 비슷한 생각이나 갈등이 있으셨다고 하면 이제라도 우리 인생 중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삶의 모든 것들을 하나님 앞에 맡기고 하나님이 어떻게 축복하실는지를 기대하며 다시금 힘을 내고 용기를 갖고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여러분과 함께해 주실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는 모세가 죽은 후에 백성들을 이끌고 축복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마음먹었다고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것이 현실입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에서의 다반사입니다.
당시 가나안의 첫 관문인 여리고 성을 중심으로 하여 많은 가나안 원주민들이 여호수아의 가나안 진입을 저지하기 위해 막강한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요단강마저 홍수 때를 만나 물이 불어 건널 길이 막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인제 와서 차라리 광야로 돌아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런 형편이 성경 속의 여호수아만의 이야기면 좋겠는데 사정과 형편만 다를 뿐 상황만 놓고 보면 오늘날 우리네 살아가는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날, 1년, 10년, 때론 20여 년을 한결같이 광야 같은 인생을 달려왔건만 현실의 벽은 여전히 높고 건너지 못할 강물만 넘실대고 있다면, 그때의 난감한 심정이 여호수아의 심정이었고 오늘 우리의 마음일 것입니다.
찬송가 375장의 가사에도 보면 이렇습니다. ‘어디 가야 좋을지, 어찌해야 좋을지, 힘도 없고 약하니, 맘이 심히 슬프니’라고.
그러면서 이렇게 이어집니다. ‘주여 인도합소서, 나를 가르치소서, 나를 도와 줍소서’라고.
그렇습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 했는데 우린 그 구멍 너머로 하나님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함께한다면 무엇을 하든, 어떤 결정을 내리든 ‘시작이 결국엔 성공’일 줄을 믿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면 하나님은 세상을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인생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신다.”고.
이 부분에서 우린 여호와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 하나를 알게 됩니다. ‘여호와 보레!’
‘여호와 이레 아닌가요?’라고 하실 분이 계시겠는데, 아닙니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 이전에 여호와 보레이십니다. 여호와 보레는 ‘여호와는 창조주이시다’라는 뜻입니다.
성경을 시작하는 첫 책이 창세기이며 첫 기록이 창조 이야기이듯이 우리의 믿음도 창조주 하나님 곧 여호와 보레를 믿는 믿음에서부터 출발되어야 합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시기에 세상에서 못 할 일이 뭐가 있겠냐는 뜻에서 ‘여호와 보레’는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시고 없는 것을 있게 하시는 전능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는다면 우리에게 걱정할 것이 무엇이며 염려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보레시다.’라는 이 한마디만 할 수 있다면 거기가 어디든 하나님은 거기서 저와 여러분을 위한 창조의 역사를 베풀어 주십니다. 그러니 사는 중에 안 된다 여겨질 때면 여호와 보레를 생각하세요. 힘들다 느껴질 때면 여호와 보레 그 이름을 불러보세요.
이리할까 저리할까 차라리 돌아설까로 고민할 시간에 오히려 지금 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그 일에 여호와 보레의 하나님이 개입하시기를 간구하세요.
그리하면 내 인생에도 방법이 있게 됩니다. 길이 열릴 수 있습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요.
믿어오면서 단 한 번일지라도 하나님께 기도한 문제라고 한다면 절대로 내 선에서 포기하면 안 됩니다. 타협도 금물입니다.
전에 사업장을 개업하신 집사님이 사업이 잘 안된다는 말을 듣고 심방을 갔더니만 분명 어렵고 힘든 상황임에도 하시는 말씀이 ‘이만하면 감사하지요.’라고 그러십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보다 더 잘 되게 하시면 어떠실까요?’ ‘감사하지요.’ ‘그럼 지금보다 훨씬 잘되게 하시면 어떨 것 같으세요?’ ‘그러믄야 너무 감사하지요.’
그래서 제가 권면했더랬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잘하시는 것이지만 그 앞에 ‘이만하면’이란 말을 빼세요’라고.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심에 있어 우리 생각대로의 ‘이만하면’이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셨는데 우리가 이만하면 이라 함은, 더는 원하는 게 없단 뜻인가요?
하나님이 더는 역사해 주시지 않아도 좋다는 뜻은 아니겠지요?
그렇게 고백하는 사람들의 진정성은 이해합니다만 그렇더라도 믿음에서는 세상에서의 기존 통념을 조금 바꿔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말하기를 사람의 욕심에는 끝이 없다고들 하지만 무릇 성도라면 기도에는 끝이 없어야 함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인이 욕심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욕심을 내야 합니다. 그것도 많이.
그러나 욕심이 세상적인 욕심으로만 끝나게 하면 안 됩니다. 욕심을 기도로 연결시켜 하나님께로부터 욕심을 기도 응답으로 받으려고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어떤 경우에서든 응답은 모든 걸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결정하실 것입니다.
욕심껏 기도하세요. 이만하고 끝내는 기도는 기도가 아닙니다. 이만하면 하고 마치는 순종은 순종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끝내시기 전엔 절대 우리 인생의 소망이 끝난 것이 아니며 하나님이 끝내시기 전까진 절대로 우리의 기회가 다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에게서 절대로 이만하고 끝내실 생각이 전혀 없으십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보세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여호와 보레’ 곧 ‘창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사하시는 능력이라면 능히 여리고 같은 문제의 성벽을 무너뜨려 주실 것입니다. 요단강 같은 시련의 강물을 갈라 주실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찬양을 불러보셨을 겁니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우린 찬양만 부를 게 아니라 그 내용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 일이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능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재주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내 돈, 내 경험, 내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그런 것들이 있으면 좋지만 없다 해서 안 되고 못 할 일도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믿음은 나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의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 능력을 믿는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능력이 없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나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머리로는 외워지는 데 마음에는 와 닿질 않는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외쳐는 봅니다만 세상은 부정합니다. 혹 국어 시간이었다면 그런 저를 향해 “네 주제를 알아라” 그랬을 겁니다. 수학 시간이라면 “네 분수를 알아라.” 그랬을 거고, 지리 시간이면 “네 현재의 위치를 알아라.” 그랬을 겁니다. 혹 미술 시간이었다면 “네 꼬라지를 알아라.”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다소 과격하고 비관적인 시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대개의 경우 누구보다 내가 내 꼬라지를 잘 알지요. 주제도, 분수도, 또한 내가 얼마나 연약하고 모자란 사람인 줄을 누구보다 내가 잘 압니다. 그렇다 보니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가당키나 한 말이겠습니까마는 역시나 성경에 답이 있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살면서 더는 내가 뭘 할 게 없다고 느끼는 상황을 만나게 되면 사람은 피곤에 지치게 됩니다. 반대로 내가 꼭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다고 느끼면 그때부터는 없던 힘도 생기게 됩니다.
이렇듯 뭔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만큼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돈이 없어 못 하고 능력이 없어 못 하는 일은 있을지언정 믿음에서까지 할 일이 없지는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성도에게 기도에는 끝이 없습니다. 순종에는 다 함이 없습니다.
여호와 보레. 창조주 하나님은 안 되는 걸 되게 하시고 없는 걸 있게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 보레시다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서도 안 되는 걸 되게 하시고 없는 걸 있게 해 주실 것입니다. 이게 우리의 믿음이어야 하고 이게 우리의 소망입니다.
희망이 사람을 살립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의 희망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놀라운 능력을 주십니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이런 희망이 있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약속을 주셨으니, 이제부터라도 피곤한 자에게 능력을 주시고 무능한 자에게 힘을 더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세요.
솔직히 사람은 누구나 피곤한 것은 싫어합니다.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는 것도 싫어하고요.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우리 아픔과 우리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가면 하나님은 그때마다 우리의 아픔과 문제를 맡으시고 해결하여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겐 희망이 있는 겁니다.
산에서 길을 잃었을 때는 살겠다고 내려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올라가야 합니다. 정상에 올라가서 둘러봐야 어디가 길인지가 보이는 것입니다.
세상살이도 그렇습니다. 인생에서 길을 잃었다면 우린 올라가야 삽니다. 그렇다면 어디로 올라가야 할까요? 하나님이 계신 저 높은 곳으로입니다. 무엇이 올라가야 할까요?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입니다.
세상적으로 사업을 확장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지금은’ 믿음을 확장해야 할 때입니다. 세상 권세가 올라가고 사회적인 지휘가 올라가는 것도 중요한 일입니다만 ‘오늘은’ 우리의 믿음이 높아져 할 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라고.
여기서 ‘앙망’이란 말은 ‘기다리다, 소망하다’라는 뜻이지만 의미적으로는 먹이를 기다리는 새끼 새가 어미 새를 향하여 입을 좍좍 벌리는 모습을 ‘앙망한다’고 그랬습니다.
어미는 자기가 애써 먹은 것을 그 입에서 꺼내어 일일이 새끼들 입에 넣어 주며 먹여 키웁니다. 그런데 아십니까? 어미 새가 새끼 새에게 먹이를 주는 방식을?
얘는 먹었으니까 다음엔 쟤를, 혹은 넌 못 먹었으니까 이번엔 너를 하는 식이 아닙니다. 어미 새는 어미를 가장 앙망하는 새끼 즉 입을 가장 크게 벌리는 새끼에게 먹이를 준다고 합니다.
새조차도 앙망하는 새끼가 먹이를 먹습니다. 그렇다고 하나님이 한낱 새처럼 분별력이 없으시지는 않지만 그렇더라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해야만 새 힘을 얻음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결코 우리 혼자 살도록 내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인생의 어려운 문제를 나 혼자 해결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고.
요한복음 1:3절에도 보면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렇듯 만물이 하나님의 지으심을 받은 것이라면 모든 만물의 소유권이 하나님께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호와 보레. 창조주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화개장터란 노래가 있지요? 거기에 가면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라고 하지만 하나님껜 그렇지 않습니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는 게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답은 나왔습니다.
현재 여러분에게는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당장에 여러분에겐 어떤 게 있어야겠습니까?
27절을 보세요.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시며 하나님이 오히려 더 안타까워하십니다.
한 번쯤이라도 이런 상념에 빠지셨던 적은 없으셨는지요?
가끔은 ‘하나님은 왜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을까? 하나님은 왜 내 믿음을 몰라주시나?’라고 생각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그런 저와 여러분에게 반문하십니다. ‘어째서 네 기도를 내가 못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느냐? 왜 내가 너의 믿음을 몰라줄 것이고 여기느냐?’고.
이젠 하나님을 향해 달라고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이젠 하나님이 해 주시기를 요청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먹는다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받아본 사람이 받습니다. 그러니 기도로 매달려서 그게 뭐든 단 한 번이라도 응답이란 걸 체험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한 번이 두 번 되고, 두 번이 자주가 되고, 자주가 매번이 되면 그때부터는 무엇이든지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은혜가 저와 여러분에게도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여호와 보레의 하나님이실진대 뭔들 없어서 못 주실 것이며 뭔들 안 돼서 못 해주시겠습니까?
하나님이시라면 믿고 구하는 저와 여러분에게 새 힘을 주시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는 은혜로 채워주실 줄로 믿습니다.
그런 믿음과 그런 기도로 그런 응답과 그런 복을 받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첫댓글 주말에 듣고 다시 읽으니 더 마음에 와 닿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