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이
이 남 순
하는 일이며 하고자 하는 일이 겁이 난다. 자신감이 없다. 사람들이 글을 참 잘 쓴다. 나만이 늘 미흡한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어리석고 둔하여 조금도 앞으로 나가질 못하니 갑갑하고 답답하다. 책 읽는 일 또한 그렇다. 책장을 넘기면 앞장 내용이 까마득하게 생각나질 않으니, 진작에 돌머리가 되었나 보다.
단어들을 떠올려 보지만 머릿속이 숯덩이처럼 까맣다. 멍청하다는 생각도 일을 저지르고 호된 뒤처리를 하면서야 깨닫게 된다. 눈도 흐릿하여 세안용인지 보습용인지 바꿔 바르고 씻어내는 곤욕을 치르기도 한다.
때로는 꼭 챙겨 가야 할 물건을 깜박할까 봐 신고 나갈 신발 옆에 둔 것을 “이것이 왜 여기 있어.” 하고는 밀쳐 두고 나오는 웃지 못할 일을 한다. ‘산다는 의미며 재미가 없다.’라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기도 한다.
추적추적 써늘한 가을비 내리는 텅 빈 길을 걷는다. ‘글 한 편 써내야 하는데,’ 언제부터 생각하지만, 아무런 느낌 없이 마음만 분주할 뿐이다. 그 치열한 경쟁으로 수필교실을 등록했는데, ‘욕심을 부렸구나!’ 싶다. 물러나야 할 때가 지나지 않았나. 이제 접어야 하나?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으로 부족한 나를 채울 것인가. 내 모습이 초라하게만 느껴진다.
낙엽 지는 가을 나이가 되었는데도 고운 추억 한 자락이 없으니. 참 허술하게 살았다. 덧없이 산 날들이 속절없이 구슬프게 비에 젖는다. 며칠 전 일이 안개 피듯 피어난다. 아! 나도 서슬 푸르던 날도 있었는데…, 뜨거운 가슴으로 애절한 사랑이라도 해볼 것을….
유림단체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버스에서 노래방을 열었다. 나이 지긋한 점잖은 팔순 노신사는 지그시 눈을 감고 구성지게 노래한다. 세월 흔적이 고스란히 내린 모습으로 절절한 사랑을 열창한다.
“사랑이 비를 맞을 때 울어도 남들은 몰라./눈물인지 빗물인지 그 누가 알 수 있나! …… 우산이 내 우산이 되어주세요./사랑이 비를 맞아요.” 저이는 청청하던 날에 뜨거운 사랑 열렬히 불태우던 일이 있었을까? 그 사랑 다 태우지 못해 아직도 희나리로 가슴에 묻어두고 매운 불씨를 엷은 입김으로 불꽃을 불어 내는가. 저 세월 동안 여윈 가슴에 그 사랑을 묻고 살았을까. 첫사랑이었을까.
나는 무엇으로 무엇을 위해 살았는지, 차라리 사랑, 그 열병이라도 앓아봤으면 속 깊이 담아 두어 아련하게 꺼내어볼 만한 애틋한 사연도 있으련만, 애석도 하다. 누군가 “신은 사랑을 이용해 천국 한가운데 지옥을 숨겨 놓은 그것은 아닌지.”라고 했는데, 풋풋한 첫사랑, 애절한 사랑 불도장이라도 찍어 봤으면 천국도 지옥도 속 깊이 담아두고 살며시 들여다볼 것을….
버럭, 버럭 전화가 진동한다. 안온한 평정심을 해치는 이 누구냐? 선배다. 카랑카랑한 쇳소리로 버릇없는 후배에게 사과받을 일이 생겼다며 자초지종을 쏟아놓는다. 둔한 나라면 웃고 말 일이다. 선배는 구태여 사과받고 말겠다며 괘씸한 생각에 잠을 설쳤단다. 오지랖 네가 나서라는 의미다. 마음 풀게 맞장구를 쳐주었다. 날 선 기분이 조금 진정된 듯 어조가 부드러워진다.
후배에게 전화한다. 기분 상하지 않게 선배 뜻을 전한다.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그렇게 곡해했다면 사과하겠단다.
전화로 마음 전했는지 후배로부터 전화가 온다. “언니, 사과했는데 나, 너무 억울해 그런 말 하지 않았고 째려보지 않았어.” 한다. “사과 잘했어. 좀 억울하면 어때? 그 선배 나이도 있으니 잘했어, 내가 너를 모르나! 네 억울함 내가 알고 있지.” “그날 언니가 안 나오니까 그런 사단이 생겼지.” “그래, 그랬구나, 미안하다.” 후배 넋두리를 쓰다듬고 쓰다듬는다. 밝아진 소리로 전화를 끊는다.
마음을 터놓을 사람이 나라는 일이 나쁘지는 않다. 선후배가 내게 마음을 풀어놓아 삭이게 하는 일이 송곳날 같은 내 마음을 어울리며 더불어 살고 있고, 살아간다는 또 다른 의미로 자신을 여유롭게 한 번 돌아보게 한다. ‘그래, 사는 그것이 뭐 그런 거지, 세월이란 물결을 따라서 그냥 흘러가 보는 거야, 폐 끼치지 않기를 힘쓰며 그냥저냥 거시기하게…. 살아보는 거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들에 감사하다.
“삶이 빈곤을 느낄 때 추억이 있는 홑 길을 걷는 것이 희망의 길이다. 이 세상에 없는 그리운 얼굴을 가슴으로 만날 수 있는 곳. 나의 그리운 산책길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며 문득 하늘을 바라보니 감사한 마음이 솟구친다.” 어디선가 본 글귀를 생각해 본다.
가로등 환한 뒷길에 일궈 가꾸는 꽃밭이 올여름 가뭄으로 말라서 죽기도 하고 새삼 덩굴에 억눌려 꽃이 탐스럽게 피어나질 않는다. 농사일에 여념 없어 돌보지 못한 내 탓이라, 시린 내 삶처럼 보는 가슴 짠하다. 내년에는 정성으로 받아둔 사연 고운 댑싸리 씨앗도 뿌려서 기름지고 윤택하게 가꾸어 볼 요량이다. 한데, 마음 밭 가꾸기는 힘에 부칠 듯하니 어찌할까?
비가 그쳤다. 그래 ‘걸을 수 있는 희망의 길도 있지.’ 쿡 처박혔던 마음이 열린다. 볼품없는 내 삶이지만, 내 몫이니 다독이며 주어진 날을 물 흐르듯이 흘러보자.