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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ble Study 03
설교는 목사의 전유물인가?
(목사의 설교권에 대한 성경적 고찰)
- 서론
우리 주위에 무의식적으로 당연하게 생각하거나 습관적인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당연한 일들 중에서 왜? 라는 질문을 했을때 쉽게 그 이유를 찾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예배 중에 가장 중요하고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목사님의 설교입니다.
이것을 "설교권"이라고 부르면서 함부로 넘볼수 없는 암묵적인 권한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배의 중심으로 자리잡은 목사의 설교권은 너무나 당연하기 때문에 의문의 대상조차 삼지 않습니다.
"이교도에 물든 기독교"라는 책에서도 보면 역사적으로 예배의 중심이 설교가 되면서 교회에서 성도간의 교제는 사라지고 가정에서 모이던 소규모 교회들은 특별한 한 두사람의 설교로 대체되면서 성도들의 교제가 아닌 듣는 예배로 전락하게되고 교단과 대형 교회로 나아갈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 목사인가 목자인가?
먼저 목사에 대해 성경에 어떻에 말하고 있는지 보면 우리가 흔히 알고있는 "목사"라는 직업을 말하는 단어는 없습니다. 단지 성경에서 목자(히,라아; 헬포이멘)(shepherd,pastors)"라는 호칭 나오는데 단어는 말그대로 "양을 치는 사람"을 말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목사 라는 직분의 개념은 신약에서 [엡4:11]에서 언급되며 그 외는 대부분 양을 돌보는 사람을 말합니다.
엡4:11 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들(pastors)와 교사로 주셨으니
그런데 이러한 양을 돌보는 사람이 수천 수만마리의 양을 양육하며 돌볼수 있을까요?
한가지 방법으로 가능한데 그것은 대형 공장에서 기계식으로 사육하는 하는 것입니다.
즉 양을 "돌보는 사람"은 자신의 양을 알아야 하지만 양을 "사육하는 사람"은 양의 이름이나 어떤 상태인지 알고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요10:14)
그리고 양을 "돌보는 사람"은 양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지만 양을 "사육하는 사람"은 양이나 털을 팔아 돈을 벌거나 잡아 먹습니다.
그들은 "양을 돌보는 것"을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그 말씀을 가르치는 일은 오직 목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들만이 하는 일이라고 말하며, 그것에 대한 댓가로 십일조나 헌금으로 그들을 생계를 유지합니다.
즉 수천 수만명의 대형교회가 가능한 것은 그들이 양을 "돌보는 사람"이 아닌 양을 "사육하는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이것은 이런 대형교회가 만들어진 배경에는 목사를 "설교하는 사람"으로 가르치거나 정의함으로 가능해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교회 타락의 주된 원인중에 하나가 목사의 설교권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 목사와 장로들인가?
먼저 앞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직분의 개념의 "목자"는 성경에 2번 뿐이 언급이 안됩니다.
대신 "장로(elder:노인,연장자)","감독(Bishop,overseer;관리자,)"이란 이름으로 더 많이 사용됩니다.
"양을 돌보는 자", "나이많은 연륜이 있는자", "관리 감독하는 자"로 조금씩 의미는 다르지만 교회에서 사용될 때에는 모두 같은 직분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예로 예수님을 혼들의 목자와 감독자로 같이 부르는데 역할에 따라 달리 표현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벧전2:25]이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혼들의 목자와 감독에게로 돌아왔음이니라.
딤전3:1-13절의 감독과 집사의 자격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목자로 언급하지 않는데 감독이 목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에 "목자"를 세웠다라고 하지 않고 "장로들"을 선임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목자의 역할을 장로가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장로들이 교회를 "다스리고"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지금의 목사(목자)를 "장로"로 부른 것입니다.
[행14:23]두 사도는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선임하고 금식 기도하며 자기들이 믿는 주께 자신들을 의탁하더라.
[딤전5:17]잘 다스리는(감독의 직분)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사람으로 여기되 특별히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는 일(교사의 직분)에 수고하는 이들에게 그리할지니라.
벧전5:1-3 내가 너희 가운데 있는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베드로)도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며 또한 장차 나타나게 될 영광에 동참하게 될 자라. 너희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고 돌보되(목자의 직분) 마지못하여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준비된 생각으로 하며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자들을 지배하려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즉 목자, 감독, 장로는 각각 다른 단어지만 이들이 하는 일은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동일한 직분을 감당한다는 사실을 알수 있습니다.
만일 지금 장로교에서 하는 것처럼 목사와 장로를 다른 직분으로 가르친다면 베드로는 교회에서 여러 장로들 중에 한 사람으로 목사의 수발을 들고 있어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교회조직은 당회장 목사 아래에 부목사 장로 전도사 강도사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초기 교회의 모습은 교회 성도들 중에 연륜과 성경 지식과 도덕적인 사람들 중에 집사들을 뽑을 때처럼 "감독자들(목자,장로)"을 선출합니다.
그리고 교회는 목자인 장로를 선임할때 한 사람이 아닌 항상 복수 "목자들", "장로들"을 선임하는데 교회는 한 사람 혼자서 관리하거나, 돌보거나,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정치 조직과 비교한다면 대통령 중심제가 아닌 총리가 없는 의원 내각제에 가깝다고 볼수 있습니다.
물론 돌보는 일들 중에 말씀을 가르치는 일도 포함되지만 장로들 모두가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지는 것은 아니였으며[딤전5:17].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주로 성경 "교사"의 역할이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스스로를 목자나 장로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전도자", "사도", "교사"로 임명받았다고 말하였던 것입니다.
[딤후1:11]이를 위하여 내(바울)가 이방인들의 전도자(설교자,preacher)와 사도와 교사(teacher)로 임명을 받았느니라.
[딤전2:7]이를 인하여 내가 전도자(설교자,preacher) 사도로 지명을 받았으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노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들의 교사(teacher)이 되었노라.
하지만 베드로는 스스로를 "장로"라고 칭하였는데(벧전5:1-3) 그는 여러지역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감당한 것이 아니라 한 특정 지역교회(예루살렘 교회,갈1:18)에 머물며 교회를 돌보고 감독하는 사역을 감당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 지역에 머무르지 않고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일을 즉 전도자의 일을 감당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목자나 감독으로 표현하지 않은 것입니다.
- 설교(preach)란 무엇인가? (설교의 정의)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자"는 영어로 "preacher""이며 이 단어는는 성경에서 8번 언급이 되는데 "전도자"로 솔로몬, 노아, 바울, 복음을 전파하는자에게 언급이 됩니다.[전12:8][롬10:14][딤전2:7][벧후2:5][딤후1:11][전7:27]
또한 우리가 "설교"라고 알고 있는 "preaching"과 "preach"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가각 25번,140번 언급이 되는데 주로 "전파"로 라고 번역 사용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설교자는 "노아"이며 처음으로 설교자로 언급한 사람은 사람은 "요나"입니다.
[벧후2:5]또 옛 세상을 아끼지 아니하셨으나 여덟 번째 사람인 의의 전도자(설교자,preacher) 노아는 구원하시고 경건치 않은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느니라.
[욘3:2]"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하여 전파하라고 한 것을 그 성읍에 전파하라(preaching)." 하시니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의 개념은 예배 시간에 "특정 직분을 부여받은 사람이 믿는 이들에게 은혜의 말씀이나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지만 성경에서의 설교(preach)의 개념은 노아나 요나 처럼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의 메세지를 전파하는 것"입니다.[행8:4][딤후4:17][고후10:14][행20:9][고후10:14]
즉 성경에서 일주일에 예배 시간을 정하고 당회장 목사 혼자서 믿는 교인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것을 "설교"로 표현하는 구절은 단 한구절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설교 즉 "전도나 전파"는 특정 직분을 받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도(preching)가 바로 설교(preching) 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설교권"이 라는 말은 하나님을 전할 "전도권"으로 쉽게 표현될수 있는데 . 하나님을 전할 권리를 특정 사람에게 부여하고 마치 전도를 권세 마냥 사용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며 전도권이 누구에는 있느니 없느니 갑논을박하는 모습을 보면 개콘을 보는 듯 합니다.
장로회 헌법에 규정한 설교권 http://blog.naver.com/xaris7/9012949
장로는 설교권이 있는가? http://blog.daum.net/lee_ys/7023400
평신도 설교권 http://blog.daum.net/dwelling/3337842
[행5:42]그들이 성전에서나 각 가정에서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설교)을 쉬지 않더라.
한 예로 집사였던 스테판이 유대인들에게 설교하다가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행6:5~8:2)
오늘날 스테판 집사가 교회에 있었다면 그는 교회에 봉사나 하도록 하고 강단에서 설교할 권한은 절대 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집사이지만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으며 이것이 바로 설교인 것입니다.
전파는 전해지지 않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을 말합니다...이미 전해진 사람에게 전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매주 예배 시간을 정해 놓고 예배당에 모여 하나님을 믿는 교인들을 매주 "전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밖으로 나가 "전도 해야 할 사람들"이 매주 "전도 당하는 것"이 얼마나 우수운 일인지...
즉 많은 이들이 설교를 교회 예배당에서 "믿는 사람들에게 은혜나 감동을 말씀을 주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설교는 말 그대로 "전도"이며 목사가 구지 설교를 해야 한다면 믿는 이들에게 설교해야 할 것이 아니라 "믿지 않는 이들"에게 설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목사들이 하고 있는 설교 즉 "믿는 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교사들"이 해야 할일입니다.
[행13:1]당시 안티옥에 있는 교회에는 몇 명의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는데,
[고전12:28]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 행함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들이며,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여러 가지 방언들이라.
[엡4:11]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설교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와 교사로 주셨으니
[딤후1:11]이를 위하여 내가 이방인들의 전도자(preacher,설교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느니라.
[히5:12]그 때로 보면 너희가 마땅히 교사들이 되었어야 할 터인데 이제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기초 원리들이 무엇인지를 누군가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어야 하니, 젖이 필요한 사람들이지 단단한 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되지 못하는도다.
-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목사의 월급
현대 교회의 목사들은 교회 안에서 평신도가 자신보다 성경을 잘 알거나 잘 가르치는 것을 좋아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자신보다 성경을 많이 알거나 설교를 잘한다면 그가 강당에서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설교의 댓가인 월급을 받을 명분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학교를 나와 목사안수를 받은 목사만이 설교권이 있다고 주장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다음 구절은 목사님들이 월급을 받아야 한다는 근거 구절로 많이 인용하는 구절입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을 전하는(preach the gospel) 사람들은 복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명령하셨느니라".(고전9:14)
그렇다면 내 상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 때(preach the gospel)에 값없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preach the gospel), 복음으로 인한 내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아니하는 것이로다.[고전9:18]
"만일 우리가 너희에게 영적인 것들을 뿌렸다면, 우리가 너희의 물질적인 것을 거둔다 해서 그것이 대단한 일이겠느냐?"[고전9:11]
윗 구절은 현대의 목사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구절인데 "복음을 전하는 것(preach the gospel )"입니다. 즉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은 믿는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믿지 않는 불신자들인 것입니다. 우리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는 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미 복음을 믿은 사람들에게 다시 복음을 전할 필요는 없습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감동과 은혜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의 대부분의 목사들이 매주 하는 설교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하거나 성경을 가르치는 등 성도들을 세우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 즉 "복음으로 살아야할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표현한 구절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적으로 헌신한 사람을 말하는데, 이들은 교회를 돌보는 목자가 될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이들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전파되지 않은 지역으로 수시로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전도자들(복음을 전하는 자들)"과 "목자들" "교사들"을 구분합니다.
여기서 오직 전도자들 만이 물질에 대한 권리를 지니는 것입니다.
[엡4:11]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전도자들(evangelists)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들와 교사들로 주셨으니
즉 바울은 지역교회의 감독이나 목자가 아니였으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설교자 : preacher)" 였습니다.
[딤후1:11]이를 위하여 내가 이방인들의 전도자(설교자 : preacher)와 사도와 교사(teacher)로 임명을 받았느니라.
[딤전2:7]이를 인하여 내가 전도자(설교자 : preacher)와 사도로 지명을 받았으며,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을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노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들의 선생이 되었노라.
[행20:7]그 주의 첫날 제자들이 빵을 떼고자 함께 모였을 때, 바울이 그들에게 설교(preached;전파)하되 다음날 떠날 준비를 하고 한밤중까지 설교(preached전파)를 계속하더라.
바울이 말한 "전도자들" 즉 "복음을 전하는(preach the gospel)자들"에 해당되는 사람들을 지금 찾는다면 선교사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믿지 않는 지역에 가서 교회를 세워야 하기 때문에 지역 교회에서 물질적 지원을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파송(be sent)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와 같이 "화평의 복음을 전하는 자(preach the gospel)들의 발과 좋은 일들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preach) 자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라고 하였느니라."[롬10:15]
즉 이 파송받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해 이들이 받아들이게 되어 교회가 세워진다면 지역 교회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필요 없어지게 됩니다.
복음 전파는 믿지 않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이지 이미 받아들인 자들에 필요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복음을 전한는 자들"은 다른 믿지 않는 이들이 있는 곳을 찾아 다시 보내지게(be sent) 됩니다.
만일 이들이 교회에 정착하여 지역 교회의 목자가 되고자 원한다면 그들은 "양을 돌보는 자"들이 되고 복음으로 인한 권리[고전9:18]는 사라지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일을 하며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바울 이외에 "전도자"의 사역을 했던 사람은 빌립과 디모데가 있는데 [행21:8][딤후4:5]
이들의 사역을 따라 성경에서 찾아보면 이들은 여기 저기 복음을 전하며 한 지역 교회에 머물며 정착하지 않았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행18:5][행19:22][고전4:17][행8:35][행8:40]
다시 말하건데 이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들"은 지역 교회를 돌보는 목자의 사역을 감당 할 수가 없는데 복음을 전하기 위해 수시로 떠나야 하기 때문에 양들을 돌볼수 없는 것입니다.
즉 성경대로 교회가 세워진다면 대형 교회의 고액 연봉을 받는 월급 목사는 절대 만들어 질수 없습니다.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하고 교회를 세웠던 위대한 사도 바울이 왜 "바울 목사"라고 불리지 않았는지 지금의 대형교회 목사들은 이해할수 있을런지 모르겠군요...
바울은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 수시로 복음을 전해야했기 때문에 지역교회의 "교회를 돌보는 사람" 목자나 감독이 될수 없었으며, 중국에 수백개의 교회를 세웠던 워치만니가 능력이 없어서 대형교회의 목사가 되지 않은 것이 아닌 것입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 "복음을 전하는 자들(설교자)" 은 대부분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데 반해 오히려 물질에 대한 권리가 없는 "양을 돌보는 사람" 즉 목사들이 구약의 십일조를 운운하며 더 물질을 요구한다는 것입니다.
윗구절은 결코 현대의 직업 목사들의 월급을 주기 위해 헌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타지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설교자 : preacher)들의 생계를 위해 물질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자신들이 유대인이라고 가르치며 성직자들에게 물질을 바치는 종교가 있는데
이것들을 사탄의 회당, 바빌론 종교를 따르는 창녀 교회라고 부릅니다.[계2:9][계18:2][계2:15]
- 삯꾼과 목자
성경에서 삯꾼이라고 번역된 이단어는 성경에서 일정한 보수를 받기 위해 "고용된 자" (an hireling)""를 말합니다.(욥7:1,2,눅15:17~19)
눅15:19 나는 더이상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자격이 없나이다. 나를 품꾼(hired)의 하나로 삼아 주소서 하리라.' 하고
욥7:1 세상에 있는 인간에게는 정해진 시간이 있지 아니하냐? 그의 날들이 품꾼(hired)의 날들과 같지 아니하냐?
요10:12~13 그러나 삯꾼(고용된 자)은 목자가 아니요,(But he that is an hireling, and not the shepherd) 양들도 자기 양들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려 두고 도망치느니라. 그리하여 이리가 양들을 채가고 흩어지게 하느니라. 삯꾼(고용된 자) 도망치는 것은 그가 삯꾼(고용된 자)이기 때문이며, 따라서 양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느니라.
수 많은 목사들이 교회나 교파에 속하여 월급을 받지만 삯꾼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회 목사를 초빙한다는 많은 광고를 봅니다. 좋게 표현하여 초빙이지 정확히 말하면 목사를 고용하는 것입니다. 고용과 피고용의 구분은 일정한 급료를 주는자와 받는자의 차이인 것입니다.
"목자"는 직업이 아니지만 "목사"는 직업입니다. 양을 돌보는 일은 누구나 할수 있지만 현대의 목사는 누구나 할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나쁜 목자"가 삯꾼이 아니라 "고용된 자"가 삯꾼입니다.
즉 "삯꾼은 목자가 아니다" 라고 성경에서 말하는 바는 목자는 "자신의 생계"와 "양을 돌보는 일"과 연관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워치만니의 "정상적인 교회 생활"에서 목사 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조직이나 사람에게 월급을 받음으로 돈이 그 사람을 지배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가 많은 대형교회의 고액 연봉을 받는 목사들은 양들에 관심이 없습니다. 교회에서 연보를 많이 하는 자들을 우대하고 자신들을 비판을 하거나 반대하는 자들을 정죄하며 쫓아내는 일이 너무나 흔한 일들이 되어 버렸습니다.
앞서 말한대로 "목자"는 "집사"나 "교사"처럼 지역교회에 모이며 각자 "자신의 직업을 지닌 신실한 성도"였으며 누군가에 고용되지 않았고 단지 교회를 위해 자신의 직분을 감당할 뿐이였습니다. 결코 이들을 위해 교회에서 돈을 모아 월급을 준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이러한 목자들은 양들을 돌보기 위해 열심히 일하였고[살후3:11][살후3:10] 그 자신의 물질로 어려운 성도들을 대접하였습니다.[딤전3:2, 5:16]
[살후3:8] 아무에게서도 양식을 거저 먹지 않고 도리어 주야로 수고하고 애써 일하여 너희 가운데 아무에게도 부담이 되지 않도록 했노라.
[살후3: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라 하였노라.
살후3:12 이제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런 자들에게 명하고 권하노니 조용히 일하고 자기 양식을 먹으라.
윗 바울의 명령은 교회의 결코 목자들(감독들, 장로들)을 제외한 일반 성도들에게 만 한 명령이 아니라. 교회 안의 "모든 자" 목자들, 집사들, 교사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구절입니다.
그 누구도 교회 안에서 성경을 잘 가르친다거나, 교회를 잘 다스린다해서, 월급을 주지 않았습니다.
오직 물질의 지원이 필요한 이들 즉 타지에서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과 "과부"나 "고아"등 가난하고 어려운 이들에게만 물질에 대한 권리가 있었습니다.(딤전5:16,요일3:17)
이런 명확한 성경의 가르침이 있음에도 고의나 무지로 진실을 감추고 성경보다는 목사 자신의 말만 듣기를 원하며, 자신이 성직자란 명분아래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일은 어떠한 경우에도 용납하지 못하며 그들을 따르는 교인들을 더욱더 무지가운데로 내몰 있습니다.
목사(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세 증인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현대 교회는 교인들 중 반 이상이 떠나도 결코 목사자리를 내 놓는 경우는 보지 못했습니다.[딤전5:19]
즉 "집사"나 "교사"라는 직분은 그 직분을 감당하기 어려우면 스스로 그만두고 내려 놓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현대의 "목사"라는 직분은 목사 안수를 받는 순간부터 죽고 난 이후에도 목사입니다.
즉 돌볼 양이 없어도 목자인 것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목사의 정의는 "교단 신학교를 졸업한 후 목사 안수를 받아 초빙을 받은자"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목자의 개념과는 너무나 멀다는 것입니다.
- 니콜라파의 교리와 행위 -
[계2:6]그러나 네게 이것이 있으니, 즉 네가 니콜라파의 행위를 미워하는 것이라. 나 역시 그것을 미워하노라.
[계2:15]그리고 네게 역시 니콜라파의 교리를 지키는 자들도 있도다. 내가 그것을 미워하노라.
성경에 2번에 걸쳐서 예수님께서는 니콜라파의 행위와 교리를 미워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니골라당(계 2:6,15) 이콜라파는 "지배하다(conquer)"를 뜻하는 그리스어 "니코(nico)"와 "백성,평신도"을 뜻하는 그리스어 "라오스(laos)"에서 유래하는데 그 의미는 "평신도를 지배하는 자들"입니다.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차이를 구분한는 기준이 세금을 누가 걷고 내느냐의 차이이듯..
평신도와 성직자를 구분하는 가장 큰 기준은 돈을 내는자는 평신도이며, 그 돈을 받는자는 성직자인 것입니다.
- 목사와 교파-
지금의 목사들은 대부분 어떤 교단의 누구의 가르침이나 책을 공부하고 쫓아갑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주로 그들이 세운 신학교에서 이루어 집니다. 어떤 사람의 가르침이나 교리에 속한 자들을 성경에서는 육신적인 사람이라고 불리웁니다...
즉 스스로 어느 교파에 속하여 있다고 자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육신적이란 뜻입니다.
너희는 여전히 육신적인 사람이라.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으니 어찌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며, 사람을 따라 행하는 자가 아니리요?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는 바울에게 속한다." 하고 또 다른 사람은 "나는 아폴로에게 속한다." 하니 너희가 육신적이 아니냐?고전3:3~4
- "목자"인가 "목자들" 인가
바울이 정의한 목자(감독)의 정의는 "지역 교회의 성도중 결혼한 남자로서 신실한 자녀를 두고 있는 성경의 교리를 잘 아는 신실한 자로 성도들을 돌보는 직분을 감당하는 자 "딤전3:1~7 딛1:5~9임 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 바울은 여자 목자를 허락한 적이 없으며[딤전2:12] 신학교를 졸업하거나, 교단에서 안수를 받은 자만이 목자의 자격이 부여된다고 말한 적이 없으며, 목자나 장로는 타지역에서 파송된 사람을 목자로 선출하지 않았으며 오직 지역 교회의 일원 중에 선출되었습니다.
또한 교회는 목자(감독,장로) 한사람이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명의 감독자들이 있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딛1:5]내가 너를 크레테에 남겨 놓은 이유는 너로 부족한 일들을 바로잡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읍에 장로들(elders)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행20:28]그러므로 너희 자신을 조심하고 모든 양떼에게도 그리하라. 이들을 위하여 성령께서는 너희를 감독자들( overseers)로 세우셨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게 하셨느니라.
[엡4:11]그가 어떤 사람들은 사도로, 어떤 사람들은 선지자로, 어떤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로, 어떤 사람들은 목자들와 교사들(pastors and teachers;)로 주셨으니
즉 교회는 결코 목사의 설교가 중심이 아닙니다. 그 설교의 댓가가 월급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만일 설교가 중심이라면 유명한 설교자의 감동적인 설교를 강대상 앞에서 녹음기로 틀어주는 것이 훨씬 효과적일 것입니다. 아니 집에서 티비나 인터넷으로 감동적인 설교를 듣는 것이 더 나을런지도 모르겠군요..
"설교권"을 통하여 잘못된 목사들은 성직자 제도가 더욱 확고히 하고 자신들에 이득에 더하는 말씀만을 전합니다.
즉 현대 교회의 대부분의 문제점과 교회의 타락은 이러한 목사들의 설교권으로 발생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경에서의 설교란 "감동을 주거나 은혜를 주는 말씀"이 아니라 "믿지 않는 자들에게 복음을 외치는 것" 즉 (전도preching)입니다. 내가 직장이든 학교든 자신이 있는 곳에서 믿지 않는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면 그것이 바로 설교인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단 한단어도 나오지 않는 "목사"라는 직업을 만들어 그들에게 설교권을 주고 매주 십일조를 바치면서 그들이 원하는 말만 듣게 됩니다. 더하여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스스로 성경을 찾지도 의심도 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을 할수 없는 지경에 왔습니다.
성경을 조금만 찾고 공부하면 알수 있는 이러한 평범한 진리들을 배울수 있는 방법이 그것을 가르치면 그들의 생계가 위협이 된다는 사실이 참으로 답답한 현실입니다.
결국 교회의 모든 잘못의 문제는 성경에서 스스로 답을 찾지 않는 성도 개개인의 게으름의 결과입니다.
설교(전도preching)라는 한 단어의 정확한 의미를 안다면 얼마나 지금의 교회가 성경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는지 금방 알수 있음에도 결코 그것을 의심하거나 성경에서 찾아보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행하면 지금의 수많은 교단 조직들은 유지되기 힘들 것입니다.
대체신학에 오염되어 구약의 성전은 교회로, 성직자는 목사로, 제사는 설교와 예배로 , 제물은 헌금으로 가르치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
가장 크고 효율적으로 움직이는 교회인 가톨릭 교회를 하나님께서 음녀 교회로 판단하듯이 우리가 효율과 현실의 문제를 고민하는 사이 하나님의 반대편에 서는 것이 아닌지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지금의 천주교와 배교한 개신교의 공통점은 둘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살펴보기 보다는 자신들의 수장들이나 조직이 어떻게 판단하느냐를 가장 관심을 둔다는 것입니다.
윗 내용이 "불편한 진실"인지 "거짓된 주장"인지 각자가 성경에서 찾아 보고 판단하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어떻에 볼것인가? 는 각자의 자유일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믿지 않아도 사실은 여전히 그곳에 있으며 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딤후2:13]우리가 믿지 아니하여도 그는 항상 신실하시니, 그는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 없음이라.
-나눔-
혹시 글 내용 중에 성경적이지 않거나 잘못 이해하는 내용 있다면 조언 바랍니다.
http://cafe.daum.net/dispen/prrp/9(신성남)이란 분의 글을 읽으면서
잘못된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하는 분조차도 성경적인 목사, 설교의 개념이 없는 것 같아 몇자 적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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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고 해석하는 설교의 은사를 가진 사람이 설교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처음이 중요하고 그 처음은 습관인 역사와 문화를 민들어 냅니다.
성경대로 믿지않으며 목사의 말이 성경보다 우선시 되고 또 성경의 얄팍한 지식으로 사람들을 현혹시켜 온것이 한국 기독교 역사임을 자인 할 때 이는 1세기 이상이 지나야 깨달을 수 있는 한국의 믿음생활 문화 일것 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들을 행하면 지금의 수많은 교단 조직들은 유지되기 힘들 것입니다.
대체신학에 오염되어 구약의 성전은 **교회로,** 성직자는 목사로, 제사는 설교와 예배로 , 제물은 헌금으로 가르치고 착각하는 것은 아닌지...**교회로- 성당이나 예배당 건물로
기독교계를 크게 둘로 나누면 대체신학을 따르는 자와 아닌자로 나누고 싶군요.. 이단 교리인 대체신학은 거의 모든 교회가 믿고 있고 대체신학을 거부하는 이들이 거의 없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