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곽재식 선생은 숭실사이버대 교수이다. 최승돈 아나운스가 진행하는 「KBS 라디오 주말 정보쇼」에 나와서는 재미난 과학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듣지는 못했지만 SBS 「김영철의 파워FM」에도 나온다고 한다. 대중에게 다가가는 작가로, 교수로 활동하면서 이런 제목의 추리소설도 쓰는 모양이다.
1. 범인이 탐정을 수사하다. 2. 천사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내려오다. 3. 유령들이 잔치를 벌이다. 4. 도망치던 사람이 영화에 나오다. 5. 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 6.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 7. 손님이 주인을 내쫓다. 8. 마귀들의 울음소리로 음악회를 열다. 등의 소제목으로 된 이야기들인데, ‘코난 도일’과 ‘루팡’, ‘아가사 크리스티’같은 작가들의 추리소설에도 견줄만한 현대적 감각의 추리소설로 이미 다른 책을 읽고 있어서, 이야기 내용을 요약해 여기에 올리지는 못하더라도 읽는 재미를 꾹꾹 눌러 담을 수는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본다.
“완전범죄를 저지르려면 먼저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 하겠군요.”
“운명에 따라서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원수가 우연히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봅시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원수의 손을 붙잡고 힘차게 끌어낸다면 여러분은 원수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일부러 조금만 천천히 달려간다면? 혹은 원수의 손을 붙잡을 때 일부러 조금 느슨하게 붙잡아서 놓친다면? 여러분 때문에 원수는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겠지만, 그게 누구에게나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심하지만 않다면 여러분 때문이라고는 아무도 지적할 수 없을 것입니다.” - 「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중
“저는 대동산업에서 유독성 물질이 섞인 소주가 나왔다고 했을 때, 그 술을 모두 버려야 하니까 대동산업이 큰 손해를 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조사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수로 마시면 죽는 술이 된 그 소주를 비싼 값에 사려는 사람은 서울에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걸 마시고 죽으면 보험 사기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겁니다. 오히려 대동산업은 마시면 죽는 쓰레기 술을 더 비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해방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갑자기 다 나가는 바람에 보험회사에서 업무를 잘 아는 이들이 없어졌고, 그래서 보험 사기를 치기 쉽다는 소문이 돈 것 같습니다. 사람값은 너무 싸고 현금은 너무 부족한 도시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아니라고, 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왜 보험 사기를, 그런 걸 걔가 왜 했겠어요? 갑자기 그렇게 돈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다고.”나는 들고 있던 보고서의 다른 장을 넘겼다.
“제가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산 불하 제도를 살펴보다가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중
사람들은 곧 박사장의 방 안에서 벽을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그곳의 벽 속에 분명히 누가 시체나 사람의 뼈를 넣어두었을 거라고, 틀림없다고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그 모든 것은 공책에 적힌 이야기의 후반부와 비슷해 보인다는 데에도 다들 생각이 비슷했다. 박 사장은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리고 술이 든 잔을 한 손에 들었다. 박 사장은 그 술의 맛을 보았다. “벽에 시체가 들어 있는 방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잖아. 또 한동안은 이 집에서 살게 될 텐데 방을 바꿔야 되나? 어제저녁까지 잘 놀고 잘 자다가 이제 와서 무서워서 도망친다는 게 좀 부끄럽기는 하네.”
- 「손님이 주인을 내쫓다」중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다다이즘’이라는 예술 풍조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술이라면서 꾸미고 짜놓은 것 말고, 남들이 도저히 예술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의미한 것을 예술이라고 내세우면 놀랍고 신기하고 충격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대적인 예술 풍조였습니다. 다다이즘 시대의 시인들을 시를 쓴다면서, 그냥 자기 주머니에 있는 소지품을 다 꺼낸 뒤에 그게 뭔지 차례로 써두고 그게 시라고 주장했습니다. ‘회중시계, 동전 네 개, 껌 종이, 먼지, 텅 빈 성냥갑.’그런 게 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를 발표하고 나면, 그게 현대 산업사회의 나약하면서도 기술에 얽매인 인간 군상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시의 가치를 평가해주었습니다. 그런 다다이즘을 우리나라에서는……”
“따따이즘이라고 불렀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다다이즘 예술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자기 별명을 아예 따따라고 붙여서 자기 이름을 ‘고따따’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 「마귀들의 울음소리로 음악회를 열다」중
황량한 서울 거리를 휩쓴 의문의 사건들, 야행에 나선 탐정의 대추격전
저편에 남선 탐정 사무소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안팎을 들락거리는 분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을 하고 들어오는 힘찬 발걸음, 일을 마치고 나가는 보람찬 발걸음. 요즘에는 백범 김구가 직접 찾아와 남선 탐정 사무소에 일을 맡긴다는 소문까지 있어서, 혹시나 백범을 구경해볼까 하는 영감님이나 아이 들까지 괜히 건물 옆에 늘어서 있었다. -「유령들이 잔치를 벌이다」에서
손님이 없어 파리만 날리는 사무소에서 무명 탐정은 자신의 처지와는 대조적으로 북적거리는, 길 건너편 ‘남선 탐정 사무소’를 하릴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죽인다. 북한이 전기를 끊어버려 불을 밝힐 수 없는 그의 영세한 공간에도, 궁지에 몰린 의뢰인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종의 거래가 성사된 후, 탐문에 착수한 무명 탐정에게 비로소 활력이 돈다. 광복 후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변화의 물결이 거리를 휩쓴 당시의 풍속이 작가 특유의 시원하고 군더더기 없는 묘사에 힘입어 오늘인 듯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속도감 넘치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재빠르게 움직이는 탐정의 부지런함이 더해져 스릴과 재미를 모두 잡았다. 쫓고 쫓기는 추격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수차례의 위기 끝에 사건은 종결된다. 무엇보다 격변기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오랜 시간 작품을 통해 견지해온 작가의 휴머니즘적인 시각이 더욱 뚜렷하게 빛난다.
살아 움직이는 입체적 캐릭터의 향연, 온정 어린 시선을 간직한 곽재식표 누아르
광복 직후 미군정시대(1945~1948)를 거치며 한국 사회를 잠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 남북 분단과 정세의 혼란 속에서 서민들의 살림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본인 소유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노동자는 대량 해고되었으며 생필품은 부족해지고 적산敵産 불하에 한몫 챙기려는 친일파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렸다. 『사설탐정사의 밤』은 경제적 궁핍과 환란이 극에 달한 그즈음의 생활상과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민간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 틈을 타고 벌어지는 암투와 소극을 그린다. 여수순천 십일구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숙청을 피하려 살인범으로 신분을 위장한 인물들(「범인이 탐정을 수사하다」), 겨레와 동포를 위하는 대의에 눈이 멀어 사사건건 사고를 치는 왕년의 독립운동가들과 그들과의 의리를 지키려 거짓으로 사건을 의뢰한 여성 정치가(「천사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내려오다」), 백범 김구를 저격할 목적으로 탐정 사무소를 사용하기 위해 무명 탐정을 외부로 유인하는 무리(「유령들이 잔치를 벌이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형사였다가 광복 후 자신을 유명 경찰학자로 홍보하며 요설을 곁들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꾼(「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 기자 생활을 관두고 인쇄소를 차려 재산을 불린 사업가(「마귀들의 울음소리로 음악회를 열다」) 등은 역사적 격변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계를 보전하며 탈출구를 모색한 민중의 삶을 대변한다. 곽재식은 평범한 인간 내면에 담긴 욕망과 이익을 둘러싸고 교차하는 군상의 상상력을 촘촘히 다룬다. 동시에, 거대한 운명의 파도에 휩쓸린 작은 존재를 향한 연민을 놓지 않고 이해를 목전에 둔 끈질긴 접촉을 시도하며 인간적인 결말에 도달한다.
아스라이 빛나는 영광 뒤편의 허무, 격변기 시대상을 반영한 미스터리 드라마
적산 불하 제도 이야기였다. 해방이 되고 일본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주인이 없어진 일본 사람의 공장이나 건물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정부에서는 심사를 거쳐서 그런 공장을 운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한국 사람을 찾아 넘겨주었다. 미군이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며칠 후 국회에서 새로 법이 통과되고 나면 더 많은 공장이 새 주인을 찾게 될 거라고 했다.
“새 법이 통과되면 대동산업에게 유달리 유리해지는 일이 있는가?” “유리하고 불리하고 할 게 있습니까? 국회의원들이야 해방 전까지 서당 훈장이나 하던 영감님들이고, 해방되고 나서는 동네 애들 몰고 다니며 영어로 ‘웰컴, 웰컴’할 줄밖에 모르던 양반들인데요, 뭘. 법 만들고 폐지하고 하는 것도 이제 갓 돌 지난 정부에서 투닥투닥 애들 소꿉장난하듯이 하는 일이죠, 뭘.”
“대동산업이 일본군 술 공장을 넘겨받기에 적합해 보일 만한 자격은 있나?”
“적합한지 안 적합한지 공무원들이 알 게 뭡니까? 일본 애들 밑에서 머릿수 세는 일만 하던 사람들이 나사못 하나 만드는 일이나 알겠습니까? 그냥 친한 사람한테 넘기는 거죠, 뭘.”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중
오귀스트 뒤팽, 셜록 홈스, 드루리 레인, 푸아로 등 세계문학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탐정의 신경질적인 날카로움과 대비되는 사설탐정사의 정직하면서도 관대한 정신은 일견 브라운 신부를 닮아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소시민적이다. 여느 평범한 삶에서 발견되는 번민의 당사자로서, 두 다리를 쉴 틈 없이 움직여 몸소 생활 전선을 파고들고 많은 순간 주변 인물과의 연대를 거부하지 않는다. 타인의 표정과 몸짓을 순식간에 파악하는 관찰력과 어지러운 인간의 심상을 직관하는 탐정의 통찰력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총 여덟 편이 수록된 이번 추리 연작소설집은 1949년 대한민국의 시대상을 세밀하게 그려 역사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긴박감 넘치면서도 위트가 풍부한 서사 구조로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작가 자신의 숙원이었고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 “1940년대, 1950년대에 나온 옛날 흑백영화 중에 범죄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그 시기에 유행했던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들이 여럿 있다. 특히 하드보일드 탐정이라고 하는, 도시의 뒷골목을 쓸쓸히 헤매다가 가끔 범죄자들과 껄렁한 싸움에 엮이기도 하는데, 그런 싸움에서도 두려움보다는 피곤함을 먼저 느끼는 탐정들이 나오는 이야기” 그 자체인 『사설탐정사의 밤』은 다정한 유머로 세상살이의 고독을 보듬으며 소재의 기발함과 강한 흡인력으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곽재식표 소설의 진수로 다가올 것이다. [인터넷교보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