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꿀뚝
아버지의 모습을 진정으로 마주할 수 있게 됐을 때, 얼굴은 주름이 가득했고 몸은 하루가 다르게 수분기 빠진 명태 처럼 말라갔다. 생신날, 밀물처럼 우르르 밀려왔던 육남매가 한꺼번에 돌아가면 홀로 남은 텅 빈자리가 허전하고 두렵지 않았을지. 남매가 한꺼번에 금연구역을 벗어나 구석진 곳에서 참아왔던 담배를 꺼낼 때 아버지를 보면 마치 어린아이가 소원하던 과자를 손에 받아 들고 미소를 짓는 것 같았다. 여태껏 보지 못한 생소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을 보며 어떠한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아물어가듯이 나의 원망도 사그라들었다.
배출구가 없이 불기만 한 풍선은 결국 터지고야 말 듯 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아 입원하셨다. 병원에서는 전립선암이라고 했다. 다행히 수술하면 랜찮을 거라고 했다. 수술이 잘되어 퇴원할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잦은 기침이 심해져 퇴원할 수가 없었다. 다시 폐 CT 촬영을 했다. 거기서 뜻하지 않은 폐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암이라는 바윗덩어리 앞에 무기력해졌다. 방바닥에 방구들을 놓던 시절은 멀어져 가고 가슴에 묵직한 침묵을 올려놓았다. 의사는 연세가 있어 수술이 어렵고, 약으로 치료할 수밖에 없다고 했다. 점점 기침은 심해졌고, 기관지에서 들려오는 숨소리는 커져만 갔다. 한 달 정도 자식들 간호를 받던 아버지는 나지막 한 신음으로 '장미'와도 이별했다. 당신의 죽음보다도 더 끓을 수 없었던 담배, 삶의 무게를 담배에 의지하며 한평생을 살았는데 몸의 굴뚝은 더는 견더내지 못했다. 임종 때 말씀은 못 해도 들을 수는 있었을 텐데 손도 잡지 못해 후회가 남는다.
나의 삶이 아버지를 잘못 만나 힘들었다고 생각하고 살았던 내가 어리석었다 마지막 의식인 화장을 하는 동안 불가마 앞에서 나는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화로 실 아궁이가 보이는 유리창을 두고 묵은 침묵이 내러앉았다. 생의 언저리에 아버지의 삶 속에 파고들었던 크고 작은 일들이 씀벅씀벅 머리를 스쳤다. 돌이켜 보면 무엇 하나 녹록지 않았던 날이 많았던 아버지와 나. 지상에서 아득바득 살아온 시간이 연기처림 흘러 자연으로 스며들었다. 기억이란 원래 양면성이 있어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희미해진다. 어느 순간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왜곡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그래서일까. 지나간 시간을 열면 그리움과 아픔이 한꺼번에 몰려든다 계절의 순환처럼 응고된 슬품도 물컹하게 변형되었다 아버지의 삶이 고궁의 굴뚝같지는 않더라도 벽돌로 쌓아 올린 정도만 되었더라면 나았을까? 기억은 멀고 추억은 점점 가까워져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