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총재라는 별칭이 익숙한 그는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과 함께 3김으로 불리며, 1960년대부터 2000년 초까지 대한민국 정치를 이끈 거물 정치인이었다. 후세의 사람들이 평하기를 한나라 황제 유방에게는 장량이 있었고 태종 이방원에게는 하륜이 있었듯, 박정희에게는 김종필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5.16 군사정변 때부터 박정희 대통령을 보좌한 최측근이었다.
반면에 영호남 정치 세력에 가려 만년 2인자라는 꼬리표가 붙기도 했지만 대통령 빼고는 다 해본 정치인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풍운아였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공부한 그는 틈틈이 그림과 아코디온 연주를 즐겼다고 한다. 패션감각이 뛰어나 패셔니스타로 불렸고 술에 관한 한 두주불사로 불릴 정도로 애주가였다. 사무사(思無邪) 글귀를 평생의 도리로 삼고 살아온 그는 예술가적 기질이 많아 멋과 풍류를 즐기는 정치인으로 불린다. 그는 작고 후 국립현충원에 안장될 수 있었으나 부인 김영옥 여사 곁에 있기를 원하여 고향인 부여 선영에 안장되면서 그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많은 사람이 감동하기도 했다.
부여에는 그의 조부 묘와 부모님 묘가 있으며, 자신의 묘까지 있어 3대에 걸친 묘를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는데, 각각의 묘에는 어떤 특징이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조부모 묘
▶위치 :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 97-1
김종필은 할머니 밀양박씨 묘를 쓰고 10년 후 태어난다. 풍수의 동기감응은 묘를 쓴 후 태어난 사람이 가장 많은 묫바람을 받는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JP는 할머니 묫바람을 고스란히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곳 묘는 주산에서부터 이어진 용세가 매우 뛰어날 뿐 아니라 풍수에서 요구하는 모든 조건을 갖춘 명당 중의 명당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묘 뒤편의 봉우리에 올라서 바라보면 좌청룡 우백호가 겹겹이 도열하고 있으며, 멀리 빼어난 봉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자리했다. 장쾌하면서도 웅장한 모습에 누구라도 감탄할 정도의 국세를 갖춘 곳이다. 특히 높은 언덕에 당당한 포스로 좌정하면서 용상이 부럽지 않을 정도다.
필자의 40년 경력에서 이런 곳을 볼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일 정도인데, 풍수를 공부하는 분들은 반드시 답사할 것을 적극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부모 묘
부친묘는 부여군 외산면 가덕리에 있었다. 하지만 서향의 묘는 가파른 경사지여서 할머니 묘와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이 떨어지는 곳이다. JP도 이곳의 묘터가 좋지 못한 것을 알았는지 2001년 예산으로 이장한다. 당시 언론에서는 JP가 대권에 도전하기 위해 묘를 이장하는 승부수를 던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DJ가 하의도에 있던 묘를 용인으로 이장하고 3전 4기 끝에 대통령에 당선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새로 이장한 곳은 천산 만산이 내려다보이는 곳이었는데, 발아래 수많은 산들이 도열한 모습 때문에 군왕지지라 말하곤 했다. 그러나 호쾌한 조망에 도취 되어 정작 가장 중요한 물 빠짐을 간과하고 말았다. 8부 능선의 높은 곳에 있다 보니 묘 앞으로 물 빠지는 것이 노골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결국 JP는 이곳으로 부모 묘를 이장하고 급전직하 추락하고 만다.
▶2001년 6월 부여에서 예산으로 이장
▶2001년 7월 산림훼손 고발
▶2001년 9월 이한동 국무총리 탈당
▶2001년 9월 자민련 교섭단체 지위 상실
▶2002년 11월 자민련 의원 3명 탈당
▶2004년 4월 국회의원선거에서 10선 실패
▶2004년 4월 정계은퇴선언
▶2004년 5월 불법정치자금혐의로 집행유예 2년 선고
당시 JP 곁에는 천하의 인재들이 있었지만, 한 평의 땅을 얻는 데는 실패했던 것이다. 이것을 보면 명당을 얻는 것은 돈이나 권력과 무관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JP는 말년에 자신의 행위가 욕심에서 비롯된 부질없는 일이었음을 깨닫고 부모님 묘를 처음 자리했던 장소로 다시 이장하는데, 15년 만에 고향 땅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고 급경사지 땅의 불안정이 바뀐 것은 아니지만, JP는 자기가 뿌린 씨를 자기가 거둔다는 생각과 수구지심의 마음에서 부모님 묘를 고향 땅에 안장한 것이다. 제3장의 입장에서 보면 물이 직수로 빠지는 예산의 묘 터 보다는 나은 곳이니 현명한 판단이었다.
JP 묘
▶위치 : 부여군 외산면 가덕리 132-1
한 시대를 풍미했던 거목이자 풍운아였던 JP는 2018년 향년 92세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묘는 부모님 묘 아래 형제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화장한 상태의 납골묘는 돔형태의 석물로 조성되었고 부인 박영옥 여사와 합장으로 자리했다.
혹자는 JP 가족에게 묘 위에 지붕을 씌운 것이 좋지 않으니 철거해야 한다고 했다는데, 전혀 걱정할 것 없다.
기와 형태의 지붕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 없으며, 오히려 묘에 비를 맞지 않게 하고 있으니 고마운 구조물이다.
가족 묘역은 산기슭에 동남향으로 자리했다. 비록 풍수의 조건은 갖추지 못했지만 양지바른 곳에 전면의 산들이 단아하니 편안한 곳이다. 아마도 무해무득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의 묘지에는 자신이 지은 묘비명이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思無邪를 人生의 道理로 삼고 한평생 어기지 않았으며
無恒産而無恒心을 治國의 根本으로 삼아 國利民福과 國泰民安을 具現하기 위하여 獻身盡力 하였거늘
晩年에 이르러 年九十而知 八十九非’라고 嘆하며 數多한 물음에는 笑而不答하던 者
內助의 德을 베풀어준 永世伴侶와 함께 이곳에 누웠노라
思無邪 : 생각함에 사악함이 없어야 한다.
無恒産而無恒心 : 생활이 안정되지 않으면 바른 마음을 가질 수 없다
年九十而知 八十九非 : 90에 이르고 보니 89세까지도 잘못 살았다.
笑而不答 : 빙그레 웃을 뿐 답하지 않는다
치열하게 살다 간 JP의 묘비명을 읽다 보면 마음이 숙연해짐을 느낄 수 있다. JP와 같은 큰 인물도 그러하거늘 필자와 같은 소인배가 과연 바르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된다.
https://youtu.be/DrNb5Q5lfGw
첫댓글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