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불교에서 「참나」를 찾으라고 수행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불교를 1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
고정불변한 마음이란 불교에는 없다. 마음은 무상하고 실체가 없는 것이며 연이생(緣而生, 조건발생, 연기)일 뿐이다. 초기경의 도처에서 부처님께서는 이 사실을 강조하고 계신다. 고정불변한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외도의 아뜨만(자아) 이론이 되어버린다. 불교는 마음을 비롯한 일체법(유위법)들의 무상과 고와 무아를 설하는 가르침이며 그래서 무상․고․무아 혹은 무상․무아․열반은 삼법인으로도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
마음은 무상이라고 하고 찰나생․찰나멸이라 하고, 인셩생이라 하고, 실체가 없다고 하면 많은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마음은 아무 것도 없는 것이냐. 그렇다면 불교는 허무주의냐.’고 항변할지도 모른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은 마음이 무상이요 찰나생멸하고 흐름이며 연이생이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은 결코 허무주의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고정불변한 마음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마음은 흘러간다.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근본원인인 갈애와 무명, 탐진치가 있는 한, 우리가 의도적 행위(업)를 계속해서 짓는 한 마음은 이러한 것을 조건으로 하여 쉼 없이 연속적으로 지속적으로 거듭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갈애와 무명이 있는 한 중생의 삶은 한 생에서 다음 생으로 쉼 없이 흘러가는 것이다. 이것이 불교에서 말하는 윤회(輪廻)이다. 갈애가 다 할 때 마침내 이러한 흐름은 끝이 나게 되며, 이것을 무여열반이라 하고 반열반이라 부른다. 그러므로 무상이나 찰나생멸이나 실체 없음을 강조하여 설한다고 해서 결코 허무주의가 될 수 없다. 오히려 실체가 없기 때문에 매찰나 지금여기에 충실하게 된다. 그래서 임제스님은 수처작주(隨處作主, 만나는 곳마다 주인이 된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출처 : 각묵스님 (초기불교에서 마음)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