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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4월 20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부활주일 설교
제목 : 2025년의 사두개인들에게
본문 : 마가복음 12장 18절(18~27절)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물었다. <새번역>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당시, 유대교는 바리새파, 사두개파, 에네세파, 열심당 이렇게 크게 4개의 종파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오늘은 특별히 이 4개의 종파 중에서 사두개파에 대한 여러 가지 자료를 검색한 결과, 그들에 대해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실 사두개인들에 관한 기록은 매우 적기 때문에, 그 기원을 정확히 파악하기는 매우 힘듭니다. 사두개인이라는 이름은 ‘사독(Zadok)’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사독은 솔로몬 왕 때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다윗 때는 대제사장이 둘 있었는데, 솔로몬이 왕이 된 후에는 대제사장들이 사독 가문에서만 나왔습니다. 이렇게 제사장 직분을 독점한 사독 집안은 B.C. 538년 고레스 왕 칙령에 따른 바벨론 포로 귀환 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다윗 가문의 왕이 사라진 이스라엘에서 사독 가문은 이스라엘에 대한 실질적 통치권을 행사하는 제사장 가문으로서 합법적인 지위를 인정받게 됩니다. 이후 마카비 혁명(B.C. 167-164) 때까지 사독 집안은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제사장 가문이 됩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사독 가문 출신 대제사장이 장로회의에서 선출되면, 평생 이스라엘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형태의 자치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마카비 혁명으로 하스모니아 왕가가 권력을 잡자, 이들은 왕위는 물론 대제사장직까지 강제적으로 겸직하였습니다. 비록 일부 사독 가문의 제사장들 중심으로 ‘율법에 어긋나는 행위’라고 저항하였지만,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왕가의 뜻을 굽히지는 못하였습니다. 이때 대제사장을 비롯한 일부 사독 가문 제사장들이 타락한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 유대 광야에 위치한 쿰란으로 도피하며 독자적인 예배 체계를 갖춘 것이 바로 에세네파의 기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 사독 가문 제사장들은 하스모니아 왕가가 대제사장직을 불법적으로 강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성전에 남아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였습니다. 이 때부터 자신들을 ‘사독 제사장 가문 출신의 제사장’이라는 의미로 ‘사두개인’이라 불렀으며, 성전 제사를 주관해야 하는 자신들의 책임과 또 성전에 걸려 있는 많은 특권과 이권들 때문에 성전 일을 포기하지 않고 지속하여 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에세네파들은 이들을 ‘가짜 사두개인들’ 즉 ‘사독 가문 가짜 제사장들’이라고 불렀고, 자신들이 ‘참된 사두개인’이라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다 시간이 흘러 B.C. 63년 하스모니아 왕가가 로마 제국에 멸망한 후, 대제사장직은 돈으로 거래되는 부패의 온상이 되었습니다. 성전을 지배하는 이 자리에는 권력과 부가 함께 하였기 때문에, 헤롯 왕가와 로마 제국은 사독 가문과 관계없이 자신들에게 뇌물을 주거나 적극적으로 자신들에게 협조하는 제사장을 골라 대제사장에 임명하였습니다.
엄청난 이권이 달린 대제사장직을 탐낸 제사장들은 엄청난 돈을 주고 대제사장직을 샀으며, 임명된 뒤에는 쓴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수탈하고 임명권자의 취향에 맞는 정책으로 보답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로마 제국에 의하여 임명된 대제사장은 백성들의 절대적 신뢰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처럼 대제사장은 율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권위가 부족하였기 때문에 힘이 센 제사장 가문 사이에서 서로 돌아가며 하는 경향이 있었고, 로마 제국도 제사장들의 협조를 얻어내기 위하여 이를 수용하였습니다. 이렇게 성전에서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던 사두개인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 범위를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사독 가문 출신 제사장에서 시작하여 다른 제사장 가문 출신의 성전 봉사자들 그리고 성전을 기반으로 하는 상업에 종사하는 상인들도 이 그룹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는 이스라엘의 귀족 계급들과, 성전과 관련하여 생계를 유지하거나 이권을 가지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두 사두개인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사두개인들은 성전을 통하여 얻은 특혜로 부유한 삶을 살았으며 또 그 특권을 오래 유지하기 위하여 로마 제국에 협조하는 공생 관계를 형성하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율법 연구보다 성전 제사에 훨씬 더 관심이 많았던 사두개파의 신앙은 매우 현실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습니다. 화수분처럼 엄청난 재물을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 성전은 이들의 세계관에 중심이 될 수밖에 없으며,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엄청난 기득권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배우고 깨달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제사 대신 율법 연구와 실천에 몰두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율법은 성전 제사를 지속하기 위한 최소한 범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성경에 기록된 문자 그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들의 성경 해석은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의미를 찾기보다는 문자가 드러내는 구체적인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심지어 율법을 어길 때의 처벌도 율법에 쓰여 진 대로 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안식일을 어긴 경우 성경에 기록된 대로 ‘돌로 쳐 죽이는 것’을 옹호하고 실행까지 하였습니다.
사두개인들은 구약성경 중 모세오경만을 남기고 나머지 책들을 모두 잘라내 버렸습니다. 그들이 모세오경만을 좋아했던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오경이 그들의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풍요를 정당화시켜 주는 역할을 해주는 인과응보의 진리가 매우 강하게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서 모든 면에 있어서 형통하게 됩니다.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 그렇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고 이삭도 부자였고 요셉도 크게 출세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자는 모든 면에 있어서 벌을 받습니다. 그중에는 경제적 궁핍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모세오경을 읽을 때 사두개인들은 마음의 편안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모세오경을 읽을 때 그들은 자신에 대해 긍지를 느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성전 제사 중심의 삶을 영위하고 또 율법의 문자적 의미만을 받아들이는 사두개인들은 매우 현세적인 삶의 태도를 갖고 있었습니다. 사두개파는 이 땅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물질적 풍요를 추구 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것만 믿었고 구약에서 부활을 암시하는 구절들이 있기는 하지만, 문자 그대로 믿는 사두개인들은 부활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부활을 부정하였다는 것은, 곧 사후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었고,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혼도 사라지는 것이라 믿었습니다. 천사와 영의 존재를 믿지 않았으며, 또 죽은 자들이 최후 심판일에 부활할 것도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세계관에 따라 사두개인들은 사후 세계를 위하여 선을 쌓는 것을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보았고, 따라서 남들에게 선을 베푸는 것을 바람직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이는 결국 선을 베푼 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부정하는 것으로 자신의 힘으로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 이들의 삶의 목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남에게 선을 베풀어야 하는 의미를 찾지 못한 결과, 오히려 타인의 고통을 즐기는 잔인함과 이 땅에서 가능한 한 최대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극단적 이기심의 소유자들이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론적으로 사두개인들이 이처럼 영적 세계를 부정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부정하는 것은 이 땅에서의 하나님 간섭을 부정하는 결과로 귀착됩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이 땅의 모든 일이 하나님 뜻에 따라 결정되어 이루어진다고 보지는 않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초월자(Idea)가 이 세상을 만들었지만 더 이상 이 땅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고 초월하여 있다”는 플라톤의 이원론과 유사한 점이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중요한 것은 인간의 자유 의지입니다. 더 이상 세상에 간섭하지 않는 하나님에게 의지하는 것은 무의미하며 오히려 이 땅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가는 자신의 의지로 얼마든지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말씀인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며 사는 것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선과 악의 문제 혹은 상과 벌의 문제가 아니라, 성전을 중심으로 한 세계의 유지를 위한 것입니다. 개인은 이러한 성전 중심 세계의 한 부분이지만, 자신의 삶은 자신이 만들어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가지고 있던 사두개인들은 당연히 예수님과는 모든 면에서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상당히 미워하게 됩니다. 시간이 흘러 성령 강림 이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던 베드로와 바울을 처음부터 가장 심하게 핍박한 것도 제사장을 중심으로 한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전하는 사도들의 주장에 유연한 자세를 보였지만, 제사장을 포함한 사두개인들은 처음부터 몹시 분개하여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는 사도들에게 감정적인 대응을 하였던 것입니다. 강한 권력과 자신들의 믿음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졌던 이들은 다른 믿음을 가진 그룹들에게 매우 잔인하게 대하였던 것입니다.
혹시 여기까지 사두개파에 대한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꾸만 누구와 닮았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이 사두개인들에 대해서 공부하면 할수록 오늘 현재를 살고 있는 현대인들과, 2025년의 일부 그리스도인들과 너무도 닮아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두개파 사람들이 부활이나 천국을 인정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워낙 유복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원 없이 낙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과 밑바닥 인생으로 갖은 고생을 다 겪으며 사는 사람들 중에서 누가 더 천국을 사모하겠습니까? 당연히 어렵게 사는 사람들입니다. 유복하게 누릴 것 다 누리며 사는 사람들은 천국은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그리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그냥 선택사항일 뿐입니다. 사두개인들에게 천국이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현대인들도 비슷합니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와도 비슷합니다.
바로 이런 사두개파 사람들이 오늘 예수님께 ‘형사취수’, 즉 형이 죽은 뒤에 동생이 형수와 결혼하여 함께 사는 혼인 제도에 대해서 질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곱 형제가 한 아내를 둔 이야기를 하며, 부활 때에 누구의 아내가 되겠냐는, 자신들이 생각할 때는 예수님이 절대 대답하지 못할 것이란 생각으로 한 질문이었습니다. 부활이 없다 생각하는 자신들의 의견이 얼마나 옳은 것인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또한 대답을 못할 예수님에게 부끄러움을 주며, 드러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의 그 얄팍한 생각을 모두 알고 계셨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하나님에 대해서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그들의 생각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첫째, 사두개인들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릅니다.
여기서 모른다는 의미는 거의 믿지 않는다는 의미와도 같습니다. 자신이 필요한 부분의 성경만, 자신들에게 필요한 하나님의 능력만을 믿다 보니, 성경과 하나님을 협소하게 만들어 무능력하고,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린 것을 먼저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른다는 것은 성경을 읽지 않고 있는 현실과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 현실에 대해서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2025년도의 사두개인들, 현대판 그리스도인들, 부활에 대해서 믿지 못하고, 부활이 없다고 생각하는 많은 이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성경을 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모릅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혹 믿더라도 내게 필요한 부분의 성경과 하나님만을 믿습니다. 빙산의 일각을 보면서 전부라고 생각하며 사실은 잘 모르면서 아는 척하는 것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보내는 우리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있습니까? 내게 필요한 부분의 성경이 아닌 성경 전체를 골고루, 천천히, 크고, 넓게 묵상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나라는 하나님이 하나님을 아주 작은 신으로 만들어 버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결국 우리도 성경을 모르고 하나님의 능력도 모른다는 예수님의 질책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아가 너무도 중요한 이 ‘부활’에 대해서 아직 싱숭생숭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모르니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일부만 보았으니 믿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것입니다.
둘째, 사두개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죽은 자들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두개인들이 그토록 존경하는 모세에게 하나님은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말은 아브라함 때도, 이삭의 때도, 야곱의 때도, 어느 시대에도, 지금도, 미래에도 하나님으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죽음으로 그 시대가 지나갔다고 생각하는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은 비록 오래 전에 죽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살아 있으며, 약속을 지키는 하나님으로서 그들과 계속적으로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그 약속의 결과로써 모세를 찾아와 말씀하고 계심을 예수님은 지금 이야기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례적으로 예수님은 사두개인들이 생각을 크게 잘 못하고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더 쉽고 명확하게 말하자면 사두개인들은 진짜 하나님에 대해서 잘 모르기에 하나님이란 존재를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 시대에만 존재하는 오늘 현재 내가 만들어내는 하나님을 하나님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은 살아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죽은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들이 마음대로 살아도 자신들에게 질책하지 않고, 과거와 미래를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더더욱 내세를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하나님이기에 그 하나님은 결코 자신들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하기에 하나님을 여러 가지 의미로 죽은 하나님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명확하게 규정하고 인식하시길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지금도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창조주이십니다. 하나님에게 불가능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사두개인들은 사실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사두개인들이 질문하고 있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에 대해서 친절히 답을 해 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완곡하게 그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진짜 하나님을 만나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 역설적으로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어지는 본문에서 율법학자가 예수님이 너무도 좋은 대답을 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서 가장 으뜸 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그 때 예수님은 그 율법학자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부활이 없다 생각하며 질문을 던진 사두개인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 하나님이신 주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뜻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이신 주님을 사랑하여라.'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여라.' 이 계명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마가복음 12장 29~31절, 새번역>
사두개인들에게 가장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었습니다.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었지만, 누구보다 하나님과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누구보다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이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가장 큰 계명에 대해서 다시 한 번 말씀하시면서 진짜 하나님을 만날 필요성에 대해서 언급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두개인들에게 정말 하나님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야 성전도 변화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다시 많은 유대인들이 제사장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 하나님의 말씀 앞으로 나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부활 주일을 보내면서 지난 2주간 드렸던 질문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드립니다. 여러분은 지금 예수님이 필요하십니까? 하나님이 필요하십니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진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회복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 이어가는 진짜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변화되기를 원하십니까?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예배자 여러분, 동역자 여러분! 오늘 이 부활주일에 우리의 모습이 혹시라도 설명 드렸던 특징처럼, 본문에 등장하는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는 2025년에 사는 사두개인의 모습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이 없다 말하는 그들의 뒤를 따라 부활 주일이지만 부활에 전혀 관심 없는 내 모습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를 보내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죽음을 이기시고, 예수님이 부활하셨습니다.
이 놀라운 일들은 모두 저와 여러분,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행하심을 은혜로 받아 이 일의 주인공이 되기를 하나님은 요청하고 계십니다. 오늘 부활주일을 보내면서 조금이라도 입고 계셨던 사두개인의 옷이 있었다면 벗어버리고 다시 그리스도인으로서 새 옷을 입으시는 의미 있는 귀한 날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결단 찬양 – 주님을 예배하는 것 + 다시 일어나 + 새로운 마음 후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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