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초
박 은 주
숲이 어둑하다. 남편은 드리워진 거미줄과 뻗친 나뭇가지를 낫으로 쳐내고, 오빠는 산소로 올라가는 길이 맞는지 확인한다. 두 사람 뒤를 올케와 내가 따라가고, 맨 뒤에 조카가 섰다.
“아, 아가씨. 제피 냄새난다. 몇 발 짝 앞서가던 언니가 조그마한 나뭇잎 하나를 따서 건네준다. “음, 맞네, 제피.” 이 알싸한 향! 엄마가 끓여주신 추어탕에 꼭 넣어 먹던 제피 가루, 바로 그 냄새다. 엄마는 가을 겨울철 나물 된장국에도 제피를 곧잘 넣으시곤 했다. 그 까만 열매에선 아버지 어머니의 고향 땅, 청도 냄새가 나는 것 같다.
1년에 한 번 벌초하러 오는 우리 외에는 거의 인적없는 산이라, 잡초가 우거지고 제멋대로 나뭇가지가 엉킨 산속은 그야말로 봉두난발이 따로 없다. 큰비 지나고 움푹 팬 물길 옆자리 바위 위를 미끄러질세라 조심조심 디딘다. 쓰러져 누운 강대나무를 타 넘고 어둑한 산길을 헤쳐나간다.
드디어 성글어진 숲 사이로 파란 하늘과 산마루가 보인다. 아, 이제, 다 왔다. 솔숲에 둘러싸여 아침 햇살 받은 두 분의 산소가 안온하다. 다행히 멧돼지가 파헤친 흔적 없이 봉분은 깨끗하다.
남자 셋은 도착하자마자 낫으로 산소 주변의 잡초를 부지런히 베기 시작한다. 어느새 오빠와 남편 얼굴에서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작년부터 서울에서 내려와 서투른 낫질이지만 벌초하는 조카의 뒷모습이 대견하다. 산소 위의 풀을 뽑고, 올케는 할아버지 묏등을 나는 할머니 묏등을 돌아가며 꼭꼭 밟아드렸다. 내 눈길이 두 분의 쌍분 사이 서 있는 검은 비석에 가닿는다. 30여 년 전 어머니가 세워 드린 할머니의 열녀비다. 세월에 묻힌 사연들이 한 올씩 흘러나온다.
할머니는 스물한 살 꽃다운 나이에 혼자 되셨다. 혼인한 지 1년도 채 안 돼 홍역에 걸리신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시자, 자식도 없이 청상과부가 되신 것이다. 그 처지를 딱하게 여긴 시동생인 친가 할아버지가 장가들어 첫아들을 낳자마자, 형수에게 양자로 안겨주신 아들이 바로 우리 아버지셨다. 그러니 원래는 이 산소에 계신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버지의 큰아버지 큰어머니이신 셈이다.
할아버지는 100년도 더 전에 돌아가신 분이니 뵌 적은 물론, 그분에 관한 이야기조차 들은 적이 거의 없다. 성품이 꼿꼿하고 호랑이 같으셨다는 할머니의 얼굴이나 목소리도 구 남매 막내였던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정작 떠오르는 기억은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장삿날의 고적했던 집안 풍경이다. 한옥 대청마루에서 어린 나를 무릎에 누이시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시던 아버지 모습이 꿈인 듯 스쳐온다. 아버지 대신 어린 상주가 된, 나보다 세 살 많은 우리 집 외동아들인 오빠마저 엄마와 다른 식구들과 고향 장지로 떠나고, 아버지와 나 둘만이 집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두 돌도 채 되기 전에 아버지가 갑자기 병석에 누우셨고 그 3년 뒤 할머니가 돌아가셨으니 내 나이 다섯 살 무렵이었다.
삼칠일부터 품에 받아 안고 애지중지 키운 아들이 당시 수재들만 다닌다는 사범학교에 들어가자, 할머니는 사시사철 밤낮으로 무명, 삼베 길쌈해서 마련한 돈으로 아들의 학비를 대셨다고 한다. 그 아들이 존경받는 선생님이 되고, 참한 규수와 혼인하는 것을 지켜보던 기쁨도 잠시, 엄마가 내리 딸 일곱을 낳으셨을 때 할머니의 근심과 실망은 대단하셨다고 한다. 대 잇기를 중시한 당시의 관습이나 할머니의 처지를 생각하면 그 심정이 오죽하셨을까. 드디어 여덟 번째로 손자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우물가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니 얼마나 기쁘셨으면 그러셨을까.
하지만 그 행복조차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닥친 병마로 마흔을 갓 넘은 아들이 몸져눕고 수술후유증으로 청각까지 마비되는 불행이 찾아왔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박복함 때문이라 노심초사하시다 중풍으로 쓰러지셔 끝내 돌아가셨다. 할머니의 애달픈 삶이 눈물겹다.
한창 꿈을 펼칠 나이에 날개 꺾인 새 같은 처지가 되어 지성을 다해 키워주신 어머니 장례에 상주 역할도 제대로 못 하신 아버지의 회한과 슬픔, 그리고 일순간 병든 남편 대신 열한 식구 대가족의 가장 역할을 해야 했던 어머니의 가없는 희생을 생각하면 또 가슴이 먹먹해진다.
오랜 시간 꽁꽁 얼어붙은 땅을 쉼 없이 쟁기질해 가꾸신 밭에 마침내 파릇하니 풀씨가 돋는다. 30년 후, 어머니는 할머니의 열녀비를 두 분의 무덤 앞에 기필코 세우셨다. 그 긴 세월 동안 남편 병간호하시며, 온갖 시련을 헤쳐가며 키우고 공부시킨 자식 8남매가 장성해서 온전히 세상에 자리 잡자, 가슴속에 간직했던 평생의 숙원을 이루신 것이다.
비석을 세우던 날, 엄마는 산에 올라와 두 분의 무덤 앞에 술잔을 올리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시고, 잔치가 열린 고향 마을회관에선 당신이 지은 가사歌辭 한 편을 읊조리신다. 스물한 살 새색시가 홀몸이 되어 일흔아홉 살로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물색 옷 한번 걸치지 못하시고, 조카를 양자로 받아 그 아들을 등대 삼고 대들보 삼아 사셨던 시어머니를 기리시며…….
벌초를 마친 산소가 파르라니 말쑥하다. 올케가 준비해 온 제수 음식들을 상석 위에 차려 놓았다. 오빠가 향을 피우고 잔을 올린 뒤 모두 함께 절을 올렸다.
산소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떠난 신랑을 못 잊어 새색시가 매일 그곳만 바라보며 눈물로 지새울세라, 동네 문중 산이 아닌 윗동네 깊은 산마루에 묻히셨던 분, 이제 그 할아버지 옆에 할머니가 나란히 누워계신다. 생전에 “내사마 죽어서 같이 안 묻힐란대이. 새파란 청년하고 우째 함께 살끼고.” 하셨다지만 그 말씀이 어찌 진심이었을까? 이승에서 못다 한 부부의 정을 저세상에서 오순도순 나누시라 빌었다.
제를 지내고, 산소 앞에 둘러앉아 송편과 전, 과일을 음복했다. 두 분이 우리 곁에 와 계신 듯 주위가 유정有情하고 따듯하다. 동네방네 업고 다니며 자랑하셨다는 손자는 얼마나 반갑고, 금지옥엽 증손자는 또 얼마나 미쁘고 든든하실까. 만면에 웃음 띠시며 기뻐하시리라. 해마다 하나뿐인 처남과 형제 삼아 벌초를 함께 하는 손녀사위에게는 “고맙네, 권 서방.” 하며 손을 내미실 것 같다. 따스한 그 두 손을 꼬옥 잡고, 당신들의 얼굴을 마음에 담고 싶은 이 손녀의 마음도 아실까?
산꼭대기 소나무 숲, 솔정〔솔頂〕이라 이름 붙은 산소 주변 솔숲을 천천히 걸어보았다.
갈피 쌓인 산 흙은 폭신하고, 뒹구는 솔방울들이 정겹다. 여기 이웃 마을 솔정에 오도카니 두 분만 계셔 외로우실까? 아니, 아니, 그렇지 않으시겠지. 서로 두런두런 말벗하시다, 아침마다 산까치가 물어다 주는 산 너머 아랫동네 소식을 들으실 테니까.
“내년 추석 전에 또 올게요, 그동안 편안히 계세요.” 할머니, 할아버지께 인사드리고 이제 부모님이 계신 곳을 향해 산길을 내려간다. ‘오늘은 산까치 대신 두 분 안부를 내가 직접 전해드려야지.’ 마음은 벌써 날개를 달고 고향마을 양지바른 산기슭 아버지 어머니 산소로 가 있다.
초가을 숲에 비치는 볕뉘가 곱고도 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