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꿀뚝
/손도순
저물어 가는 가을 풍경이 보고 싶어 고즈넉한 고궁을 찾았다. 조용하고 여유로운 경복궁의 단풍들이 어우러져 마음에 녹아든다. 옛집에서 흙을 밟고 노니는 것 같다. 무심코 들어간 뒤 뜰의 '교태전 아미산 십장생' 굴뚝이 눈에 들어왔다. 육각형으로 된 황토색 벽돌로 30단 정도를 쌓은 굴뚝이었다. 주변 담장과 조화를 이뤄 굴뚝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상징처럼 신비했다. 70년대 초, 내가 살았던 집의 굴뚝하고 비교하기 미안할 정도로 고급스러웠다. 옛집의 굴뚝은 슬레이트 지붕 옆에 양철로 돌돌 말아 세워져 있었다. 양철 굴뚝은 궁핍한 살림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내가 여덟 살이 될 무렵에 아버지는 집 짓는 일을 했다. 손재주가 좋아 방구들을 잘 놓았다. 옛집의 굴뚝을 세운 사람도 아버지였다. 특히 아버지가 놓은 방구들은 연기가 잘 빠져나갔다
아버지는 눈을 뜨자마자 담배에 불을 지펴 코로 배출시켰다. 가끔은 어머니보다 먼저 부억으로 나갔다. 마른 솔가지는 탁탁 소리를 내며 불길과 연기가 방고래 깊숙이 빨려 들어갔다. 방고래로 흔연된 연기는 굴뚝을 타고 위로 솟구쳤다가 스멀스멀 아래로 내려와 지붕을 감아 돌았다. 어던 날은 마른 솔가지로 마중 불을 놓고 덜 마른 아까시나무를 태워 세숫물을 데웠다. 아버지는 주로 아까시나무만 해 왔다.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부지런한 사람들이 좋은 나무들은 다 해 가고 없으니 아까시나무밖에 할수 없었단다 아버지만의 크고 몽뚝한 가죽장갑을 만들어 한 손에 끼고 낫으로 분질러 가며 아궁이에 밀어 넣었다. 덜 마른 아까시나무에 붙을 지피면 눈이 매웠다. 굴뚝은 아버지의 한숨처럼 시커먼 연기를 게워 냈다.굴뚝이 막힌 날이나 바람이 부는 날이면 매운 연기가 부억으로 역류해 아버지와 어머니를 위협하기도 했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할 때는 눈물 바람이 불었다. 같 데 없는 연기는 몸을 파고들었다.
열두 살 무렵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형 밑에서 자랐다. 할머니는 재가하고 형도 입대하면서 아버지는 구례에서 논농사를 많이 짓는 황 씨 댁으로 가게 됐다. 그 집에서 온갖 농사일을 했다. 어느 날 손수레에 벼를 싣고 내려오다 언덕에서 굴러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치료도 제대로 못 한 채 3년을 보냈다. 형이 제대하면서 아버지를 집으로 데려왔다. 형은 군 생활을 힘들게 했다고 했다. 그때는 군대에서 죽기도 많이 죽었으니 동생이 걱정되어 군에 보내지 않았다. 그 후로 병역기피자가 됐다. 그래서 전북 남원시 산내면 부운리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했다. 일자리가 있어도 일을 못 하고 숨어 살다시피 했다. 훗날 결혼하고 어머니는 뒤늦게 병역기피자란 걸 알았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생을 많이 했다.
3년 정도 지나자 지서에서 병역기피자를 면해 준다는 소문이 들렸다. 지서에는 이미 많은 병역기피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삼삼오오 서로 염탐하느라 수군거리며 뇌물이나 배경을 쓰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돈도 연줄도 없어 한쪽 구석에 앉아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뇌물을 먹이려는 사람들은 다시 잡혀 들어갔고, 구석에 포기하고 앉아있는 아버지를 부르며 "당신은 돌아가시오." 했단다. 그날 병역 기피자 신세를 면하게 되어 부운리에서 벗어나 조금 더 큰 마을 입석리로 이사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