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산[修道山]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산.
개설
우면산에서 매봉산으로 이어진 지맥 가운데 북쪽 방향으로 작은 능선이 뻗어서 역삼동 국기원(國技院) 근처의 역삼공원 구릉[84m]을 이루고, 다시 동쪽으로 나아가 삼성동 봉은사 뒷산인 수도산[75m] 봉우리를 형성한다. 수도산 북쪽 기슭에는 경기고등학교가 있고 남쪽 기슭에는 봉은사가 있다. 현재 수도산은 봉은역사공원이 되었다.
명칭 유래
수도산(修道山)이라는 명칭은 봉은사의 역사와 함께 이해할 수 있다. 1548년(명종 3)에 보우(普雨)가 봉은사 주지로 부임하고 당시 섭정을 맡고 있던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옹호로 불교 중흥의 기반을 마련하면서 봉은사는 조선 최대의 명찰(名刹)이 되었다. 1551년(명종 6)에는 선종의 승과(僧科)가 부활하고 봉은사는 선종수사(禪宗首寺)로 지정되었다. 그 이듬해 보우가 선릉 동쪽에 있던 봉은사를 현재 위치인 수도산으로 옮겨 세웠다. 따라서 수도산이라는 명칭은 선종 사찰의 성격을 가진 봉은사가 입지한 사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자연 환경
2002년 조사결과에 따르면 수도산에는 아카시나무숲이 우점하고 있는 곳으로 파악되었다. 또한 수도산 기슭에 위치한 경기고등학교에는 멧비둘기·직박구리·개똥지빠귀·붉은 머리오목눈이·쇠박새·박새·참새·까치 등 10종 71개체의 야생조류가 서식하고 있음이 확인되었다. 이 수치는 강남구 내 학교 녹지 중에서 가장 많은 것으로 수도산이 양호한 생태 환경을 지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현황
수도산 녹지를 중심으로 조성된 봉은공원(奉恩公園)과 삼성공원(三成公園)은 역사공원 및 근린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들에게 역사교육과 휴식 장소를 제공하고 있다. 1498년(연산군 4)에 정현 왕후(貞顯王后)가 선릉의 원찰로 중창한 봉은사는 대웅전·판전·선불당을 비롯하여 20여 개의 전각으로 구성된 가람이다. 봉은사가 입지한 일대는 1971년 근린공원인 봉은공원으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에 역사공원으로 변경되었다.
참고문헌
『강남구지』(강남구, 1993)
『서울의 산』(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7)
『강남의 향토문화 기행』(강남문화원, 2001)
『강남구 공원녹지분야 장기발전 기본계획 및 기본설계』(강남구, 2002)
『강남구 향토지』((사)대한노인회 강남구지회, 2003)
강남구행정자료도서관(http://ebookroom.gangnam.go.kr)
배우리의 땅이름 기행(http://www.travelevent.net)
서울특별시e문화복덕방(http://culture.seoul.go.kr)
서울의 공원(http://parks.seoul.go.kr/park)
강남구청(http://www.gangnam.go.kr)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소요산[逍遙山]
경기도 동두천시와 포천시 신북면에 걸쳐 있는 산.
개설
소요산의 높이는 587.5m이고, 산세가 웅장하지는 않으나 석영반암의 대암맥이 산능선에 병풍처럼 노출되어 성벽을 이루고 있는듯하며, 경기소금강(京畿小金剛)이라고 할 만큼 경승지이다. 동두천역에서 약 4㎞ 떨어져 있는데, 소요산 하면 진달래·단풍·두견과 폭포를 연상할 만큼 꽃과 단풍으로 알려진 산이다.
명칭 유래
974년(광종 25)에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서화담과 양사언과 매월당이 자주 소요하였다고 하여 소요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자연환경
소요산의 입구에 청량폭포(淸凉瀑布) 및 원효폭포가 있는데, 청량폭포가 있는 곳을 하백운대(下白雲臺)라 하고 그 위쪽의 원효폭포가 있는 곳을 중백운대라고 한다. 원효폭포 주변에는 방음봉·이필봉·약수봉 등의 봉우리들이 솟아 있다. 신라시대 원효가 세운 자재암(自在庵)에서 30미터 돌층계를 올라가면 그 위쪽으로 중백운대와 상백운대가 있다. 중백운대와 상백운대를 거쳐 나한대, 의상대에 이르게 된다. 산의 정상에서 보면 북쪽으로는 한탄강이, 남쪽으로는 서울방면의 산맥이 굽이쳐 전망이 매우 좋다. 추가령구조곡이 산의 서쪽으로 지나간다
현황
소요산은 수려한 자연경관과 수많은 전설이 많은 명승지를 품고 있다. 처음 계곡을 오르면 원효폭포가 있는데 이곳이 하백운대다. 그 오른쪽에 원효대사가 앉아 고행을 했다는 원효대가 있으며, 이를 지나면 백운암(白雲庵)이 있다. 백운암을 지나 오르면 소요교가 있고 이를 건너면 자재암(自在庵)이 나타난다. 그 앞에 청량폭포는 중백운대이고 이곳에는 옥로봉, 관음봉, 이필봉 등 기묘한 봉우리들이 있다. 옥로봉을 넘어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나한대와 의상대가 있는데 이곳이 상백운대이다. 또한 소요산에서 봄에는 철쭉축제가 열리고, 가을에는 단풍축제가 열려서 서울·경기 지역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문화행사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참고문헌
『동두천시사(東豆川市史) 상(上)』(동두천시사편찬위원회, 1998)
『한국지명요람(韓國地名要覽)』(건설부국립지리원, 1982)
자유수호평화박물관(自由守護平和博物館)
[Freedom Protection Peace Museum]
경기도 동두천시 평화로에 있는 공립박물관.
개설
한국전쟁 당시에 참전했던 유엔참전국 21개국의 활약상을 기리고 한국전쟁 당시 유물을 발굴·연구·관리·전시함으로써 한국전쟁을 재조명하고 국민들에게 호국정신을 함양시켜 안보교육의 공간으로 제공하고자 한다.
설립목적
한국전쟁 이후로 미군(美軍)이 주둔함으로써 군사도시로 발전한 동두천시에 1997년 특성화 박물관으로 계획되어 2002년 개관하였다. 잊혀져 가는 6·25전쟁에 대한 이해와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하여 희생하신 분들의 뜻을 기리고 유엔 참전국과의 우호 증진을 위해 건립된 1종 전문박물관으로서 6·25전쟁 참전 21개국 유엔군의 활약상 및 관련 유물·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1997년 동두천의 특성화 박물관으로 계획되어 한국전쟁 당시 치열한 교전이 벌어진 소요산에 부지를 마련하고 착공했으며 2001년 건물이 준공되었다. 2001년에 동두천시 하봉암동에 있던 한국전쟁 노르웨이 참전비를 박물관 부지내에 이전하였고 이와 관련하여 노르웨이 국왕이 특별히 박물관을 방문하였다. 다음 해인 2002년 5월 정식 개관하였으며 2011년 상설 및 기획전시실을 추가 확장·증설하였다.
기능과 역할
야외전시장, 기획전시실, 상설전시실, 영상실, 강당 및 어린이박물관 및 기념실에 한국전쟁 및 관련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 또한 회화, 공예, 서예 및 전통문화 등 기획전시회가 연중 10여 회 이상 개최되고 있으며 학생과 단체들의 안보견학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
조직은 박물관담당을 중심으로 학예연구와 유물 및 자원봉사자관리, 시설관리, 방호 등의 업무를 분담하고 있다.
현황
40,000㎡ 부지에 3,331㎡의 건축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2,000여 점의 한국전쟁 및 근현대사 자료를 보유, 전시하고 있다. 야외전시장에는 한국전쟁 때 사용하던 탱크 및 함포·정찰기 등 대형군장비가 전시되어 관람객이 직접 만지고 체험할 수 있다. 1층 로비에는 소규모 기획전시실이 마련되어 다양한 전시물을 접할 수 있다. 2층 주전시실에는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UN 21개국을 나라별로 소개하고 있으며 3층 영상실에는 한국전쟁 관련 영상물을 상영하여 전쟁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고자 하였다. 강당에는 다양한 행사 및 세미나가 개최되고 있으며 어린이체험실과 기념실에는 과학·문화체험시설이 설치되어 교육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4층 기획전시실에는 수준 높은 전시회를 개최하여 지역 내 중심적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잊혀져 가는 한국전쟁에 대한 이해와 지역 내 문화·예술 중심시설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관련 시설 및 역량을 증대시키고 있다. 또한 박물관의 역할과 활성화를 위해 다양한 기획과 연구를 진행함으로써 더 나은 전시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동두천시문화유적분포지도』(국민대학교박물관, 2005)
자유수호평화박물관(www.ddc21.net/museum)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제암[自在庵
경기도 동두천시 소요산(逍遙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암자.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역사적 변천
654년(무열왕 1) 원효(元曉)가 창건하여 자재암이라고 하였으며, 974년(광종 25) 각규(覺圭)가 태상왕의 명으로 중창하였다. 1153년(의종 7) 화재로 소실된 것을 각령(覺玲)이 대웅전과 요사채만을 복구하여 폐사와 다름없이 명맥만 이어 오다가, 1872년(고종 9) 원공(元空)과 제암(濟庵)이 중창하여 영원사(靈源寺)라고 하였다. 그때의 당우로는 영산전(靈山殿)·만월보전(滿月寶殿)·독성각(獨聖閣)·산신각(山神閣)·별원(別院) 등이 있었다고 한다. 1907년 화재로 인하여 만월보전을 제외한 모든 당우가 소실되자 1909년 성파(性坡)와 제암이 절을 중창하고 다시 자재암이라 하였다. 이때에는 전각(殿閣)뿐 아니라 약사여래상과 지장보살상·관음보살상 등의 불상과 함께 이 절의 유래와 깊은 관련이 있는 원효·의상(義湘)·윤필(尹弼) 등의 화상(畵像)을 그려서 봉안하였다. 6·25전쟁 때 다시 소실되었으나, 1961년 진정(眞靜)이 대웅전을, 1968년 성각(性覺)이 요사채를, 1977년 법조(法照)가 삼성각(三聖閣)을 각각 지어 현재의 당우를 완성하였다.
내용
자재암에는 여러 전설적 설화가 전한다. 『조선지지(朝鮮地誌)』에는 이곳에 요석궁(瑤石宮)의 옛터가 있다고 하였다. 요석궁은 원효가 요석공주(瑤石公主)와 관계를 가졌던 곳이며, 나중에 원효가 이곳에서 설총(薛聰)을 길렀다고 한다. 자재암이라는 사명(寺名)을 갖게 된 것은, 원효가 요석공주와 관계를 가진 뒤 관음보살이 변신한 아리따운 여인의 유혹을 설법을 통해서 물리친 후, 다음날 관음의 진신을 친견하고 무애자재인(無碍自在人)을 상징하며 자재암이라고 했다고 한다. 절 근처에는 조선 태조가 즐겨 찾았던 백운대(白雲臺)와 폐정(廢井)이 있고, 백운대 밑에 있는 폭포는 원효가 노닐던 곳이라고 하여 원효대(元曉臺)라고 하는데, 옛날 이곳에는 소요사(逍遙寺)라는 절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제암과 원공이 서로 다른 꿈을 꾸고 우연히 만나서 절을 중창했다는 영험담도 전해지고 있다.
자재암 소장본인 『반야바라밀다심경약소(보물, 1994년 지정)』는 1464년(세조 10)에 간경도감(刊經都監)에서 간행한 판본으로서 책 머리에 책머리에는 금강경의 전문(箋文)인 「금강경심경전(金剛經心經箋)」이 붙어 있고, 교정을 하였다는 의미인 교정인(校正印) 찍혀 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봉선사본말사지(奉先寺本末寺誌)』
『명산고찰 따라』(이고운·박설산, 신문출판사, 1987)
『한국사찰전서』(권상로 편,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07-02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