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아이를 축복하신 예수님. 子供たちを祝福されたイエス様。( 2024년 5월 5일 주일예배)
https://youtu.be/1q1XGPhDRs0
본문: 마가복음 10:13~16
막 10: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것을 보시고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13. イエスに触れていただくために、人々が子供たちを連れて来た。弟子たちはこの人々を叱った。14. しかし、イエスはこれを見て憤り、弟子たちに言われた。「子供たちをわたしのところに来させなさい。妨げてはならない。神の国はこのような者たちのものである。15. はっきり言っておく。子供のように神の国を受け入れる人でなければ、決してそこ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16. そして、子供たちを抱き上げ、手を置いて祝福された。
지난 주일에는 성서일과의 본문으로 말씀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우연하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것이... 그리고 사소하게 보이는 그 어떤 일이... 실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와 섭리를 완성하는 귀중하고 태초부터 설계된 치밀한 계획의 일부라는 말씀이었지요. 그 계획과 섭리 가운데에 우리의 오늘이 있음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사소한 것과 우연적인 일들을 주님의 시선으로 볼 수 있는 기적의 주인공들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면서 또한 어린이날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어린이주일을 지키면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주님의 말씀으로 넘치는 사랑과 은혜를 체감하실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람들이 자신의 어린 자녀들을 예수님께 데리고와서 축복을 받으려는 와중에 제자들이 나서서 그 부모들을 제지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노여워하시며 저지하시는 장면입니다.
현 시대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말씀과 반응이 매우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겨집니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어린이와 자녀는 미래의 소망을 현실에 구현해 줄 수 있는 소중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연약하고 나약한 어린이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오늘날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상식에 속하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종종 어린이들이 올바른 대접을 받지 못하여 불이익을 받거나, 혹은 나쁜 일을 당하거나 하는 소식을 듣고 뉴스를 접하게 되면 대부분 사람들은 분노하기 마련이지요.
하지만, 당시에는 어떠했을까요? 제자들의 반응은 실은 매우 상식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당시의 어린이는 사람취급을 받지 못하는 존재였습니다. 사람취급을 받지 못할 뿐이 아니라, 한 집안의 도구와 그 가장의 소유물처럼 여겨지는 존재였습니다. 물론 신분에 따라서 더욱 더 물건취급을 당하거나, 집에서 키우는 가축처럼 여겨지는 경우까지도 있었지요.
요즘은 어린이들이 주인공인 행사나 혹은 장소들도 많이 있습니다. 어린이 전용의 영화나 상점들도 있지요. 어른들의 용품보다 어린이 용품이 훨씬 많은 비용으로 만들어지기도 합니다.
이처럼 우리의 시대가 어린이의 존재감을 귀하게 여기게 된 계기는 사회와 지역마다 역사가 다릅니다. 하지만, 성경의 가르침이 그 역사의 가장 깊은 배경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시편에서는 어린이의 존재감을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2)
아무리 대단한 권력자이며 실력과 재능을 갖춘 권세자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권능을 맡기지 않으면 어린아이나 젖먹이에게도 미치지 못한 존재라는 것인데요.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 가장 연약하고 무익하며 무용한 존재들을 주목하고 계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제자들이 서로 누가 더 큰 사람인가, 누가 더 존재감이 두드러지는가를 논쟁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 아이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또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라 너희 모든 사람 중에 가장 작은 그가 큰 자니라 (눅 9:46)
오늘 본문과 맥이 통하는 말씀이지요.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는 말씀이나...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나 일맥상통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다만 오늘 말씀에서는 제자들이, 즉 세속의 상식이 어린이와 같이 무익하고 존재감없는 이들을 경솔하게 여기는 상황에서 주신 말씀이구요. 누가복음의 말씀은 제자들이, 즉 세속의 상식이 말하는 크고 강함에 대해 논쟁하는 상황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할 메시지는 단지 ‘어린이’라고 하는 작고 귀여운 사람... 미래가 활짝 열려 있는 사람... 살아갈 날이 더 많이 남아 소망이 더 많은 사람에 대해서 더 관심을 가져야 미래가 밝다고 주장하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가치를 변호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구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지만, 일부 선진국들은 출산율이 급격히 줄어들어 어떤 나라는 향후 500년내에 그 존재가 사라질 것이라고 예측하는 극단적인 결과도 있는데요. 그 어떤 나라란 대한민국을 말합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바라지요. 그래서 이러한 인구절벽과 감소를 막기 위해서 여러가지 정책과 인식변화를 도모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자녀들을 양육하고 교육하는 일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어린이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 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이 어린 아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으로 말씀하시고, 하나님을 영접하듯 어린 아이 한 명을 영접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인구절벽과 민족소멸을 걱정하는 차원의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린 아이와 같은 믿음을 갖고, 어린 아이와 같이 미약한 존재를 하나님처럼 여기라는 명령은 세속의 가치관으로 사람을 보는 눈을 바꾸라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속적인 입장에서 무용한 이들, 세속적인 관점에서 그다지 인기가 없고, 관심을 받지 못하는 사명들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는 말씀인 것이지요.
세속적인 입장에서는 열 명의 어린이보다 한 명의 어른이 일을 더 잘 해낼 수 있습니다. 세속적인 입장에서 자유분방하게 제 멋대로 움직이는 어린이보다, 말귀를 잘 알아듣고 통제가 잘 되는 어른 한 명의 가치가 더 유용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사람이나, 환경이나, 물건이나, 주어지는 삶의 자리를 헤아리지 말고, 주님께서 보게 하시는 시선으로 보라는 말씀이지요.
바울은 세속적인 시선에서 자랑할 것이 많던 고린도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고전 1:27-28)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 15:43)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고후 12:9)
만일 우리가 여전히 더 강한 것을 갈망하고, 더 유능한 것을 바라고, 더 큰 것을 갈급해하고 있다면... 주님을 더 바라보아야 합니다. 더 주님의 시선을 의식해야 합니다. 더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 주님께서 얼마나 낮아지셨는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성경은 고백합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 2:6-8)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약하고 무능한 인간의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태어나셨습니다. 왕궁에서 나지 않으셨고, 가난하고 미천한 신분인 목수 요셉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온갖 궂은 일을 하는 직업으로 30여년을 사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사람들의 오해와 가장 똑똑한 제자로부터 배신을 당하시고 비효율적이며 비능률적인 연약한 어린 양의 모습으로 희생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에 감당하신 모습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렘 31:3)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에 구체적으로 나타나신 것을 우리는 십자가를 보고 압니다. 어린이들을 볼 때 그들의 외모나 행동이 귀엽고 사랑스럽기에 귀하게 여기는 것은 감정적이며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들이 비록 무용한 존재이고, 비능률적인 존재이고, 혹은 미래에 어떤 유익을 가져다 줄 것으로 기대할 존재로 볼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통해 연약함이 곧 강함이 되는 신비와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린이주일을 지키는 것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의 자녀들을 섬기고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며, 또한 동시에 내가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원한 자녀인 것을 기억하며 감사하는 것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그분의 자녀인 것을 믿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롬 8:15)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자녀답게 살 수 있게 힘을 주시는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다른 어떤 방법들... 나름대로의 경험들... 지금까지 쌓아 왔던 지식과 지혜들을 사용하기 전에 먼저 주님을 바라보며 주님 앞에 내려놓고 주님께서 하라시는대로 순종하며 따르기로 결단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어린 아이가 아무 고민이나 걱정 없이... 전적으로 어른과 부모를 의지하고 따르는 것처럼... 우리가 주님만 바라보고 따르기로 결단할 때 주님께서 반드시 힘 주시고, 피할 길을 주시고, 은혜를 채우실 것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에서 지키는 어린이주일은 어린이를 챙겨주고 축복하며 또한 관심을 기울여 주인공으로 세워주는 주일입니다. 그러나 세간에서 하듯이 이날 하루만 어린이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마는 날로 여기는 것은 오히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제대로 듣지 않는 것입니다. 이 땅의 어린이들과 우리의 자녀들을 축복하며 동시에 우리가 주님의 자녀가 된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고 찬양하는 날입니다. 어린이와 같은 연약하고 무용한 존재까지도 축복하시고 사랑하신 주님께서,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존재였을 때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속죄의 제물이 되어 주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린이와 자녀들을 축복함으로서 자신을 축복하고 사랑하시는 우리 주님의 임재하심과 동행하심으로 넉넉한 은혜를 누리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