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
박정희 대통령은 1964년 12월 서독을 방문했다. 전후 잿더
미 위에서 경제 부흥에 성공한라인강의 기적을 직접 눈으로
보고 서독에 차관을 요청하기 위한 나들이였다. 서독 방문 중
박 대통령의 눈길을 확 잡아끄는 기반시설이 하나 있었다.
자동차 전용 고속도로인 아우토반(Autobahn)이 바로 그것이
었다. 1932년 쾰른과 본을 잇는 도로가 처음 개통된 이래 아
돌프 히틀러 치하를 거치면서 아우토반은 독일을 종횡으로가
로지르는 국가 대동맥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아우토반을 본 이후 고속도로 건설은 박 대통령의 꿈이됐다.
지속적인 경제 발전을 위해서는 인프라 스트락처
(Infra-structure), 그중에서도 서울과 부산을 잇는 국가대동맥
의 건설이 시급하다고 굳게 믿었다. 1967년 재선에 도전한
박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선거 공약으로 내놨다.이
공약에 환호성을 올린 사람은 아마도 한국에서 정주영밖에는
없었을 것이다.결국, 유사 이래 최대 규모가 될 역사(役事)는
박정희, 정주영의 합작품이 된다. 언론과 학계는 반대의 목소
리를 높였다.
무엇보다 공사에 들어갈 막대한 자금을 과연 조달할 수 있을
지 의문을 제기했다.
설사 재원을 확보한다 해도 그로 인해 빚어질 인플레이션을
우려했다. 마침 세계은행은한국의 교통량이 경부고속도로를
뚫어야 할 만큼 충분하지 않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언론과 학
계는 이 보고서를 금과옥조처럼 활용했다. 세계은행과 같은 권위 있는 기관이부
정적인 의견을 내자 여론도 부정적으로 돌았다. 당장 세계은행에서 차관을 얻어
쓰는길도 끊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주저앉을 박정희, 정주영이 아니었다. 하루
는 박 대통령이 정주영을청와대로 불렀다. 단둘이 만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태국에서 고속
도로를 건설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 사장이 경부고속도로 건설에 드는 최저 소요 경비를 좀
산출해 봐주시오." 박 대통령은 도대체 돈이 얼마나 들어갈
지조차 파악이 안 돼 답답하던 중이었다.
대통령의 말을 들은 정주영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드디어
2년 전 태국에서 익힌 공사 경험을 한국에서 써먹을 기회가
왔다고 판단했다. 정주영은 즉시 5만분의 1 지도를 들고 한
달 가까이 서울과 부산 사이의 강과 산, 들판을 미친 듯이
돌아다녔다.
주판을 두드려보니 380억 원이라는 계산이 나왔다. 건설부
는 650억 원, 서울시는 180억 원으로 추산했다. 박 대통령은
현대건설이 제시한 금액에 가까운 400억 원에 예비비 30억
원을 추가해 총 430억 원으로 공사비를 책정했다. 이 돈으로
서울과 부산을 잇는 총 428km의 고속도로를 3년 안에 완공하
라는 게 현대건설을 비롯한 17개 건설회사에 맡긴 지상과제
였다. 마침내 1968년 2월 1일, 흥분과 감동 속에 경부고속도
로 기공식이 열렸다.현대건설은 서울~오산, 대전~옥천 등
전 구간의 5분의 2가량을 맡았다. 공사비 책정이워낙 빠듯했
던 만큼 애초부터 큰돈을 벌기는 어려운 공사였다. 그렇다고
기업인이이익을 포기하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기업가는 이익을 남겨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지 국가
를 위해 또는 사회를 위해거저 돈을 퍼 넣는 자선사업가는 아
니다. 기업가들이 사회에 주는 기업의 열매는 소득과 고용을
창출하는 것이면 된다. 어떤 경우에도 이익을 남겨야 하는 것
이 기업가에는번번이 절체절명의 명제였다."
이익에 집착해 탈법 또는 부실공사를 할 수는 없는노릇이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공사기간을 최대한 단축해이
자와 노임을 최대한 절약해야 한다. 정주영, 아니 모든 건설
회사 경영자들에게 공기 단축은 곧 돈이었다. 정주영이 무작
정 공기 단축에 나선 것은 아니다. 그는 당시로써는 천문학적
인 금액이랄 수 있는 800만 달러어치의 중장비를 도입했다.낙
동강 고령교 공사(1953년 착공) 때 20t짜리 크레인 한 대만으
로 무리하게 덤벼들었다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겪은
뒤 장비 확보는 정주영에게 최우선 과제였다.그는 고속도로
공사를 위해 중장비 1천900여 대를 들여왔다. 당시 우리나라
에 있는 중장비가 모두 1천400대 정도였으니 장비에 대한 정
주영의 집착을 읽을 수 있다. '호랑이' 정주영은 현장에 간이
침대를 갖다 놓고 작업을 독려했! 다.공기 단축이 부실 공사
로 이어지지 않도록 꼼꼼하게 챙겼다. 잠잘 시간에는 일하고
,대신 덜컹거리는 44년형 지프를 타고 가면서 잠깐씩 눈을 붙
였다. 차에서 자는 습관은 나중에 울산 조선소 건설 때까지 이
어져 결국 목 디스크의 원인이됐다.
심지어 어떤 때는 지프에서 잠을 자면서 지프는 공사장을
빙빙 돌도록 했다.
직원들은 '호랑이'가 지켜보고 있다는 생각에 게으름을 피우
지 못했다. 돌이켜보면 노동력을 착취한 가혹한 자본가라는
비판을 받을 만도 하다.그러나 약 40년 전 정주영은 현장 노
동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또 한 명의 노동자였을 뿐이다.
그는 노동자가 일할 때 자기만 편하게 쉬는 전형적인 자본가
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는 평생을 두고 자신을 이렇게 평가했
다. "나 자신은 나를 자본가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나는
그저 꽤 ? 括??노동자일 뿐이며,노동으로 재화를 생산해
내는 사람일 뿐이다."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고 기반시설을
확보한 박 대통령 시대의 자본주의 산업화는,우리 사회를
오랜 농업사회에서 공업사회로 단숨에 변화시켰다고 볼
수 있다.
1960년 64%이던 농어민은 80년에 31%로 감소했으며, 중화
학공업화가 진행된 70년대에는 2차 산업이 1차 산업을 능가
하고 중공업이 경공업의 비중을 추월하는 선진국형 산업구조
를 갖추었다. 그 근간에는 월남전 참전용사들이 국내로 송금
한 달러가 기반이 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자료출처 / 월남전과 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