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신문 주최 제37회 매일 한글 글짓기대회 차상 입상]
집
남 현 숙
“여기 아기집 보이시죠?
먹물로 콕 찍은 듯 까맣게 보이는 점을 가리키며 의사가 말했다. 그저 까만 점일 뿐인데 아기집이라니…….
신기한 마음에 눈을 떼지 못하고 그것을 바라보니 기쁨이 스르르 밀려온다. 그 작은 집에서 자랄 아기를 생각하니, 햇살 좋은 날 피어나는 꽃처럼 핑크빛 설렘이 퍼진다.
결혼하고 3년 만에 찾아온 아기 소식을 온 가족에게 전했다. 모두 기뻐하며 축하해 주었다. 하루하루가 꿈결 같았다. 한 주가 지나 부푼 가슴을 안고 병원에 갔다. 긴장되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키며 초음파를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지난번과 똑같은 까만 점만 보일 뿐 뭐가 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초음파를 보던 의사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뭐가 잘못된 걸까? 불안한 마음에 내가 묻는다.
“왜 그러세요?”
“이때쯤엔 아기 심장이 뛰어야 하는데 아직 안 뛰네요.”
“왜 안 뛰는 걸까요?”
“글쎄요. 좀 늦을 수도 있고…….”
“…….”
“일단 한 주 더 지켜봅시다.”
의사의 말에 심장이 쿵 내려앉는다. 집만 덩그러니 지어 놓고, 있어야 할 아기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병원을 나오는데 나뭇가지에서 나뭇잎 하나가 바람에 이리저리 날리며 떨어져 내린다. 떨어지는 나뭇잎만 봐도 마음이 불안하다.
시곗바늘을 누가 반대로 잡아끌기라도 하는 듯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한 달처럼 느껴지던 일주일이 지났다. 불안감을 떨치지는 못했지만, 아기가 그 집 안에 자리 잡고 있길 바라며 병원에 갔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떨리는 마음으로.
초음파를 보는 의사의 표정이 어둡다. 여전히 까맣게 보이는 아기집. 번지지 않은 먹물처럼 일주일 전의 그 모양 그대로 그렇게 있다. 그 안에 있어야 할 아기는 여전히 없다. 주인 없는 집만 덩그러니 어둠에 묻혀 있다.
결혼 3년 만에 찾아온 첫아기는 그렇게 집만 지어 놓고 가버렸다. 눈물이 비가 되어 내렸다. 주인 없는 집을 철거하듯, 아기집은 그렇게 내 몸에서 사라졌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남기고…….
그로부터 1년 후, 아기가 다시 내 배 속에 집을 지었다. 이번에는 튼튼한 집에 건강한 아기가 생겨나길 간절히 바랐다. 까만 아기집 그 안에 아기가 꼭 있기를 바라며 떨리는 마음으로 초음파를 봤다. 긴장되는 마음에 의사의 표정을 살피며 입술을 깨물었다. 초음파를 유심히 보던 의사가 밝은 목소리로 말한다.
“여기 하얗게 깜빡이는 거, 심장 뛰는 것 보이시죠? 잘 자라고 있네요.”
“아, 감사합니다!”
의사가 아기의 심장을 뛰게 한 듯 감사하다는 말이 저절로 나온다. 불안이 기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의사는 심장 뛰는 소리를 들려준다. 말발굽 소리처럼 심장이 빠르고 힘차게 뛰고 있다. 그 소리와 함께 내 가슴도 벅찬 기쁨으로 같이 뛴다. 다시 찾아온 아기는 힘찬 심장 소리로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이번에는 그 집을 잘 지키며 살다가, 건강한 모습으로 세상에 나와 주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다.
아기는 아기집에서, 나는 아늑한 보금자리인 나의 집에서 서로 교감하며 만날 날을 기다렸다. 좋은 것만 듣고, 음식도 가려 먹으며 내 눈을 통해 아기에게 아름다운 세상을 보여 주려 애썼다.
아기집은 아기가 자라는 만큼 커져 내 배를 불룩하게 만들었다. 배가 나오는 만큼 몸이 힘들었지만, 그만큼 행복감도 커져갔다. 아기는 그 안에서 축구를 하는지 깜짝깜짝 놀랄 정도로 발길질을 해댔다. 그러다가 조용해지면 자는 걸까? 생각하면서도 불안함이 밀려오기도 했다. 엄마 배를 뻥뻥 차서 배가 아파도 좋으니 많이 움직여주길 바랐다.
그렇게 무럭무럭 자라던 아기는 배 속 집이 좁아져 답답했는지 양수를 터뜨리고 38주 만에 세상에 나왔다. 좀 일찍 나왔지만, 몸무게도 정상으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아기가 태어났을 때의 기쁨과 감동을 무엇에 비유할 수 있을까. 비유할 말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벅찬 감동이었다.
꼬물꼬물 작은 생명이 배 속 어두운 작은 집을 나와 처음 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처음 본 엄마, 아빠의 모습은 마음에 들었을까? 엄마, 아빠는 우리의 첫 아기가 이 세상 어떤 아기보다도 예뻐 보여서 입가에 미소를 달고 살았는데…….
도돌이표처럼 반복되는 계절을 무수히 지나 아기는 대학생이 되었다. 엄마 마음엔 여전히 아기나 다름없지만 이젠 몸도 마음도 커진 어른이 된 것이다.
겨울 기운을 봄 햇살로 밀어내며 계절이 힘겨루기라도 하듯 새싹이 움트기 시작할 때, 아이는 대학생이 되어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아이의 짐을 싸서 기숙사에 데려다주고 오는데, 떨어져 지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눈시울이 뜨거워져 창밖의 풍경들이 일렁인다.
집에 와 아이의 텅 빈 방을 보니 복잡 미묘한 감정이 든다. 배 속에서 아이가 태어난 것처럼 나를 꽉 채우고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간 느낌이랄까. 허전하기도 하고 대견하기도 하다.
부모의 품을 떠나 스스로 헤쳐나가야 할 세상을 향해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태어날 때 그랬던 것처럼, 그 세상을 향해 당당하게,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살아갔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들아, 엄마는 언제나 너의 집이 되어 줄게. 몸과 마음이 지쳐 쉬고 싶을 때 언제라도 오렴. 아무 걱정 없이 몸과 마음을 기댈 수 있는 그런 집. 엄마는 너에게 항상 그런 집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