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즐거움 찾기
편 영 미
나뭇가지 끝으로 가을이 살짝 보이는 날, 바람이 찾아와 나뭇잎들 사이를 부지런히 오가며 스르르륵 사르르륵 연주를 한다. 이맘때 가을 나무가 들려주는 음악 소리가 좋아 가을을 기다리기도 하는데, 올해는 썩 반갑지만은 않다.
올해 초 수필교실 선생님과 가까운 문우들에게 ‘한 달 한 편 쓰기’를 선언하며 한 해를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수필 시간 과제인 글 한 편 쓰기가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왔다. 스스로 글쓰기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려 애써보았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뭔가 대책이 필요할 것 같아 한 선언이고 자신에게 한 약속이기도 한데, 지키지 못한 채 결실 없는 가을을 맞고 있다.
상반기엔 예상치 못한 일들로 바빠 수필 수업도 듣지 못했다. 한 달 한 편 쓰기는 고사하고 반년이 넘도록 한 편도 쓰지 못했다. 바쁘다는 것은 구차한 변명일 것이다.
여름 방학 동안 격주로 진행되는 수필 특강을 들으며 글쓰기는 더 큰 압박감으로 다가왔다. 과제 제출 날은 다가오고 글은 한 자도 써지지 않는다. 몇 해 전부터 활동하고 있는 수필문학회 문집에 ‘어머니’ 특집을 싣는다고 한다. 시어머니 이야기를 쓰려고 머릿속으로 스케치를 하고 있지만, 키보드 위 손가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하얀 시트 위 껌뻑이는 커서만 보다 노트북을 접는다.
속절없이 시간은 가고 애만 태우다 선생님께 전화를 드린다. 글이 써지지 않는다고 답답한 마음을 전했다. ‘그럴 땐 좀 쉬어가는 것도 방법이지.’라고 해 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다음으로 순서를 바꿔 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한꺼번에 다 쓰려고 하지 말고 주제에 맞는 소재를 한 단락씩 써 연결하라고 하신다. 글감을 찾는 법이며 여러 조언을 아끼지 않으신다. 그 방법들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그냥 글이 써지지 않는다.
어렵고 힘들게 모든 에너지를 쏟아부어 마감일 시간을 꽉 채워 글을 보냈다. 하지만 과제를 하고 난 후에도 머릿속은 여전히 복잡하고 마음은 편치 않다.
쓰고 싶은 것이 없는 것도 아니다. 몇 해 전부터 틈틈이 걷는 지산샛강생태공원의 사계를 세심한 묘사로 그리듯 써보고 싶고, 조지훈 시인의 시로 시 퍼포먼스를 기획해 전국 대회에 출전한 과정도 기록해 두고 싶다. 또 작년 연말 다녀온 포르투갈과 스페인 여행기도 쓰고 싶다. 아, 마음과 달리 쓰고 싶은 것들은 머릿속에서만 맴돈다. 막상 쓰려고 하면 기차처럼 길게 늘어져 있던 문장은 단어로 토막이 나고 어느 순간엔 자음, 모음으로 흩어져 깨알만큼 작아져서 사라진다.
하반기 과제 제출일이 결정되고 여러 날 책상 앞에 앉아 있지만 하얀 시트 위 커서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글이 써지지 않는 막막함을 문우에게 넋두리하자 그 막막한 감정들을 글감으로 해서 써보라고 한다. 그래 뭉친 실타래의 끝이라도 찾아보자는 심정으로 처음 글쓰기를 할 때 어떤 마음으로 시작했는지를 되돌아본다.
살아가면서 내 안에 드는 생각과 느끼는 감정들을 단정하게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공부이다. 쉽게 생각한 것은 아니었지만 새로이 문법을 익히고 글감을 찾고 특히 지금도 쉽지 않은 띄어쓰기는 큰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단어들을 알아가고 손끝으로 다듬어지는 문장들은 마른 가지에 새잎을 피우는 듯한 생기를 주었다. 주제에 맞는 소재들이 몽글몽글 피어나는 기쁨 또한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글감이 생기면 사정없이 썼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마음 닿는 대로 쓰다 보면 세 페이지는 거뜬히 넘긴다. 주제에서 벗어나는 소재들은 빼고 보충할 것은 찾아 넣으며 기승전결 글을 구성하고 완성해 나가다 보면 쓰는 부담감은 유연하게 즐길 수 있었다. 그 즐거운 부담감은 어디로 갔을까?
며칠 전 하반기 과제를 조금 일찍 보내 달라는 선생님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과제 제출 날 밤이 깊어가는데도 보내지 못하고 있다. 가을비 내리는 10월 마지막 밤 창밖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나뭇잎들은 형형색색 물들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다. 아마 선생님은 메일 도착 알람 소리를 기다리시다 잠자리에 드셨으리라. 아, 내일은 수필 수업 있는 날, 선생님을 뭔 낯으로 뵈어야 할지? 글을 어떻게 마무리 지어야 할지를 고민하며 마감 시간을 넘겼다.
과제를 보내고 난 후의 아침은 11월 1일, 수필 수업을 하는 날이다.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수필 수업에 참여했다. 선생님은 인디언 아라파호족은 11월을 ‘모두 다 사라진 것은 아닌 달’이라고 부른다며 ‘그렇다면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일까, 낙엽 밟는 소리가 아닐까?’ 하시면서, ‘11월엔 낙엽 밟는 소리가 가장 명쾌하게 들리는 달’이라고 하신다. 바스락 바스락 낙엽이 연주하는 소리가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모든 게 사라진 것이 아닌 달’이란 말이 커다란 위안을 준다.
글쓰기의 즐거움도 어디로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닐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